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노동청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는 등받이를 구부러뜨렸다. 이준호는 신청서 한 장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박민지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떨리고 있었다.
"떨려요?"
"아니다."
거짓이었다. 손가락 끝이 계속 움직였다. 삼십 년 대법관 경력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진동이었다. 법정에선 이랬다. 판사석에 앉으면 두려움이 사라졌다. 판결을 내릴 때도, 다른 판사들 앞에서 의견을 말할 때도, 대법원장과 마주할 때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대기실에서, 월급 103만 원을 남긴 채 살고 있는 서른 살 알바생으로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려니 손이 떨렸다.
담당자 김소연은 서류를 정렬했다. 서른 중반의 여성이었다. 회색 정장, 검은 구두. 공무원의 표정은 중립적이었지만 눈빛은 다르다는 걸 이준호는 알았다. 흥미가 아니라 피로였다.
"다섯 명의 진정인이 있는 거 맞죠?"
"네, 맞습니다."
"계약서는?"
이준호가 건넨 폴더 안에는 다섯 개 CU편의점의 고용계약서와 월급 계산서가 들어 있었다. 타이핑 오류까지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김소연은 페이지를 넘겼다.
"음... 임금 명세서에 '경영비 보조금'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 비용이 근로기준법 제43조에 위배됩니다. 임금 공제는 법에서 정한 경우에만 가능한데, 경영비는 그 범위에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소연이 이준호를 봤다. 이상한 표정이었다. 조력인이라고 해도 보통은 이렇게 정확하게 법조문을 인용하지 않는다.
"진정서는 여기 서명하시고, 증거자료는 사본으로 충분합니다. 원본은 나중에 법정에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법정이요?"
박민지가 처음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조사 결과에 따라 기업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정소송이 되죠."
"행정소송?"
박민지의 눈이 흔들렸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조사는 얼마나 걸리나요?"
"보통 한 달 정도요. 기업에 출석 통지를 보내고, 진술을 받고, 현장 조사를 합니다. 그 다음에 판단을 내려요. 기업이 이의를 제기하면 행정소송으로 넘어가죠."
박민지의 얼굴이 굳었다. 한 달. 행정소송. 그 사이의 시간과 비용. 모든 게 그에게는 무거웠다.
"진정 비용은 없나요?"
"없습니다. 무료죠."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대법관이라면 여기서 법의 정의를 말했을 것이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무료 진정 제도는 그 정신의 구현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는 대법관이 아니었다. 월급 103만 원을 남긴 채 살고 있는 서른 살 알바생이었다.
"우리 부서도 이상하게 느껴져요."
김소연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뭐가요?"
"이 기업들이요, 한두 번 적발되는 게 아니거든요. 지난해만 해도 같은 위반으로 과태료를 받고도, 올해 또 같은 방식으로 위반하는 거예요. 마치 누군가 우리 조사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이준호는 노트에 적지 않았다. 이미 뇌에 저장되었다. 노동청 내부 부패의 첫 신호다.
서류 제출은 십 분이면 끝났다. 종이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고, 영수증을 받았다. 법정 외 구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곧 답변이 되지는 않았다.
노동청을 나가는 복도는 형광등으로 가득했다. 박민지는 한 발 한 발 느리게 걸었다.
"한 달이 길어요?"
"길지 않습니다."
"정현우가 합의를 제안하면?"
이준호는 멈췄다.
"받으세요. 확실한 것을 받으세요."
"근데 다른 언니들은?"
박민지의 눈이 이준호를 마주쳤다. 스물여덟의 눈이었는데, 그 안에는 이미 포기가 있었다.
"은지는 아직도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어요. 준호 언니도. 우리가 합의하면, 정현우는 과태료만 내고 다시 같은 짓을 할 거예요."
이준호는 답을 찾지 못했다. 대법관 경력 삼십 년, 판례 수천 건을 기억하는 뇌도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법을 알아도 비용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 시간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다. 신뢰가 없으면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이 법정 외 지역의 현실이었다. 판결문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현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편의점도 확인했나요?"
이준호가 돌아봤다. 남자였다. 삼십대 초반. 왼쪽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누세요?"
"강태진입니다. 배달 라이더예요."
남자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특이한 확신이 있었다. 박민지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 조력인이죠? 들었어요. 편의점 임금 건으로 노동청에 진정한 사람이라고."
"네."
"제 친구가 CU에서 일하는데, 같은 공제를 받고 있어요. 근데 편의점이 아니라 배달 플랫폼도 똑같습니다."
강태진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왼쪽 다리를 절며 걷는 그의 움직임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사고 났거든요. 한 달 전에. 제 다리가 부러졌어요. 배달하다가 미끄러워서 넘어졌는데, 플랫폼은 산재 신청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산재를 안 해줬다고요?"
"대신 자신들이 의료비를 지원해준다고 했어요. 근데 병원에 물어보니, 이미 다섯 명의 라이더가 같은 방식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산재 처리 없이."
이준호의 뇌가 즉시 작동했다. 산재 은폐. 불법 직고용. 배달 플랫폼의 책임 회피 구조. 이미 판례로 알고 있던 패턴이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들으니 다르다.
