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호텔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서 대한민국 vs 베트남의 경기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박준호는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화면을 흘깃 봤다. 오후 3시. 예선전 첫 경기까지 정확히 6시간.

경기장 가는 버스 안에서 박준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옆자리의 김민재가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그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창밖을 봤다. 뒷자리에서 이준성과 최동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선전 전술에 대한 얘기였지만, 박준호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편안 시야만 있으면 된다. 편안 시야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경기장 도착 후 라커룸에서 박철수 감독은 침착한 목소리로 포메이션을 설명했다.

"베트남은 측면 공략이 약하다. 중원을 장악하면 이긴다. 이준성, 중원에서 박준호로의 패스를 정확히. 김민재, 측면에서 빠른 크로스. 최동욱, 측면 수비를 단단히."

감독이 마지막으로 의료실 의사를 바라봤다. 의사는 박준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편안 시야는 이번 달 최대 2회만 사용할 수 있어. 뇌 손상 위험이 있거든. 이 이상 쓰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올 수 있다."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의사의 경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편안 시야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감독의 시선이 박준호에게 향했다.

"넌 팀의 일부다. 기억해."

박준호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골을 넣으면 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면 된다.

전반 5분.

박준호는 중원에서 공을 받자마자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베트남 수비수가 달려들었지만, 한쪽 눈만으로도 상대의 무게중심 이동이 보였다. 박준호는 상대를 왼쪽으로 속이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공은 정확하게 골키퍼 손 위를 넘어갔다.

경기장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 응원석에서 태극기가 흔들렸다. 박준호는 팔을 들어올렸지만, 팀동료들의 손을 받지 않았다. 혼자 뛰어 중원으로 돌아왔다.

전반 18분.

이준성이 박준호에게 패스를 했다. 박준호는 공을 받는 즉시 슈팅을 시도했다. 이준성이 크로스를 원했지만, 박준호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공은 골키퍼의 왼쪽으로 휘어 들어갔다.

2:0.

전반 32분.

박준호가 중원에서 공을 탈취했다. 베트남 선수들의 움직임이 모두 보였다. 한쪽 눈으로 집중할수록 나머지 감각이 극대화되는 것을 느꼈다. 좌측면에서 김민재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박준호는 그를 무시했다. 직접 골 에어리어로 침투해 슈팅했다.

3:0.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길에 김민재가 박준호의 팔에 손을 얹으려 했다.

"준호, 잘했어. 그런데 측면으로도 좀 더 연계하면—"

"내가 알아서 한다."

박준호는 손을 뿌리쳤다. 김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고, 입술이 다물어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처음 느끼는 사람처럼. 박준호는 그 표정을 보고도 돌아서 버렸다.

후반 시작. 박준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편안 시야의 대가로 오는 두통을 견디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뇌 뒤쪽이 울렸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망치로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반 15분.

박준호가 경기장에 들어섰다. 베트남은 전반에 3골을 당한 후 수비 체형을 바꿨다. 더 많은 선수들이 박준호를 마크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한쪽 눈으로 모든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후반 17분.

박준호는 골 에어리어 좌측에서 공을 받았다. 골키퍼가 나왔다. 박준호는 편안 시야를 발동했다. 골키퍼의 무게중심, 팔의 움직임, 시선의 방향—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골키퍼는 오른쪽으로 뻗을 것이다. 박준호는 왼발로 슈팅했다.

골.

하지만 그 순간, 뇌 뒤쪽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폭발했다. 박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한쪽 눈이 초점을 잃으며 상이 겹쳤다. 무릎이 꺾였다. 몸의 균형감각이 사라졌고, 박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팀동료들이 박준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준성은 경기를 계속 진행했고, 김민재는 고개를 돌렸다. 최동욱은 박준호를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의료진이 달려왔다.

"준호! 괜찮아?"

박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두 발로 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경기장은 여전히 조용했다. 한국 응원석의 함성도 줄어들었다.

후반 27분.

