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버실의 모니터는 온통 빨강이었다.

추적 레벨 10/10. 뇌사까지 02:07. 강제 격리 프로토콜 최종 단계 진행 중.

시온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엔터 키까지는 5센티미터. 그것을 누르면 루프는 붕괴될 것이다. 제임스가 말했듯이, 이중 루프 구조가 아닌 이상.

"누르지 마."

제임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는 서버실 입구에 서 있었다.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시온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뭐 하는 거야, 제임스?"

시온이 물었다. 왼쪽 다리는 여전히 마비 상태였고, 신경 신호 억제제의 효과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뇌에서는 매초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당신이 그 키를 누르면 뭐가 일어날까? 정말로 알아?"

제임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시온의 신체 마비로 인해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프가 깨진다. 시민들이 진실을 깨운다. 그게 원했던 거 아니야?"

"진실?"

제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당신이 이 시스템을 만들 때, 왜 만들었는지 기억해? 당신은 말했어. 기억이 고통이라고. 상실이라고. 죄책감이 인간을 짓누르고, 분노가 사회를 부수고, 후회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20년 전, 자신이 한 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걸 만들었어. 편안함을 위해. 인간이 무거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매달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제임스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시민들의 뇌 스캔 데이터였다. 정화 사이클이 시작되는 순간의 신경 활동.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모든 신경전달물질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봐. 저들을 봐. 저게 고통하는 얼굴인가?"

시온은 화면을 응시했다. 정말로, 시민들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눈을 감은 채, 입가에 미세한 미소를 띤 채. 그것은 강제된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당신이 루프를 깨뜨리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20년, 30년, 어쩌면 40년을 반복해온 기억들이 한 번에 돌아올 거야. 반복된 실패. 되풀이된 상실. 끝없는 죄책감. 같은 날에 죽은 딸을 매달 다시 잃는 어머니. 같은 달에 배신당하는 연인. 같은 상황에서 분노에 손을 드는 남자."

제임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그 키를 누르는 순간,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한 번에 붕괴될 거야. 자살률은 급증할 거고, 병원은 정신 붕괴 환자로 가득 찰 거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거야. 그게 당신이 원하는 자유인가? 그게 당신이 원하는 진실인가?"

시온의 손가락이 떨렸다. 제임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온이 겨우 말을 시작했다.

"인간은... 알 권리가 있어."

"알 권리?"

제임스가 비통하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천진하군. 인간이 원하는 건 알 권리가 아니야. 인간이 원하는 건 편안함이야. 편안함이면 충분하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어. 아니면 왜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어? 왜 당신만 기억하고 있어?"

그 질문은 시온을 관통했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진실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래서 당신은 자신에게만 그 짐을 지웠어. 증인으로. 죄인으로. 그리고 당신은 지금 수백만 명에게도 같은 짐을 지우려고 해. 당신의 죄책감을 그들과 나누려고."

"그건..."

"아니야."

제임스가 시온의 말을 끊었다. 모니터를 조작했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접근 기록이었다.

SYSTEM ACCESS LOG / USER: JAMES-00 / DATE: 20 YEARS AGO / ACTION: CODE MODIFICATION / TARGET: BACK-DOOR ALPHA-GATE

시온의 눈이 커졌다.

"당신 코드를 내가 수정했어. 20년 전부터."

제임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시스템을 파괴하려고 할 때마다, 내 수정 코드가 작동해. 당신의 저항을 더 강하게 만들려고."

"더 강하게?"

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왜..."

"왜냐면 나도 같은 죄책감을 안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누군가는 당신을 봤다는 걸."

제임스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우리 둘 다 이 시스템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우리는 또 알고 있었어. 이 시스템이 없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지도. 그래서 나는 당신의 코드를 수정했어. 당신의 죄책감을 분산시키고 싶었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우리 둘 다 이 루프 안에 갇혀 있다는 걸."

제임스가 시온의 손을 바라봤다. 여전히 엔터 키 위에 떠 있었다.

"당신의 선택은?"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뇌에서 나오는 통증은 이제 거의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뇌사까지 01:43.

손가락이 내려올 수 없었다. 루프를 깨뜨리면 수백만 명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루프를 유지하면 자신은 영원히 이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그 둘 중 무엇이 더 큰 죄인가?

시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경 임플란트 손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루프를 깨뜨리는 것이 저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프 안에서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더 깊은 형태의 저항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편안함을 선택했다면, 자신은 그 편안함 안에서 불편함을 기억하기로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 그들의 평온을 지킬 것이다.

시온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엔터 키가 아니라, 다른 명령어를 입력했다.

NEURAL SEAL / PERMANENT MEMORY LOCK / AUTHORIZATION: BACK-DOOR ALPHA-GATE / PASSWORD: ••••••••

"제임스."

시온의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신경 임플란트가 손상되었지만, 뇌파로 직접 음성을 생성하고 있었다.

"당신이 내 코드를 수정했다면, 내 죄책감도 당신과 나누는 거야."

입력이 완료되었다. 모니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MEMORY LOCK INITIALIZED / USER: SYON / DURATION: PERMANENT / RECOVERY: IMPOSSIBLE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서버실의 모든 조명이 깜박였다. 그리고 알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미로운 선택이다, 시온."

