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루프 5회차

루프 5회차. 20시 02분.

은지의 눈이 떠졌을 때 처음 느낀 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무거움이었다. 마치 누군가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휘저어 놓은 듯한 감각. 지하철 차량의 형광등이 간헐적으로 깜박거렸다.

은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벤치에 누워 있었나? 언제부터? 옆에 앉아 있던 도연이 그녀의 얼굴을 들었다.

"깼어요?"

"네." 은지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도연이 은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아니, 따뜻했나? 은지는 손의 감각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네, 따뜻했다. 지금은 따뜻하다. 이전엔?

"당신이 이상민을 죽였어요."

은지가 도연을 바라봤다. 도연의 입이 움직였다.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지연되어 도달했다. 마치 오래된 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은지는 이상민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차량 안의 사람. 그 사람이 죽었다. 은지가. 타임백으로. 왜?

"내일은 누가 죽을 거예요?"

은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전 루프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프? 이전? 그런 말을 누가 했나. 은지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모두 있었다. 아니다. 한 손가락이 없었다. 약지. 손톱이 벗겨져 있었다. 그 위에 핏자국이 있었다. 누구의 피? 자신의?

차량이 움직이지 않았다. 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벽만 있었다. 회색 벽. 그 벽에 긁힌 자국들이 있었다. 손톱자국. 글씨. 은지가 일어나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루프 7회차'

손톱으로 파낸 글씨였다. 깊고 절박한 자국. 은지가 자신의 손톱을 벽에 맞춰봤다. 크기가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 루프 몇 회차인가.

"루프 5회차입니다."

유진의 목소리가 차량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은지는 뒤를 돌아봤다. 차장실 너머로 유진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뭔데 이 글씨는," 은지가 벽의 '루프 7회차'를 가리켰다. "5회차인데 7회차가 있다고?"

유진이 한 발 다가섰다.

"기억이 흐릿해지나?"

은지가 자신의 손톱을 다시 봤다. 벗겨진 약지. 그 아래로 깊은 상처가 있었다. 언제 생긴 상처? 왜? 은지는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닿으려 해도 손가락 끝만 스칠 뿐 붙잡을 수 없었다.

"누구를 죽였어?"

"모르겠어요." 은지의 대답이 자신을 놀라게 했다. 왜 모르지? 무언가 중요한데.

도연이 은지의 팔을 잡아챘다. 손가락이 은지의 팔에 깊숙이 박혔다. 그제야 은지가 도연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도연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공포. 그리고 필사적인 뭔가.

"저를 살려 줄 거죠? 제발." 도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의사예요. 나는 도움이 돼. 내 경험이 여기서 쓸모 있을 거야. 제발 나를 살려 줘."

뒤에서 최수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날 살려 줘! 나는 아직 젊아!"

최수진이 도연을 밀쳐냈다. 도연이 벤치에 몸이 부딪혔다. 은지가 도연을 받아줬다. 도연의 팔이 은지의 목을 휘감았다.

"제발. 제발 제발."

차량 안의 다른 승객들이 일어섰다. 박준호가 입을 열었다.

"내 아내가 밖에 있어. 내 아이가 있어. 그들이 나를 기다려. 제발 내가 살아야 돼."

"그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 모두가 밖에 누군가를 두고 있어!"

차량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든 승객들이 은지를 보고 있었다. 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살려 줘. 제발.

은지가 한 발 물러섰다. 도연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최수진이 도연을 밀어냈다. 박준호가 "정신 차려, 우리 모두가 경쟁할 필요 없어"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누구를 죽일지 난 정할 수 없어!"

은지의 목소리가 차량 전체에 울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승객들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입들이 다물어졌다. 눈들만 은지를 향해 떠 있었다.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1초. 2초. 3초.

그리고 한 명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맨 뒤에 있던 노인이었다. 은지가 이름을 모르는 승객. 그의 몸이 희미해졌다. 손가락 끝부터. 팔뚝. 가슴. 그의 입이 벌어졌다. 소리를 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투명한 음성. 무음. 그리고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 있었다. 침묵과 빈 자리.

