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철 차량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은지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톱이 벗겨진 손가락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1화였을 리 없다. 벤치 밑의 손톱자국들을 봤으니까. 루프 8회차라고 새겨진 그 자국들.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7번을 반복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억에는 2번의 루프만 있다.

20시 47분.

디지털 시계는 깜박였다 켜졌다. 은지는 시간을 재고 있었다. 24시간마다 한 명씩. 첫 번째 루프에서는 할아버지였다. 두 번째에는 박민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차량 내 조명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공기는 점차 탁해지고 있었다. 은지가 숨을 내쉬면 그 숨이 하얀 연기처럼 보였다.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온도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산소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켜도 가슴이 꽉 찬 느낌이 풀리지 않았다.

"또 시작됐어."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장실에서 나온 그는 은지를 스쳐 지나갔다. 은지는 그의 얼굴을 봤다. 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예정된 각본처럼. 유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은지가 일어섰다.

"이상민이 누구야?"

그 이름을 말하자마자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이상민. 이상민. 이상민.

세 번 반복해도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량 내 남자는 세 명이었다. 벤치 끝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박준호. 창가에 기대어 있는 젊은 남자—누구지? 그리고 또 누가 있었나? 네 번째 남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은지의 손이 떨렸다.

"내가 누구를 살린 거야?"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 웃음은 은지가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너무 익숙했다.

"누구를 죽인 거야?"

이 질문이 더 정확했다. 은지는 지금 누군가를 죽였다. 타임백을 사용했으니까. 누군가의 이름이 빠졌으니까.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젊은 남자가 움직였다. 그는 은지를 바라봤다. 눈에 생기가 없었다.

"또 누구를 죽일 거예요?"

박준호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절망이 배어 있었다.

"내 가족이 밖에 있어요. 아내와 아이가. 그들을 살려줄 거라고 약속했어요."

은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아, 맞다. 자신은 박준호를 살렸다.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타임백의 대체 효과. 한 사람을 살리면 다른 누구가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그 누군가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

은지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벤치에서 할머니가 일어났다. 김도연이었다. 흰 머리를 한 그녀의 눈이 부릅떴다. 은지는 그 눈에서 뭔가 변한 것을 봤다. 처음 루프의 따뜻한 할머니는 사라지고 있었다.

"당신이 죽인 거네."

도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당신이 그 남자를 죽인 거야."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시스템이—"

"시스템? 당신은 타임백을 쓰기로 선택했잖아!"

도연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차량의 조명이 깜박일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은지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벤치가 막아섰다.

"당신이 그 남자를 살리기로 선택했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죽었어. 당신이 죽인 거야."

도연의 손가락이 은지의 가슴을 찔렀다. 물리적인 접촉은 아니었지만, 은지는 느꼈다. 그 손가락의 무게. 그 손가락이 지르는 죄책감.

"그럼 내일은? 모레는?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넌 누구를 죽일 건데? 나? 아니면 다른 사람?"

도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입가가 굳어갔다.

"우리가 모두 죽을 때까지? 우리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계속 누군가를 죽일 거야?"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도연이 은지의 목을 잡았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 손가락들이 은지의 목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이 현실이 됐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누구를 위해 남겠어?"

도연이 중얼거렸다. 은지의 목을 잡은 손이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누군가는 남아야 하잖아. 누군가는."

박준호가 일어섰다. 그는 도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 도연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냥 주저앉았다. 벤치 위에.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박준호가 은지에게 말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저를 살려줘서 감사해요. 정말로. 제 가족을 위해서. 당신이 저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은지는 그의 얼굴을 봤다. 감사하는 얼굴. 감사하는 눈. 감사하는 목소리.

그리고 그 감사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은지는 자신의 얼굴을 박준호의 어깨에 묻었다.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세제, 땀, 그리고 무언가 낡은 것의 냄새—가 은지의 콧속을 채웠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현실이었다.

누군가를 살리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었다.

은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손가락들이 박준호의 등을 할퀴었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현실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23시 12분.

차량 내 온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은지는 자신의 숨이 하얀 연기가 되는 것을 봤다. 다른 승객들도 봤다. 누군가는 팔을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공기가 줄어들고 있다.

은지는 그것을 느꼈다. 산소 농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차량은 밀폐되어 있었다. 응급문도 열리지 않았다. 외부와의 통신도 불가능했다. 이 공간은 외부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자신이 시간을 되감으면서 뭔가가 깨지고 있는 건가?

