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현철의 유산
협회 본부 지하 3층. 정보 보안실의 백업 서버실이었다.
정태민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창문 없는 회색 방에서 모니터 네 개가 빛을 뿜어냈고, 화면에는 협회의 폐기된 기록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침입한 지 정확히 14분.
"여기다."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라가 그의 어깨 너머로 몸을 구부렸고, 이준호는 지하실 입구에 선 채로 귀를 기울였다. 한강 다리 아래 계단에서 박시연과의 통화를 끝낸 지 2시간. 600명의 저등급 헌터들이 모인 은신처—낡은 아파트 지하실—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강현철. 파괴자 강현철."
정태민이 화면을 확대했다. 파일 생성 날짜: 15년 전. 분류: '상위 기밀·폐기 처리 완료'.
이미라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죽음의 원인이... 추적 표식 중독?"
화면에 떠오른 이미지는 명백했다. 시체 사진. 손목에 새겨진 작은 기호. 협회만이 사용하는 추적 표식. 그 표식 주변으로 까맣게 썩어 들어간 살.
이준호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강현철. 15년 전 죽은 S급 헌터. 이준호가 폐허 던전에서 발견한 시체. 그 유해에서 꺼낸 '스킬 변조'—모든 기술을 원하는 등급으로 위장할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능력.
"협회가... 그를 죽였단 말인가?"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가락이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추적 표식은 강제 위치 추적 장치야. 협회 특수팀만 다룰 수 있어." 이미라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깊게 박으면... 제거하려다가 감염되는 거고..."
이준호는 말이 없었다. 손가락이 창백했다. 지난 며칠간 스킬 변조를 세 번 썼다. 1시간씩. 3개월분의 수명이 증발했다. 손가락이 그걸 증명했다. 마치 얼어붙는 듯 흼어지는 살색.
"더 있어." 정태민이 다른 탭을 열었다. "협회 내부 메모."
화면에 떠오른 문서. 작성자: 임준석 회장. 날짜: 15년 전 3월 15일.
*'강현철의 등급 시스템 비판은 조직 전체의 신뢰를 훼손한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특수팀에 지시: 추적 표식을 통한 무력화. 모든 증거는 폐기한다.'*
침묵.
지하실의 600명이 숨을 참았다. 누군가 떨어진 펜 소리가 가장 큰 음이었다.
이준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흔들렸다.
"강현철이... 협회에 의해 제거되었구나."
목소리가 낮았다. 감정이 없었다. 더 무서운 건 그 무감정이었다.
정태민이 돌아봤다. "이준호?"
"그 사람도 이 시스템을 바꾸려고 했어."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나도 해야 한다."
방의 공기가 변했다. 누군가가 숨을 내쉬었고, 또 누군가가 섰다. 맨 뒤에 앉아 있던 남자—40대 택배 기사 출신 F급 헌터—가 일어섰다.
"우리도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옆의 여자도 일어섰다. 간호사 출신이었다.
"우리도."
여자가 따라 말했다.
그리고 한 명, 또 한 명. 지난 일주일간 약자연대에 몰려온 저등급 헌터들이 차례로 일어섰다. F급, E급, D급. 10년, 15년, 20년을 쥐굴 같은 던전에서만 일한 사람들. 결혼도, 집도, 꿈도 포기한 사람들.
모두가 일어서고 있었다.
정태민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600명이 600명이 아니야. 이건... 반란이야."
이미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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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본부. 회장실.
임준석이 탁자 위에 손가락을 내려쳤다. 회의실 벽면에 설치된 화면에는 한강 다리의 영상이 나타났다. 약자연대의 시위. 경찰차가 도착했지만, 특수팀은 아직 출동하지 않았다.
"이준호가 협회 기록을 해킹했습니다."
박시연이 아니라 다른 감시관이 보고했다. 박시연은 이미 배치 해제 상태였다. 임준석의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뭔가 찾았나?"
"강현철 사건의 폐기 기록들입니다. 15년 전 사망 원인, 협회 특수팀의 관여 증거, 그리고..."
감시관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당신의 지시 메모도 포함됩니다."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임준석의 얼굴이 변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15년 전 일이 고스란히 나타날 리 없었다. 분명 폐기 처리했는데.
"강현철은 시스템 전복을 시도한 테러리스트였다. 그것은 공식 기록이다."
임준석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그가 죽은 것도, 그 이유도 모두 정당한 조직 방위였다."
회의실의 기사들이 시선을 피했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준호와 약자연대는 테러 조직이다."
임준석이 일어섰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거하라. 경찰, 특수팀, 필요하다면 길드도 동원한다. 이 시스템이 흔들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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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길드 '천상회' 본부. 회장실.
이혜원이 영상 통화를 끝냈다. 화면에는 임준석이 보여주는 이준호의 기록이 떠 있었다. 데이터 이상. 비정상적 클리어 속도. 그리고 강현철과의 연결고리.
"스킬 변조라고?"
이혜원의 옆에 앉은 A급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런 건 존재할 수 없어. 능력 체계상 불가능한데..."
"존재한다는 게 문제지."
