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의 천장 누수자국을 세고 있을 때였다.
엑셀 화면을 닫고 거울을 봤다. 낡은 벽걸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여전히 낯선 남자였다. 서른 살. 편의점 알바생. 이준호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섰고, 판사 앞에서 헌법을 인용했고, 서민준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이 뭔가 아닌 것이라는 의심을 읽어냈다.
그 거울 속 남자의 이름이 정말 이준호일까.
"삼십 년 판사였던 이준호는 여기 없다."
혼잣말을 뱉었다.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법정 가기 전에 한 번 봐야 할 게 있어요."
박민지의 톤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이준호는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
편의점 CCTV가 닿지 않는 골목 카페에서 박민지는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는 엑셀 파일이 떠 있었다. 편의점 직원 15명의 이름, 근무 기간, 부당 공제액이 정렬되어 있었다.
"이것만 해도 아니에요."
박민지가 손가락으로 탭했다. 또 다른 시트로 넘어갔다. 배달 라이더 12명. 이름 옆에는 사고 유형, 회사의 거부 사유, 현재 상태가 기재되어 있었다. 강태진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그 아래 누군가의 이름에는 '자살 시도'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게..."
"강태진이가 네트워크에서 모은 거예요. 플랫폼 Q에 산재 보험 거부당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모이거든요. 12명이 모두 같은 패턴이에요. 사고 났을 때 회사는 '개인사업자니까'라고 책임을 회피해요."
박민지가 또 다른 시트를 넘겼다. 콜센터 상담사 8명. 이혜진의 이름 옆에는 '3년 누적 520만 원 부당 공제'라고 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더 이상 이름이 없었다.
"콜센터는 8명밖에 못 모았어요. 회사 감시가 심해서... 이혜진이가 나머지 사람들한테 말해봤는데, 다들 겁내고 있어요."
마지막 시트를 넘겼다. 가맹점주 5명. 모두 편의점 본사의 불합리한 가맹점 계약금, 상품 판매 강제, 수수료 부담 때문에 빚진 상태였다.
"이 분들이 제일 복잡해요."
박민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는 피해자지만, 이 분들도 피해자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우리를 착취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이준호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총 40명. 편의점, 배달, 콜센터, 가맹점주. 네 개의 카테고리에 흩어진 을들. 각자 다른 이유로 착취당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
"다섯 기업이 모두 여기 연루되어 있어요."
박민지가 정리했다.
"편의점 본사. 배달 플랫폼 두 곳. 콜센터 파견회사. 그리고 가맹점주들이 일하는 개별 매장. 이 사람들을 다 집단소송으로 묶을 수 있어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엑셀을 다시 위로 스크롤했다. 편의점 직원들의 이름을 읽기 시작했다.
김민준, 이수진, 박준혁, 최지윤, 한영미...
"이들이 누구지?"
박민지가 물었다.
"그냥... 이름이 궁금해서."
이준호는 거짓말했다. 진실은 다른 데 있었다. 삼십 년을 법관으로 지내며 본 판결문의 당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피고인 A', '피해자 B'라고 불렸다. 또는 사건 번호로만 존재했다. 그들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다. 법정에서 변론인단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된 정보일 뿐이었다.
지금 이준호 앞에는 40명의 이름이 있었다. 각자의 상황이 기재되어 있었다. 각자의 손실액이 계산되어 있었다.
"이들이... 내가 놓친 을들이구나."
중얼거렸다. 박민지가 그를 바라봤다.
"법관이신 분처럼 말씀하셔요."
농담처럼 웃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
그 밤, 고시원으로 돌아온 이준호는 밤샘을 시작했다. 40명의 정보를 정리했다. 근로계약서, 급여명세서, 카톡 기록, 사진 자료. 모든 증거를 분류했다. 각 사건의 법적 근거를 정리했다. 근로기준법 43조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위반, 계약법상 부당조항.
새벽 3시. 이준호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거울을 봤다.
고시원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그 남자의 얼굴은 더욱 낯설었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턱수염이 자라 있었다. 삼십 년간 법관실의 의자에 앉아 있던 이준호는 여기 없었다.
그 자리에는 편의점 알바생 이준호가 있었다. 배달 라이더들을 만나고, 콜센터 상담사를 위로하고, 가맹점주들을 설득하는 이준호가 있었다.
"너는 누구인가."
거울 속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4시 47분. 김소연이었다.
"이준호님, 지금 깨셨어요? 급한 거 아니고... 다만..."
김소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노동청에서 이상한 지시가 내려왔어요. 편의점 5곳 진정 건에 대해서 조사를 중단하라고. 그리고 당신 신원 정보를 요청했어요. 공식적으로는 '조력인 자격 확인'이라고 했지만..."