23시 47분.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 손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은지는 그 손을 봤다. 누구의 손이었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즉시 사라졌다.

그 이름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 사이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또 누구가 죽어."

도연이 중얼거렸다.

"누구야? 누구를 죽인 거야?"

은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모르는 것 자체가 무섭게 다가왔다. 자신이 살린 사람. 자신이 죽인 사람. 그 누구의 이름도 기억할 수 없었다.

24시 00분.

소멸이 끝났다.

차량은 다시 조용해졌다. 벤치 위에는 옷이 남았다. 신발도. 시계도.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유진이 차장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루프가 시작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직도 모르고 있네."

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뭘?"

"이건 선택이 아니야. 이건 시스템이야."

유진이 말했다. 은지는 이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어디서? 언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번 누군가가 죽고, 매번 누군가가 살아나고, 매번 넌 누군가를 죽일 거야."

유진이 은지의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은지의 손가락 위에 놓였다.

은지의 손가락에서 희미한 빛이 깜박였다.

타임백의 표시였다. 하지만 그 빛의 범위는 이전보다 작았다. 한 손가락에만 남아 있었다.

"넌 점점 약해지고 있어."

유진이 속삭였다.

"그리고 우린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가까워진다고?"

은지가 물었다.

"뭐가?"

유진은 웃음만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뭔가 부서진 것의 소리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이 깨져나가는 소리처럼.

차량의 조명이 깜박였다.

24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차량 내 조명이 완전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은지는 눈을 깜빡였다. 시간이 점프한 느낌이었다. 아니, 시간이 점프했다. 분명 23시 47분이었는데, 지금은 20시 0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벽의 디지털 시계가 새로운 루프를 알리고 있었다.

은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다. 한 손가락에만 남아 있는 희미한 빛. 그 빛이 떨리고 있었다.

타임백이 축소되고 있다.

그 사실이 은지의 심장을 옥죄었다. 처음엔 온 몸을 감싸던 능력이 이제 한 손가락에만 남았다. 다음 루프엔? 그 다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승객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프의 리셋. 모두가 이전 루프의 기억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은지는 달랐다. 은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민지의 투명해지는 손. 준호의 감사하는 눈물. 그리고 그 눈물 아래 누군가의 죽음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

"당신, 괜찮아요?"

누군가가 은지의 팔을 건드렸다. 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도연이었다. 도연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 루프에서 도연은 아직 자신이 죽음을 목격할 차례가 아니었다. 아직 모성애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은지가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도연이 은지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일회용 물티슈를 꺼내 은지의 얼굴을 닦아줬다.

"이상해요. 뭔가 자꾸 불안한 기분이 들어요."

도연이 말했다.

"마치 무언가 끝나가고 있는 것처럼."

은지는 도연을 봤다. 그 말은 정확했다. 무언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은지의 능력. 은지의 기억. 은지의 정체성. 모두가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혹시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도연이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냥... 뭔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무섭고, 끔찍하고, 절망적인 무언가."

도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이름을 모르겠어요."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도연은 다음 루프에서 어쩌면 투명해질 사람이었다. 또는 그 다음 루프에서. 또는 그 다음다음 루프에서. 은지가 누구를 살릴지에 따라 달라졌다.

"당신이 뭔가 알고 있어요."

도연이 은지의 얼굴을 들었다.

"뭐예요?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은지는 도연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이미 두려움이 가득했다. 루프를 반복하지 않았어도 도연은 뭔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은지가 말했다.

"진짜로."

20시 15분.

박준호가 다시 나타났다. 이 루프에서 준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물론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응급통신도 안 되네."

준호가 중얼거렸다.

"이상민이 아까 응급문 손잡이를 뜯으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안 됐어. 이 차량, 뭔가 이상해."

이상민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 루프에서 이상민은 아직 왕성했다. 아직 자신의 생존이 다른 누구보다 우선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가는 방법이 있을 거야."

이상민이 말했다.

"뭔가 있을 거야."

그는 차량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금속음이 울렸다. 하지만 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차량,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기도 줄어들고 있는 것 같고."

은지는 최수진을 봤다. 이 루프에서 최수진은 여전히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착한 마음도 루프가 반복될수록 부서질 것이다. 은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 루프에서 최수진은 자신의 착한 행동이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20시 45분.

유진이 차장실에서 나왔다. 이 루프에서 유진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그는 은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마치 은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유진이 말했다. 그 말은 은지에게 이미 들었던 말이었다. 아니, 이전 루프에서 들었던 말이었나? 기억이 흐릿했다.

