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고시원 방 3평. 이준호는 침대 끝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화면에 950명의 이름이 떠 있었다.

손이 떨렸다. 클릭. 다시 클릭. 스크롤. 멈춤.

950명.

회귀 후 14년간 판사로서 본 수백 건의 판례들. 2010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근로자에게 일방적으로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는 임금 착취다. 그 판결이 낳은 후속 판결들, 수정 판결들, 확대 해석들.

모두 무시당하고 있었다.

950명이 지금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시간을 더 화면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한 명 한 명을 클릭했다. 이름을 읽었다. 나이를 읽었다. 피해액을 읽었다.

950명은 숫자가 아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언니들을 만났어요. 다섯 분점 중에서 세 분점 대표들이 오기로 했습니다."

"지금?"

"네. 제가 말씀하신 카페에서. 근데..."

음성이 흔들렸다.

"들어보니까 우리 편의점만 이런 게 아니라더라고요. 다른 회사 편의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대요."

"확인됐어. 내가 지금 카페로 간다."

강남역 근처 카페. 이준호가 도착했을 때 박민지는 이미 세 명의 편의점 직원을 앉혀놨다. 모두 20대 중반. 피곤한 얼굴들. 눈 아래 다크서클이 검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분이 제 얘기를 들어주신 분이에요."

박민지가 소개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처음과 달리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근데 말이에요."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편의점 B의 직원 유경아였다.

"저희 점장은 이런 공제가 있다는 걸 모르래요. 본사에서 통보한 거라고만 해요."

"그럼 누가 지시했어요?"

"그건 점장도 모른대요. 그냥 POS 시스템에 들어가 있었대. 자동으로 공제되는 거."

이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자동 공제. 시스템 설계. 누군가의 의도.

"본사에 문의했어요?"

"문의? 저 혼자? 그게 돼?"

유경아의 목소리가 끊겼다.

"다들 알긴 알아요. 이상한 거. 근데 문제 제기했다가 시급 깎이거나 쫓겨날까봐..."

편의점 C의 직원 민준호가 덧붙였다.

"저한테는 이미 한 번 있었어요. 손상비 때문에 뭐라고 했더니 다음 주 일정을 다 빼버렸어요."

침묵이 흘렀다. 편의점 직원들의 공포는 구체적이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펼쳤다.

"봐봐. 이거."

엑셀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다섯 기업의 공제 항목과 금액들.

"이건 개별 사건이 아니야. 네트워크야."

박민지가 화면을 들었다.

"네트워크?"

"같은 본사 체인이라도 이렇게 정확하게 동일한 공제 항목을 쓰는 경우는 없어. 특히 금액까지 5만 원 이내의 편차로.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시스템이야."

이준호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더 봐봐."

다음 탭을 열었다. 대법원 판례 검색 결과.

"2010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근로자에게 일방적으로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는 임금 착취로 본다. 이 판결이 나온 지 14년이 지났어. 14년 동안 이 판례는 수백 건의 후속 판결로 확대됐어. 근데도 지금도 똑같은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건..."

이준호가 화면을 내렸다.

"누군가 이 판례들을 무시하라고 지시한 거야."

유경아가 박민지를 봤다.

"이게 이길 수 있는 건가요?"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야."

이준호가 말했다.

"바꾸는 거야. 이 시스템을."

고시원으로 돌아온 이준호는 밤새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졌다.

알바생 커뮤니티, 배달 라이더 커뮤니티, 노동자 게시판.

"손상비 공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편의점에서 미납금 떼간다고 하는데 법적 근거가 있나요?" "배달 플랫폼 차량유지비 공제가 합법인가요?"

게시물은 수십 개가 아니었다. 수백 개였다.

각 게시물의 댓글 섹션에는 거의 동일한 패턴의 답글들이 있었다.

"저도 그래요. 같은 편의점 체인이면 다 똑같대요." "우리 회사도. 다른 지점 친구들한테 물어봤는데 똑같은 공제예요." "플랫폼 바꿔도 똑같은 항목으로 공제돼요."