이준호의 손가락이 엑셀 마우스를 잡았다. 40명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이게 뭔가 좀..."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통화를 끊었다. 이준호는 다시 엑셀로 돌아갔다. 명부를 완성했다. 40명. 그들의 이름 옆에는 각자의 손실액이 있었다. 총 1억 2,370만 원. 다섯 기업의 체계적인 착취.
새벽 7시. 이준호는 가맹점주들을 만나기로 했다.
—
첫 번째 가맹점주는 50대 남성 이상민이었다. 편의점을 10년 운영했고, 현재 빚은 3,400만 원이었다. 본사의 상품 판매 강제, 수수료 부담, 가맹점 계약금으로 인해 매월 적자 상태였다.
"집단소송에 참여하면 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준호가 설명했다.
"당신도 피해자예요."
이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피해자? 내가 알바생들 급여를 깎는 쪽인데?"
"그것도 본사의 강제 때문이 아닙니까? 본사가 수수료를 높이면 당신은 알바생의 급여를 깎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본사와 알바생 사이의 중간착취자일 뿐입니다."
이상민이 한숨을 쉬었다.
"법리는 맞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다르거든. 내가 본사를 고소하면 가맹점 계약이 해지돼. 그럼 내 빚은 누가 갚아? 내 가족은?"
"소송 과정에서 회사는 계약 해지를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위법입니다."
"법으로 막을 수 없는 게 많아요. 회사는 늘 방법을 찾거든."
이상민은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난 참여할 수 없어. 내 가족을 지켜야 하거든."
—
두 번째 가맹점주는 여성 박지현이었다. 30대 초반, 편의점 운영 5년 차. 그녀는 이상민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참여하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우리 편의점 알바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있어요. 본사 때문에 나도 못 주는 거지만, 그렇다고 내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직원들이 이겨야 나도 이기는 거 같아요."
이준호는 박지현을 바라봤다.
"회사의 보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되겠죠. 어차피 이대로는 망하니까."
—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가맹점주들의 반응은 섞여 있었다. 두 명은 참여하겠다고 했고, 한 명은 거부했다. 최종적으로 5명 중 3명이 집단소송에 동의했다.
이준호는 명부를 업데이트했다. 총 37명. 편의점 직원 15명, 배달 라이더 12명, 콜센터 상담사 8명, 가맹점주 2명.
—
밤이 다시 찾아왔다. 고시원의 책상 위에는 엑셀 파일이 떠 있었다. 37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손실액. 그들의 증거. 그들의 분노.
이준호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바라봤다.
37명.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들.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모두 같은 구조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중얼거렸다. 법관실의 판결문은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았다. 숫자와 법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호가 보는 것은 다른 세계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강태진이었다.
"형, 근데 우리 정말 이길 수 있어?"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강태진, 당신은 이미 이긴 거예요."
"뭐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 12명의 라이더가 같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긴 거예요."
강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만 들렸다.
"법정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이 혼자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형이 법관이신 분 같아."
농담처럼 웃었지만 진지함이 묻어났다.
"우리 정말 이길 수 있어?"
"이길 겁니다."
이준호는 거짓말했다. 이길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회귀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걸.
통화를 끝냈다.
이준호는 다시 엑셀을 켰다. 새로운 시트를 만들었다. 제목: '법정 일정'. 첫 번째 기일은 2주 뒤. 박민지의 편의점 임금 공제 사건. 판사가 박민지의 진정성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준호는 증거 자료들을 정렬했다. 37명의 진정성. 37명의 분노. 37명의 증거.
—
새벽 2시. 고시원의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법무법인 정음의 회의실에서 서민준은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CCTV 캡처 화면이었다. 법원 앞에서 촬영된 이준호의 모습. 그의 얼굴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서민준은 정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저 사진 봤어요?"
"응. 뭔가 있나?"
"네. 뭔가... 이상합니다."
서민준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얼굴의 각도, 눈의 깊이, 입가의 선. 모든 것이 '조력인'이라기엔 너무 노련했다.
"이 사람, 뭔가 이상해요. 일반 을이 아닙니다."
"뭐가 이상한데?"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법관 출신 같은데요?"
침묵이 흘렀다.
"확인해봐. 전국 법관 인명록 다 뒤져봐. 저 얼굴이 어디서 본 얼굴인지."
"알겠습니다."
서민준은 통화를 끝내고 사진을 확대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봤다.
"넌 정말 누구야."
중얼거렸다.
고시원과 법무법인 정음. 같은 밤을 지나는 두 남자. 한 명은 37명의 이름을 보고 있었고, 한 명은 한 명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새벽 3시 47분. 이준호는 명부 작성을 완료했다.
새벽 4시 12분. 서민준은 신원 조사 지시를 내렸다.