박준호는 다시 중원에서 공을 받았다. 이번엔 편안 시야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의료실 의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뇌 손상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평범한 슈팅으로 골을 노렸지만, 골키퍼가 막아냈다.

후반 28분.

최동욱이 중원에서 공을 탈취했다. 그는 빠르게 골 에어리어로 침투했다. 이준성이 크로스를 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최동욱은 혼자 슈팅을 시도했다. 공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이준성이 외쳤다.

"내가 할 수 있었어!"

최동욱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절망이 묻어났다. 박준호를 믿을 수 없으니 자신도 혼자 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이.

경기는 계속됐지만, 팀의 연계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후반 30분. 경기 종료.

5:0. 베트남을 압도했다. 하지만 라커룸의 분위기는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이 흘렀다.

박철수 감독은 팔을 깍지 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내일 홍콩과의 경기가 있다. 충분히 쉬어라. 그리고..."

감독의 눈이 박준호에게 향했다.

"팀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기억해."

호텔 방. 밤 11시.

박준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왼쪽 눈을 감았다 떠보기를 반복했다. 뇌 뒤쪽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박준호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다음은 김민재의 문자 메시지였다.

"준호, 내일 경기 전에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측면 연계에 대해서..."

박준호는 읽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었다.

다음은 최동욱이었다. 라커룸에서 나가며 박준호에게 말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넌 혼자 하고 싶으면 혼자 해. 우리는 팀이 되고 싶어."

박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불빛이 흔들렸다. 아니다. 자신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틀 뒤. 아시안컵 예선전 두 번째 경기, 홍콩전.

박준호는 벤치에서 경기를 봤다. 이준성과 김민재, 최동욱이 중원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계는 어제보다 더 어색했다. 마치 서로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첫 번째 경기 때처럼 박준호가 없으면 팀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반 20분. 홍콩이 선제골을 넣었다.

박철수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박준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신호였다.

후반 15분. 아직 전반이 끝나지 않았지만, 박준호가 투입됐다.

박준호는 경기장에 들어서며 편안 시야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김민재의 시선이 만났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거리감이 있었다. 이준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더 이상 박준호를 팀동료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박준호는 무시했다. 공을 받자마자 골 에어리어로 침투했다. 편안 시야를 발동하려는 순간, 두통이 터졌다. 어제보다 훨씬 심했다. 뇌 뒤쪽에서 시작된 통증이 관자놀이까지 퍼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하지만 박준호는 슈팅했다.

골.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이번엔 견뎠다. 하지만 뇌 뒤쪽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후반 5분. 다시 한 번 편안 시야를 발동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손목에서 팔뚝까지 전해졌다. 골키퍼의 움직임을 읽고 슈팅했다.

또 골.

이번엔 박준호가 쓰러졌다. 무릎이 아닌 허리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팀동료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의료진만 달려왔다.

"준호! 괜찮아?"

박준호는 손을 들어 의료진을 밀어냈다.

"계속하겠습니다."

경기는 2:2로 진행됐다. 시간이 갈수록 박준호의 경기력은 불안정해졌다. 편안 시야를 또 쓰고 싶었지만, 뇌 손상의 위험이 자꾸만 떠올랐다. 평범한 슈팅은 홍콩 골키퍼에게 막혔다.

후반 28분. 최동욱이 공을 탈취했다. 그는 빠르게 전진했다. 이준성이 크로스를 할 준비를 했다. 최동욱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최동욱은 또 혼자 슈팅했다.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갔다.

"뭐 하는 거야! 크로스 할 수 있었잖아!"

이준성이 또 외쳤다.

최동욱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절규가 아니라 포기가 담겨 있었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말은 이미 죽어 있었다. 대신 최동욱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침묵의 항복이었다.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 김민재가 최동욱 옆을 지나쳤다.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욱은 그 손을 피했다. 팀동료의 손마저 거부하는 최동욱의 모습이 박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이준성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비통해 보였다.

경기는 계속됐지만, 박준호는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장 10분. 박준호가 다시 투입됐다. 편안 시야를 한 번 더 발동했다. 이번엔 손 떨림이 더 심했다. 공을 차는 순간 손가락이 경련했다.

