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로운 세상

협회 중앙 시스템실 지하 5층,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목까지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신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는 것도 의미 없었다. 분 단위를 넘어 초 단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준호, 진짜 이 정도면 충분해."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하 3층 계단에서 피신해 온 정태민은 이준호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태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직 하나 남았어."

이준호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의 음성 같았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만으로 충분했다.

협회 중앙 시스템 감지 센서가 반응했다.

**[비정상 접근 감지 / S급 이상의 기술 활성화 / 위장 해제 신호 감지]**

협회 본부 40층 집무실에서 임준석 회장이 모니터를 노려봤다. 빨간색 알람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건... 4개? 5개?"

옆에 선 이혜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상회 회장이 그렇게 된 건 처음이었다.

"6개입니다."

기술팀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시에 6개의 S급 이상 기술이 중앙 시스템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건 불가능합니다. 스킬 변조는 3개 동시 위장이 한계인데..."

임준석의 눈이 찬 광채를 잃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스킬 변조의 제약은 '위장'에만 있었다. 이준호는 지금 위장을 전부 해제했다. 제약 따위는 없었다.

6개의 순수한 S급 기술이 협회의 신경계를 짓이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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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통증도 없었다. 차가움도 없었다. 단지 행동만 남았다. 손가락이 마지막 코드를 입력했다.

**[초기화 프로토콜 실행 / 등급 판정 알고리즘 삭제 / 신분 데이터베이스 소거 중...]**

화면의 진행 바가 올라갔다. 99%. 99.5%. 99.9%.

그 순간이 왔다.

100%.

협회 중앙 시스템이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 동시에, 전국의 모든 헌터 협회 지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니터가 검게 변했다. 데이터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헌터의 등급이 동시에 초기화되었다.

**[등급 시스템 붕괴 / 신분 기록 영구 소거 / 새로운 시대 개시]**

메시지는 전국의 뉴스 채널을 휩쓸었다. 방송국의 기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흰 글씨의 메시지만 화면을 채웠다.

협회 본부의 무전기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회장! 시스템이 전부 날아갔습니다!"

"모든 등급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전국 1,000개 던전의 난이도 분류가 사라졌습니다!"

임준석이 일어섰다. 손가락이 탁자를 내려쳤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이준호... 그 자식이 뭔가 했어. 어디야? 어디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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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5층에서 이준호는 이미 움직이지 못했다. 목까지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신체. 마지막 남은 것은 눈뿐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밝았다.

정태민이 이준호를 안았다. 손가락이 차갑고 딱딱했다. 마치 돌 조각을 안는 것처럼. 정태민의 손가락이 이준호의 손목을 더듬었다. 맥박이 사라지고 있었다. 호흡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온기뿐이었고, 그것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준호... 미안해. 너무 미안해."

정태민의 눈물이 흘렀다. 옆에서 김민재가 서 있었고, 박시연도 있었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는 600명의 약자 헌터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현수막이, 가슴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이준호의 시신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입구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정태민은 알아들었다.

"우리 모두... 같은 세상에 있어. 신분으로 나뉜 세상이 아니라, 함께하는 세상. 그게 내가 만들 세상이야."

눈이 천천히 감겼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정태민의 울음소리가 지하 5층 전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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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본부 40층에서 임준석은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었다. 100년 동안 정착된 등급 판정 알고리즘. 그것이 전부 사라졌다.

"회장, 그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기술팀의 음성이 떨렸다.

"이건 단순 해킹이 아닙니다. 이건 의도적인 파괴입니다. 모든 데이터가 영구 삭제되었어요. 백업도 다 지워졌습니다."

임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혜원도 마찬가지였다. 천상회 회장의 얼굴은 회색 종이처럼 변했다.

"그럼... 우리 등급도?"

이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들도 알고 있었다.

S급 헌터 이혜원은 더 이상 S급이 아니었다. 단지 '이혜원'이었다. 보상도 없고, 특권도 없고, 신분도 없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임준석은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강현철... 그놈이 이걸 준비했단 말이야? 15년 전부터?"

협회 본부 지하에서 정태민이 발견했던 폐기 기록. 강현철이 남겨놓은 메모와 시스템 백도어. 그것이 모두 이준호의 손에 전달되었고, 이준호는 그것을 완벽하게 실행했다.

100년 정착된 신분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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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후.

새로운 헌터협회 본부. 예전 협회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내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등급 시스템은 사라졌고, 대신 '능력 기반 평가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모든 헌터는 동등한 신분을 가졌다. 단지 던전에서의 역할과 능력이 다를 뿐이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차가웠다. 정태민이 새로운 협회의 약자연대 회장으로서 발언했다.

"이제 우린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받아요. 같은 급여, 같은 기회, 같은 존엄성. 그게 이준호가 남긴 거예요."

정태민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절망의 떨림이 아니라 책임감의 떨림이었다.

김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협회의 윤리위원회 위원장인 그는 이제 자신의 A급 신분을 내려놓았다. 그저 '기사 김민재'일 뿐이었다.

"그런데..."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김민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말하려다 멈춘 것처럼. 그 순간, 박시연이 태블릿을 켰다. 이제 그녀는 협회 감시관이 아니라 '정보분석관'이었다. 신분이 아닌 역할로만 정의되는 새로운 직책.

