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아파트 지하 3층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협회 특수팀장 이강우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렸다. 그의 뒤로 검은색 전술복을 입은 특수팀원 30명이 일렬로 계단을 막았다. 박시연의 손이 이준호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이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 그래. 여기구나."
이준호의 손가락이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검게 변해 있었다. 마치 동사한 시체의 손처럼.
박시연이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A급 감시 능력으로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이준호의 심장음이 분당 120회 이상으로 뛰고 있었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신체 곳곳에서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준호. 도망쳐."
박시연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도망칠 곳이 없어. 애초에 없었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안에는 두려움도, 분노도 없었다. 다만 어떤 확정된 것 같은 것이 있었다. 마치 이미 결정된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의 목소리.
이강우가 무전기를 들었다. "특수팀 1, 2, 3 출동. 헌터 이준호를 격리하라. 저항하면 제압하라."
순간, 지하실 전체가 울렸다.
약자연대의 은신처는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펼쳐진 거대한 공간이었다. 서울 외곽의 폐기된 지하 쇼핑몰을 개조한 장소. 600명이 넘는 저등급 헌터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지하 1층. 정태민이 먼저 반응했다.
"특수팀이다! 특수팀이 들어왔어!"
그의 목소리에 은신처 전체가 술렁였다. 600명의 헌터들이 한 번에 일어섰다. 하지만 대부분은 E급, F급이었다. 협회 특수팀은 평균 B급 이상의 정예 부대였다.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끝났다..."
"도망쳐야 해..."
"준호를..."
정태민이 계단을 향해 달렸다. 지하 2층에서 3층으로 향하는 계단. 그 위에서 이준호가 서 있었다. 박시연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고, 특수팀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준호!"
정태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준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이 정태민과 만났다. 그리고 그 뒤로 600명의 약자들이 보였다. 울고 있는 자도, 분노하고 있는 자도, 그저 절망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스킬 변조."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엄청났다. 그의 몸 주위로 빛이 일렁거렸다. 파란색, 빨간색, 금색. 세 가지 빛이 동시에 그를 감쌌다.
'갈라진 대지' - S급 지형 파괴 기술.
'검의 진수' - S급 칼날 기술.
'강철 방패' - S급 방어 기술.
세 개의 기술이 동시에 F급으로 위장되었다.
그런데 이준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제약을 어겼다. 스킬 변조는 최대 3개까지만 동시에 위장할 수 있었다. 그는 그 한계를 초월했다.
그의 손가락이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변했다. 팔뚝이 따라 변했다. 마치 석상이 되어가는 것처럼. 육체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것.
강현철이 2년 전 남긴 메모에 '최후의 수단'이라고만 적혀 있던 그것. 그 조건은 명확했다. 3개 이상의 S급 능력이 동시에 위장 해제될 때, 자동으로 발동된다. 협회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설계된 것.
이준호가 그것을 깨웠다.
"규칙을 깨뜨린다."
그의 독백이 아파트 지하를 울렸다.
이 순간이 왔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약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
"하지만 이미 깨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강현철이 이 함정을 남긴 이유를. 협회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이렇게 몰아붙일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 누군가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모든 것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계속 무너져 내릴 것인지.
이준호는 선택했다.
특수팀이 계단을 내려왔다. 이강우가 무전기로 외쳤다.
"격리하라! 지금 당장—"
그 순간, 지하 전체가 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갈라진 대지'가 발동했다. 계단이 갈라졌다. 아스팔트가 우그러들었다. 특수팀원 3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B급 이상이었다. 체력 강화로 착지했다.
'검의 진수'가 펼쳐졌다. 이준호의 손에 검이 나타났다. 없던 검. 공기 자체가 검이 되었다. 그가 한 번 휘었다. 특수팀원 10명이 한 번에 날려갔다.
'강철 방패'가 일어섰다. 그의 몸 주위로 투명한 방어막이 생겼다. 특수팀의 반격이 모두 막혔다.