이준호는 스프레드시트를 새로 만들었다.

"카르텔 피해자 발굴 현황."

한 시간에 50개. 두 시간에 100개. 새벽 4시, 200개.

편의점 프랜차이즈 A 체인: 15개 지점 확인. 모두 동일 공제. 편의점 프랜차이즈 B 체인: 12개 지점 확인. 모두 동일 공제. 편의점 프랜차이즈 C 체인: 10개 지점 확인. 모두 동일 공제.

배달 플랫폼 Q: 300명 이상의 라이더. 동일한 비용 공제 패턴. 배달 플랫폼 R: 280명 이상의 라이더. 동일한 비용 공제 패턴.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합계.

편의점: 37개 지점. 추정 피해자 370명 이상. 배달 플랫폼: 580명 이상.

총 950명 이상.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강태진에게 전화했다.

"내일 만나는 라이더들 몇 명이야?"

"저 포함 다섯 명이요. 근데..."

강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명이 말을 안 들어요."

"뭐?"

"정훈이 친구 중에 한 명이 있는데, 그 친구가 소송 같은 건 하지 말라고 자꾸 반대해요. 일 잃을까봐서. 차라리 조용히 다시 다른 플랫폼으로 가는 게 낫대요."

이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편의점 직원들은 본사 공제 구조에 저항했다. 하지만 라이더들은 다르다. 플랫폼 시스템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차이가 을 세계 내부의 갈등을 만들고 있었다.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니야. 네트워크야. 다른 플랫폼으로 가도 똑같은 공제를 당해. 그 친구도 결국 같은 덫에 빠진다는 뜻이야."

"그걸 어떻게 설득해요?"

"직접 만나자. 내일 카페에서."

강남역 카페. 다음 날 오후 3시.

이준호는 강태진과 함께 도착했다. 라이더 네 명이 이미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손을 모으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꾸 움직였다. 불안감.

"정훈이 친구, 김준석입니다."

강태진이 소개했다.

"이 분이 제 얘기를 들어주신 분이에요."

이준호가 앉았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봐?"

김준석이 입을 열었다.

"좋은 마음은 알겠는데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플랫폼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아세요? 개인사업자예요. 우리 같은 사람은 소비 가능한 자원일 뿐이에요. 소송 같은 걸 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려져요. 그럼 생계가 끊겨요."

"지금도 생계가 끊길 위험에 있지 않아?"

"네?"

"차량유지비로 매달 80만 원씩 떼가고 있잖아. 사고 나면 보험도 없고.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거야? 5년? 10년? 결국 사고로 끝나는 거야."

김준석이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이 일이 끝나길 원해요."

"일이 끝나는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죽는 거고, 하나는 바꾸는 거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준석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향했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폈다.

"이거 봐봐."

스프레드시트를 띄웠다. 950명 이상의 피해자 데이터.

"너 혼자가 아니야. 여기 950명 이상이 지금 너랑 똑같은 공제를 당하고 있어."

강태진이 화면을 봤다.

"이게... 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에요?"

"응. 그리고 여기 950명 중에 내가 아는 라이더도 있을 거야."

이준호가 화면을 가리켰다.

"왜 아무도 말 안 했을까? 이렇게 많은데."

김준석의 목소리가 작았다.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 한 명의 이름을 클릭했다. 또 다른 이름을 클릭했다. 스크롤을 내렸다. 다시 올렸다.

950명.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배달 플랫폼 R, 라이더, 김정훈. 정훈이.

"정훈이도 여기 있네요."

목소리가 떨렸다.

이준호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이건 개별 사건이 아니야. 다섯 개 기업이 같은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들이 다 한 건으로 모이면?"

"집단소송?"

"응. 다섯 개 기업을 피고로 해서 동시에 진행하는 거야."

"집단소송?"

"개별 소송으로는 이길 수 없어. 비용이 너무 크고, 회사는 법무팀이 있고, 우리는 없으니까. 근데 950명 이상이 같은 항목으로 같은 방식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면? 이건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착취야. 이건 법원도 무시할 수 없어."

