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은 레이의 시간이었다.

검을 집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고, 팔이 기억하고, 다리가 알고 있다. 도서관 창고에서 꺼내온 낡은 검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로 검신의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기숙사 옥상. 밤 11시 30분. 주변 건물들은 모두 어둠에 잠겼고, 레이만 서 있다.

검을 휘둔다.

첫 번째 동작은 기본기다. 하지만 레이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기본이 아니다. 공기가 찢긴다. 정말로.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귀로 듣는다—칼날이 진공을 가르는 신비로운 음성. 몸이 기억한다. 어쩌면 손이 아니라 영혼이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검신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목소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감각. 뇌 안에 직접 울려 퍼지는 음파.

—이것이 진정한 검술이다. 넌 이미 알고 있다.

레이는 모른다. 하지만 몸은 안다. 두 번째 동작으로 넘어간다. '봉인 해제'. 검이 공중을 따라 원을 그리고, 푸른 빛이 흔적을 남긴다. 마법이 아니다. 마법보다 오래되고, 마법이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무언가. 검술 자체가 마법인 세계. 레이는 그 세계 속에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시간이 흐른다. 손가락의 피로가 없다. 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몸이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하지만 이 느낌이 끔찍할 정도로 기분 좋다. 평생을 약한 몸으로 살아온 레이에게 이것은 중독이다. 강함. 진정한 강함.

옥상의 가장자리에 서서, 레이는 밤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린다. 별빛이 검 위에 반사된다. 검신의 기억 속에서, 이 동작의 이름은 '천지 참'이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검술. 레이가 검을 휘두르자, 바람이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은 바람. 기숙사 주변의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이것이 진정한 나다.

레이는 웃음이 난다. 쓸쓸한 웃음. 광기 섞인 웃음. 밤 1시, 옥상 위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며 웃는 낙제생. 이 모습이 너무나 우습다.

기억에서 깨어난다.

손에 검이 있고, 팔은 여전히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레이가 의식을 되찾자, 움직임이 멈춘다. 손가락이 떨린다. 피곤함이 밀려온다. 몸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다. 몸은 멀쩡하다. 다른 무언가가 망가지고 있다.

레이가 눈을 감는다. 방금 전 저녁 시간을 생각해본다.

저녁 7시. 기숙사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밝은 표정의 친구. 해맑은 웃음. 하지만 이름이... 이름이 뭐였지?

레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저녁 6시에 뭘 먹었지? 기숙사 식당에 갔는데... 국? 밥? 색깔이 뭐였더라? 맛은? 냄새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옥상 가장자리에 앉은 레이의 손이 떨린다. 검은 이미 내려놨지만, 손가락들이 여전히 검술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 근육이 움직인다. 자동으로. 의지와 무관하게.

친구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밝은 얼굴. 항상 웃는 입. 그 이름이... 토...

토마스다. 기억났다. 하지만 그 사이의 공백이 있었다. 몇 초? 몇 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 있었던 건 아닐까.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레이의 호흡이 빨라진다. 옥상의 찬 바람이 얼굴을 친다. 가슴이 철렁한다.

검신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넌 계속 사용할 것이고, 계속 잃을 것이다.

"뭘 잃는다는 거야?"

—너 자신을.

새벽 2시. 레이는 여전히 옥상에 앉아 있다.

---

아침 마법 수업. 교실은 회색이다. 회색 칠판, 회색 책상, 회색 학생들. 리안 교사가 앞에서 마법 기초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누구도 듣지 않는다. 10반은 처음부터 포기된 반이다.

레이는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그 손가락은 옥상에서 검을 휘둘렀던 손가락이다. 지금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레이는 안다. 이 손가락들은 전설을 움직일 수 있다.

리안 교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좋아. 그럼 레이, 넌 뭐해? 발화 마법 시도해봐."

레이가 손가락을 움직인다. 발화 마법은 낮은 단계의 마법이다. 손가락 끝에 불씨를 만드는 정도. 어제는 우연히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검신의 기억이 손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떻게 될까.

손가락 끝에 불이 피어난다. 하지만 즉시 꺼진다. 0점. 여느 날처럼.

"역시 안 되는군. 좀 더 집중해봐, 레이."

레이는 손을 내린다. 불이 안 피어난 이유를 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마법을 억압하고 있다. 어제 검신의 기억에 접근했을 때, 레이는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 안에 깊숙이 박혀 있는 족쇄. 마법을 막는 장벽.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부터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그것.

내가 약해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날 약하게 만들었다.