하지만 그 손에 든 자료는 평범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무너질 때 뭔가 이상했어. 협회 데이터베이스 재구축 과정에서 강현철의 메모에 암호화된 신호가 계속 나왔어. 처음엔 노이즈라고 생각했는데..."

박시연이 화면을 넘겼다. 복잡한 코드가 떠올랐다. 강현철이 15년 전 남겨둔 시스템 분석 자료였다. 그 안에는 협회의 정상적인 운영 기록 사이로 이상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강현철의 기록을 더 파보니... 협회가 정말로 한 일이 뭔지 알았어. 등급을 만든 게 아니야.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던전을 조작했어."

침묵이 회의실을 채웠다.

"조작이라니?"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가 조작된다는 거예요?"

"던전의 난이도는 자연발생적인 게 아니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정하고 있었어. F급 던전에는 의도적으로 약한 몬스터를 배치했고, S급 던전에는 강한 몬스터를 몰아줬어. 그럼으로써 등급 격차를 고정시켰던 거야."

김민재가 손을 들었다. "그럼 강현철이 우리에게 준 스킬 변조는?"

"그걸 깨뜨리기 위한 도구였어. 강현철이 남겨둔 마지막 유산."

회의실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들은 모두 깨달았다. 이준호가 죽으면서 무너뜨린 건 단순한 '등급 시스템'이 아니었다. 100년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짜놓은 거대한 구조였다.

"그럼 지금 뭘 해야 해요?" 정태민의 목소리는 작았다. "이준호는 이미..."

"이미 다 했어." 김민재가 말을 끊었다. "그놈이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남은 건 우리가 할 일이야."

박시연이 화면을 또 넘겼다. 이번엔 던전 분포도였다. 서울 전역의 1,000개 던전이 표시돼 있었다. 그 중 상당수에 빨간 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던전들이 정말로 안전한지 다시 조사해야 해. 강현철이 남긴 코드를 보니 어딘가 이상한 신호가 나오고 있어. 특히 심층 던전들에서."

"심층 던전?" 정태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아무도 진입하지 말라는..."

"맞아. 아무도 진입하지 말라고 했지. 왜 그럴까?"

침묵이 회의실을 채웠다.

---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깊은 던전. 절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곳. GPS도 신호를 보내지 못하는 심층부의 심층부.

검은 관이 놓여 있었다. 관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글도 아니고 한자도 아닌, 뭔가 다른 문자. 마치 고대의 언어처럼 보이는 것.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검은 손가락. 마치 이준호의 손처럼 검은 손가락이. 하지만 이건 다른 손이었다. 훨씬 크고, 훨씬 오래된 손이었다.

눈이 떠졌다. 동공이 없는 검은 눈. 그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추었다. 처음엔 흐렸던 상이 점점 선명해졌다. 관의 내부. 이 던전. 그리고...

입이 열렸다. 썩어버린 듯 보이는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건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서 울려 나왔다.

"깨어났다."

관을 밀어내는 손이 또 나타났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손들이 관을 밀어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관이 동시에 열렸다.

일어서는 것들. 검은 것들. 마치 석상화된 시신들처럼 보이지만, 움직였다.

첫 번째 것이 완전히 일어섰다. 그것은 강현철이었다. 15년 전 협회 특수팀에 의해 암살당했던 S급 헌터 강현철. 하지만 죽지 않았다.

강현철의 몸에서 검은 빛이 흘렀다.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렸다. 그것이 닿는 곳마다 던전의 벽이 반응했다. 기호가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회로도처럼 던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임을 보여주듯.

"나는 죽지 않았다."

강현철이 돌아섰다. 그의 옆에 또 다른 것들이 섰다. 마찬가지로 검게 변한 것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강현철과 같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각각 다른 형태를 한 것들. 마치 다양한 시대의 유해들처럼.

"우리도 죽지 않았다."

던전의 깊숙한 곳에서 더 많은 것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 모두 검은색으로 변했지만, 각자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깊은 곳으로. 더 오래된 던전으로.

강현철의 손이 들렸다.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 너머에, 또 다른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 더 크고, 더 검은 입구.

그 입구의 저 너머에서는 뭔가가 울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만 있던 것이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는 듯이.

"이준호. 넌 충분히 했어."

강현철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서.

"이제 우리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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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곽 묘지에서.

이준호의 무덤 앞에 약자들이 모여 있었다. 600명. 아니, 더 많았다. 지금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달 이 묘지를 찾았다. 신분이 초기화된 후, 약자연대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제 그들은 '약자'가 아니었다. 그저 헌터였다.

정태민이 무릎을 꿇었다. 손에 들린 것은 새로운 헌터 신분증. 더 이상 'F급'이라는 글씨는 없었다. 단지 이름과 능력만 있었다. '정태민 - 창술 전문' 그뿐이었다.

"이준호, 봤어? 우리 변했어. 진짜 변했어."

정태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근데 이번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넌 했어. 넌 정말 했어. 근데..." 정태민이 무덤의 비석을 쓸어냈다. "넌 한 가지를 놓쳤을 거야.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

바람이 불었다. 묘지의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딘가 먼 곳에서 울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던전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같은 것. 마치 누군가가 깨어나고 있는 듯한...

정태민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반응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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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완**

**제2부: 깨어나는 것들**

**곧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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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예고**

**당신이 알던 던전은 가짜였다.**

**진짜 던전이 깨어난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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