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고시원의 창문으로 여름 햇빛이 쏟아졌다. 이준호는 이혜진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안녕하세요. 저 콜센터 상담사인데, 박민지 씨 소송 소식 들었어요. 저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데... 혼자가 아니었구나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메시지 아래에는 급여명세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화면을 확대했다.

기본급 170만 원. 성과급 120만 원. 그리고 공제 항목들. 통신비 15만 원, 장비비 8만 원, 고객만족도 미달 페널티 35만 원. 최종 수령액 242만 원.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같은 날 오후, 강남역 근처 작은 카페에서 이혜진을 만났다. 서른 초반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닳아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 입가의 주름, 한 손으로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의 떨림.

"감사합니다. 이렇게 만나줘서."

이혜진이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제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지난 3년간 콜센터 상담사로 일했어요. 회사는 저희를 '개인사업자'라고 부르고, 성과급 중심의 임금 체계를 운영해요."

이준호가 노트북을 켰다.

"성과급이라는 게 정확히 뭔가요?"

"답변 시간, 고객만족도, 이탈률... 이런 것들을 점수로 환산해서 월급을 정해요. 한데 그 기준이 완전히 일방적이거든요. 회사가 기준을 바꾸면, 우리가 받는 돈이 확 줄어들어요."

이혜진이 핸드폰에서 사진들을 꺼냈다. 콜센터 내부의 모니터링 카메라, 직원들이 화면을 노려본 모습, 그리고 지난 6개월간의 급여명세서 이미지들. 이준호는 하나씩 살폈다.

"이 수치들 보세요. 기본급은 같은데 성과급이 매달 다르고, 공제 항목도 계속 생겨나요. 여름엔 '냉방비'라고 해서 10만 원을 뺐고, 가을엔 '난방비 선납'이라고 해서 12만 원을 뺐어요. 그런데 우리가 낸 돈으로 난방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이준호가 엑셀을 띄웠다. 지난 2주간 입력해온 데이터들. 편의점 5곳, 배달 플랫폼 2곳, 그리고 이제 콜센터.

"이 공제들이 정당한가요?"

이혜진이 계약서를 건넸다. 이준호는 한 문장씩 읽어나갔다.

'상담사는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계약을 체결하며, 회사는 필요시 공제 기준을 조정할 수 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 문구는 문제가 많습니다. 개인사업자라는 명칭은 실제 근로 관계를 은폐하는 수단입니다. 업무 시간이 지정되어 있나요?"

"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반드시 근무해야 해요. 지각하면 페널티 있고요."

"복장 규정은?"

"있어요. 회사 유니폼 입어야 하고, 화장과 머리까지 지정해요."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근로자입니다.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는 자신의 업무 시간, 방식, 복장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혜진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제가 근로자라는 거예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회사가 당신을 개인사업자로 부르는 것은 임금, 4대보험, 퇴직금 같은 의무를 회피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장 도급'이라고 부릅니다."

이준호가 계약서로 돌아갔다.

"공제 조항도 문제입니다. '필요시 공제 기준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방적 변경권입니다. 근로기준법 제43조는 '임금 공제는 법령에 의하거나 당사자가 합의한 경우만 가능하다'고 규정합니다. 회사 마음대로 기준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요."

이혜진이 물을 마시는 손이 떨렸다.

"그럼 그동안 뺀 돈들은?"

"반환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이준호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명세서의 각 항목을 더했다. 6개월간 부당 공제액 87만 원. 3년이면...

"약 520만 원입니다."

이혜진의 몸이 경직되었다. 숨이 멎은 듯했다. 손가락이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쥐더니 점점 경직되어갔다. 고개를 묻으며 어깨가 떨렸다. 처음엔 눈물이 흘렀고, 이내 목이 메였다.

"저 혼자만 그런 줄 알았어요. 이상한 거 알면서도... 다른 애들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이준호가 노트북을 돌렸다. 엑셀 시트에 입력되어 있던 데이터를 가리켰다.

"보세요."

