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편의점 POS기 옆 좁은 휴게실에서 이준호는 박민지의 계산서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종이가 낡아 곡선으로 말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금액을 따라가며 읽었다. 기본급 2,100,000원에서 공제 항목이 여덟 개. 유니폼 세탁비 35,000원, 손상 물품 변상금 50,000원, 매장 관리비 120,000원, 보험료 75,000원, 교육비 30,000원, 장비 사용료 65,000원, 시스템 이용료 45,000원, 기타 공제 100,000원. 최종 수령액 1,480,000원.

합계 620,000원.

이준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30년 대법관 경력에서 수백 건의 근로기준법 위반 판례를 봤지만,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는 것과 판결문으로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가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속이 헛한 느낌. 법정에서 수백 번 봤던 을의 표정이 눈앞에 있었다.

"이게... 이게 다 공제 항목이라고요?"

박민지가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스물두 살이라고 했는데, 더 어려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편의점 야간 근무 때문일 수도,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네. 모두 공제입니다."

"그런데 이게... 위법이라고요?"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박민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감과 희망이 동시에 섞여 있는 표정. 그는 이 표정을 수백 번 봤다. 법정에서. 을들이 판사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심과, 혹시 모를 일에 대한 간절함.

"근로기준법 제43조를 보면, 임금에서 공제할 수 있는 항목은 법에서 정한 것만 가능합니다. 세금, 보험료, 법원 판결에 따른 채무 변제 정도입니다."

이준호가 계산서를 가리켰다.

"유니폼 세탁비, 손상 물품 변상금, 교육비, 시스템 이용료 같은 항목은 원칙적으로 공제할 수 없습니다."

박민지가 계산서를 다시 들었다. 손이 떨렸다.

"근데... 점장님이 하는 거잖아요. 이게 위법이라고 하면..."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그 뒤에 이어질 말들을. 점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할까요. 다른 데 다니라고 하면? 내가 어디서 일하지?

"혼자가 아닙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박민지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아니라 한숨에 가까웠다.

"변호사 아니신데 어떻게요?"

"저는 법정 조력인입니다. 변호사처럼 법정에 설 수 있고, 의뢰인을 대리할 수 있습니다. 비용도 없습니다."

박민지의 얼굴이 굳었다.

"법정 조력인이... 뭔가요?"

이준호가 설명했다. 법정 조력인 제도에 대해. 민사소송에서 변호사를 쓸 수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법관의 허가 하에 법정에 설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자신의 30년 경력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저 이 제도가 존재하고, 자신이 이 제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만 강조했다.

박민지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 아니면 안 됩니다."

"법정에서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니에요. 변호사가 아니면... 뭔가 부족한 거잖아요."

이준호는 박민지의 얼굴을 봤다.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게 박혀 있는지를 본 것이었다. 을들은 을만 대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트는 엘리트여야만 한다고. 자신은 을이니까 을이 도와줄 수 없다는 역설적 신념.

"저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법을 압니다. 당신의 권리를 압니다."

박민지가 계산서를 내려놨다.

"다른 편의점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요?"

"다른 점포도요?"

"네. 저희 편의점 체인이 있잖아요. 제 친구가 다른 지점에서 일하는데, 그곳도 똑같이 공제해요. 아니, 더 심해요. 친구는 800,000원을 공제당했대요."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800,000원. 한 명이 한 달에. 만약 이게 전국의 모든 점포에서 반복된다면.

"얼마나 많은 점포가 있습니까?"

"음... 몇 개인지 모르겠는데, 꽤 많아요. 인천, 서울, 경기도에 다 있어요."

이준호는 계산을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점포 수, 직원 수, 월간 공제액, 연간 규모. 첫 화에서 발견한 5개 점포 36,000,000원의 규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그럼 지금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기는 건가요?"

박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희망이 겁을 이기고 있었다.

이준호가 입을 열려고 했다. 확신에 찬 대답을 주려고 했다. 법관으로서 30년을 지낸 자가 할 수 있는 그런 대답을 말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박민지!"

점장 정현우의 목소리가 휴게실을 가득 채웠다. 박민지가 벌떡 일어났다.

"네, 점장님!"

그 순간의 반사 반응. 몸이 경직되었다.

정현우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얼굴이 단단했다. 이준호를 보는 눈이 차가웠다.

"뭐 하고 있어?"

"손님 응대하다가..."

박민지가 서둘러 말했다. 거짓이었다. 손님은 없었다.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박민지는 거짓을 말했다.

정현우가 이준호를 보며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당신이 또 와 있네요. 이미 해고당한 사람인데."

"박민지 씨와 상담 중입니다."

"상담? 뭔 상담을?"

이준호가 계산서를 들었다. 정현우의 눈이 반사적으로 계산서를 향했다. 그 순간의 감정 변화를 이준호는 놓치지 않았다. 경계. 두려움. 그리고 즉시 뒤따르는 분노.