그리고 네 번째 것.
이준호가 무언가를 느꼈다. 자신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 수명이 초 단위로 깎여나가는 느낌.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한 번에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남은 시간은 분 단위. 아니, 초 단위였다.
이것이 끝이다. 그는 알았다.
특수팀이 흩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물러났다. 이강우가 무전기를 들었다.
"본부에 보고한다. 헌터 이준호의 전투력이 S급 이상으로 확인된다. 격리 불가능. 즉시 상부 지시를 요청한다."
협회 본부.
회장 임준석이 모니터를 봤다. 지하에서 전송되는 실시간 영상. 하얀 빛이 가득한 화면.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준호의 모습.
"상황 보고."
임준석의 목소리가 나갔다.
"헌터 이준호가 3개 기술 동시 위장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특수팀이 압도당하는 중입니다."
임준석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강현철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가 남긴 스킬 변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준호가 극한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임준석이 손을 들었다.
"최후의 수단을 가동한다."
그의 말에 협회 본부가 울렸다. 회의실의 모든 직원들이 멈췄다.
"회장님, 그것은..."
"가동하라."
협회 본부 지하, 가장 깊은 곳. 100년간 보관되어온 협회의 핵심 시스템. 헌터 등급 판정 시스템의 중추.
그것이 깨어났다.
모니터에 붉은 글자가 떴다.
'MAD 프로토콜 가동 중.'
'모든 헌터 등급 데이터 초기화 진행 중.'
'협회 기능 전체 마비 예정.'
'사회 경제 시스템 붕괴 예정.'
임준석이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마지막 버튼. 이것을 누르면 모든 등급이 초기화될 것이다. 100년간 유지되어온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약자도, 강자도 없어질 것이다.
모두가 같은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회장님."
그 순간, 손이 임준석의 손목을 잡았다.
박시연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여기 왔는가. 아파트 지하에서 협회 본부까지. 협회 본부의 지하 터널 구조를 음파 감지로 파악한 후,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벽의 진동을 감지하며, 계단과 복도를 헤쳐 나갔다.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이 이상은 안 됩니다."
박시연의 목소리가 차갑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결의가 있었다.
그녀의 손이 임준석의 손목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음파 감지가 임준석의 심장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분당 80회. 규칙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죽음 앞의 두려움.
"당신의 심장이 이미 결정했습니다, 회장님. 당신도 알고 있어요. 이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박시연이 손을 더 눌렀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순간, 모니터가 깜빡였다.
협회 본부의 전등이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다.
시스템 초기화가 완료되었다.
모니터에는 오직 한 줄의 글자만 남았다.
'모든 등급이 초기화되었습니다. 협회 기능이 중단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 구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작성자: 강현철. 2년 전 프로그래밍됨. 조건: 3개 이상의 S급 능력이 동시에 위장 해제될 때.'
협회 본부가 혼란에 빠졌다. 직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100년간 유지되어온 시스템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모든 헌터의 등급이 초기화되었다. S급도, F급도 없어졌다.
그 순간, 아파트 지하에서 이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이 회색으로 변했다.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피부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마치 도자기가 깨져가는 것처럼. 냉기가 몸 전체를 침식해 들어왔다. 청각이 먼저 사라졌다. 주변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목까지 석상화가 진행되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정태민이 계단을 내려왔다. 600명의 약자 헌터들이 뒤따라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없었다.
주먹을 쥔 손. 눈에 맺힌 눈물.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노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무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준호가 정태민을 바라봤다. 그의 검은 눈이 정태민의 눈과 만났다.
"정태민."
목소리가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우리... 했어?"
정태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600명의 약자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울음이 아니었다.
분노의 울음이었다.
"넌 해냈어. 이제 남은 건 우리 차례야. 우리가 이 세상을 다시 만들 차례야."
정태민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변해가는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할 거야. 600명이 함께. 약자의 연대니까. 그리고..."