법정은 2주 뒤였다.
# 본문
밤이 다시 찾아왔다. 고시원의 책상 위에는 엑셀 파일이 떠 있었다. 37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손실액. 그들의 증거. 그들의 분노.
이준호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바라봤다.
37명.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들.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모두 같은 구조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중얼거렸다. 법관실의 판결문은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았다. 숫자와 법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호가 보는 것은 다른 세계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강태진이었다.
"형, 근데 우리 정말 이길 수 있어?"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강태진, 당신은 이미 이긴 거예요."
"뭐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 12명의 라이더가 같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긴 거예요."
강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만 들렸다.
"법정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이 혼자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형이 법관이신 분 같아."
농담처럼 웃었지만 진지함이 묻어났다.
"우리 정말 이길 수 있어?"
"이길 겁니다."
이준호는 거짓말했다. 이길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회귀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걸.
통화를 끝냈다.
이준호는 다시 엑셀을 켜 새로운 시트를 만들었다. 제목: '법정 일정'. 첫 번째 기일은 2주 뒤. 박민지의 편의점 임금 공제 사건. 판사가 박민지의 진정성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준호는 증거 자료들을 정렬했다. 37명의 진정성. 37명의 분노. 37명의 증거.
다음 날 아침, 이준호는 가맹점주 2명을 만나기로 했다. 편의점 본사의 압박 속에서도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박정수, 이재호였다.
박정수는 강남의 편의점을 5년간 운영해온 45세 남자였다. 이준호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가락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소장님, 제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어떤 의미인가요?"
"본사에서 벌써 연락이 왔어요. 소송에서 손을 빼라고. 그리고..."
박정수는 목을 긁었다.
"그리고?"
"가맹점 계약을 해지하면 어쩌냐고. 제가 5년을 투자했는데, 그걸 날려버리라는 거예요."
이준호는 박정수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공포였다. 순수한 공포.
"본사는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뭘 줬다니요?"
"당신이 당신의 직원들에게 얼마나 공제했는지 알아요?"
박정수의 얼굴이 굳었다.
"월 평균 120만 원. 당신은 본사 지시에 따라 직원들의 급여에서 공제했어요. 통신비, 장비비, 판매 부진 페널티. 모두 불법이었어요."
"그건... 본사에서 하라고 한 건데요."
"네. 그래서 당신도 피해자예요. 동시에 가해자기도 해요.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선택은..."
이준호는 잠시 멈췄다.
"본사가 당신을 버린다면, 당신은 어쨌든 손해를 입습니다. 하지만 본사를 고소한다면, 당신은 최소한 당신의 손해를 회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만약..."
"만약 당신이 소송을 포기한다면?"
이준호가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직원들을 계속 착취할 거예요. 당신도 본사의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을의 나라'라는 거예요. 모두가 누군가에게 짓눌려 있고, 그 누군가가 또 누군가를 짓누르는.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싸우는 거예요."
박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해봐요. 당신의 직원들은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본사를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준호는 박정수에게 명함을 건넸다.
"결정은 당신 몫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이기면 당신의 직원들도 이길 겁니다."
박정수는 명함을 들었다. 손가락이 그제서야 멈췄다.
---
이재호와의 만남은 더 복잡했다. 그는 이미 본사에 항의했다가 질렸다는 투였다.
"소장님, 저는 이미 포기했어요. 5년 더 하면 가맹점비 다 낼 거고, 그 다음엔 모르겠지만."
"당신은 지금 월 얼마를 버나요?"
"600만 원대."
"본사 지시 공제가?"
"160만 원."
"그럼 당신 수익은?"
"440만 원."
이준호는 계산했다. 160만 원 × 12개월 = 1920만 원. 5년이면 9600만 원.
"당신은 5년간 9600만 원을 불법으로 공제당했어요."
"뭐하는 짓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의 회계장부가 있잖아요."
"회계장부는 본사에 다 올려요."
"그렇다면 당신은 본사의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재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이 소송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그 시스템 속에 갇혀 있을 겁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이겨봤자 뭐하는 건데. 본사는 강하고 우린 약하니까."
이준호는 이재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을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당신의 직원은 몇 명인가요?"
"5명."
"그 5명이 당신을 믿나요?"
이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소송에 참여하면, 당신의 5명 직원도 함께 소송에 참여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위에는 본사가 있고, 본사 위에는 더 큰 본사가 있어요. 그들이 당신을 착취하는 이유는 당신이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싸우면, 당신의 직원들도 싸우고, 그 모든 을들이 모이면..."
이준호는 말을 멈췄다.
"그럼 당신들은 더 이상 약하지 않습니다."
이재호는 이준호를 오래 바라봤다.
"소장님, 당신 정말 변호사예요?"
