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프 5회차
20시 02분.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자마자 도연이 은지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이상민을 죽였어요."
도연의 손은 따뜻했고, 손가락이 은지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그 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은지는 도연의 얼굴을 마주했다. 눈빛이 예리했다. 할머니처럼 보이던 그 사람이 지금은 다른 무언가였다.
"모르겠어요."
은지가 겨우 내뱉은 말이 전부였다.
도연이 손을 놨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울음이었다. 도연의 입이 떨렸다.
"모르겠다고요? 당신은 능력이 있잖아요. 당신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데, 그건 누군가를 죽인다는 뜻인 거고. 그럼 당신은 정확히 누구를 죽일 건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승객들의 시선이 은지에게 몰렸다. 박준호는 벤치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이 떨리고 있었다. 손이 주머니를 감싸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이었다. 은지는 그걸 봤다. 흰색의 로프 같은 것.
준호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다.
"내일이 내 차례일까?"
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내일이 내 차례일까?"
그가 반복했다. 손가락이 주머니 속의 로프를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차량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게 아니라 공기가 움직였다. 산소 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은지는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루프에선 충분했던 공기가 이제는 희박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최수진이 일어섰다. 그녀는 은지의 앞에 섰다. 간호사였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당신 능력, 대체 뭐하는 건가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손도 떨렸다.
"한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하면, 다른 누군가가 죽어요. 이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건 그냥... 저주 아닌가요?"
최수진이 한 발 더 다가섰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요. 당신이 누군가를 살리든 안 하든. 결국 24시간마다 한 명씩 사라지는 거고, 당신이 그 사람을 선택하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 중에 누가 죽을지 결정하는 거라고요."
최수진의 손이 은지의 어깨를 밀었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은지는 뒷걸음질을 쳤다.
"한 사람 정도만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뭐하는 거예요? 이건 능력이 아니에요. 이건 고문이에요."
최수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은지는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눈을 돌렸다. 차량의 다른 쪽을 봤다.
이상민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회사원처럼 보였다. 셔츠의 단추가 풀려 있었다. 그의 눈은 은지를 좇았다.
"넌 우리 중에 누구를 죽일 거야?"
이상민이 물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정확히 말해 봐. 내일은 누가 사라질 거야?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해 봐."
은지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차량이 조용해졌다. 모든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모든 눈이 은지에 집중되었다.
입술이 떨렸다. 입 안이 건조했다. 목이 칼칼했다. 산소 부족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못하겠어요."
은지가 겨우 내뱉었다.
"못하겠다는 게 뭐야?"
이상민이 물었다. 그가 일어섰다. 그의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포식자 같았다. 천천히 은지에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죽어야 해. 너도 알잖아. 10번만 사용할 수 있고, 매번 누군가가 대신 죽어. 그럼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 거야. 그럼 정확히 누가 죽을 거야?"
은지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등이 차량 벽에 닿았다.
"넌 이미 알고 있잖아. 누가 약한지. 누가 죽어도 상관없는지."
이상민이 더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이 은지의 얼굴 앞에 있었다.
"누구야?"
한 글자 한 글자가 쏟아졌다.
은지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거짓이야. 넌 알아."
이상민의 손이 은지의 목을 감싸려 했다. 그 순간, 유진이 나타났다. 차장실에서 나온 유진이 이상민을 밀쳤다. 이상민이 넘어졌다.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다.
"너도 알고 있잖아, 차장. 이건 게임이야.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 게임. 그 게임의 규칙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유진이 이상민을 바라봤다. 유진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이 흔들렸다.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제 충분해."
유진이 말했다.
"루프가 끝나간다."
시간은 23시 47분이었다.
차량 내 조명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군가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은지는 그 방향을 보지 않기로 했다. 누구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소멸의 소리.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음.
그리고 침묵.
은지는 바닥을 봤다. 바닥에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물건. 신발, 또는 시계, 또는 반지.
그때 은지의 눈이 벽을 향했다.
벽 아래쪽에 손톱자국들이 있었다. 많은 손톱자국들. 그것들이 숫자를 이루고 있었다.
'루프 1회차'
'루프 2회차'
'루프 3회차'
손톱자국으로 새겨진 숫자들이 계속됐다.
'루프 4회차'
'루프 5회차'
'루프 6회차'
은지의 손이 벽을 만졌다. 손톱자국의 깊이를 느꼈다. 얼마나 오래 전에 누군가가 이것을 새겼을까. 얼마나 절망했을까.
'루프 7회차'
'루프 8회차'
'루프 9회차'
계속됐다. 계속 이어졌다.
'루프 10회차'
'루프 11회차'
'루프 12회차'
은지의 손가락이 따라 내려갔다. 손톱자국을 쓸어내렸다. 어떤 것들은 너무 오래되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신선했다. 최근에 새겨진 것들.
'루프 34회차'
은지가 멈췄다. 34회차. 자신의 루프보다 훨씬 많다. 자신은 이제 5회차인데. 누군가는 34회차를 반복했다. 34번을 반복했다. 34번을 선택했다. 34번을 살인했다.
