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의 경계
기숙사 복도는 침묵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르바는 레이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압박감만으로도 공기가 갈라질 것 같았다. 3반 학생. 의회의 직속 요원. 마법 추적에 특화된 사냥개.
"0점 낙제생이 밤 11시에 기숙사에 없다는 건 흥미롭지 않나?"
시르바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중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이. 레이는 복도 모퉁이에서 몸을 날린 것처럼 나타났다. 손에는 교과서 몇 권. 옷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아, 시르바 선배?"
연기는 완벽했다. 놀라움,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 레이의 목소리는 떨렸고, 손에 들린 책이 철석철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서관에 있었어요. 내일 시험 때문에... 밤샘 공부를..."
시르바의 눈이 좁혀졌다. 마법 추적자로서 그는 알고 있었다. 3시간 전, 이 복도를 통해 강력한 마법 파동이 흘러나왔다는 것을. 그것은 낙제생 같은 것이 낼 수 있는 신호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철저히 평범한 0점 학생이었다. 떨리는 손, 초조한 눈동자, 도서관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옷의 먼지. 시르바의 눈이 레이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깜빡임의 간격이 불규칙했다. 목소리의 톤도 마지막 음절에서 약간 올라갔다. 그의 심장 박동도 불안정했다. 완벽한 공포의 신체 반응.
"도서관은 자정에 문을 닫는다."
"아, 그... 리안 선생님께서 특별히 허락해주셨거든요. 저 같은 학생도 뭔가 도움이 되길 바라셔서..."
거짓. 시르바는 즉시 알아챘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도서관의 CCTV는 리안 교사의 접근 권한으로 조작될 수 있었고, 마법 흔적도 깨끗했다. 아니, 너무 깨끗했다.
"그렇다면 네 방에 왜 강력한 마법 파동이 감지되었나?"
직구였다. 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르바가 기대한 반응이었다. 그 순간, 레이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숨겨진 것을 드러낼 때의 공포감.
"제... 제임스가 어제 제 방에서 마법 훈련을 했어요. 잔재가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완벽한 거짓이었다. 제임스는 어제 엘리트 타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르바도 그것을 즉시 증명할 수 없었다. 마법 잔재는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정확한 시간을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시르바는 레이를 바라봤다. 완전히 흠잡을 데 없는 무능한 낙제생. 그런데 3시간 전의 그 마법 파동은 뭐였나?
"훈련을 더 받고 싶으면 엘리트 타워의 시설을 사용하거라. 기숙사는 평온함을 유지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시르바는 몇 초간 더 그를 바라봤다. 뭔가 놓친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손가락으로 집을 수 없었다. 마치 물속의 물고기를 보려는 것처럼 흐릿했다.
시르바가 돌아섰을 때, 레이는 숨을 내쉬었다. 검신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를 제거하라. 그는 추적자다. 위협이다.
레이의 손이 검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 시르바를 제거하면 몇 시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레이의 다른 손이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레이의 의지였다. 검신과 구분되는, 자신의 것.
*아직이 아니다. 아직.*
시르바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레이는 기숙사 건물 뒤 정원으로 몸을 날렸다. 담장을 넘고, 야산의 어둠 속으로. 그의 호흡은 가빠졌고, 손은 떨렸다.
검신은 계속 속삭였다.
—정체를 드러내라. 숨을 수 없다. 더 이상 약한 척할 수 없다.
레이는 검을 집어 들었다. 푸른 빛이 살짝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기억의 일부가 흐릿해졌다. 어제 먹은 음식이 뭐였더라? 토마스가 뭐라고 했더라?
"아니다."
레이는 검을 내려놨다.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검신의 속삭임을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저항했다. 검신의 침식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직은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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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레이를 찾아왔다. 표정은 심각했다. 낙제반 거주지의 공용 식당에서 그는 레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르바가 너를 쫓고 있어. 어제 밤 복도에서 본 애들이 있다고 해. 조심해."
레이는 토마스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심각함.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 아래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결연함. 마치 자신도 이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듯한.