"몇 명이요?"
"여기 계세요."
강태진이 손짓했다. 세 명의 남자가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모두 다리를 절거나 팔을 삼각건에 맨 상태였다.
"이분들 다 배달 중에 사고 난 사람들이에요."
첫 번째 남자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 전체가 석고로 고정되어 있었다.
"택배 기사 김준호입니다. 세 달 전에 배송 중 오토바이가 넘어졌어요. 병원에서는 골절이라고 했는데, 회사는 산재 신청을 거부했어요. 대신 일반 의료비로 처리하라고 했고, 저는 지금까지 받은 의료비가 총 180만 원입니다."
"180만 원?"
"골절 치료는 최소 500만 원 이상이 들어요. 회사가 지원한 180만 원은 제 돈으로 채워야 하는데, 저는 일을 못 하니까 돈이 없어요."
두 번째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목을 고정하는 보조기를 하고 있었다.
"배달 라이더 박준수입니다. 두 달 전에 신호 위반 차량과 충돌했어요. 경추 염좌와 디스크 손상이 나왔는데, 회사는 같은 이유로 산재 신청을 거부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120만 원을 받았고, 계속 통증이 있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일을 나가고 있어요."
세 번째 남자가 팔을 들어 보였다. 삼각건에 고정된 왼쪽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배달 라이더 이상민입니다. 한 달 전에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왼쪽 팔이 골절되었는데, 회사는 '배달 중이 아닌 휴식 시간의 사고'라고 주장했어요. 저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준호는 세 사람의 얼굴을 봤다. 분노가 아닌 피로였다. 반복된 불법 앞에서 이미 감정을 소진한 사람들의 표정.
"우리 만나서 얘기해보니, 같은 플랫폼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었어요."
강태진이 다시 말했다.
"다른 플랫폼도 똑같았어요. 배달 앱 세 곳, 택배 회사 두 곳.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산재를 은폐하고 있었어요. 마치...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처럼."
이준호는 계산했다. 편의점 5개 점포에서 임금을 공제하는 방식. 배달 플랫폼 3곳에서 산재를 은폐하는 방식. 택배 회사 2곳에서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것. 그 사이의 연결고리.
이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다.
체계적인 착취다.
그 순간, 이준호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대법관에서 을로의 전환이 이 복도에서 완성되었다. 판사석이 아닌 현장에서, 법전이 아닌 생생한 고통 앞에서.
"너희들이 아는 다른 라이더들은?"
"많아요. 이 정도 사고는 매달 생기거든요. 근데 대부분 회사가 무섭다고 해서 신고를 안 해요. 일을 잃을까봐."
이준호의 뇌가 회전했다. 대법원의 재판부 회의실이 아니라, 노동청 복도에서. 판례를 읽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들으며.
"우리 도와줄 수 있어요?"
강태진이 물었다.
"돈이 있나요?"
"없어요."
"시간이 있나요?"
"일을 못 하니까 시간은 있어요. 근데 생활비가 없어요."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강태진의 질문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숨어 있었다. 법을 알아도 변호사를 쓸 수 없다면? 판례가 있어도 법원에 갈 수 없다면? 법정 조력인이 있어도 신뢰가 없다면?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언제요?"
"내일."
"어디서요?"
이준호는 생각했다. 고시원은 너무 좁다. 편의점은 위험하다. 노동청은 또 다른 무력함만 줄 것이다.
"강태진 님이 알고 있는 다른 라이더들을 모아주세요. 가능한 많이."
"집에 오세요. 우리 동네 카페에서 만나요."
강태진이 주소를 말했다. 이준호는 기억했다. 노트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박민지는 여전히 서 있었다. 노동청 복도의 형광등 아래서, 자신의 월급 620만 원을 기다리며.
"박민지님. 당신은 은지와 준호 언니한테 말해주세요."
"뭐라고요?"
"노동청 진정은 이미 했습니다. 한 달이면 기업에서 합의를 제안할 거예요. 당신은 그걸 받으세요. 확실한 돈을 받으세요."
"그럼 다른 언니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박민지의 눈이 흔들렸다. 희망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요?"
"네."
박민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이 합의였는지, 포기였는지는 이준호도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호가 화면을 봤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준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저 이혜진이에요. 콜센터 이혜진?"
목소리는 작고 빠르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해요. 제가 계산서 얘기했다고 해서 경고를 받았어요."
배경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 뒤에 명령조의 고함.
"경고요? 뭐라고 했어요?"
"다시는 그런 얘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가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지금 어디세요?"
"콜센터 사무실이에요. 근데 제 핸드폰을..."
배경의 소음이 커졌다. 누군가 이혜진에게 다가오는 소리. 그 뒤에 목소리가 겹쳤다.
"당신 뭐 하는 거야? 핸드폰 내놔!"
"아, 잠깐—"
통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다시 걸었다. 신호음만 울렸다.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더 걸었다. 여전히 신호음. 세 번째. 네 번째.
강태진이 이준호의 얼굴을 봤다.
"뭔데요?"
"모릅니다."
이준호는 거짓말을 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혜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복도는 여전히 밝았다. 형광등이 계속 켜져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끄지 않았다.
이것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