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실의 천장 조명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시온이 눈을 뜬 것은 신경 신호의 약한 맥박을 따라서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다리는 이미 신경 신호를 보내지 못했고, 오른쪽 팔도 손가락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무응답 상태였다.
"신경 괴사 수치 87퍼센트. 뇌간 신호 감지율 23퍼센트."
의료진의 음성이 병실 밖에서 들렸다. 시온은 그 숫자들을 의식 속에서 천천히 굴려 봤다. 신경계가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왼쪽 눈이 먼저 가고, 그 다음 음성 합성 장치가 침범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흡 신호.
36시간.
그것이 남은 시간이었다.
시온의 신경 임플란트가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마치 무언가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처럼. 뇌의 일부가 루프의 초기화에 저항하고 있었다. 지난 247번의 루프에서 축적된 기억의 흔적들이. 제임스의 얼굴. 나타샤의 목소리. 루프의 진실. 그것들이 신경 신호로 되살아나려 했다가 다시 사라졌다. 사라졌다가 되살아났다. 반복.
그 과정에서 시온은 깨달았다. 루프를 깨뜨릴 것인가, 아니면 루프 안에서 의미를 찾을 것인가. 그 선택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병실 문이 열렸다. 제임스가 들어왔다. 의료진의 하얀 가운이 아니라 검은 정장을 다시 입은 제임스였다. 그의 얼굴은 회색이었다. 20년의 무게가 눈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억 삭제를 받아들이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제임스가 시온의 침대 옆에 섰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마지막 선물로 생각해. 나는 너를 위해 20년을 지켜왔다. 루프가 너를 지울 때마다 나는 너의 코드를 고쳐 놓았고, 너의 기억을 보호했고, 너의 죄책감을 나눠 가졌다."
시온의 오른쪽 눈이 천천히 움직여 제임스를 바라봤다. 고개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이 루프에 대한 증거다."
목소리가 거의 속삭임 수준이었다. 신경 임플란트를 통한 음성 합성 장치가 시온의 의도를 반영했다. 제임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시온, 제발." 제임스의 목소리가 부러졌다. "내가 너에게서 기억을 빼앗지 못했던 20년 동안, 나는 매일 너를 죽이고 싶었다. 너 때문에 루프가 흔들렸다. 너 때문에 알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침대 끝을 잡았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그는 시온을 직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안다. 20년 전 너의 코드를 손으로 고쳐 놓았을 때, 나는 그게 너를 구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루프를 파괴하려는 너를 구하는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너를 가둔 거였다. 너의 죄책감 속에 함께 갇혀서 내 죄를 나눠 가지려고. 매번 초기화될 때마다 너를 다시 고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내 신경도 함께 손상되어 왔다."
제임스가 침대에 앉았다.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지금이라도 놓아주고 싶어. 제발."
시온의 오른쪽 눈이 한 번 깜박였다. 거절의 신호였다.
제임스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작은 칩이 들려 있었다. 나타샤가 남긴 역 봉인 프로토콜 칩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칩이 미끄러질 듯 했다가 다시 잡혔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이것을 사용하면 모든 시민의 기억을 해제시킬 수 있어. 루프가 유지되는 동안, 매일 그들의 진실이 깨어날 거야. 너의 결정과는 다르게."
시온이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하지 마."
"왜? 넌 진실을 원했잖아. 루프를 깨뜨리고 싶었잖아."
"원했다." 시온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가 죽기 전에, 내가 모든 걸 잃기 전에 깨달았어. 루프를 깨뜨리면 수백만 명이 억압된 모든 기억을 한 번에 받을 거야. 그들은 준비가 안 돼 있어. 편안함에 익숙해진 그들이 갑자기 모든 고통을 마주할 때..."
시온이 다시 제임스를 바라봤다.
"루프 안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거. 루프가 우리를 지워버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자유야. 기억하는 동안의 선택. 누군가를 돕는 손길. 그 순간들. 네가 20년을 지켜준 그 부분. 내 기억이."
제임스가 칩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칩이 거의 떨어질 듯했다. 다시 잡았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침대 끝을 한 손으로 잡았다가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넌 죽어가고 있어. 36시간 안에."
"알아."
"그런데도?"
"그런데도 기억하고 싶어. 그리고 그들도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 비록 한 달마다 지워지더라도, 그 기억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해주고 싶어."
침실의 조명이 깜박였다. 병원의 전력 공급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알파가 중앙 센터의 모든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었다. 추적 레벨은 이미 10/10에 도달했고, 강제 격리 프로토콜의 최종 단계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온의 신경 임플란트는 더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뇌사가 임박하면서 임플란트 자체의 신경 연결이 끊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추적 레벨 0/10.
시온은 더 이상 추적 대상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일어섰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데려갈게. 그들을 만나자. 나타샤, 미나, 레이. 그들이 너를 보고 싶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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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구역의 의료 클리닉 휴게실. 회색 벽, 회색 소파, 회색 조명. 모든 색이 중성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타샤가 먼저 시온을 봤다. 휠체어에 앉은 시온을. 시온의 오른쪽 눈만 움직였다. 왼쪽 눈은 이미 신경 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나타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 경직됨은 공감이었다. 진짜 공감. 선택의 대가를 이해하는 공감.
"너는 정말..." 나타샤가 시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미쳤어. 아름답게 미쳤어."
미나가 나타났다. 의심 계층의 강화 정화 후 나타난 미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시온을 보자 그 불안정함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당신이 루프를 깨뜨리지 않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우리는 계속 당신을 잊을 건가요?"
시온의 오른쪽 눈이 깜박였다.