"너... 뭘 알고 있어?"
토마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만 강한 게 아니야, 레이. 우리 모두... 우리 모두가 강했어.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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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교사는 그날 오후 레이를 별도의 공간으로 데려갔다. 중앙 도서관 아래, 지도에 없는 창고였다. 낡은 책들과 먼지 냄새. 그리고 사람들.
10반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전부가 아니었지만, 대략 18명. 그들의 눈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깊은 절망과, 그 아래 숨겨진 불꽃.
"이들도 너처럼 봉인되었어. 마법 능력이 강했던 애들이 모두 여기로 모아졌지."
리안의 목소리는 낮았다.
"왜?"
"통제하기 위해서지. 강한 자들을 한 곳에 몰아서, 약한 척하게 만들고, 서로 비교하지 못하게 하고... 희망을 빼앗기 위해."
레이는 한 명 한 명을 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레이를 바라봤다. 마치 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이제 뭐 하려고?"
"그건... 너에게 달려 있어."
리안은 한 발 물러섰다.
"난 너희를 깨울 수 있어.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하지만 그 방법은... 한 명이 먼저 완전히 깨어나야 해. 모두를 위해서."
"그게 나라는 뜻이군."
"맞아. 그리고 넌 이미 깨어나 있어. 하지만 완전하지 않지. 아직도 저항하고 있어. 너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리안의 눈이 진지해졌다.
"만약 넌 완전히 깨어난다면, 넌 이들을 깨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정체성을 잃는다."
"그래. 검신이 너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는 그걸 막을 수 없어."
10반의 학생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지나라고 불리는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팔에도 검은 봉인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를 깨워줘. 제발."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아닌 간절함이 있었다.
"우리도 싸우고 싶어. 너 혼자만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아."
레이의 손이 떨렸다. 검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깨어나라. 강해져라. 그들을 해방시켜라.
그리고 동시에, 레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이야. 아직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어.
리안은 레이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그것은 벨라드의 필체로 작성된 문서였다. 봉인 해제 주문. 리안이 의회 내부에서 탈취한 것이었다. 벨라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걸 가져. 준비가 되면 사용해. 하지만 기억해. 한 번 시작되면 돌아올 수 없어. 넌 더 강해질 거야. 하지만 넌 희미해질 거야."
레이는 종이를 들었다. 손가락이 글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기억이 사라졌다. 엄마의 얼굴. 어렸을 때의 목소리. 그것들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얼마나 남았어?"
"모르겠어. 검신의 침식 속도는 예측 불가능해. 혹은 너의 저항력에 달려 있어."
리안의 목소리는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넌 이 선택을 미룰수록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 너의 정체성을 보존할 시간 말이야."
레이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시르바는?"
"의회가 보낸 최고의 추적자야. 너를 제거하기 위해. 하지만 동시에... 너를 시험하기 위해서기도 해."
"시험? 뭘 시험하는데?"
"의회는 넌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고 싶어 해. 벨라드는 특히. 그래서 시르바를 보냈어. 간접적으로 너를 측정하기 위해. 직접 나서면 너무 위험하니까."
리안이 한 발 다가섰다.
"시르바는 약한 상대에겐 관심이 없어. 그 남자가 찾는 건 강함이야. 그래서 넌 아직 살아있는 거고, 계속 약한 척하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어."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맞춰지고 있었다. 자신은 하나의 게임판 위에 있었고, 모든 말들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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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토마스가 다시 나타났다.
"리안 선생님을 만났지?"
"응."
"그럼... 넌 뭐 할 거야?"
토마스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자신이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을 묻는 듯이.
레이는 멈춰 섰다. 그리고 토마스를 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있었다. 두려움도, 희망도 아닌, 확신.
"넌... 이미 알고 있었어. 10반이 뭔지. 우리가 뭔지."
"응. 오래전부터."
"왜 말하지 않았어?"
"누가 날 믿었을까? 그리고..."
토마스가 한 발 다가섰다.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아무도 준비가 안 돼 있어. 그냥 시작해야 할 때가 왔어."