이혜원이 찻잔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시스템이 무너지면 우리도 무너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S급 자질.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신분. 이 시스템이 없다면 자신은 그저 '이혜원'일 뿐이었다. 능력도, 지위도, 부도 없는 한 명의 인간.
"협회와 함께하자. 반드시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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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로 돌아온 이준호.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낡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강현철이 남긴 메모. 스킬 변조의 사용법과 함께 적혀 있던 글.
*'이 능력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수명 따위는 싼 값이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면 좋겠지만, 내가 실패하면... 누군가는 이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 두루마리를 남긴다. 만약 이것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제발 계속해 주길.'*
이준호가 글을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창백했다. 이제 그 글의 의미가 명확했다.
강현철은 혼자였다. 그래서 죽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600명이 있었다. 그리고 더 많아질 것이었다.
"정태민."
이준호가 불렀다.
"네?"
"협회 기록에서 강현철의 동료가 몇 명이나 있었어?"
정태민이 화면을 뒤적였다. "약 50명. 모두 협회에 의해 추적되거나 제거된 것 같아요.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추적 표식이 15명에게 발견됐고..."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15년 전 강현철의 반란은 50명이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제는 600명이다.
"이미라."
"네."
"협회 기록 중에 박시연의 이름이 있어?"
"감시관 박시연이요? 음... 5년 전부터 기록이 남아 있네요. 그 이후로 계속... 아, 뭔가 달라진 게 있어요."
"뭐?"
"2년 전부터 강현철 관련 기록들을 계속 조회했어요. 나중엔 협회 상위 기밀 폴더까지 열려고 시도했고... 근데 막혔어요. 임준석이 개인적으로 접근을 차단한 것 같아요."
이준호가 생각했다. 박시연은 강현철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을 그것을 추적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박시연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다. 협회 신분증은 없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박시연?"
박시연이 한 발 한 발 디디며 가까이 왔다. 600명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협회의 감시관. 시스템의 내부자. 그런데 왜 여기에?
박시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협회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침묵.
"15년을 협회에 있었어요. 신입 기사로 들어가서 감시관까지 올라왔어요."
박시연이 한숨을 쉬었다. 마치 15년을 한 숨에 내려놓는 듯이.
"강현철을 죽인 게 협회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했으면 나도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침묵했어요. 15년 동안."
그녀가 이준호를 봤다. 눈가가 축축했다.
"당신이 나타났을 때, 나는 당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스템을 지키는 게 내 일이니까. 하지만..."
박시연이 한 발 더 가까이 왔다.
"당신은 달랐어요. 혼자가 아니었어요. 600명이 따랐어요. 그리고 계속 따를 거예요. 그렇다면 이번엔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빴다.
"이 안에는 협회의 모든 내부 기록이 들어 있어요. 임준석의 지시, 길드와의 유착, 등급 조작의 증거, 그리고 강현철을 포함한 25명의 암살 기록. 다 여기 있어요."
정태민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미라의 손이 입을 막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박시연이 말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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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석이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박시연이 협회를 떠났다는 보고가 나타났다. 그녀와 함께 협회의 기밀 문서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15년 만에.
협회 특수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준호와 약자연대의 위치를 파악했는가?"
"네, 회장님. 서울 강남구 구반포동 아파트 지하실입니다. 현재 600명 이상이 모여 있는 상태입니다."
"특수팀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임준석이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 뭔가 어두운 감정이 떠올랐다.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 이것은 국가적 비상 상황이다."
통화가 끊겼다.
임준석이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 그 안에는 600명의 반란자들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강현철의 유산을 받은 자였다.
그의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임준석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그가 지킨 시스템 전체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했다.
절대로.
협회 특수팀의 차량들이 강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무음 이동. 밤 1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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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연의 말이 끝나자 지하실이 요동쳤다. 누군가의 울음이 터져나왔고, 다른 누군가는 박시연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 정태민이 "미쳤다, 진짜 미쳤다"를 반복하며 중얼거렸고, 이미라는 가방 안의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며 눈을 빨개지게 했다.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600명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의 눈은 박시연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 위의 작은 상처들. 15년을 협회에 있으면서 남은 것들.
"왜 지금?" 이준호가 물었다.
박시연이 한숨을 쉬었다.
"강현철의 파일을 읽었어요. 완전한 파일은 아니었지만, 임준석이 직접 지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이 그 파일들을 찾으려고 했다는 걸 알았을 때..."
박시연이 눈을 감았다.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600명을 모았을 때, 나는 깨달았어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는 걸."
그녀가 눈을 떴다.
"강현철도 그랬어요. 혼자였어요. 그래서 죽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번엔 다를 수 있어요."
이준호가 천천히 움직였다. 지하실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거기에는 협회의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임준석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그 아래 특수팀, 감시관, 기사들. 그리고 맨 아래 수천 개의 던전과 수만 명의 헌터들.
이준호는 거기에 박시연의 이름을 더했다. 협회 내부자. 그리고 그 이름 옆에 화살표를 그었다. 아래로.
"강현철의 기록이 다 들어 있어?" 이준호가 물었다.
"네. 암살 지시, 시간, 장소, 실행자까지. 모두."
