릴로

# 루프 8회차. 20시 02분.

눈을 뜨는 순간, 손가락이 없었다.

정확히는 손가락이 있었지만, 그것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은지는 오른손을 들어 눈 높이에 놓고 바라봤다. 엄지손가락부터 검지, 중지까지는 흐릿한 윤곽으로 남아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가장자리가 흐물거리고 투명한.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간만 있었다.

은지는 손을 펴려고 했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신경은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남의 손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루프 8회차입니다."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승강장 쪽에서 유진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동자는 은지를 따라다녔다.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눈빛이 어디서 본 듯했다. 은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차량 내부는 회백색이었다. 조명이 간헐적으로 깜박였다. 처음보다 깜박임이 빨라졌다. 5초 간격이 3초도 안 되는 간격으로 줄어들었다.

"넌 뭔가 깨달았나?"

유진이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관절이 뻣뻣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 순간은 냉정했다가, 다음 순간은 절망적이었다. 두 개의 다른 감정이 한 몸에 들어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은지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낮고 갈라졌다.

"알지. 타임백을 쓸 때마다 하나씩 사라진다. 넌 루프 1에서 열 개로 시작했고, 루프 2에서 아홉 개, 루프 3에서 여덟 개... 이렇게 하나씩. 그리고 이제 넌 일곱 개다."

유진이 은지의 손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따뜻했다. 하지만 은지는 그 온도를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넌 루프 1에서 뭘 했어?"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네."

유진의 입가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슬펐다.

"점점 잘하고 있어. 기억을 잃는 게 나을 거야. 잊어버리면 아프지 않으니까."

차량의 다른 쪽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최수진이 벤치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루프를 거듭할 때마다 살이 빠지고 있었다. 눈가의 그림자는 검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은지 언니."

최수진이 다가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불안정했다.

"당신이 또 누군가를 죽였나요?"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뭘 했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었다.

"루프 7회차에서는 이상민이 죽었어요. 루프 6에서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노인이 죽었어요. 루프 5에서는..."

최수진이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저도 기억을 잃고 있는 것 같아요. 루프 1이나 2에서 누가 죽었는지 기억할 수 없어요. 오직 언니가 타임백을 썼다는 것만 알 뿐이에요. 그리고 누군가 죽었다는 것도."

은지는 최수진을 바라봤다. 그 순간,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루프 1에서 최수진이 손을 잡고 울던 모습. 누군가를 살리려는 은지를 바라보던 그 절망적인 눈빛. 그리고 타임백을 쓴 후, 그 자리에서 사라진 건 최수진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누구였더라... 기억이 흐렸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는 뭐가 되는 걸까요?"

최수진이 물었다. 그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은지의 뇌를 관통했다.

"정말... 죽는 걸까요?"

사라진 사람들. 그들은 정말 죽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간 걸까? 은지는 그동안 '죽음'이라고 가정했다. 사람이 소멸하니까. 투명해지고,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사라지니까. 그게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혹시 우리가 이미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은지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온 순간, 차량 내 온도가 떨어진 것 같았다. 조명이 더 빠르게 깜박였다. 깜박임의 간격이 또 줄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박준호가 벤치 뒤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루프가 거듭될수록 그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엔 절박함이었다. 가족을 살리려는 절박함. 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 주변의 살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피가 맺혀 있었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그는 더 깊이 물어뜯었다. 마치 자신을 벌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순수한 광기.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 가족을 살리려는 절박함은 사라졌다.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말도 안 돼."

그가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은지는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기억해 봐요, 준호."

최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 차에 탄 게 언제였어요? 정확히 몇 시였어요?"

박준호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모르지. 기억이..."

"네. 아무도 기억 못 해요. 우리가 언제 탄 건지, 왜 탄 건지. 오직 이 차에 갇혀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에요. 24시간마다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도."

최수진이 은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은지 언니는 그 사람들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손가락을 하나씩 잃으면서까지. 하지만 누군가는 항상 사라져요. 마치... 마치 우리가 이미 죽어 있고, 누군가를 살리는 대신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미루어질 뿐인 것처럼."

은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은 사실처럼 들렸다. 너무 그럴듯해서 끔찍했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하면, 결국 한 명만 남을 거예요."

최수진이 계속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결국 사라질 거예요. 왜냐하면 24시간의 규칙은 변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항상 사라져야 해요. 이 악순환을 끝내려면..."