"계산서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계산서는 문제없습니다. 계약서에 다 나와 있고."

"근로기준법 제43조 위반입니다."

정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 없는 웃음.

"법 이야기 또 하네요. 당신 변호사도 아니면서. 여긴 사적 공간이고, 당신은 직원도 아닙니다. 나가세요."

"박민지 씨는 현재 피해 상황입니다. 법정 조력인으로서 상담할 권리가..."

"법정 조력인? 뭐 하는 직책인데요? 변호사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나가세요. 아니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박민지가 이준호를 봤다. 눈이 흔들렸다. 희망과 겁이 뒤바뀌고 있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계산서를 박민지에게 건넸다.

"당신의 권리입니다."

박민지는 계산서를 받지 않았다. 손가락도 펼치지 않았다.

정현우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갑의 횡포가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경계심이 있었다. 마치 이준호를 완전히 처음 보는 상대가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마주한 듯한 표정.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정현우의 얼굴에 의심이 짙어졌다. 마치 이 침묵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드러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정현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정 점장."

점장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40대 중반의 남자. 정현우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본사에서 왔습니다. 고용관리팀 과장 서민준입니다."

그 사람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멈췄다.

"당신... 누구세요?"

이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민준.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15년 전 대법관실에서. 한 건의 판결로 인생이 뒤바뀐 남자. 그때 판결은 서민준의 소송을 기각했다. 정확히는 원고 적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이준호는 그 판결이 옳다고 생각했다. 법리상 명확했다. 하지만 그 판결 이후 서민준은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이준호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정현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준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서민준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가세요."

서민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명령조였다.

이준호는 움직였다. 계산서를 테이블에 놓고 휴게실을 나갔다.

뒤에서 박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점장님, 제가..."

"조용히 해."

정현우의 목소리가 끊었다.

편의점 문을 나갔다. 밖은 밤이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고시원까지 가는 골목길. 그곳에서 이준호는 처음으로 느껴봤다. 법을 알아도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손이 떨렸다. 화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서민준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복잡해질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고시원에 들어가며 이준호는 생각했다. 박민지는 내일 출근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임금을 받을 것이다. 같은 공제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 없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이... 이준호 씨예요?"

목소리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민지였다.

"네."

"저... 혼자 안 됩니다. 혼자는 정말 안 돼요."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럼 저와 함께하세요."

"근데 정말... 이걸로 이길 수 있어요?"

침묵이 흐른 후, 이준호는 대답했다.

"네.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박민지의 숨이 멎었다.

"점장님이 또..."

통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천장을 계속 봤다. 곰팡이 자국이 마치 지도처럼 보였다. 을의 나라의 지도처럼. 거기서는 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런 지도.

그 지도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준호는 아직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첫 번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박민지는 이틀 뒤 다시 연락했다. 이준호가 고시원에서 나가기 직전이었다.

"점장님이 자리 비웠어요. 지금 괜찮으세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결연했다. 전날의 떨림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 봅시까?"

"편의점 앞이 아닌 곳. 역 앞 카페."

이준호는 30분 뒤 카페에 도착했다. 박민지는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계산서 다섯 장과 계약서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제 것만 아니에요. 다른 언니들도 다 같아요."

박민지가 말했다.

"은지 언니, 수진 언니, 준영이, 태훈이... 모두 다."

이준호는 서류를 살폈다. 계산서의 공제 항목은 정확히 같은 패턴이었다. 통신비, 손실금, 위생용품비. 모두 임의로 책정된 것들이었다. 근로기준법 제43조에서 명시한 법정 공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

"몇 명이요?"

"우리 점포에만 여덟 명이에요."

박민지가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장을 켰다.

"제가 다른 분점 언니들한테 물어봤어요. 강남점, 서초점, 용산점도 다 같대요. 항상 다른 이유를 붙이지만 다 비슷한 액수가 공제된대요."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다른 무게가 있었다.

"더 있어요."

박민지가 숙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 친구가 강남 편의점에서 일했는데, 작년에 갑자기 폐점됐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편의점이 다시 열렸어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회사라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서를 다시 들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가장 오래된 것이 9개월 전이었다. 모두 같은 패턴이었다. 체계적이었다.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다.

"이건 단순 공제가 아니에요."

이준호가 말했다.

"이건 시스템입니다. 조직적인 착취 시스템."

박민지의 눈이 커졌다.

"그럼... 더 심한 거예요?"

"네. 훨씬 심합니다."