편의점, 배달 플랫폼, 콜센터. 각 기업의 공제 항목들이 화면에 나열되었다. 이혜진이 화면을 자세히 봤다.

편의점: 가맹점 비용 월 50만 원 이상 배달 플랫폼: 플랫폼 유지비 월 30만 원 콜센터: 장비비, 통신비 월 25만 원

"어? 이게..."

이혜진의 눈이 커졌다.

"우리 회사 항목이랑 똑같네?"

"네. 구조가 동일합니다. 모두 근로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근로자에게 전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근거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준호가 또 다른 탭을 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스크린샷들. '콜센터 착취 사례', '배달 라이더 산재', '편의점 알바 공제' 같은 제목들이 화면을 채웠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아실 거 같은데... 정말로 조직적이에요. 다섯 개의 기업이 거의 동일한 착취 구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혜진의 눈이 흐려졌다.

"근데... 회사와 싸울 수 없어요."

목소리가 작아졌다.

"왜요?"

"생계가 불안정해서요. 내일 월급이 없으면 전셋값을 못 내요. 그리고..."

그녀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회사에서 저희를 감시해요. 휴게실에 카메라가 있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누가 누구와 얘기하는지 다 보고 들어요. 저 혼자 회사를 고소했다는 게 알려지면, 저는 끝이에요."

이준호가 물었다.

"누군가 이미 그렇게 됐나요?"

이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5월에 김은주라는 상담사가 있었어요. 그 애가 공제가 이상하다고 얘기하다가... 얼마 뒤에 우울증이 심해져서 휴직했어요."

"우울증?"

"회사에선 '자발적 휴직'이라고 했는데...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아요. 그 애가 회사에서 받는 압박이... 정말 심했거든요."

이준호가 다시 물었다.

"그 압박이 뭐였어요?"

"성과급이 계속 깎이는 거. 그리고 회사가 기준을 계속 바꾸니까 왜 줄어드는지도 모르고. 매달 월급이 달라지니까 불안정하고. 그러다 보니 정신이 안 좋아진 거 같아요."

이준호가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엑셀 파일의 세 줄. 편의점, 배달, 콜센터.

그리고 이제 보였다. 네 번째 패턴.

산재 은폐.

강태진의 친구 정훈이. 배달 사고 후 치료비 부담으로 자살했다는 말. 이혜진의 동료 김은주. 회사의 압박으로 인한 우울증.

"산재 처리는 어떻게 돼요?"

"산재요?"

"네. 직업병 같은 것. 감정 노동으로 인한 정신 건강 문제라든지."

이혜진이 고개를 저었다.

"회사에서 절대 산재로 처리하지 않아요. 모두 '개인의 건강 문제'라고 해요. 그래야 회사가 책임을 안 지니까."

이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김은주는 산재 청구를 했나요?"

"아뇨. 그냥 휴직하고 나중에 퇴사했어요."

"왜 청구하지 않았어요?"

"몰라서 아니면... 할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겠어요."

이준호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검색했다. '콜센터 우울증', '콜센터 산재', '감정 노동 후유증'.

게시물이 수십 개 나왔다.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회사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 보험으로 처리하라고 한다. 산재 청구를 시도하면 눈엣가시 취급을 받는다.

이준호가 이혜진을 봤다.

"당신의 동료들 중에 정신 건강 문제로 휴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돼요?"

이혜진이 생각했다.

"이번 달만 해도... 3명이요."

"3명?"

"네. 그리고 작년에는 더 많았어요. 한 달에 4, 5명씩..."

이준호가 엑셀로 돌아갔다. 새로운 줄을 추가했다.

편의점: 저임금 장시간 근무로 인한 신체 질환 → 산재 신청 시 가맹점주 책임 회피 배달 플랫폼: 교통사고 및 폭행 피해 → '개인사업자' 명목으로 산재 거부 콜센터: 감정 노동 누적으로 인한 정신 질환 → 회사 기준 변경으로 추가 압박

세 업종, 세 가지 은폐 방식. 하지만 모두 같은 결과였다. 근로자의 피해를 외면하고, 회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

그리고 강태진이 언급한 라이더 정훈이의 사망. 배달 플랫폼의 산재 은폐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준호가 말했다.