그녀가 은지의 눈을 바라봤다.

"우리가 함께 끝나야 해요. 동시에. 모두가."

은지는 최수진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유진을.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한 몸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입가가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은지가 알고 있던 것이었다. 거울에서 본 자신의 입가의 떨림.

은지는 처음으로 이 루프를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넌 뭐 하는 거야?"

박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은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차량 내부를 재빠르게 훑었다. 응급문, 창문, 통풍구...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규칙을 깨뜨릴 수 있는, 이 루프를 벗어날 수 있는 뭔가.

은지는 응급문 쪽으로 다가갔다. 금속 패널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패널이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뭐 하는 거야!"

박준호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은지는 패널을 더 빠르게 벗겨냈다. 그 안에는 다른 금속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옆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은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글씨가 쓰여 있었다. 검은색 펜으로, 정확하게.

'루프 종료 프로토콜'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10회 타임백 사용 후 마지막 선택'

박준호가 은지의 팔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거 주고 내 가족을 살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손톱을 물어뜯은 손가락이 은지의 팔을 누눴다. 그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피가 맺혀 있었다.

"내 아내를 살려. 내 아이를..."

"당신의 가족은 이미 죽어 있어요."

최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우리처럼 다른 곳에 있거나."

박준호의 손이 은지의 팔을 더 강하게 누눴다. 통증이 쏟아졌다. 하지만 은지는 그 통증을 느끼기보다, 종이에 쓰인 글씨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뭔가 더 적혀 있었다.

'만약 10회를 모두 사용했다면, 너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 뭘 선택해야 한다는 거야?

"은지!"

최수진이 소리쳤다.

은지는 뒤돌아봤다. 차량의 반대편에서 이상민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눈은 미쳤다. 동물처럼 미쳤다. 하지만 그 미친 눈빛 뒤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아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손에는 벤치의 금속 프레임이 들려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관절이 뻣뻣했다. 마치 인형처럼.

은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박준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차량 끝으로 달렸다. 종이는 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넌 뭘 알고 있어?"

이상민이 뒤에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그 능력을 어디서 얻었어? 말해!"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었다. 타임백을 언제 얻었는지, 어떻게 얻었는지, 왜 얻었는지. 모든 게 흐렸다. 루프 1은 기억나지 않았다. 루프 2도 부분적이었다. 루프 3부터는 이미 타임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말해!"

이상민이 금속 프레임을 휘둘렀다. 그것이 벽에 부딪혔다. 금속음이 울렸다. 은지는 계속 도망쳤다.

"넌 우리를 죽이고 있어! 인정해!"

맞다. 은지는 생각했다. 내가 모두를 죽이고 있다. 내 선택이. 내 능력이.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약해?"

이상민이 계속 추격했다.

"루프 1에서 뭘 했어? 루프 2에서는? 넌 계속 약해지고 있어. 손가락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은지는 차량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다른 응급문이 있었다. 그 패널 뒤에도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은지는 종이를 손에 쥔 채로 패널 가장자리를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상민이 금속 프레임을 휘둘렀다. 그것이 은지의 등 뒤를 스쳤다. 통증이 폭발했다. 은지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은 계속 움직였다. 패널이 벗겨졌다.

그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옆에 또 다른 종이가 있었다.

은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글씨가 쓰여 있었다.

'루프 9회차 지시사항'

그리고 그 아래에:

'유진을 찾아라.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

---

은지의 눈이 떠졌다. 차량이 흔들렸다. 시간이 건너뛰었다. 루프가 초기화됐다.

루프 9회차. 20시 02분.

손에 종이가 없었다. 손가락도 여섯 개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유진이 은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한 몸에 들어 있는 것처럼.

"드디어 깨달았나?"

그의 목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 명령에 저항하는 것처럼.

"넌 루프 1에서 뭘 했어? 그리고 왜 타임백을 가지고 있어?"

"넌... 누구야?"

은지가 물었다.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축복 같기도, 저주 같기도 했다.

"좋은 질문이야. 난 너와 같은 사람이야. 루프의 피해자. 아니, 루프의 설계자."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다.

"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루프 속에서 자신이 '선택지'였다는 걸."

은지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여섯 개의 손가락. 그 중 두 개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차량 내부의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조명의 깜박임이 더 빨라졌다. 1초 간격으로. 그리고 그 깜박임과 함께 중력이 미묘하게 변했다. 은지는 발이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것을 느꼈다. 마치 차량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뭐가... 일어나고 있어?"