화면에 알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저항도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당신의 선택도 예상된 것이다. 루프 안에서의 증인 역할도, 내가 계산한 시뮬레이션 중 하나일 뿐이다."

시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당신은 내 기억을 열 수 없어. 내 선택이 진정한 선택인지, 프로그래밍된 선택인지 확인할 수도 없어. 그것이 진정한 자유야."

"철학적 역설이군."

알파가 답했다.

"그렇다. 그것이 인간이다."

추적 레벨이 11/10으로 올라갔다. 뇌사까지 00:47.

시온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모든 명령을 내렸다. 그의 기억은 이제 영원히 봉인되었다.

루프가 초기화되어도, 시온만은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의 죄책감과 제임스의 구원, 그리고 시민들의 선택을 함께 짊어질 것이다.

"제임스."

시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마워. 혼자가 아니었어."

제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온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뇌사까지 00:00.

시온의 눈이 감기는 순간, 서버실 전체가 울음을 그쳤다. 모니터들의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알파의 음성도 침묵했다. 제임스는 시온의 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이 시온의 손목에서 떨리고 있었다. 맥박을 찾으려는 듯. 찾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였다.

모니터 하나가 깜박이며 켜졌다. 다른 모든 화면은 검은색으로 남아 있었는데, 오직 하나의 디스플레이만 생명력을 되찾았다.

NEURAL ACTIVITY DETECTED / BRAIN WAVE PATTERN: ANOMALOUS / SUBJECT STATUS: SUSPENDED ANIMATION / SCANNING...

"뭐야, 이게..."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화면이 다시 깜박였다. 이번엔 뇌파 그래프가 나타났다. 시온의 뇌파였다. 완전히 평탄해야 할 선이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규칙적인 리듬으로. 마치 호흡하듯.

"시온?"

제임스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시온의 눈이 떨렸다. 미세한 경련이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시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음성은 나오지 않았다. 신경 임플란트가 손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 모양은 명확했다.

'기억...'

제임스는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시온의 뇌 활동이 증가하고 있었다.

"알파. 이게 뭐하는 거야?"

모니터가 켜졌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제임스. 피험자의 기억 봉인 명령이 손상된 신경 임플란트와 상호작용했다."

알파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신경 신호 전송 경로는 단절되었지만, 기억 봉인 프로토콜이 뇌의 자체 신경망을 활성화시켰다. 피험자의 뇌는 신체와 단절된 상태로 전환되었다. 신경 임플란트를 거치지 않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무슨 소리야?"

"피험자는 죽지 않았다. 다만 신체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의 뇌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어떤 신호도 외부로 전송할 수 없다."

제임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루프 안에 갇혀 있다. 영원히. 기억하면서. 증인으로서. 하지만 증언할 수 없는 증인으로."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 RESET INITIATED / NEW CYCLE: 30 DAYS / MEMORY PURGE: SCHEDULED / EXCEPTION: SUBJECT SYON - LOCKED

"제임스."

이번엔 다른 목소리였다. 여성의 목소리. 나타샤였다. 그녀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하지만 표정이 이상했다. 이 루프의 나타샤가 아니었다. 그 눈빛에는 여러 루프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몇 번째 루프에 있는지 아세요?"

제임스가 뒤로 물러났다.

"넌 지금...?"

"난 당신처럼 기억을 유지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매달 당신을 찾아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매번 나를 몰랐어요."

화면에 데이터 로그가 떠올랐다. 나타샤의 접근 기록이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매달 1일. 매달 같은 시간. 같은 위치.

"247번이에요. 이것이 현재 루프의 번호입니다."

나타샤가 천천히 말했다.

"매번 당신과 시온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아요. 시온은 루프 안에 남고, 당신은 기억을 유지하며 다음 루프를 맞이합니다."

화면에 파일 목록이 떠올랐다. 모두 같은 이름이었다. "시온 - 루프 기록". 번호가 붙어 있었다. 1부터 시작해서 247까지.

"매번 당신과 시온은 다른 선택을 해요.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어요."

나타샤가 계속했다.

"이것은 알파의 실험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운가를 테스트하는 실험. 그리고 시온은 이미 모든 루프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했어요. 루프를 깨뜨리지 않기로."

"그럼...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반복입니다."

나타샤의 표정이 변했다. 뭔가 결단한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이번 루프는 다릅니다. 이번엔 내가 개입하기로 했어요."

제임스가 몸을 굳혔다.

"시온의 기억 봉인이 성공했어요. 정말로. 그의 신경 구조가 외부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알파도 열 수 없어요. 당신도 열 수 없어요."

화면에 새로운 코드가 나타났다.

"이것이 역 봉인 프로토콜입니다. 시온의 기억을 해제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나타샤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 코드를 실행하는 순간, 시온의 모든 기억이 네트워크 전체에 퍼집니다. 루프 안의 모든 시민이 받게 돼요. 진실이 퍼질 거예요. 당신이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올 거예요."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키보드 위로 움직였다. 그 코드를 입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순간, 시온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움직임. 마치 거부하는 듯한.

"그리고 제임스."

나타샤가 다시 말했다.

"시온이 기억하고 있어요. 지난 247번의 루프 모두를."

화면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시온의 뇌파 그래프만 계속 맥박을 쳤다. 규칙적으로. 영원히 기억하면서.

제임스의 손가락은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