"뭘?"

은지가 물었다.

"이게 몇 번째 루프인지?"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세고 있어. 계속 세고 있어. 하지만 세는 것도 의미가 없어. 왜냐하면 매번 넌 조금씩 잊어가니까."

유진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이름도 잊어. 얼굴도 잊어. 그리고 마지막엔 넌 잊을 거야. 너 자신을."

은지는 뒤로 물러섰다.

"넌 누구야?"

"넌 아직도 모르고 있네."

유진이 말했다.

"이건 선택이 아니야. 이건 시스템이야. 그리고 넌 이미 누군가의 루프 속 선택지야. 넌 자유롭지 않아. 처음부터."

은지의 몸이 경직됐다. 그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으면서도,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인 듯했다.

"뭐... 무슨 말이야?"

"아직은 말할 수 없어."

유진이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갑고 비어 있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유진의 손가락을 은지가 잡았다. 그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손가락의 끝에 남겨진 흔적. 마치 타임백을 사용했던 자의 표식처럼. 은지는 유진의 눈을 마주쳤다.

"정확히 몇 번째야?"

은지가 물었다.

유진의 미소가 굳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마치 계획에 없던 질문을 받은 것처럼.

"아직은 아니네."

유진이 은지의 손을 뿌리쳤다.

21시 30분.

차량 내 공기가 점차 탁해지고 있었다. 은지는 자신의 숨이 하얀 연기가 되는 것을 봤다. 온도도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팔을 감싸고 있었다.

이상민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이 루프에서 이상민은 아직 은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은지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 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민이 은지의 목깃을 잡았다.

"뭐야?"

은지는 이상민의 손을 밀쳤다.

"모르겠어."

"거짓말하지 마."

이상민이 은지를 벽에 밀어붙였다.

"당신, 계속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어. 마치 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은지는 이상민의 눈을 봤다. 그 눈 속에는 동물적 본능만 있었다. 생존. 그것뿐이었다.

"누군가 죽을 거야. 또 누군가가 죽을 거야."

은지가 말했다.

"뭐?"

"24시간마다 누군가가 죽어. 정확히 24시간마다."

은지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은 계속 나왔다.

"그리고 내일이면 너도 죽을 거야. 아니면 내일모레. 아니면 그 다음."

이상민이 은지의 목을 졸렸다.

"거짓말하지 마!"

은지는 질식하면서도 말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도연이 이상민을 뒤에서 밀었다.

"놔! 놔줘!"

도연이 외쳤다.

이상민이 은지를 놓았다. 은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민, 당신이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도연이 말했다.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 해요."

"함께?"

이상민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뭘? 함께 죽자고?"

23시 15분.

첫 번째 투명화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손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신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은지는 그 사람을 봤다. 이상민이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없었던 것처럼.

"누구야? 누구가 죽는 거야?"

최수진이 외쳤다.

"누구를 구하지 않아? 당신은 구할 수 있잖아!"

최수진이 은지를 흔들었다.

"구해! 구해줘!"

은지는 투명해지는 이상민을 봤다. 그리고 타임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누구를 살릴지는 정해야 했다. 이번 루프에서 누가 죽을 것인가.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준호. 도연.

그 중에서 한 명이 대신 사라질 것이다.

은지는 준호를 봤다. 준호는 가족이 있다고 했다. 밖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루프 속의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24시간으로 옮겨간다. 준호의 가족은 이 차 안에 없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은지는 도연을 봤다. 도연은 모두를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도연도 곧 포기할 것이다. 자신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투명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은지의 손가락이 떨렸다. 한 손가락에만 남은 빛이 더욱 희미해지고 있었다.

은지는 준호를 선택했다.

타임백이 발동했다.

시간이 역행했다. 음향이 먼저 왜곡됐다. 차량 내의 모든 소리가 거꾸로 흐르면서 귀를 찢을 듯한 음파가 울렸다. 은지의 눈앞이 순간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신체 전체가 뒤로 당겨지는 느낌—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빛이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축소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중력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신경이 타는 듯한 고통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뻗어 올랐다.

투명화가 멈췄다. 이상민의 손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누군가가 사라졌다.

은지는 그 누군가를 봤다. 그것은 도연이었다. 도연의 자리에는 옷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은지는 도연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연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눈 색깔만 남고 입 모양이 사라졌다. 도연이라는 이름도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가 없었던 것처럼.