뒷자리에서 시르바가 레이를 바라보고 있다. 어제 마법 수업에서 그 표정을 본 이후로 시르바는 계속 레이를 관찰하고 있다. 찬찬히. 차갑게. 마치 곤충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레이가 시르바와 눈이 마주친다. 시르바는 웃음을 짓는다. 미소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저 입술만 올린 표정이다.

---

점심시간. 레이는 기숙사 식당에 간다. 토마스가 이미 식탁에 앉아 있다. 밥과 국을 먹고 있다. 레이가 옆에 앉자, 토마스가 고개를 든다.

"어제는 뭐 했어? 좀 이상해 보여."

레이가 숟가락을 든다. 대답할 말이 없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제는 밤새 옥상에서 검을 휘둘렀고, 친구의 이름을 잊고, 저녁 밥이 뭐였는지도 모르게 됐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다. 강했다. 전설을 움직였다.

"괜찮아. 그냥 못 자서."

"그래? 요즘 자주 못 자는 거 같은데."

토마스는 레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관찰력이 뛰어난 친구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토마스가 계속 파고들면, 레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진실을 말해야 할 텐데...

"정말 이상해. 눈빛이 달라."

"그런가?"

"응. 뭔가... 위험한 느낌? 아니, 그게 아니라..."

토마스가 말을 잇지 못한다. 그저 레이를 바라본다. 레이도 토마스를 바라본다. 이 친구는 진정한 친구다. 10반에서 유일하게 레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사람이다. 낙제반의 학생들도 서로를 피하는데, 토마스만은 그렇지 않다.

레이가 토마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정말로. 하지만 또 검신의 기억에 빠진다면, 이 친구도 잊을 것 같다. 토마스. 토마스. 자꾸만 이름을 반복해본다. 마치 마법 주문을 외우듯이.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질 것 같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토마스가 밥을 한 숟가락 뜨려다가 멈춘다. "너... 정말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레이가 수프를 마신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다.

---

오후 2시. 도서관.

레이는 리안 교사가 줬던 낡은 책을 반납하려고 도서관에 들어왔다. 카운터에 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건넨다.

"안녕. 혹시 너 레이야?"

레이가 고개를 든다. 1반 학생. 카린.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위험해 보이는 학생.

"내가 너를 찾았어. 혹시 마법 이론 동아리에 관심 있어?"

레이는 카린의 얼굴을 본다. 그녀의 미소는 완벽하다. 하지만 눈이 다르다. 그 눈은 무언가를 추적하고 있다. 사냥꾼의 눈.

"마법 이론이라고?"

"응. 혹시 흥미로우면 우리 방에 놀러 와. 저녁 6시. 1반 타워 3층."

카린이 돌아서려는 순간, 레이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마법의 파동을 느낀다. 옥상에서 검신의 기억에 접근했을 때와는 다른 파동. 이것은 추적의 파동이다. 마법 흔적을 감지하는 능력. 리안 교사도 언급했던, 아카데미의 마법 추적자들이 가진 능력.

카린은 어제 도서관에서 레이의 마법 파동을 감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숨기고 있다. 그림자 의회의 지시인지, 아니면 자신의 판단인지. 레이는 알 수 없다.

"왜? 싫어?"

"아니. 가볼게."

카린이 웃음을 짓는다. 진정한 웃음인지, 연기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마 그 자신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다.

"좋아. 그럼 저녁에 봐."

카린이 사라진다. 레이는 책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간다. 손이 떨린다. 또 다시. 옥상에서처럼.

검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는 위험하다. 그녀는 너를 추적하고 있다. 마법 추적자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강해져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내 기억을 더 깊이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 내가..."

—너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 그걸 모르니? 저녁 밥을 잊었고, 친구의 이름도 잊었고, 이제는 누가 너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레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검신의 말이 맞다.

—나는 너를 깨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삼킬 것이다.

---

저녁 5시 50분. 1반 타워 3층.

레이는 카린의 방 앞에 서 있다. 문을 두드린다. 카린이 문을 연다. 뒤에는 아무도 없다. 동아리가 아니다. 이것은 함정이다.

"들어와."

레이가 들어간다. 카린이 문을 닫는다.

"너 정말 뭔가 이상한데. 아까 도서관에서 마법 파동을 감지했거든. 낙제생이 그런 파동을 낼 리 없지."

카린이 레이를 바라본다. 그 눈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레이가 대답하려는 순간, 복도의 발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다가온다. 이미 카린의 방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발소리가 멈춘다.

방의 문이 이미 살짝 열려 있었다. 마법 감지 장치의 흔적이 공기 중에 남아 있다.