은지가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회색 벽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차갑지 않았다. 온도가 없었다. 은지는 손으로 벽을 만져봤다. 손가락이 벽에 닿았다. 약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 약지의 자리에는 공기가 있었다.

"왜 기억이 안 나?"

누군가가 물었다. 은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기억이 안 나는 게 정상이야."

유진이 다시 말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항상 침착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은지가 화장실을 찾아 다녔다. 누군가가 가리켜줬다. 화장실 안에는 거울이 있었다. 작은 거울. 은지가 자신의 얼굴을 봤다.

얼굴이 흐릿했다.

처음엔 거울의 먼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이 정말로 희미했다. 눈이 보이긴 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았다. 코도. 입도. 모두 흐릿했다. 그녀는 언제든 이렇게 투명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루프에서. 혹은 이 루프가 끝나가는 23시 47분에.

은지가 손가락을 들었다. 거울에 비친 손가락들이 떨렸다. 약지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투명했다. 은지는 손을 거울에 가져다 댔다. 거울 속의 손이 거울 밖의 손과 만났다. 차갑지 않았다. 그냥 차갑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유진이 화장실 문 밖에 서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은 선명했다. 매우 선명했다. 은지의 얼굴과 달리.

"넌 점점 흐릿해지고 있어."

유진이 말했다.

"그건 정상이야."

은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봤다. 정말로 흐릿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혹은 자신이 원래부터 여기 없던 건 아닐까. 누군가의 루프 속에서, 누군가의 선택지로.

23시 47분. 또 다른 누군가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비명도 없었다. 그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려 했다. 은지는 자신의 손톱을 들었다. 한 손가락만 남았다. 엄지손가락.

벽에 무엇을 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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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프 6회차

루프 6회차입니다. 차량의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진의 목소리였다. 은지는 벽을 바라봤다. 손톱자국들. 이전 루프들의 기록. 그 아래 어딘가에 자신의 손톱이 새길 다음 기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했는지. 왜 선택했는지. 누구를 죽였는지. 그저 투명해져 가는 자신의 얼굴만 기억할 것이다. 거울 속에서 본 그 희미한 얼굴.

20시 02분.

새로운 차량이 아니었다. 같은 차량이었다. 은지는 그것을 안다. 아니, 안다고 생각한다. 기억이 너무 흐릿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뭔가 반복되는 느낌이 있다. 벤치의 패턴. 천장의 흠집. 좌석 등받이의 헐어진 부분. 모두 같다.

승객들의 얼굴을 세어본다. 1, 2, 3... 몇 명이었더라? 어제는 몇 명이 있었지? 기억이 안 난다. 은지의 머리에는 안개가 끼어 있다. 그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선택해 줘." "나를 살려 줘." "제발." 하지만 그 목소리들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도연이 은지에게 다가온다. 은지는 그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아니, 방금 누군가가 "도연이야"라고 말했다. 아니다. 그건 전 루프에서? 아니면 그 전전 루프에서?

"당신이... 능력을 쓸 수 있어?"

도연의 목소리가 떤다. 그녀의 눈은 은지를 향해 있지만, 동시에 다른 승객들을 재단하고 있다. 계산하고 있다. '저 사람이 죽을 확률은?' '저 사람이 살아남을 확률은?'

"모르겠어요."

은지가 대답한다. 정말로 모른다.

"당신이 누군가를 살린 거 봤어. 우리 다 봤어."

박준호가 나선다. 그의 목소리는 더 절박하다. 그의 입술이 떨린다. 뭔가 간청하려는 입술. "내 가족을 살려 달라는 입술일까?"

"그거... 다 환상일 수도 있어요."

은지가 말한다. 자신이 말한 건지 누군가가 말한 건지 구분이 안 간다.

"환상이 아니야."

