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진의 목소리는 진정한 적이 없었다. 노동청 복도에서 처음 들었을 때도, 지금 고시원 방 안에서도.
"사고 나던 날 오전 11시 52분이었어요."
그는 달력을 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으며 정확한 시각까지 재현했다. 이준호는 침대 끝에 앉아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강태진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강남역 근처 신호등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옆 차선 택시가 갑자기 끼어들다가 저한테 부딪혔어요. 제 잘못이 아니었는데, 경찰도 택시 기사 과실이라고 했고."
"그 이후는?"
"플랫폼에 사고 보고를 했죠. 그럼 배달 사고 처리팀이 있어서 거기서 알아서 할 줄 알았어요."
강태진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펼쳤다. 배달 플랫폼 Q라는 회사의 로고가 인쇄된 용지였다. 이준호는 그것을 집어 들고 글자를 따라갔다.
"개인사업자인 라이더 님께서 제3자의 과실로 인한 사고의 경우, 당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개인보험에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이준호의 턱이 경직되었다.
"이거 뭐 하는 짓입니까? 당신이 직접 회사에 연락했습니까?"
"네, 했어요. 사고 당일 저녁에 전화했거든요. 그때 상담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우리 직원이 아니라 개인사업자니까, 당신이 든 보험으로 처리하세요. 우리는 배달 건당 수수료만 가져가는 중개 플랫폼이라고."
"그 전화 녹음이 있습니까?"
강태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당신의 계약서를 보여주세요. 정확히 뭐라고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강태진이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스크린샷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첫 장을 확대해서 보여줄 때,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배달원 가입 약관** **제1조 서비스 이용 관계** 이 약관에서 정의하는 배달원(이하 "라이더")은 당 플랫폼을 통해 배달 건을 수주하는 개인사업자입니다.
"여기까지는 개인사업자로 명시하고 있는데…" 이준호가 계속 스크롤하도록 손짓했다.
다음 장에는 다른 내용이 있었다.
**제3조 배달 일정 관리** 라이더는 당 플랫폼이 지정한 배달 구간에서만 활동하며, 지정된 시간 내 배달을 완료해야 합니다. 미달 시 다음 달 배달 건수 배정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지정된 시간? 이건 뭡니까?"
"평일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는 무조건 대기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안 하면 건수가 줄어요. 사실상 시간 관리거든요."
이준호가 다음 장을 열었다.
**제5조 배달 기준 및 처리** 라이더는 배달 중 발생한 음식 손상, 고객 불만에 대해 배상책임을 집니다. 또한 배달 완료 시간이 초과된 경우 건당 2,000원의 패널티를 부과합니다.
"패널티요?"
"네. 시간 초과되면 수입에서 깎아요. 그런데 여기서 웃긴 게…" 강태진이 다시 스크롤했다. "개인사업자라고 했는데, 일할 때는 회사 지정 복장을 입어야 하고, 회사 지정 배낭을 써야 하고, 회사 정책을 어기면 계정 정지를 당해요. 이건 뭐 근로자 맞는 거 아닙니까?"
이준호는 침대에 다시 앉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신 말고 다른 라이더들은?"
"제 주변에 사고 난 사람들이 있어요. 정훈이, 민준이, 준석이. 모두 같은 플랫폼에서 일했는데, 사고 처리는 거의 같았어요."
이준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구체적으로 뭐가 같았습니까?"
강태진이 심호흡했다.
"정훈이는 작년 여름에 강남역 근처에서 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부러졌는데, 플랫폼에 연락하니까 '당신은 개인사업자니까 개인보험으로 처리하세요'라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민준이는 강동구에서 추락 사고를 당했고, 준석이는 신호 위반 차량과 충돌했는데, 셋 다 똑같은 답변을 받았어요."
"다른 플랫폼에서도?"
"네. 민준이는 R 플랫폼, 준석이는 S 플랫폼에서 일했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친구 종호는 T 플랫폼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역시 같은 식이었어요."