골.

하지만 이번엔 박준호가 일어나지 못했다. 의료진이 달려와 목과 머리를 고정했다. 박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고통이 아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절박함이었다.

경기는 3:2로 끝났다.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장의 함성은 축제 같지 않았다.

라커룸.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박철수 감독도, 코칭스태프도. 침묵만 흘렀다.

의료실.

의사는 박준호의 뇌척수액 압력을 재며 한숨을 쉬었다.

"편안 시야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뇌 손상의 위험이 임계점을 넘었어요."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절망감이 몸을 휘감았다. 편안 시야 없이 자신은 누구인가.

"본선까지..."

"본선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박준호는 의료실을 나왔다.

예선전은 계속됐다. 박준호는 편안 시야를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팀동료들의 연계가 부실할 때마다, 상대가 거의 골을 넣을 뻔할 때마다, 자신이 쓰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3경기를 더 치렀다. 박준호는 편안 시야를 총 8회 더 발동했다.

월 제한인 2회를 훨씬 넘었다.

예선전 마지막 경기. 라오스전.

박준호는 경기장에 들어서지 않았다. 의료진의 권고였다. 팀은 8:0으로 이겼다. 박준호 없이.

라커룸에서 박철수 감독은 팀을 모았다.

"아시안컵 본선 진출이 확정됐다. 모두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감독의 얼굴은 자랑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가 있다. 팀이 하나가 아니다. 박준호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박준호가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상태로는 본선에서 우승은 불가능하다."

감독은 박준호를 바라봤다.

"너는 팀을 믿어야 한다."

침묵이 흘렀다. 팀동료들의 눈빛이 박준호에게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기대가 없었다. 실망과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 김민재는 눈을 돌렸고, 이준성은 턱을 깨물었다. 최동욱은 박준호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이미 포기했다. 팀으로서 박준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박준호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호텔 방. 밤.

박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오른쪽 눈으로만. 왼쪽 눈은 감은 채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태국 에이스 서준호였다. 박준호는 받았다.

"안녕, 박준호. 나 서준호야."

"알고 있다."

"그래? 그럼 좋아. 예선전 봤어. 넌 정말 강한 선수야. 개인적으로는."

"그래."

"하지만 넌 팀을 못 믿고 있어. 그게 보여. 우리 태국은 다르지. 우리는 팀이야."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준호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팀 전체를 향한 말 같았다.

"본선에서 만나자. 그리고 봐봐. 팀이 개인보다 강한지를 말이야."

전화가 끊겼다.

박준호는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아시안컵 본선까지 이제 정확히 2주.

김민재의 문자가 왔다. 이번엔 읽었다.

"준호, 본선 전에 우리 한 번 얘기하자. 제발."

박준호는 화면을 내려놨다. 라커룸에서 본 팀동료들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차갑고 거리감이 있었던 그 눈빛들. 자신을 향한 실망과 절망이 담긴 눈빛들.

그리고 후반 28분, 최동욱이 크로스 기회를 보고도 혼자 슈팅을 시도했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이준성의 손이 뻗어있었고, 김민재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동욱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자신도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박준호가 만든 절망이었다.

박준호는 왼쪽 눈을 떠봤다. 천장의 불빛이 선명했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도 보였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 자신이 외면하고 있는 것.

팀을 믿는 것. 팀을 필요로 하는 것. 팀과 함께 이기는 것.

그제야 박준호는 깨달았다. 편안 시야는 강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팀동료들의 신뢰를 잃은 자신은 결국 혼자가 되어 있었다. 최동욱처럼. 이준성처럼. 김민재처럼.

박준호는 눈을 감았다. 뇌 뒤쪽의 통증이 여전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본선까지 2주. 그 2주 동안 자신은 팀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내일 아침, 김민재를 찾아가야 했다. 최동욱과 마주앉아 말을 나누어야 했다. 이준성의 눈빛을 다시 살려내야 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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