"법정 조력인입니다."
"뭐가 다른데?"
"변호사는 돈이 있는 사람들을 대리합니다. 조력인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재호는 웃음이 나왔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럼 당신도 돈이 없겠네."
"네."
"돈이 없는데 왜 이러는 거예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법관 시절의 정의감? 회귀의 의미? 죄책감?
"생각해봐요. 그리고 당신의 직원들과 얘기해봐요."
---
고시원으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였다. 이준호는 거울을 봤다.
낡은 거울. 그 속에 비친 얼굴은 서른 살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하지만 거울을 보는 눈은 여전히 대법관이었다. 그 모순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1화에서 처음 회귀했을 때 느꼈던 '낯선 얼굴'. 지금 그 낯선감은 더 심해졌다. 왜냐하면 지금 이준호는 37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분노, 그들의 공포, 그들의 희망. 모두가 거울 속에 반사되어 있었다.
"넌 정말 누구니."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형, 가맹점주 형들도 참여한대요?"
"네."
"그럼 우리 정말 이기는 거 아니야?"
"모르겠어요."
"뭐가 모르냐고. 우리 37명인데."
"37명이 맞아요. 하지만 법원이 우리를 인정할지는 모르겠어요."
"법관이신 분이 그런 말씀을?"
박민지가 웃었다. 이준호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얼굴이 굳어진다.
"박민지, 나 정말 법관 아니야."
"알았어. 농담이야."
하지만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박민지는 이미 이준호를 법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강태진도. 이혜진도.
그들의 눈에 비친 이준호는 '을'이 아니었다. 그는 '을의 편에 선 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준호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새벽 2시. 고시원의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이준호는 37명의 명부를 다시 정렬했다. 편의점 알바생 15명, 배달원 12명, 콜센터 상담사 8명, 가맹점주 2명.
마지막 줄에 그는 이름을 입력했다: '이준호, 법정 조력인'
그리고 엔터를 눌렀다.
37명이 아니었다. 38명이었다.
---
법무법인 정음의 회의실에서 서민준은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CCTV 캡처 화면이었다. 법원 앞에서 촬영된 이준호의 모습. 그의 얼굴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서민준은 정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응."
"저 사진 봤어요?"
"봤다. 뭔가 있나?"
서민준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얼굴의 각도, 눈의 깊이, 입가의 선. 모든 것이 '조력인'이라기엔 너무 노련했다.
"네.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데?"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법관 출신 같은데요?"
침묵이 흘렀다. 서민준은 그 침묵이 정현우의 확신이라고 느꼈다.
"확인해봐. 전국 법관 인명록 다 뒤져봐. 저 얼굴이 어디서 본 얼굴인지."
"알겠습니다."
서민준은 통화를 끝내고 사진을 확대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봤다. 눈썹의 각도, 광대뼈의 높이, 입가의 미세한 움직임.
"넌 정말 누구야."
중얼거렸다. 컴퓨터 화면이 밤빛을 반사했다.
---
고시원과 법무법인 정음. 같은 밤을 지나는 두 남자.
한 명은 38명의 이름을 저장했다. 그 파일의 제목은 '집단소송_명부_최종본'이었다.
한 명은 한 명의 얼굴을 검색했다. 법관 인명록.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 신원 조회.
새벽 4시 12분. 이준호는 명부 작성을 완료했다. 파일을 저장했다. 백업을 만들었다. 클라우드에 올렸다.
새벽 4시 47분. 서민준은 검색 결과를 받았다. 그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을 때,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준호. 삼십 년 경력, 대법관 이준호."
서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현우 회장님."
그는 전화를 눌렀다.
"확인됐습니다. 저 사람은... 법관이 맞습니다."
"이름?"
"이준호. 삼십 년 경력의 대법관이었습니다. 3년 전 대법원에서 명예퇴직했고..."
"지금 뭐하고 있어?"
"그건... 기록이 없습니다. 3년 전 이후로는."
정현우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럼 저 남자는 지금 뭐 하는 거야?"
서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이준호의 얼굴 사진 위에서 멈췄다.
"조사를 계속해. 저 남자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든 걸 알아내."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서민준은 여전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준호의 얼굴. 법관의 눈. 을의 옷.
"대법관이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새벽 5시. 법무법인 정음에서는 신원 조사 특별팀이 꾸려졌다. 이준호라는 인물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 이준호는 고시원의 침대에 누웠다. 38명의 명부. 2주 뒤의 법정. 그 사이에 일어날 모든 것들.
그는 천장을 봤다. 낡은 천장. 곰팡이 자국. 물 새는 흔적.
"정체가 드러나면 끝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을들의 신뢰는 한 번 깨지면 회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체가 드러나든 안 드러나든, 법정은 2주 뒤에 시작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