이준호의 몸이 굳었다. 강태진이 계속했다.
"정훈이 얘기를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강태진이 스마트폰의 사진 폴더를 열었다. 병원 영수증이 보였다. 수술비, 입원비, 물리치료비. 총액은 천만 원을 넘었다.
"정훈이는 보험금이 5백만 원 정도 나왔어요. 근데 이게 다 떨어졌고, 치료비를 내다가 돈이 없어졌어요. 회사는 여전히 '당신은 개인사업자'라고만 했고…"
강태진이 다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카톡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마지막 메시지는 정훈이가 보낸 것이었다.
**"태진아, 미안해. 더 이상 못 버티겠어. 고마워."**
날짜는 정확히 1년 전이었다.
강태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주먹이 천천히 쥐어졌다. 손가락 마디가 하얀색으로 변했다.
"정훈이는 그 다음날 아침에 집에서 발견됐어요. 자살이었어요. 엄마가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은 '개인사업자의 사건이니 회사 책임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이준호는 강태진을 오래 바라봤다. 청년의 떨리는 목소리, 하얀 손가락, 그리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눈빛. 그것이 분노가 아닌 다른 것임을 이준호는 알았다. 사명감이었다.
"저는 이 싸움을 하고 싶어요. 제 손해배상 때문만이 아니라, 정훈이 같은 사람이 또 나오지 않도록."
이준호가 강태진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받아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병원 영수증을 한 장 한 장 확인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할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회사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걸면, 회사 측은 당신의 개인사업자 지위를 들고 나올 거고, 법원은 계약서를 근거로 판단할 겁니다. 이길 확률은 낮습니다."
"그럼 뭘 해야 합니까?"
"산재보험 청구를 하십시오."
"산재? 근데 전 근로자가 아니라…"
"계약서에는 개인사업자라고 했지만, 실제 운영 구조는 근로자입니다. 산재보험법에서는 '실질적 근로 관계'를 판단합니다. 당신이 산재 신청을 하고, 회사가 이를 거부하면, 산재보험심판위원회에서 판정을 내립니다."
이준호가 강태진의 계약서로 돌아갔다.
"여기 시간 지정, 복장 규정, 배낭 지정, 회사 정책 강제, 패널티 시스템. 이 모든 것이 증거입니다. 근로기준법 제2조에서 정의하는 근로자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법원이 이를 보면, 당신은 근로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산재 신청을 어떻게 하는데요?"
"먼저 사고 당시의 모든 기록을 모아야 합니다. 경찰 사건 기록, 병원 진단서, 당신의 배달 기록. 그리고 당신이 언급한 다른 라이더들의 사고 기록도 필요합니다."
강태진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떴다.
"정훈이, 민준이, 준석이, 종호. 다 같은 상황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우리가 함께…"
"그렇습니다. 당신 혼자의 소송이 아니라, 같은 상황의 라이더들과 함께 진행하면 더 강력합니다."
이준호가 침대 밑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는 강태진의 계약서를 정렬하며 핵심 조항들을 필기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라이더들의 연락처와 각각의 사고 내용을 정확히 정리해 주세요. 어느 플랫폼에서 일했는지,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회사의 대응이 정확히 뭐였는지."
강태진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는 이름, 연락처, 플랫폼, 사고 내용, 회사 대응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정훈이는 Q 플랫폼, 다리 골절, 회사 책임 거부. 민준이는 R 플랫폼, 추락 사고, 역시 거부. 준석이는 S 플랫폼, 신호 위반 차량 충돌, 거부. 종호는 T 플랫폼, 배달 중 넘어짐, 거부."
"그들과 만날 수 있습니까?"
"네, 연락해 볼게요."
이준호는 강태진의 계약서를 한 번 더 읽었다. 조항마다 위법성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당신이 처음 플랫폼에 사고 보고를 했을 때, 상담사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합니까?"