"당신이 찾은 거군요."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지는 돌아봤다. 유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차장 유진. 늘 그곳에 있던 유진.
"그건 뭐예요?"
은지가 물었다.
"당신보다 먼저 이 차에 갇혔던 사람들이 남긴 거죠."
유진이 대답했다.
"그들도 루프를 반복했어요. 그들도 타임백을 사용했어요. 그들도 루프 1회차부터 시작했어요."
유진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은지의 손이 떨렸다. 벽 위의 손톱자국들을 다시 봤다. 34회차를 넘어서 더 있었다.
'루프 35회차'
'루프 36회차'
'루프 37회차'
계속 이어졌다. 끝이 없었다. 벽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새 루프가 시작되려고 했다. 은지의 시야가 흐려졌다. 기억이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벽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손톱자국이 아니라 다른 것. 피로 쓰인 듯한 글씨.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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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5회차. 20시 02분.**
은지는 눈을 떴다. 지하철 차량. 같은 자리. 같은 냄새.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인사했다. 은지는 그 사람을 봤다. 얼굴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름이 없었다. 마치 사진 속 인물처럼 존재하되 호출되지 않는 사람.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발성하지 못했다.
"은지 씨? 괜찮으세요?"
최수진이 손을 흔들었다.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었다.
벽 위의 손톱자국들이 떠나지 않았다. 루프 4회차에서 타임백을 사용했을 때, 차량이 뒤로 흔들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되감기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자신의 몸은 앞으로 튕겨졌다.
되감기는 범위가 축소되었다.
차량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자신과 유진이 있는 공간만. 은지는 그 생각에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만약 범위가 계속 축소된다면? 다음 루프에서는 더 작은 구간만 되감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결국 아무것도 되감길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도연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에 박준호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민. 그 남자는 은지를 노려봤다.
"또 당신이네. 매번 당신이 깨어나면 누군가가 죽어."
이상민이 일어났다. 은지는 몸을 움츠렸다. 루프 3화에서의 폭력이 기억났다. 아니, 기억이 났다. 이번 루프에서는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몸이 반응했다.
"여긴 뭐야? 이 차는 뭐야?"
이상민이 계속 물었다.
"모르겠어요."
은지가 답했다. 더 이상 설명할 에너지가 없었다.
"모르겠다고? 넌 뭘 알아? 우리 중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건 당신이잖아."
"제가 죽이는 게 아니라—"
"그럼 뭐야?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박준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은지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왜곡되어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한 사람 정도만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뭐하는 거예요? 우리는 여덟 명이잖아. 여덟 명이 갇혀 있는데, 당신은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어요?"
박준호가 은지에게 가까워졌다. 은지는 뒤로 물러났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누군가가 죽어. 그건 구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예요. 누구를 죽일지 선택하는 거야!"
"아니야.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 난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죠?"
박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절망이 목에 걸려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거네. 결국 우리는 다 죽는 거네."
박준호가 벤치에 앉았다. 몸이 웅크러들었다. 은지는 그 모습을 봤지만 도울 수 없었다. 도울 수 있는 게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제 차례가 올까봐 무서워요."
박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 은지는 그의 프로필만 봤지만 공포가 보였다. 루프 3화에서 그는 감사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 감사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서 있었다.
"제 차례가 올까봐 무서워요. 정말 무서워요."
박준호가 반복했다.
"나갈 수 없나요?"
도연이 물었다. 은지를 보지 않고 물었다. 질문은 은지를 향했지만 기대는 없었다.
"응급문을 열 수 없어요. 통신도 안 돼요. 밖에서도 우리를 감지할 수 없어요."
은지가 대답했다. 이것은 이미 세 번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럼 우리는 죽는 거네."
도연이 말했다.
"한 명씩. 하루에 한 명씩. 여덟 명이니까..."
도연이 손가락으로 세었다.
"8일이면 우리 모두 죽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은 뭘 할 거예요?"
이상민이 다시 은지에게 다가왔다. 은지는 벤치 끝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한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그걸로 뭘 하실 거예요? 누구를 살릴 거예요? 그럼 나머지 일곱 명은 어쩌고요?"
이상민이 은지의 앞에 섰다. 은지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당신이 날 살려줄 거예요? 아니면 누군가를 대신 죽일 거예요? 그냥 말해 봐. 당신이 날 죽일 거면 지금이라도 죽여. 이 고통을 언제까지 겪어야 돼?"
은지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못 말하네. 선택을 못 하는군요."
이상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그럼 우린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네. 당신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
시간은 흘렀다. 22시. 23시. 은지는 벤치 끝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최수진은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박준호는 주머니 속 무언가를 꺼냈다—사진이었다. 아내와 아이의 사진. 그는 그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내 아이는 아직 다섯 살이야."
박준호가 말했다. 은지를 보지 않고.
"이 차 안에 없어. 밖에 있어. 그 애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난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살아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은지는 답하지 않았다.
23시 47분.
조명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누군가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은지는 그 방향을 보지 않았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소멸의 음.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침묵.
누군가의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신발인 것 같았다.