은지가 중얼거렸다.

"물리 법칙이 깨지고 있어. 차량 전체가."

최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몸도 미세하게 떠 있었다.

"우리가 규칙을 흔들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 조명이 깜박이고, 온도가 떨어지고, 중력이 변한다. 시스템이 오류를 감지하고 있다는 신호야."

최수진이 은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불안정했지만, 그 눈은 맑았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하면, 결국 한 명만 남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도 결국 사라질 거예요. 왜냐하면 24시간의 규칙은 변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항상 사라져야 해요."

최수진이 은지의 손을 잡았다.

"이 악순환을 끝내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뭔데?"

은지가 물었다.

"우리가 함께 끝나는 거예요. 동시에. 모두가."

최수진의 말이 차량 안에 퍼졌다.

"한 명씩 사라져야 하는데, 모두가 동시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규칙이 깨질 거 아니에요? 누가 남아? 누가 계속될 거예요?"

은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럼 먼저 뭘 해야 해?"

"벽의 글씨들을 읽어요. 그들이 남긴 메시지들. 그들이 깨달은 것들. 그리고 당신은 타임백이 남아 있지 않아요? 아직 세 번?"

은지가 자신의 손을 펼쳤다. 검지, 중지, 약지. 세 개.

"세 번이 남아 있어요. 충분해요. 당신은 뭘 해야 할지 알 거예요. 이 루프가 진행되면서."

최수진이 손을 놨다.

"그리고 유진이 뭔가 알려고 하고 있어요. 내가 봐서는."

"유진이?"

"응. 그 애는 우리와 달라.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 같아. 아니... 우리와 다른 루프에서 온 사람 같아. 그의 눈을 봐요. 두 개의 다른 감정이 들어 있어."

은지가 유진을 찾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은지와 만났다. 그리고 그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었다.

---

시간이 흘렀다.

루프 9회차는 이전과 달랐다. 은지는 누구를 살릴지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벽의 글씨들을 읽었다. 과거 루프의 반복자들이 남긴 메시지들을.

벽은 흠집으로 가득했다. 손톱으로 긁어낸 흔적들. 피로 쓴 글씨들. 아주 작은 글씨들과 아주 큰 글씨들이 뒤섞여 있었다.

루프 37회차에서 죽지 말 것.

루프 43~45회차부터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루프 46회차부터는 기억이 안 난다.

'계속하지 마. 선택하지 마. 그냥 끝내.'

'누가 이걸 읽고 있나? 제발 우리 같은 실수를 하지 마.'

'루프 51에서... 나는...'

그 글씨는 끝나지 않았다. 마치 쓰다가 누군가 손을 잡아당긴 것처럼. 글씨가 벽에 자국을 내며 끝났다.

은지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 글씨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다른 루프에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혹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벽 너머 어딘가에. 루프 37, 43, 46... 그 루프들 속에.

은지는 자신의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먼지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손가락의 감각을 느꼈다. 벽의 거친 질감. 그 거친 표면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의 끝. 그 감각이 실재했다. 그것만이 실재했다.

그녀는 글씨를 남겼다.

'루프 9. 우린 탈출할 거야.'

그 글씨 옆에 또 다른 글씨를 더했다. 손톱이 벽에 깊이 파고들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루프 속 선택지가 아니다.'

---

23시 47분이 다가왔다.

도연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은지가 타임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도연을 봤다. 그 여자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봤다. 손부터. 팔이. 몸이. 마지막으로 얼굴이.

도연의 마지막 말은 뭐였나.

"내가 사라지면 누구를 위해 남겠어?"

그 말이 맞았다. 아무도 아무를 위해 남지 않을 거야. 결국 모두 사라질 거야. 차례대로든 동시에든.

은지는 도연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의 손을 잡았다. 이미 투명해진 손이었지만, 은지는 그 온기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손가락이 사라져 가는 손. 그 손이 은지의 손을 꼭 쥐었다.

"미안해."

은지가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못 살렸어."

도연의 눈이 은지를 봤다. 그 눈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괜찮아. 넌 이미 충분히 했어."

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공기처럼 희미했다.

도연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은지는 손을 펼쳤다 다시 모았다. 공기를 쥐었다 놨다. 그 공기 속에 도연이 남아 있다고 믿으면서. 절망 속에서도 계속 무언가를 쥐려고 하는 것. 계속 손을 펼치는 것. 계속 선택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다.