정태민의 주먹이 쥐어졌다. 그 옆에 선 여인도, 그 옆의 소년도 주먹을 쥐었다.
"이제 우리가 규칙을 만들 차례야."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그래... 약자의 연대니까."
목소리는 거의 들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하지만 그 말은 600명 모두의 귀에 들렸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그들이 원했던 말이었으니까.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검은색이 이제 얼굴 전체를 덮었다. 손, 팔, 다리, 가슴, 목. 모두가 석상이 되어갔다. 마치 시간이 역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마치 그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정태민이 이준호를 안았다. 차가운 석상을 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600명의 약자 헌터들이 그를 바라봤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바라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이제 다른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협회 본부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박시연이 임준석의 손목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막음이 아니었다. 함께 손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초기화되었습니다."
박시연이 말했다.
"회장님이 이걸 복구할 수 있나요?"
임준석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모든 색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00년간 자신의 손으로 지켜온 것. 자신의 정당성이 된 것. 그것이 사라졌다.
"복구 불가능합니다. 코드가 완전히 삭제되었어요."
박시연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작성자: 강현철.'
그 이름이 15년 만에 떠올랐다. 폐기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S급 헌터. 협회가 암살한 남자.
협회 본부의 다른 직원들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협회 직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도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작성자: 강현철.'
협회 본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의 혼란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깨달음의 혼란이었다.
박시연이 협회 본부의 모든 직원들 앞에서 그녀의 협회 배지를 벗었다. 배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협회의 정보 담당자 김민준이 먼저 따라 움직였다. 그는 음파 감지로 박시연의 결정을 감지했다. 그 음파의 진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박시연의 음파를 감지하며 그녀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정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침묵할 이유가 없었다.
"협회는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들 차례입니다."
김민준이 박시연의 옆에 서며 자신의 배지를 벗었다. 그의 결정이 신호가 되었다. 협회 본부의 다른 직원들도 배지를 벗기 시작했다. 행정 담당자 이수진은 고민 끝에 배지를 벗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도 이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이제 그 용기가 생겼다.
하나, 둘, 셋. 점점 더 많은 배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임준석이 혼자 남겨졌다. 모니터 앞에서. 초기화된 시스템 앞에서. 강현철이 남긴 메시지 앞에서.
그 순간, 외부에서 뉴스 방송이 울려 퍼졌다.
"...협회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모든 헌터의 등급이 초기화되었고..."
라디오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현재 서울 전역에서 던전 봉인이 동시에 해제되고 있습니다. 은행 시스템이 마비되고 신용등급 시스템이 붕괴되는 중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며..."
아파트 지하에서 600명의 약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나타났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정. 아직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
"나가자."
정태민이 말했다. 이준호의 차가운 손을 한 번 더 만졌다.
"우리가 나가서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넌 시작했어. 이제 우린 계속할 거야."
600명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준호를 뒤에 남기고. 하지만 그를 잊지 않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협회 본부 위로. 서울의 밤하늘로.
강남구의 '천상의 탑' 던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갈라지고 검은 빛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강북구의 '검의 무덤' 던전에서 봉인이 해제되었다.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문이 열렸다.
서초구의 '여신의 휴식처' 던전에서 봉인이 해제되었다. 하얀 빛이 폭발하듯 방출되었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10분마다. 20분마다. 시간 간격은 불규칙했지만, 그 방향은 명확했다.
모든 등급이 초기화되었고, 모든 던전이 해제되고 있었다.
이준호가 마지막으로 펼친 세 개의 S급 기술. 갈라진 대지, 검의 진수, 강철 방패. 그것들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아직도 위장이 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울 전역의 던전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었다.
강현철의 프로그래밍은 완벽했다. 이준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연쇄 반응. 그것은 멈출 수 없었다.
그 밤하늘 어디선가, 새로운 던전의 봉인이 또 하나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