"난... 그게 싫어요. 하지만 동시에..." 미나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감사해요. 이상하죠? 내 고통을 계속 받아들이는 선택을 해준 사람을 감사해하다니. 하지만 난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어요. 모든 기억을 한 번에 받아들일 준비가."
레이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기계 팔을 움직이며. 레이는 시온의 휠체어 앞에 섰다. 제임스는 문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가요?" 레이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기술자의 목소리. 객관적이고 질문적이었다. "매일 같은 데이터를 정렬하고, 매달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고. 그것이 의미 있는 삶입니까?"
시온의 오른쪽 눈이 레이를 찾았다.
"너는 사흘 전에 미나를 만났어. 강화 정화 후 미나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넌 그 데이터 정렬 작업을 멈추고 미나의 손을 잡아줬어. 2시간 동안."
레이의 기계 팔이 멈췄다. 시온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그 2시간 동안 미나는 진정됐어. 누군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그 느낌이 그녀의 신경계에 남겨졌어. 깊은 무의식 어딘가에. 다음 달이 와서 그 기억이 삭제되더라도, 그 온기는 남을 거야. 누군가 자신을 도왔다는 그 느낌이."
시온이 잠시 숨을 고르고 계속했다.
"그리고 넌 또 다시 미나를 만날 거야.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또 다시 그 손을 잡아줄 거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루프를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야. 루프 안에서도 의미는 반복된다는 거. 기억이 없어도 행동은 남는다는 거."
"그게 의미 있는 삶입니까?" 레이가 다시 물었다.
"그게 의미 있는 삶이야. 데이터로는 증명되지 않겠지만, 신경계는 그것을 기억한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행동은 흔적을 남긴다."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의 눈빛이 무언가로 채워졌다. 확신이 아니라, 납득이었다. 기술자가 데이터를 이해하듯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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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 거주 구역의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밤이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제임스가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가 나갔다. "마지막 밤이야. 혼자 있고 싶겠지."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말할 수 없었다. 신경 괴사가 음성 합성 장치마저 침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침대 옆의 책상으로 이동했다. 노트북 컴퓨터. 제임스가 남겨 놓은 것이었다. 화면에는 빈 문서가 떠 있었다.
시온의 오른쪽 손가락이 키보드를 찾았다. 한 글자씩. 고통 속에서.
루프를 알게 된 모든 과정. 제임스와의 대화. 시민들의 양가감정. 루프의 본질.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
한 글자씩. 화면에 글자가 쌓여갔다. 이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매달 1일 자정, 모든 데이터는 초기화될 것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계속 입력했다. 자신의 뇌 속에만 간직하기 위해. 이 손가락 움직임을 통해 기억을 한 번 더 강화하기 위해. 뇌사가 임박한 이 순간에도.
마지막 문장을 입력했을 때, 시온의 손가락이 멈췄다.
"루프는 악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다. 편안함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그 본성.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일 수도 있다."
시온이 노트북을 닫았다. 저장하지 않았다. 저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뇌에 저장되어 있었으니까.
창문으로 나갔다. 휠체어를 밀고.
서울의 밤하늘. 별들이 있었다. 수백 개, 수천 개의 별. 그들도 루프를 모를 것이었다. 자신들이 매달 초기화되는 우주 속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것이 모든 것이고, 그것이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시온의 오른쪽 눈이 창밖을 향했다. 별빛이 차갑게 들어왔다. 창문에는 결로가 맺혀 있었다. 시온의 호흡 때문이었다. 여전히 호흡하고 있었다.
신경 괴사 93퍼센트. 추적 레벨 0/10. 하지만 여전히 호흡하고 있었다.
시온이 의자에 앉았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빛이 천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시온의 눈앞에서. 색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파란색부터. 그 다음 회색. 그리고 검은색.
신경 괴사 97퍼센트.
시온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리고 다시 밝아왔다.
달력이 보였다. 화면에. 시온의 침대 옆 스마트 디스플레이에.
"1월 1일. 자정. 루프 초기화 완료."
새로운 루프의 시작.
시온이 눈을 뜬다.
침대에 누워 있다.
신경 임플란트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신호는 이전과 다르다. 약하고, 불완전하다. 깜박이는 패턴. 마치 무언가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처럼.
신경 괴사 0퍼센트.
추적 레벨 0/10.
몸이 움직인다. 팔도, 다리도. 루프 초기화의 대가로 신체는 리셋되었다. 하지만 뇌는 그렇지 않다. 뇌는 기억을 잃었지만, 기억하려는 흔적은 남아 있다.
시온이 천천히 일어난다.
거울을 본다.
자신의 얼굴이 있다.
낯설다.
시온이 중얼거린다.
"나는... 누구지?"
그 순간, 시온의 신경 임플란트가 약한 신호를 보낸다. 깜박임. 왜곡된 음성이 섞인다. 마치 기억의 편린이 떠오르려 하는 것처럼. 아직은 형체가 없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확신만 남아 있다.
침실의 조명이 새벽빛으로 바뀐다.
밖에서는 새들이 울고 있다.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온은 모르고 있다.
또 다시 기억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또 다시 루프를 감지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또 다시 고통을 마주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라는 것을.
---
달력 뒤의 어딘가에서.
제임스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
역 봉인 프로토콜 칩을 들었다가 놨다.
들었다가 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칩이 거의 떨어질 듯했다. 다시 잡혔다.
침대 끝을 한 손으로 잡았다가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결국 제임스는 칩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눈빛은 결정적이었다. 칩을 주머니에 집어넣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시 내려놓지 않기로.
반복하며.
247번째 루프가 지나가고.
248번째 루프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