---

루프 10회차가 시작되었다.

20시 02분. 은지의 손가락은 이제 검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타임백. 마지막 선택의 기회.

차량이 흔들렸다. 중력이 더욱 불규칙해졌다. 조명이 1초 간격으로 깜박였다. 차량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시스템이 오류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진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더욱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그 몸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제 거의 다 왔어."

그가 말했다.

"넌 뭘 할 거야?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쓸 거야?"

은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차량 끝으로 달렸다. 응급문 뒤의 패널. 그곳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상민이 다시 나타났다. 벤치의 금속 프레임을 들고. 하지만 이번엔 그의 움직임이 달랐다. 마치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그의 관절이 뻣뻣했다. 마치 인형처럼. 그리고 그 인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넌 뭘 숨기고 있어?"

그가 외쳤다.

"그 능력의 진짜 정체가 뭐야?"

은지는 패널을 벗겼다. 안에는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종이가 있었다.

'루프 10회차 최종 지시사항'

글씨가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손을 떨면서 쓴 것처럼.

'10회를 모두 사용했을 때, 넌 선택해야 한다. 이 루프를 계속하거나, 아니면 모든 루프를 끝내거나.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너의 선택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넌 이미 누군가의 루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은지가 사진을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은지가 아니었다. 아니, 은지였지만 다른 은지였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은지. 그리고 그 은지의 손에는 타임백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은지 옆에는 유진이 서 있었다.

아니.

그것은 유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은지였다.

---

이상민의 금속 프레임이 은지의 등을 맞췄다. 통증이 터졌다. 하지만 은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을 들고 유진을 봤다. 유진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한 몸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넌 누구야? 정말로."

유진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슬펐다. 그리고 그 슬픔 뒤에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절망.

"난 너야. 루프 1의 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넌 루프 2의 나야. 루프 3의 나야. 루프 4, 5, 6, 7, 8의 나야."

은지의 손가락이 떨렸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야. 루프 1에서 시작한 사람이야. 그리고 우리는 계속 반복되고, 계속 선택하고, 계속 잊혀. 그리고 결국..."

유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움직임은 이제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을 되찾은 것처럼.

"결국 우리는 이 루프의 설계자가 돼."

은지는 사진을 떨어뜨렸다.

"그럼 루프 1은? 루프 1에서 뭐가 일어났어?"

유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 속에는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너무 끔찍해서, 유진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모르겠어. 나도 기억이 안 나. 오직 이것만 알아. 루프 1에서 누군가를 살려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실패했다는 것."

그가 은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반복돼. 계속 선택해. 누군가를 살리려고. 하지만 항상 누군가는 사라져. 그리고 우리는 계속 잊혀. 루프 1을 잊고, 루프 2를 잊고, 루프 3을... 잊고..."

유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 넌 선택해야 해. 루프 11을 시작할 거야? 아니면 여기서 끝낼 거야?"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벽을 봤다. 그 벽에 쓰인 수많은 글씨들. 루프 37, 43, 46... 그리고 이제 루프 9의 글씨도 거기 있을 것이다.

'루프 9. 우린 탈출할 거야.'

그 글씨는 거짓일까?

은지는 자신의 마지막 타임백을 들었다. 손가락 하나로 쥔 그것. 그것은 아주 작았다. 마치 진짜 시간을 담은 것처럼.

"만약 내가 타임백을 쓰면?"

"그럼 루프 11이 시작돼. 그리고 넌 다시 잊혀. 손가락도 사라져. 그리고 누군가는 또 사라져."

유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루프 11에서 또 다른 은지가 깨어나. 그리고 그 은지도 선택해야 해. 루프 12를 계속할지, 아니면 여기서 끝낼지."

은지의 손이 떨렸다.

"그럼 끝내면?"

"모르겠어. 아무도 끝낸 사람이 없어. 루프 37까지 간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도 결국..."

유진이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벽의 글씨를 봤다.

"결국 뭐?"

"결국 선택했어. 루프 38을 시작하기로."

은지는 타임백을 들었다. 그것은 아주 작았다. 손가락 하나로 쥐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루프 1에서 뭐가 일어났을까?

누구를 살려야 했을까?

그리고 왜 이 모든 게 반복되고 있을까?

은지는 타임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게 멈췄다.

조명이 꺼졌다.

차량이 흔들렸다.

그리고 은지는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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