레이의 검이 울렸다. 그 울음은 아주 작았지만, 두 사람 모두 느꼈다.
"너는... 뭘 준비했어?"
토마스의 눈이 반짝였다.
"다른 애들과 신호 체계를 만들었어. 마법으로. 넌 한 번의 명령만 보내면 돼. 우리는 모두 그걸 받고 움직일 준비가 돼 있어."
"어떻게?"
"봉인이 풀리는 순간, 우리 모두가 동시에 신호를 받을 거야. 그리고 그 신호는 명령이 돼. 넌 우리를 이끌기만 하면 돼. 우리는 따를 거야."
"그럼 넌?"
"난... 넌 깨어날 때 제일 먼저 움직일 거야. 너를 지킬 거고, 다른 애들을 모을 거야. 그리고 의회에 증거를 제시할 거야. 봉인 실험, 강제 마법 억압, 모든 것들."
레이는 토마스의 얼굴을 봤다. 결연함. 그것이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듯한.
"위험해."
"알아.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는 것도 위험해. 그리고..."
토마스가 웃음을 지었다.
"우린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최소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기회는 없었어. 이게 그 기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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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려앉으면서, 레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쳤다. 봉인 해제 주문. 그 아래에는 벨라드의 서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레이의 손이 떨렸다. 검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다. 이제 깨어날 때다.
레이는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두 줄. 그리고 멈췄다.
*이 선택을 하면, 난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 억압받는다.*
창문 너머로 아카데미의 야경이 보였다. 엘리트 타워는 밝았고, 낙제반 거주지는 어두웠다. 그 차이 속에서 레이는 호흡했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이미 흐릿했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검신의 목소리만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 아래에 자신의 의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기숙사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 의회의 요원들이었다. 시르바가 이끌고 있었다.
"이번엔 확인할 차례다."
시르바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레이. 문을 열어."
레이의 손이 주문 위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선택지로 축소되었다.
*완전히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숨을 것인가.*
*하지만 숨을 수 없다. 이미 들켰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룰 시간도 없다.*
레이는 주문을 완성했다. 종이가 빛으로 변했고, 그 빛은 그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검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환영한다. 레이.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레이의 눈이 검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뭔가 반항하는 것이 있었다.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는 그 곳에서, 레이는 자신의 의지를 붙잡았다. 아직, 아직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숙사 문이 쾅 열렸다.
시르바가 들어섰다. 그 뒤로 의회 요원 셋이 따랐다. 모두 마법 추적자들이었고, 모두 레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한 명의 낙제생일 뿐이었다. 손에 종이 조각을 쥐고,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레이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정말 무서워하는 학생의 목소리였다. 검신의 기억 속 검술은 사라져 있었고, 남겨진 것은 순수한 패닉뿐이었다.
시르바는 한 발 다가섰다. 그의 눈은 차갑고, 정확했다. 마치 먹이를 재는 사냥꾼처럼.
"그 종이를 내놔."
"이... 이건 뭐..."
레이가 손을 떨렸다. 종이가 떨어졌다. 시르바가 주워 들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는 순간, 그의 눈이 좁혀졌다.
"봉인 해제 주문. 리안 교사에게 받은 건가?"
레이는 말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최고의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정말로."
시르바가 종이를 구겨 들었다.
"의도적으로 봉인을 풀려고 했어. 그런데 왜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올 줄 알았나?"
"몰라. 난 정말 몰라."
레이가 일어나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서툴렀고, 겁먹은 학생 그 자체였다. 검신의 기억은 완전히 봉인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사실은 그것이 최고의 연기였다.
시르바가 다가섰다. 그의 손이 레이의 목을 잡았다. 마법 추적자의 손이었다. 그 손으로는 대상의 마법 회로를 직접 감지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해. 넌... 완전히 봉인되어 있지 않아. 아니, 봉인이 풀리고 있는 중이야."
시르바의 감지는 정확했다. 레이의 마법 회로는 이미 활성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그것을 감추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안쪽으로 모아서.