"이혜진 씨, 저한테 도움을 줄 수 있나요?"

"뭘 어떻게요?"

"당신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부당 공제와 임금 미지급. 그리고 산재 은폐. 하지만 당신 혼자가 아니라 다른 상담사들과 함께요."

이혜진이 떨렸다.

"다른 애들? 그럼... 회사가 알면..."

"알 거예요. 하지만 당신 혼자가 아니면 회사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요."

"정말요?"

"네. 부당 해고나 보복은 노동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감정 노동도 노동입니다. 당신이 고객에게 웃음을 팔고, 분노를 삼키고, 목소리를 상품화했어요. 그것은 임금으로 계산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받은 것은 정당한 댓가가 아니에요."

이혜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움켜쥐고 있었고, 목이 메이며 어깨가 떨렸다.

"저도... 싸울 수 있나요?"

"네."

이준호가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매일매일 회사의 부당함에 저항하면서. 이제 그 싸움을 법으로 표현하는 거일 뿐입니다."

이혜진이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3초, 5초, 10초. 마침내 말했다.

"다른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몇 명이 함께할지..."

이혜진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월급이 끊길 수도, 감시의 눈초리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바뀌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520만 원. 그 숫자가 주는 희망.

"시간이 필요하나요?"

"네. 회사에서 감시하고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휴게 시간에 한두 명씩, 아주 자연스럽게..."

"누구부터 접근할 생각이에요?"

"김은주 이후로 휴직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 애들이 제일 분노가 클 것 같아요. 그리고 신입들... 아직 회사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애들이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이준호가 명함을 건넸다. 고시원 주소와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직업란에는 '법정 조력인'이라고 썼다.

"1주일 안에 연락 주세요. 그 사이에 저는 더 많은 증거를 모으겠습니다."

이혜진이 명함을 받았다. 손가락이 종이를 주름잡았다.

"감사합니다."

카페를 나온 이준호는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엑셀을 켰다. 다섯 기업의 착취 구조를 다시 정렬했다.

편의점 가맹점주 착취 시스템 → 배달 플랫폼 라이더 착취 시스템 → 콜센터 상담사 착취 시스템.

세 업종, 세 가지 형태.

하지만 같은 원리.

임금 공제. 위장 도급. 산재 은폐.

이준호가 새로운 탭을 열었다. 콜센터 상담사들을 파견하는 아웃소싱 회사들을 검색했다.

'케이에스 파견' '바이탈 아웃소싱' '인력풀 솔루션'...

수십 개가 나왔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회사를 찾았다. 바이탈 아웃소싱. 전국 30개 콜센터에 인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그 회사의 임원진을 검색했다. CEO, CFO, 법무이사...

마우스가 멈췄다. 바이탈 아웃소싱의 고문 명단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CEO 사진. 정현우. 나이 55세.

검색 결과를 스크롤 했다. 정현우의 경력. 법무법인 정음의 고문. 서민준의 상사.

그리고 더 아래. 정현우와 서민준이 함께 찍은 사진. 회의실에서. 노트북 화면에 뭔가가 보였다.

'이준호 추적'

이준호가 화면을 더 확대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김소연이었다.

"이준호 씨, 긴급입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뭐가요?"

"법무법인 정음의 서민준 변호사가 노동청에 공식 문의를 보냈어요. '이준호라는 인물에 대한 신원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경직되었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가슴이 철렁거렸다.

"신원 조사?"

"네. 그 사람이 뭔가 의심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단순한 조력인이 아니라고..."

이준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핸드폰을 내렸다. 화면으로 돌아갔다. 정현우와 서민준이 함께 찍은 사진. 노트북 화면의 텍스트가 명확했다.

'이준호 추적'

법무법인 정음과 바이탈 아웃소싱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민준은 지금, 이준호의 정체를 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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