은지의 눈이 내려갔다. 벽을 따라.
손톱자국들.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루프 1회차'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들.
은지는 몸을 굽혔다. 벽을 더 자세히 봤다. 손톱자국들 사이에 다른 글씨들이 있었다.
'루프 37회차: 도연을 선택했다'
은지의 심장이 멈췄다.
도연. 자신이 알고 있는 도연. 지금 이 차량에 있는 도연.
다음 줄:
'루프 38회차: 준호를 선택했다'
그 다음:
'루프 39회차: 최수진을 선택했다'
은지의 손이 벽을 따라 내려갔다. 글씨들이 계속됐다.
'루프 40회차: 유진을 선택했다'
'루프 41회차: 이상민을 선택했다'
'루프 42회차: 다시 도연을 선택했다'
손톱자국으로 새겨진 글씨들. 누군가는 각 루프마다 누구를 죽일지 기록했다. 마치 게임의 점수표처럼.
'루프 43회차: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은지는 이 글씨에서 멈췄다. 손가락으로 긁어낸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 글씨를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루프 44회차: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루프 45회차: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글씨가 없었다. 하지만 벽 위에는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지우려다 만 흔적들.
은지가 벽에서 손을 뗐다. 가슴이 철렁했다. 루프 43회차에서 누군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죽었을까? 타임백을 사용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여전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루프 46회차부터는 기록이 없었다.
은지는 벽 아래쪽을 더 살펴봤다. 거의 바닥에 가까운 곳에 뭔가 있었다. 펜으로 쓰인 글씨였다. 깔끔하고 정확했다.
'루프 46회차부터는 기억이 안 난다'
그 글씨 바로 옆에는 또 다른 글씨가 있었다. 다른 필체로.
'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그 옆에:
'나도'
'나도'
'나도'
같은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되어 있었다. 다른 필체로. 다른 시간에 쓰인 것 같았다.
은지는 그 글씨들을 봤다. 각각의 필체. 각각의 절망. 기억이 사라지는 공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두려움.
루프가 거듭될수록 범위가 축소되고, 기억이 파편화되고,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인가.
은지는 벽에서 손을 떼었다. 손가락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니, 먼지만이 아니었다. 손톱 자국 아래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묻어 있었다. 금속 냄새. 녹슨 철.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은지가 다시 그 글씨를 찾았다. 손가락을 그 위에 갖다 댔다. 마르지 않은 것처럼 끈기가 있었다.
피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피로 이 글씨를 남겼다. 루프 33회차에서. 그리고 그 글씨는 아직도 신선했다.
은지가 유진을 찾았다. 차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은지는 차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유진!"
은지가 소리쳤다.
차장실의 문이 열렸다. 유진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뭐예요?"
은지가 벽을 가리켰다.
"이 글씨들. 이게 뭐예요?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루프 46회차부터는 기억이 안 난다? 이게 뭐라는 거예요?"
유진은 벽을 봤다. 그리고 다시 은지를 봤다.
"당신보다 먼저 이 차에 갇혔던 사람들이 남긴 거죠."
"그들이 몇 회차까지 반복했어요?"
"모릅니다."
유진이 대답했다.
"기록이 끝나는 지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은지가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장실로 돌아갔다. 문이 닫혔다.
은지는 벽 앞에 남겨졌다. 손톱자국들과 피로 쓰인 글씨들과 함께.
조명이 깜박였다.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려고 했다.
그 순간, 은지는 벽의 가장 아래쪽을 다시 봤다. 펜으로 쓰인 글씨들 아래에 또 다른 글씨가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낸 글씨. 최근에 새겨진 것 같았다. 깊고 절박했다.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그 아래: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은지는 이 두 줄을 봤다. 누군가는 루프 43회차에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했다. 타임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죽었을까?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만약 자신이 루프 43회차처럼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은지의 마음이 철렁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 아닐까.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은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루프 43회차의 누군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기록으로 남겼다. 마치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듯이.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담아.
은지는 벽에 새겨진 글씨들을 다시 봤다. 각각의 필체. 각각의 절망. 그리고 루프 43회차의 저항.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그 절규.
혹시 루프 33회차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건 아닐까.
혹시 자신이 지금 누군가의 루프 33회차 속에 있는 건 아닐까.
시야가 흐려졌다. 기억이 떨어져 나갔다. 루프 5회차가 끝나가고 있었다.
은지는 마지막으로 벽을 봤다. 손톱자국들. 피로 쓰인 글씨들. 펜으로 쓰인 절망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에, 가장 최근에 새겨진 글씨.
'루프 33회차에서 죽지 말 것'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두 개의 글씨가 나란히 있었다. 마치 질문과 답변처럼. 마치 누군가의 절규처럼. 마치 다른 길이 있다는 증거처럼.
검은색이 은지를 삼켰다. 그녀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몇 회차인지, 정말로 은지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마지막으로 은지가 들은 것은 차장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유진이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은 뭔가 다른 것을 담고 있었다. 동정인지, 아니면 확인인지.
"루프 6회차입니다."
유진이 말했다.
차장실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