최수진의 목소리. 그 여자는 은지 옆에 있었나? 은지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본다. 젊은 얼굴. 예쁜 얼굴. 하지만 그 얼굴도 흐릿하다. 아니다. 모두가 흐릿하다. 이 차량 안의 모든 것이. 유진을 제외하고.

"당신이 할아버지를 살렸어. 그리고 그 대신..."

최수진이 말을 끝내지 않는다. 끝낼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안다. 그 대신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이상민이 벤치에서 일어난다. 그의 손가락이 은지를 가리킨다. 그 손가락은 위협이다.

"넌 우리 중에 누군가를 죽일 능력이 있어. 그러면 넌 누군가를 살려야 해. 나를."

이상민의 목소리는 야수의 울음이다. 계산 없는 순수한 욕망. 생존욕.

"제발, 내가 살아야 해. 내 가족이..."

박준호가 은지의 팔을 잡는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 아니, 차갑다. 은지는 구분할 수 없다.

"나도 가족이 있어! 나도!"

도연이 박준호를 밀친다. 그들의 신체가 충돌한다. 차량이 흔들린다. 아니, 흔들린 게 아니라 은지의 시야가 흔들렸다.

"제발... 나는 의사야. 나는 도움이 돼. 나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

도연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목소리는 비명이다. 절박함의 비명. 은지는 그 비명을 듣는다. 들었다. 아니, 지금 처음 듣는 건가.

"나는 아직 젊아! 내가 살아야 한다고!"

최수진이 도연을 밀친다. 승객들이 은지를 둘러싼다. 원형을 이룬다. 은지가 그 원의 중심에 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인다.

"누구를 살릴 거야?"

"누가 죽어?"

"나를 선택해 줘."

"제발."

목소리들이 겹친다. 은지의 귀를 울린다. 그녀의 머리를 누른다. 안개가 더 짙어진다.

"나... 모르겠어요."

은지가 중얼거린다.

"뭐?"

"누가... 누가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은지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더 커진다.

"누구를 죽일지 난 정할 수 없어!"

절규다. 그것은 절규였다. 그녀의 몸이 떨린다. 그녀의 목이 아프다. 눈에서 뭔가 흐른다. 눈물인가. 아니면 그냥 흐릿해지는 것인가.

침묵이 찾아온다.

모든 소리가 멈춘다.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승객들의 손이 공중에서 멈춘다. 입들이 다물어진다. 눈들만 은지를 향해 떠 있다.

1초. 2초. 3초.

그리고 한 명이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이번엔 노인이 아니다. 젊은 남자다. 은지가 이름을 알 리 없는 승객. 그의 손가락 끝부터 희미해진다. 팔뚝. 어깨. 목. 그의 입이 벌어진다. 소리를 내려 하지만 이미 투명해진 목에서는 음성이 나오지 않는다. 무음의 비명. 그리고 그는 완전히 사라진다.

남은 것은 그의 옷. 그의 휴대폰. 그의 신발.

은지는 그 자리를 본다. 방금 전까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옷과 신발만 남았다. 마치 그 사람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은지의 손이 떨린다. 그녀가 한 일이다. 자신이 정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사라졌다. 그 남자의 마지막 눈빛이 은지를 향했다. 왜? 나는 왜? 그 눈이 은지에게 묻고 있었다.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은지는 벽에 등을 기댄다. 그 벽이 그녀를 받아준다. 차갑지 않은 벽.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모두가 안다. 이제 비명 지을 차례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이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도연이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댄다. 박준호도. 최수진도. 이상민도. 모두가 벽에 기댈 자리를 찾는다. 마치 자신들도 곧 투명해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은지는 화장실을 찾아 다닌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말은 없다. 이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침묵만이 남았다.

화장실의 거울은 작다. 손톱 하나를 들이대도 가득 찬 거울. 은지가 자신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흐릿하다.

처음엔 거울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손으로 거울을 닦아본다. 거울은 깨끗해진다. 하지만 그 안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하다. 눈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 코도. 입도. 턱도. 모두 희미하다.