"'당신은 우리 직원이 아니라 개인사업자니까, 당신이 든 보험으로 처리하세요. 우리는 배달 건당 수수료만 가져가는 중개 플랫폼입니다'라고 했어요."
이준호가 손가락으로 노트에 메모했다.
"그 상담사의 이름이나 통화 시간을 기억합니까?"
"통화 시간은 오후 6시쯤이었고, 상담사 이름은… 확인을 안 했어요."
"괜찮습니다. 플랫폼에 통화 기록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법적 절차를 통해."
강태진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변했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가득했던 눈이,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 정말 법관 같아요."
이준호가 움직임을 멈췄다. 강태진이 다시 말했다.
"아니, 정말 법관이신 거 아닙니까? 이 정도로 정확하게 법을 알면서, 편의점 알바를 하고 계신 이유가 뭐예요?"
침묵이 고시원을 채웠다. 이준호는 강태진의 질문을 피하지 않으려 했지만, 답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당신이 이 싸움을 원한다면, 제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미래, 그리고 정훈이 같은 사람들의 미래입니다."
강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준호는 강태진의 계약서를 정렬하며 다시 생각했다. Q 플랫폼. R 플랫폼. S 플랫폼. T 플랫폼. 네 개의 배달 플랫폼에서 동일한 산재 은폐 구조. 그리고 편의점 프랜차이즈 전체에서 발생하는 임금 착취.
이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었다.
이준호는 강태진의 계약서를 한 번 더 읽었다. Q 플랫폼의 로고가 보였다. 그는 스마트폰을 켜 각 플랫폼의 이용약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R 플랫폼의 약관을 열었을 때, 그의 눈이 좁혀졌다.
**배달원 가입 약관** **제1조 서비스 이용 관계** 이 약관에서 정의하는 배달원(이하 "라이더")은 당 플랫폼을 통해 배달 건을 수주하는 개인사업자입니다.
같은 문장이었다. 제3조도, 제5조도 동일했다. S 플랫폼, T 플랫폼도 마찬가지였다. 시간 지정, 복장 규정, 배낭 지정, 회사 정책 강제, 패널티 시스템. 마치 누군가 같은 템플릿을 사용해 만들어낸 것처럼.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네 개 기업이 동시에 같은 약관을 만들 리 없었다. 누군가 조율했다. 누군가 이 구조를 설계했다.
그는 노트에 적었다.
**배달 플랫폼 Q, R, S, T: 동일한 약관 구조** **산재 은폐 패턴: 동일** **네 개 기업의 조율 가능성: 높음** **카르텔 의심**
고시원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강남역 8번 출구. 내일 오후 3시. 카페 '라운지'.
그곳에서 강태진의 친구들을 만나면, 네 개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또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울림. 이준호는 전화를 켜 확인했다.
발신자: 김소연 (노동청)
이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기다렸다.
메시지가 왔다.
**"이준호님, 긴급입니다. 편의점 진정서 건으로 우리 부서에 이상한 신호가 들어왔어요.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혼자 말고 꼭 혼자."**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우리 부서에 이상한 신호. 혼자 말고 꼭 혼자.
노동청 담당자 김소연의 메시지는 경고였다. 부서 내 누군가가 이 사건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 강남역 8번 출구에서 강태진의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이준호는 달력을 펼쳤다. 내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강남역 8번 출구 카페 '라운지'에서 강태진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김소연은 내일 오후 3시에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시간이 정확히 겹친다.
이준호는 노트를 내려놨다. 고시원의 침묵이 더 깊어졌다. 내일 오후 3시.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시간이었다. 두 곳 중 어디를 선택하든, 뭔가를 포기해야 했다.
강태진의 친구들을 만나면 카르텔의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김소연의 경고를 무시하면 부서 내 감시자에게 노출될 수 있다.
김소연을 만나면 부서 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강태진의 친구들을 놓치면 증거 수집에 시간이 더 걸린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단순히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훈이의 죽음, 강태진의 사명감,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다른 라이더들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고시원의 밤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