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기득권의 흔들림

카페 창밖으로 여의도 빌딩들이 오후 햇살에 반짝였다. 이준호는 아메리카노 잔을 들었다가 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김민재가 앉았다. 기사 복장은 벗었지만 등 펴는 습관은 남아 있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직진했다.

"당신, 정말 그냥 F급이세요?"

이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기사님이 왜 자꾸 그걸 묻습니까?"

"협회 내부에서 당신 건으로 회의가 열렸습니다."

잔이 탁 소리를 냈다. 이준호가 놨다. 감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목이 말랐다.

"당신을 '등급 위변조 혐의자'로 낙인찍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회장이 직접 지시했습니다. 박시연 감시관이 당신 데이터에서 이상 신호를 포착했다고 보고했거든요."

"이상 신호."

"네. 망령의 숲 클리어 속도, 기술 사용 패턴, 신체 부하 곡선. 모두 F급이라기엔 말이 안 된다고."

이준호는 천천히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김민재가 그걸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기사로 10년을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았습니다." 김민재가 말을 이었다. "A급 자질로 태어났고, 협회에서 교육받고, 매뉴얼대로 일했어요. 그 과정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도 많았지만, 그냥... 시스템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나한테는 이득이었으니까."

이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을 보니까." 김민재가 손을 모았다. "이 시스템이 정말 맞는 건지... 의문이 들어요."

"기사님 입장에선 위험한 생각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거고." 김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당신, 정말로 이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는 건가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당신은 이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그럼 뭐 하는 겁니까?"

김민재가 웃음을 흘렸다. 목이 메인 듯한 웃음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살아온 방식이 있으니까. 그걸 바꾸는 게 무섭고."

이준호는 김민재의 얼굴을 봤다. 10년 기사를 한 남자의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굳어 있었다. 이것이 바뀐다는 건 이렇다는 뜻이었다. 기득권 진영에 균열이 생긴다는 건, 누군가의 불안으로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만약에요." 김민재가 음성을 낮췄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 시스템을 바꾸려고 한다면, 저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김민재가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이준호의 손이. 김민재는 그걸 느꼈다.

---

협회 감시센터, 지하 3층. 박시연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세 개의 화면이 켜져 있었다. 첫 번째: 여의도 카페 CCTV. 두 번째: 이준호의 이동 경로 추적. 세 번째: 망령의 숲 던전 로그.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데이터가 쏟아져 나왔다.

망령의 숲 진입: 오전 6시 02분 예상 클리어 시간(F급 기준): 8시간 ~ 12시간 실제 클리어 시간: 2시간 17분 신체 부하 수치: 850 (정상 범위 F급: 200~300) 기술 사용 패턴: 검술 기본형 × 47회, 체력 강화 × 23회, 감지 능력 × 8회

박시연이 손을 멈췄다. 화면을 확대했다. 기술 사용 수치의 파형을 확대했다. 일반적인 F급 기술 곡선이 아니었다. 기술마다 위력의 편차가 거대했다. 때론 E급 수준, 때론 C급 수준.

"이 남자는..."

박시연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기술별로 필터링했다. 검술만 추출했다. 47회 중 45회가 정상 범위였다. 하지만 2회가 다른 곡선을 그렸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신호를 왜곡한 것처럼.

그건 불가능했다.

F급은 S급 기술을 못 쓴다. 자질이 못 쓰게 한다. 등급 보정이라는 자연 법칙이 그렇게 정했다. 그런데 여기 데이터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박시연이 화면을 꺼졌다. 켜졌다. 다시 확인했다. 같은 결과였다.

핸드폰을 들었다. 직통 번호를 눌렀다.

"회장님. 이준호 헌터의 데이터 이상이 확인되었습니다."

멀리서 임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급 위변조 혐의입니다. 위장 기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침묵. 2초. 3초.

"체포 영장을 신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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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밖. 이준호가 휴대폰을 켰다.

협회 공식 앱이 울렸다. 긴급 공지. 푸시 알림이 화면 위에 떴다.