은지는 손가락들을 들어올린다. 거울에 비친 손가락들이 떨린다. 한 손가락이 없다. 약지. 그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본 약지는 완전히 없는 게 아니라 투명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은지는 손을 거울에 가져다 댄다. 거울 속의 손이 거울 밖의 손과 만난다. 차갑지 않다. 온도가 없다. 그냥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언제부터 흐릿해졌어?"

은지가 중얼거린다. 자신에게 묻는 질문.

"처음부터."

문이 열린다.

유진이 화장실 문 밖에 서 있다. 그 남자의 얼굴은 매우 선명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은지의 흐릿함과 정반대로. 그의 눈. 그의 코. 그의 입. 모두 또렷하다.

"넌 점점 흐릿해지고 있어."

유진이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다.

"그건 정상이야."

은지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본다. 정말로 흐릿해졌다. 마치 자신이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 것처럼. 혹은 자신이 원래부터 여기 없던 게 아닐까. 누군가의 루프 속에서. 누군가의 선택지로.

"내가... 미쳐가는 건가?"

은지가 묻는다.

유진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은지를 본다. 그의 시선이 무겁다. 마치 그 시선이 은지를 더욱 투명하게 만드는 것 같다.

"루프 5회차에서 당신이 선택을 거부했을 때, 그 노인이 소멸했어."

유진이 느리게 말했다.

"당신의 거부가 시스템을 작동시킨 거야. 선택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대신 선택한다."

은지가 유진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의 말은 명확하다.

"그럼 이번엔?"

은지가 묻는다.

유진이 웃는다. 아주 작은 웃음. 마치 은지가 기대했던 질문을 받은 것처럼.

"이번엔 다르지. 이번엔 넌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어. 넌 그저 절규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 절규가 누군가를 죽였어."

유진이 한 발 다가선다. 은지는 물러난다. 거울이 그녀의 등을 막는다.

"이제 넌 깨닫기 시작했어. 넌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넌 이미 시스템의 일부야. 루프 1부터."

유진이 은지의 얼굴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은지의 투명한 약지를 만진다.

"루프 43회차부터 누군가는 선택을 거부했어. 루프 46회차부터 기억이 사라졌어. 루프 50회차부터 죽음을 원했어. 그리고..."

유진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루프 55회차부터는 아무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어."

은지의 호흡이 빨라진다. 공황이 가슴을 누른다. 그 남자가 말하는 게 뭐지. 루프 43회차? 루프 55회차? 그건 뭐고, 자신은 지금 몇 회차인가. 루프 6회차라고 했는데.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

은지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자신이 더 이상 거울 속에 있지 않다. 거울 속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거울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이 거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건가. 은지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차량의 스피커에서 음성이 울린다.

"23시 47분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이번엔 도연이다. 그 여자의 손가락 끝부터. 은지는 도연이 자신을 보려고 한다. 도연이 자신에게 뭔가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투명해진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도연의 눈이 마지막으로 은지를 찾는다. 그 눈에는 질문이 있다. 왜? 나는 왜? 하지만 은지도 모른다. 자신이 뭘 했는지. 자신이 왜 이 능력을 갖고 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도연의 눈이 은지에게 박힌다. 그 눈 속에 있던 신뢰, 희망, 모든 것이 절망으로 변한다. 그리고 은지는 그것을 본다. 자신이 초래한 결과를. 자신의 무능이 죽인 사람. 자신의 침묵이 사라지게 한 사람.

도연이 완전히 사라진다. 옷과 신발만 남는다.

은지가 눈을 돌린다. 유진을 보지 않기 위해. 하지만 유진의 목소리는 계속 들린다.

"루프 7회차입니다."

새로운 루프. 새로운 승객들. 아니, 같은 승객들. 아니, 모르겠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언제 사라졌는지. 누가 자신에게 뭘 했는지.

은지는 자신의 손톱을 든다. 이제 한 손가락만 남았다. 엄지손가락. 그것도 얇다. 마치 부러질 것처럼.