시르바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린. 넌 뭐 하고 있어?"

카린의 얼굴이 긴장으로 경직된다. 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검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이 시간에 낙제생이 여기 있을 리 없지. 뭔가 숨기는 거 아니야?"

시르바가 문을 밀어낸다. 카린이 뒤로 밀려난다. 시르바가 방으로 들어온다.

시르바의 눈이 레이를 포착한다.

"넌..."

시르바의 손이 움직인다. 마법의 흔적이 공기를 가른다. 파괴의 마법. 2반의 엘리트 마법사의 공격.

레이의 몸이 반응한다. 검신의 기억이 활성화된다. 옆으로 몸을 날린다. 시르바의 마법이 레이의 어깨를 스친다. 벽이 타버린다.

"뭐야? 피했어?"

시르바의 표정이 변한다. 차갑던 얼굴에 뭔가 다른 감정이 흐른다.

"넌... 강한 거야?"

시르바가 다시 마법을 날린다. 이번엔 더 강하다. 파괴의 마법이 연쇄로 터진다. 방의 벽이 흔들린다.

레이는 재빠르게 움직인다. 검신의 기억이 몸을 조종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법의 폭발을 피한다. 하지만 피할 때마다 레이의 의식이 흐릿해진다. 누가 움직이고 있는가. 레이인가, 아니면 검신인가.

"이상한데... 뭐야 넌?"

시르바가 마법을 모으기 시작한다. 더 큰 규모의 공격. 방 전체를 태울 수 있는 규모.

카린이 움직인다. 그녀는 시르바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복잡한 형태의 마법. 하지만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시르바를 방해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레이를 해치려는 것인가.

시르바의 마법이 완성된다. 파괴의 광선이 레이를 향해 날아온다.

레이의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검신의 기억이 완전히 제어권을 빼앗는다. 레이의 입에서 말이 나온다. 레이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로.

"치워."

레이의 손가락이 공중을 그린다. 검이 없어도 상관없다. 검신의 기억은 이미 공기 자체를 검으로 만들 수 있다. 푸른 빛이 흔적을 남긴다. 시르바의 마법과 충돌한다.

폭발이 일어난다.

방이 흔들린다. 먼지가 날린다. 카린이 벽에 몸을 날린다. 시르바는 뒤로 밀려난다.

먼지가 걷히자, 레이는 서 있다. 손가락은 여전히 공중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레이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몸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넌..."

검신의 목소리가 레이의 입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순간, 카린이 움직인다.

그녀가 그려던 마법이 완성된다. 마법의 형태가 공중에 나타난다. 그것은 봉인의 마법이다. 하지만 시르바를 향한 것이 아니다.

레이를 향한다.

카린의 눈이 결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결정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봉인의 마법이 레이를 감싼다. 검신의 기억이 저항한다. 푸른 빛이 봉인에 부딪힌다. 하지만 봉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레이의 몸이 경직된다. 손가락이 멈춘다. 검신의 목소리가 끊긴다.

"뭐... 하는 거야..."

레이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희미해진다. 봉인이 깊어진다. 레이의 의식이 가라앉는다.

시르바가 일어난다. 옷이 타버렸지만, 상처는 없다. 시르바는 봉인된 레이를 바라본다. 그 표정은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다.

"카린. 넌..."

"빨리 나가."

카린이 레이에게 말한다. 그 목소리는 차갑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다.

"뭐?"

"빨리 나가! 지금 당장!"

카린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담긴다. 그것은 명령이자, 동시에 경고다.

레이는 봉인 속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검신도 저항할 수 없다. 봉인의 마법이 너무 강하다. 그것은 10반 학생들을 가두기 위해 설계된 마법이다.

시르바가 카린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하다.

"넌 의회를 배신하는 거야?"

카린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레이를 바라본다. 그 눈에는 죄책감과 결의가 공존한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를 지켜야 해."

시르바가 한 발 다가간다. 하지만 카린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또 다른 마법이 준비된다. 이번엔 시르바를 향한 마법이다.

"물러나. 지금 당장."

시르바가 멈춘다. 그리고 웃음을 짓는다.

"흥미로운데. 의회가 이걸 알면..."

"알면 뭐 할 건데? 이미 늦었어."

카린이 창문을 열었다. 밖은 어둠이다. 아래는 3층이다. 하지만 레이는 이미 움직일 수 없다.

봉인 속에서, 레이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검신의 기억도, 자신의 의식도. 모두 봉인되어 간다.

마지막 순간, 레이는 생각한다.

이것이 끝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