"제... 제가 뭘 한 거예요?"
레이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였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뇌 속에서는 두 개의 의식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검신의 목소리는 계속 울렸다.
—지금이다. 이 남자를 무너뜨려라. 넌 할 수 있다.
하지만 레이는 저항했다. 머릿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저항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견딜 수 있었다.
"의회에 보고해야겠네."
시르바가 손을 놓았다.
"넌 지금부터 감시 대상이야. 24시간. 어디든 가지 마. 이 주문이 완성되면 넌..."
"죽는 건가요?"
"아니다. 더 나아. 의회에 흡수된다. 너의 모든 힘이. 너의 모든 것이."
시르바가 돌아섰다. 의회 요원들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문을 나가는 순간, 시르바는 다시 돌아서서 레이를 봤다.
"너는... 정말로 약하구나. 그게 너의 유일한 무기라는 게 이상해."
"뭐...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관찰일 뿐."
시르바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 순간, 레이의 눈이 다시 검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숨을 쉬었다. 긴 숨. 가슴이 철렁했다. 거의 실패할 뻔했다.
—약해. 넌 약해.
검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그게 나야."
레이가 중얼거렸다.
"그게 나고, 그게 내 무기야."
검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 침묵은 동의가 아니라, 분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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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갔다. 레이는 기숙사를 나갔다. 시르바의 감시를 피하려면 더 똑똑해야 했다. 그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낮에는 절대 가지 않는 시간에. 창고 깊숙한 곳으로.
그곳에서 그는 카린을 만났다. 아니, 카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넌 봉인을 풀었어?"
"응. 시르바가 왔어. 연기했어."
"그리고?"
"먹혔어."
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바는 강한 적을 찾고 있어. 약한 상대는 관심이 없어. 그래서 넌 아직 살아있는 거야."
"얼마나 오래?"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또 다른 문서가 있었다.
"리안 선생님이 이걸 주라고 했어. 10반 학생들 전원의 봉인 해제 주문. 한 번에 풀 수 있어."
"한 번에?"
"응. 한 번에 모두 깨어나."
레이가 종이를 받았다.
"그럼?"
카린이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는 뭔가 무거운 것이 있었다.
"그럼 의회가 움직여.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강자가 깨어나는 걸 허락할 리 없어. 의회는 모든 걸 동원할 거고... 그럼 전쟁이야. 아카데미 내 전쟁."
"다른 방법은 없어?"
"있지. 천천히 하나씩 깨우는 거. 그럼 의회도 눈치 채기 어려워. 하지만 그럼 넌 혼자 버텨야 해. 검신의 침식을 견디면서."
카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혼자 남으면?"
"그럼 넌 살아. 최소한 한 달은. 그 동안 너는 검신이 돼가.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의회가 너를 제거할 거야. 깔끔하게. 넌 위협이 되기 전에."
레이가 종이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번엔 검신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이었다.
"리안은 뭐라고?"
"리안 선생님은... 넌 선택을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어. 하지만 넌 이미 선택지가 없어. 그냥 언제할지 선택할 뿐이야."
카린이 돌아서려 했다.
"잠깐."
레이가 물었다.
"넌? 넌 어디 서 있어?"
카린이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 얼굴에는 뭔가 있었다. 후회? 아니면 확신?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난... 일단 넘어간다. 의회 쪽으로 보고할 건 보고하고, 그 사이에 넌 움직여. 그리고 충분히 강해지면... 그때 난 선택할 거야."
"무슨 선택?"
"누구를 배신할지. 의회 내 파벌들, 벨라드의 진짜 의도, 혹은 내 자신의 이해관계까지. 모든 걸 저울질해야 해. 그리고 넌 그 선택의 무게를 견딜 만큼 강해져야 돼. 그래야 내 배신도 의미가 있으니까."
카린이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레이는 창고에 혼자 남겨졌다. 종이를 들고. 그리고 그 종이 위에는 18명의 이름이 있었다. 모두 봉인된 강자들.