준호가 일어섰다. 그는 도연이 있던 자리를 봤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루프가 리셋되면서 다른 승객들처럼 기억도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누가 여기 있었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뭔가...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은지는 준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도연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려고 했지만, 그 기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정지했다.

24시간이 리셋되었다.

---

차량 내 조명이 깜박였다. 20시 02분.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었다.

승객들이 다시 움직였다. 모두가 기억을 잃었다. 하지만 은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일부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 루프에서 누가 사라졌나?

은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당신, 괜찮아요?"

누군가가 은지의 팔을 건드렸다. 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박준호였다. 준호의 얼굴은 낯설었다. 은지는 그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친숙했다. 마치 전생에서 만난 사람처럼.

"네. 괜찮아요."

은지가 대답했다.

박준호가 은지 옆에 앉았다.

"이상해요. 뭔가 자꾸 불안한 기분이 들어요."

박준호가 말했다.

"마치 누군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은지는 박준호를 봤다. 그 말은 정확했다. 무언가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20시 22분.

이상민이 움직였다. 그는 은지를 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동물적 본능이 가득했다.

"당신, 뭔가 알고 있어."

이상민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뭐야?"

은지는 이상민을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민의 손가락을 봤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손가락 끝에 남겨진 흔적. 마치 타임백을 사용했던 자의 표식처럼.

은지의 눈이 커졌다.

"넌... 넌 누구야?"

이상민은 웃음만 터뜨렸다.

"아직은 아니네."

이상민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시간이 아니야."

21시 40분.

차량의 조명이 간헐적으로 깜박였다. 공기가 점점 탁해지고 있었다. 산소 농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은지의 손가락에서 깜박이던 빛이 거의 사라졌다.

다음 루프에는?

다음 루프에도 타임백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은지는 손가락을 들어 봤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최수진이 은지의 손을 잡았다.

"뭔가 이상해요."

최수진이 말했다.

"당신, 계속 손가락을 봐요. 마치 뭔가가 있어야 할 것처럼."

은지는 최수진을 봤다. 최수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음엔 어떻게 돼요?"

최수진이 물었다.

"누가 죽어요?"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23시 50분.

투명화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손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은지는 그 사람을 봤다. 그것은 최수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누구를 구해줄 거예요?"

최수진이 외쳤다.

"누구를 살려줄 거예요?"

은지는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빛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타임백은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은지는 최수진을 바라만 봤다. 그녀가 투명해져 가는 것을 바라만 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은지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최수진이 완전히 사라졌다.

차량은 조용해졌다. 벤치 위에는 옷이 남았다. 신발도. 시계도.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24시 00분.

소멸이 끝났다.

유진이 차장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달라 있었다. 마치 기대하던 순간이 온 것처럼.

"아홉 번째 루프가 시작될 거야."

유진이 말했다.

"이제 넌 선택할 수 없어."

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뭐?"

"타임백이 없어졌어. 이제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지켜보기만 할 수 있어. 누군가가 죽는 것을. 매일 누군가가 죽는 것을."

유진이 은지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은지의 얼굴을 들었다.

"이제 넌 내 차례를 기다리기만 하면 돼."

은지는 유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 무슨 말이야?"

"이건 루프가 아니야."

유진이 속삭였다.

"이건 선택의 시스템이야. 누군가는 선택하고, 누군가는 선택당해. 그리고 그 누군가는 계속 바뀌어. 매 루프마다."

은지의 몸이 얼었다.

"넌 지금 선택당하는 입장이 돼. 이제 넌 피해자야. 그리고 다음 루프에서 넌 사라질 거야. 아니면 그 다음 루프에서. 아니면 그 다음다음 루프에서."

유진이 웃었다.

"누군가 다른 선택권을 가질 때까지."

차량의 조명이 깜박였다.

새로운 루프로의 진입이 임박했다.

은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빛도 없었다. 능력도 없었다. 선택지도 없었다.

차량의 조명이 다시 깜박였다. 이번엔 더 강하게. 더 오래.

그 순간, 차량 내 모든 것이 변했다.

벤치의 배치가 달라져 있었다. 창문의 위치가 이동해 있었다. 응급문의 손잡이가 새로운 위치에 있었다. 차량 자체가 미묘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은지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루프가 아니었다. 이것은 진화하는 시스템이었다. 매 루프마다 규칙이 바뀌고, 매 루프마다 선택권이 이동하고, 매 루프마다 누군가의 역할이 뒤바뀌고 있었다.

차량의 조명이 완전히 켜졌다.

20시 02분. 아홉 번째 루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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