벽을 바라본다. 손톱자국들. 이전 루프들의 기록. 누군가의 절망. 누군가의 절규. 누군가의 마지막 외침.

벽의 글씨들을 더듬는다. 손가락이 홈을 따라간다. 각 글씨는 깊고, 절박하고, 절망적이다.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누가 썼는가. 누가 이 경고를 남겼는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른 루프에서? 아니면 이미 영구히 사라진 건가.

더 아래쪽에는 각 루프마다 누가 죽었는지 기록한 글씨들이 있다.

"루프 37회차. 루프 38회차. 루프 39회차. 루프 40회차. 루프 41회차. 루프 42회차."

그리고 그 아래.

"루프 43회차부터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여러 필체. 여러 손가락. 여러 루프. 여러 절망.

"루프 46회차부터는 기억이 안 난다."

"루프 50회차부터는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루프 55회차부터는 죽고 싶다."

"루프 60회차부터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 아래로는 공백만 있다. 긴 공백. 마지막 기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은지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새로운 글씨를 새기려 한다. 하지만 무엇을 쓸지 모른다. 자신의 루프 번호? 이미 썼다. 누가 죽었는가? 기억이 안 난다. 왜 그 선택을 했는가? 모른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가? 모르겠다.

손톱이 벽에 닿는다. 글씨가 새겨진다. 깊고, 절박하고, 절망적으로.

"루프 7회차"

손톱이 벽에서 떨어진다. 은지는 손을 내린다. 손가락이 아프다. 아니, 감각이 없다.

조명이 깜박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차량 안의 모든 것이 깜박인다. 승객들. 벽. 좌석. 그리고 자신.

그 순간, 은지는 깨닫는다.

자신이 처음 지하철에 탔을 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그 깨달음이 은지의 몸을 관통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호흡이 끊긴다. 손가락이 저린다. 세상이 흔들린다. 아니,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고 있다.

유진이 은지에게 다가온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다. 은지의 얼굴보다 훨씬.

"넌 루프 1에서 뭘 했어?"

유진이 묻는다. 그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함정이 있다. 은지는 그것을 느낀다.

은지가 대답하려 한다. 루프 1. 첫 번째 루프. 그게 뭐였더라. 거기서 뭘 했더라. 누구를 살렸더라. 아니, 누구를 죽였더라.

하지만 기억이 없다. 완전히 없다. 마치 루프 1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존재했지만 자신이 거기 없었던 것처럼.

"기억 안 나?"

유진이 다시 묻는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마치 은지를 보는 것 같은. 아니, 은지를 관찰하는 것 같은. 마치 은지가 누군가의 실험 대상인 것처럼.

"당신이... 뭐예요?"

은지가 묻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린다. 공포. 해리. 현실감각의 붕괴.

유진이 웃는다. 아주 작은 웃음. 마치 은지가 기대했던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난 너와 같은 사람이야. 그저 한 루프 앞서 있을 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은지는 깨닫는다.

자신이 처음 지하철에 탔을 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그 깨달음이 은지의 몸을 또다시 관통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호흡이 끊긴다. 손가락이 저린다. 세상이 흔들린다.

은지는 벽으로 돌아간다. 벽의 글씨들을 다시 본다. 루프 43회차부터의 기록들. 그 글씨들이 누구의 것인가. 그게 자신의 글씨인가. 아니면 자신이 될 누군가의 글씨인가.

은지의 손이 벽을 더듬는다. 글씨를 따라간다. 루프 43. 루프 46. 루프 50. 루프 55. 루프 60. 그리고 그 이후의 공백.

자신이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 루프 60을 넘어서. 죽음도 두렵지 않은 곳으로.

은지는 손톱을 다시 든다. 엄지손가락. 마지막 손가락. 그것도 이제 반투명해 보인다.

벽에 새긴다. 글씨를 새긴다. 자신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루프 1에서 뭘 했는지 모른다는 것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글씨가 벽에 새겨진다. 깊고 절박한 자국으로.

그리고 은지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이미 이 글씨를 여러 번 새겼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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