김준석이 화면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블랙리스트에?"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어. 너랑 정훈이 같은 사람들. 그게 뭐 하는 짓인지 알아?"

이준호가 노트북을 더 가깝게 옮겼다.

"2010년 대법원 판결을 보면, 이런 식으로 근로자에게 일방적으로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는 임금 착취로 봐. 근데 14년이 지났어도 이렇게 되고 있다는 건 뭘까? 누군가 이 판례를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 거야."

강태진이 물었다.

"그럼 이기면 어떻게 돼요?"

"일단 공제 부분이 돌아와. 그리고 회사는 이런 식의 공제를 못 하게 돼. 가장 중요한 건, 950명의 데이터가 법원에 기록된다는 거야. 그럼 다른 라이더들도, 편의점 직원들도 보고 따라올 수 있어."

이준호가 노트북을 덮었다.

"너 혼자가 아니야.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김준석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의 눈이 강태진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이준호를 봤다. 긴 침묵 끝에 목소리가 나왔다.

"생각해 볼게요."

고시원 방으로 돌아온 이준호는 노동청 홈페이지를 열었다.

법정 조력인 등록 신청 페이지.

"법정 조력인은 변호사가 아니면서도 민사소송에서 의뢰인을 대리하여 법정에 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준호는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 이준호. 주소: 고시원 3층 302호. 직업: 편의점 아르바이트원. 학력: 대학 중퇴.

마우스가 "제출" 버튼 위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회귀 전, 대법관으로서의 자존심이 현재의 무일푼 알바생 신분과 충돌했다. 거짓말이었다. 명확한 거짓말.

그는 숨을 참았다. 손이 떨렸다.

그리고 클릭했다.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이준호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시간을 더 화면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950명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한 명 한 명을 생각했다. 그들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들의 피해액을 계산했다.

950명이 밀어붙였다.

한 시간 뒤, 강남역 근처 오피스텔.

법무법인 정음의 회의실.

서민준이 노트북을 켰다.

"박민지, 강태진, 이혜진. 세 명 모두 노동청 진정을 넣었고, 이제 개인 상담을 받고 있는 상태다."

법무팀 부장 이태호가 물었다.

"상담자가 누구?"

"그게 문제예요."

서민준은 화면을 들었다. 신원조회 결과가 떠 있었다.

"이름만 있고 신원이 안 떠요. 고시원 주소, 아르바이트원. 그런데 노동법을 엄청 깊게 알고 있다고. 판례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절차를 완벽하게 안대요."

이태호의 얼굴이 굳었다.

"변호사?"

"아니에요. 법정 조력인 신청한 지 오늘 하루예요. 근데..."

서민준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다섯 개 기업 피해자 950명 이상을 한 건으로 엮으려는 것 같아요. 노동청에 집단소송 관련 서류를 미리 요청했어요."

이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단소송?"

"네. 규모로는 역대 최대예요."

이태호는 창밖을 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정현우 회장한테 지금 당장 연락해."

서민준은 노트북 화면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신원조회 버튼을 다시 눌렀다.

화면이 로딩 중이었다. 로딩 바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서민준이 중얼거렸다. 손이 떨렸다.

로딩 바가 멈췄다.

신원 불일치.

대법관 경력 기록 없음.

이준호라는 이름은 공란이었다.

"이태호 부장님."

서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사람, 신원이 안 맞아요."

이태호가 돌아봤다.

"뭐?"

"고시원 주소인데 법정 조력인 신청은 됐고, 노동청 진정 과정에서 계속 나타나고... 근데 신원이 없어요. 대법관이라는 기록도 없고, 아르바이트원이라는 기록도 없고."

이태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현우 회장이야?"

"네. 방금 전화 받으셨어요."

"뭐라고 했어?"

"지금 오신대요. 30분 안에."

서민준은 노트북 화면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신원조회 버튼을 또 눌렀다.

같은 결과가 떴다.

신원 불일치.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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