그 순간, 토마스가 나타났다. 이번엔 정말로 나타났다.
"리안 선생님이 날 보냈어. 넌... 결정했어?"
"아직 아니야."
"얼마나 남았어? 시간?"
"모르겠어. 검신의 침식이 자꾸만..."
레이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목소리도 없었다. 대신 검신의 목소리만 선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토마스가 다가섰다. 그리고 말했다.
"난 이미 준비했어. 다른 아이들도. 우린 모두 신호를 받고 있어. 넌 명령만 하면 돼. 우리는 따를 거야. 그리고 싸울 거야. 의회에 우리의 진실을 알릴 거야."
"따르면 죽을 수도 있어."
"그래.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면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주문.
그 순간, 아카데미 전역에서 뭔가 울렸다. 아주 작은 울음. 하지만 모두가 느꼈다. 의회의 요원들, 벨라드, 시르바 모두가.
"뭐야, 이건?"
토마스가 물었다.
"신호야."
레이가 말했다.
"10반이 깨어나고 있다는."
두 번째 주문을 읽는 순간, 기숙사 전역의 불이 나갔다. 일시적으로. 하지만 그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그 어둠 속에서 18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깨어났다. 봉인이 풀리는 순간, 각자의 몸에서 마법이 폭발했다.
지나의 팔에서 검은 마법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 다시 생겨난 힘. 그 손이 떨렸다.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이 순간을.
다른 학생의 몸에서는 푸른 불이 일어났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웃음이 나왔다. 광기 어린 웃음. 자신이 뭔지 다시 기억하는 기쁨.
한 명의 학생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을 봤다. 마법 회로가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다. 그 회로를 따라가며 그는 중얼거렸다. "돌아왔다. 난 돌아왔다."
또 다른 학생은 하늘로 떠올랐다. 중력을 무시하고. 그 학생의 눈은 빛났다. 마법의 빛. 자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다시 깨닫는 순간.
한 명의 여학생은 침대를 부숴버렸다. 손가락 하나로. 아무 주문도 없이. 순수한 마법의 폭발로. 그리고 그 폭발 속에서 그녀는 웃었다.
또 다른 학생은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봉인이 풀리면서 억압되었던 마력이 얼굴에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 변화를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
한 명의 남학생은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유.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욕구였다.
또 다른 학생은 자신의 손에 검을 소환했다. 마법으로. 그 검을 들었다가 다시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반복했다.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의식처럼.
한 명의 여학생은 울었다. 그냥 울었다. 오래 억압받은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 눈물 속에는 절망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것은 분노였다.
또 다른 학생은 자신의 방 벽에 손을 대고 있었다. 벽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의 마법이 돌아왔다. 얼음의 마법. 그는 얼어붙은 벽을 바라봤다. "이제 시작이야."
한 명의 남학생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전기를 봤다.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 아닌, 순수한 기쁨의 웃음.
또 다른 학생은 다른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강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한 명의 여학생은 자신의 마법을 공중에 펼쳤다. 빛의 마법. 그 빛이 기숙사 전체를 밝혔다. 그 빛 속에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여기 있어."
또 다른 학생은 자신의 심장을 느꼈다. 그 심장이 뛰고 있었다. 강력하게. 마법과 함께. 그 박동을 느끼며 그는 알았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한 명의 남학생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봉인이 풀리면서 목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라짐을 느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오래 기다렸다. 이 순간을.
한 명의 여학생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 불을 소환했다. 작은 불.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불이었다. 다시 돌아온 자신의 마법. 그 불을 바라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줄 시간이야."
모두가 동시에 깨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알았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게임이다.*
레이는 검을 들었다. 그 검에서 파란 빛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 빛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빛은 이제 그의 빛이었으니까. 검신의 빛이 아닌, 레이 자신의 빛. 검신과 싸우면서도 자신을 지킨, 그 빛.
"우리 시작할까?"
토마스가 웃었다.
"응. 이제 시작이야."
아카데미의 밤이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