박시연이 가방을 들었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있어요."
그녀가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빨간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협회 회장 직인.
"임준석이 강현철을 죽인 이유. 그것도 기록되어 있어요."
침묵이 지하실을 채웠다. 600명이 숨을 죽였다.
박시연이 읽었다.
"'파괴자 강현철, 등급 시스템 붕괴 혐의로 사형 집행. 약자연대 조직 혐의로 선제 제거. 시스템 유지를 위한 필수 조치.'"
정태민이 비명을 지르듯 웃었다. 미쳐버린 웃음.
"필수 조치? 사람을 죽이는 걸 필수 조치라고?"
이미라가 정태민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눈은 박시연이 들고 있는 서류에 못을 박고 있었다.
이준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스킬 변조를 사용할 때마다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 능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소진이었다. 분노가 아니라 결의였다.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칼날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강현철은 어떻게 죽었어?"
박시연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사진. 폐허 던전의 입구. 그리고 그 앞에 누워 있는 시체.
"협회 특수팀이 폐허 던전에 투입됐어요. 목표는 강현철을 '사고'로 보이게 제거하는 것. 하지만 강현철은 S급 이상이었어요. 그들이 이기지 못했어요."
박시연이 다음 사진을 넘겼다. 혈흔. 여러 구의 시체. 특수팀원들이었다.
"그래서 임준석이 직접 내려왔어요."
다음 사진.
폐허 던전 깊숙한 곳. 강현철과 임준석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사진은 누군가 몰래 찍은 것 같았다.
"그들은 3시간을 싸웠어요. 임준석은 S급이 아니었지만, 그는 협회 회장이었어요. 즉, 그는 협회의 모든 것을 무기로 쓸 수 있었어요."
박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현철이 졌어요. 마지막 사진."
강현철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임준석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현철의 손목에는 작은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협회의 추적 표식.
"죽기 전에, 강현철이 뭔가를 꺼냈어요."
박시연이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손글씨. 누군가 급하게 쓴 글씨.
'이 능력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수명 따위는 싼 값이다. 누군가 이걸 받을 거고, 그 사람이 우리를 이어갈 거야. 미안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이준호가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하실의 600명이 침묵했다.
정태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라도. 옆의 청년도. 그들은 강현철을 몰랐다. 하지만 그 글씨 속의 절망과 희망은 알 수 있었다.
이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시연."
"네."
"협회가 너를 찾으면 어떻게 될까?"
박시연이 웃었다. 절망적인 웃음이었다.
"이미 찾고 있을 거예요. 내 신분증이 협회 시스템에서 삭제된 지 30분이 지났어요. 임준석은 지금 내 위치를 파악하려고 할 거고, 특수팀을 보낼 거예요."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빴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어요. 여기 있든 어디 있든 죽을 거라면, 차라리 뭔가 남기고 죽는 게 낫다고."
이준호가 박시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사합니다."
박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아직입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에요. 이 기록들이 세상에 나가려면..."
그 순간, 지하실의 천장에서 소리가 났다.
저음의 진동음. 차량의 엔진음.
여러 대.
정태민이 일어섰다. "뭐... 뭐야?"
이미라가 창밖을 봤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검은색 차량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이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협회 특수팀.
박시연이 시계를 봤다. 밤 11시 53분.
"빨리."
박시연이 이준호를 잡았다.
"나가야 해요. 뒷문이 있어요?"
정태민이 "있어! 지하 3층으로 가면..." 하고 말했지만 이미 이준호는 움직이고 있었다.
600명의 약자연대는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짐을 챙기고, 누군가는 박시연이 들고 온 서류들을 들었다. 이미라는 가방을 꺼내 사진과 기록들을 담기 시작했다.
이준호가 박시연을 이끌었다. 지하실의 뒷문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1층. 2층.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빠르고 무거운 발걸음. 특수팀이 지하실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장비가 부딪치는 소리, 무전기의 잡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이준호!"
박시연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창백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의 손가락도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스킬 변조의 첫 번째 사용 이후로 계속.
"수명이 얼마나 남았어요?"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을 더 빨리 내려갔다.
3층. 뒷문이 보였다. 협회 특수팀의 발걸음이 2층까지 내려왔다.
이준호가 뒷문을 밀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이준호의 폰이 아니었다. 박시연의 폰이었다.
화면에는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통화 번호는 협회 본부였다.
박시연이 받았다.
"박시연 감시관. 협회로 돌아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임준석의 목소리였다. 차분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칼날이 있었다.
박시연이 말했다.
"저는 협회를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약자연대와 함께 제거될 것이다."
박시연이 통화를 끊었다.
"이제 우리는 공식적으로 반란자입니다."
뒷문을 나가면서, 그녀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길이 생겼다는 것도.
이준호와 박시연은 밤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뒤에서는 협회 특수팀의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하실에는 600명의 약자연대가 남았다.
서류들을 들고. 희망을 들고. 그리고 분노를 들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특수팀 대원들은 지하실의 문을 부수기 위해 폭발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핀을 빼는 금속음. 타이머의 비프음. 밤 11시 57분.
협회의 최후 통첩이 날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