이준호는 계산서를 정렬했다. 손가락으로 각 항목을 짚으며 설명했다. 30년 판례 데이터베이스가 작동하고 있었다. 비슷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2015년 대법원 판결. 편의점 프랜차이즈의 위법 공제 사건. 당시 판결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과태료는 미미했다. 그리고 그 이후 같은 패턴의 착취가 계속되었다. 법이 작동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통신비는 개인 휴대폰이면 개인 부담이어야 해요. 손실금은 직원 과실이 증명되지 않으면 공제할 수 없어요. 위생용품비는 사용자 부담이 맞지만, 정해진 상한이 있어요."

이준호가 말했다.

"근데 여기는 다 무시하고 있어요."

"그럼 법적으로..."

"법적으로는 위법입니다."

이준호가 박민지를 봤다.

"당신들이 받아야 할 돈이에요."

박민지의 입술이 떨렸다.

"근데 언니들한테 말하면... 다들 두려워할 것 같아요. 점장님이 해고한다고 하면..."

"그래서 단체로 움직여야 합니다."

"단체로?"

"노동청에 진정을 제출하는 거예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그리고 필요하면 소송을 진행합니다."

박민지가 몸을 뒤로 빼면서 고개를 저었다.

"소송요? 변호사 비용이..."

"돈이 없어도 됩니다."

이준호가 말을 끊었다.

"저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법정 조력인이에요. 법원에서 인정한 자격이고, 법정에서 당신을 대리할 수 있습니다. 비용은 없어요."

박민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박민지는 자신의 상황을 재평가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언니들을 설득해볼게요."

박민지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결의가 들었다.

이준호는 노트에 적었다. 강남점, 서초점, 용산점. 그리고 폐점된 점포. 그 이름은 아직 몰랐지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를 나오며 이준호는 박민지에게 말했다.

"당신이 용감합니다."

박민지가 쓸쓸하게 웃었다.

"용감한 게 아니라 지쳐 있는 거예요. 이제 싸울 에너지가 남았다는 것뿐이에요."

박민지는 편의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후 4시 근무 시작 30분 전이었다.

그날 밤, 박민지는 은지에게 계산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휴게실에서 몰래. 은지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야?"

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이게 공제가 아니라고? 그럼 내가 받아야 할 돈이란 거네?"

"그래. 이준호 씨가..."

박민지가 말을 이었다.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도 아닌데 뭘 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아?"

"아니야. 이건 불법이야."

박민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은지는 박민지의 얼굴을 봤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 대신 분노가 있었다.

"정말?"

"정말이야. 그리고 혼자가 아니야. 다른 언니들도 다 같은 피해를 입고 있어."

은지는 수진에게 말했다. 수진은 준영이를 찾아갔다. 준영이는 태훈이를 불렀다. 하나둘 퍼져나갔다. 같은 아픔의 확인. 같은 분노의 공유. 휴게실 구석에서, 매장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계산서가 돌려졌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점장 정현우가 휴게실 문을 열었다.

박민지의 손에 들린 계산서가 보였다. 정현우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뭐야?"

박민지가 벌떡 일어났다. 계산서를 숨기려 했지만 늦었다.

"누가 이걸 준 거야?"

정현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그냥..."

박민지가 말을 더듬었다.

"그 사람이 준 거지? 그 변호사 아닌 놈?"

정현우가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이거 어디서 나온 거야? 누가 복사한 거야?"

"점장님, 제 것이에요. 제 계산서..."

박민지가 말했다.

"조용히 해!"

정현우가 고함을 쳤다. 그리고 즉시 휴대폰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본사 과장님? 저 정현우입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이 직원들한테 자료를 나눠주고 있어요. 네, 계산서를 보여줬어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나요?"

통화가 끝났다. 정현우는 박민지를 봤다.

"당신 오늘부터 출근 금지. 나머지 직원들도 이 얘기 꺼내면 해고야. 알겠어?"

박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점장님..."

"나가!"

박민지는 편의점을 나갔다. 밤거리는 차갑고 외로웠다. 그녀는 이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이준호 씨? 저 박민지예요. 점장님이... 점장님이 저한테 출근 금지를 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분노가 아니라 공포가 섞여 있었다.

"진정하세요. 그건 부당해고에 해당합니다."

"부당해고요?"

"네. 당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건 위법입니다."

"근데 제가... 제가 이겨야 하나요?"

박민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쳐 있는 거예요. 이제 싸울 에너지가 없어요."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그 침묵을 견뎌냈다. 을의 무력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내일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정식 의뢰 계약을 하겠습니다."

"정식 의뢰 계약?"

"네. 법적으로 당신의 대리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박민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네. 부탁드려요."

이준호는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마치 지도처럼 보이는 그 자국들. 을의 나라의 지도.

하지만 이제 그는 알았다.

지도 위에서 해야 할 일을.

첫 번째 의뢰인 박민지. 그리고 그 뒤에 따를 수많은 을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노동청 진정 양식을 검색했다. 법정 조력인 등록 절차를 확인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웠다.

내일부터 시작된다.

을의 싸움. 진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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