【긴급 공지】 이준호 헌터(F급)에 대해 등급 위변조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혐의: 기술 위장, 등급 사기 대응: 즉시 협회에 자수 시 감형 대상 조치: 거부 시 강제 체포, 헌터 자격 박탈

이준호의 손가락이 창백했다. 이미 창백했던 손가락이 더 창백해졌다.

카페 옆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정태민과 이미라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호가 문을 열고 탔다. 정태민이 핸드폰을 들었다.

"이준호 형, 봤어요?"

"응."

"우리 뭐... 이미라가 말했는데, 형이 걸린다고 했어요. 어떻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여의도 빌딩들이 오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정태민이 침묵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옆에 앉은 이미라도 알아챘다. 이미라가 물었다.

"혹시... 이게 계획이었어?"

이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라의 얼굴을 봤다.

"계획은...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이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협회 공지를 읽었다. 다시 읽었다.

수명 소진 누적: 500일.

망령의 숲에서 120일. 기사 시험에서 60일. 약자연대 첫 모임 준비에서 45일. 그리고 지난 일주일, 김민재를 만나기 위한 위장에 275일.

남은 수명: 약 26년.

정상 수명이 60년이라면, 이준호는 이미 절반을 소진했다. 30대 초반 나이에 60대 초반의 신체 시간을 갖고 있었다.

"형?"

정태민이 물었다.

"뭐... 뭐 해요?"

이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에 협회 공지가 떠 있었다. 그 아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댓글 23,447개】 - 드디어 들킬 뻔했다 ㅋㅋㅋ F급이 뭘 한다고 - 근데 진짜 뭔가 수상한데? 저 속도는... - 협회 계획이라고 봐. 아래 기사 읽어봐 - 약자연대 끝이네. 회장이 없으면 이들도 먹이감 - 이미 수십 개 길드가 움직인다더라

이준호가 댓글을 내렸다. 그 아래 또 다른 댓글이 있었다.

- 그래도 가는 거 아니냐? 우리 같은 놈들을 위해 온 유일한 기회잖아

이준호가 화면을 켰다가 껐다.

"자동차 움직여."

"어... 어디로?"

"약자연대 모임 장소. 지금 다 모이라고 연락해."

정태민이 운전대를 잡았다. 손이 떨렸다.

"형, 이거 우리 진짜... 끝나는 거 아니야?"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협회 드론이 하늘에서 이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세 개. 아니, 다섯 개.

그것만이 아니었다. 골목골목 어디선가 협회 수사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전기가 울리고 있었다.

"이준호 용의자 추적 중. 현재 여의도 지역 이동."

박시연이 감시센터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준호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움직였다. 차량이동 속도. 시내 도로. 북쪽.

"모든 체크포인트에 통보하세요. 용의자 차량 정지. 강제 체포 준비."

그 순간,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민재였다.

"당신 지금 뭐 해요?"

"피하는 중입니다."

"미쳤어요? 협회를 상대로?"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을 상대하는 거고."

"그게... 같은 거 아니야?"

이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목이 메인 듯한 웃음이었다.

"기사님, 당신은?"

침묵.

"당신은 어디에 있을 거예요?"

"그게..."

"쉬운 선택 하지 마세요. 한 번 선택하면 돌아올 수 없으니까."

이준호가 전화를 끊었다.

---

협회 회장실. 임준석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 이준호의 위치를 추적하는 빨간 점이 한강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면 옆에는 실시간 카운트다운이 떠 있었다. 체포까지 8분.

옆에 이혜원이 서 있었다. 천상회 회장. 그녀의 얼굴은 단단했다.

"저 남자를 없애야 합니다."

"진행 중입니다."

"물리적으로."

임준석이 고개를 들었다. "협회의 방식은 법입니다."

"법으로 안 되니까 저 남자가 문제가 아닙니까?"

임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를 다시 봤다. 빨간 점이 한강 방향으로 급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마우스를 집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남자 뒤에 누가 있습니까?"

임준석이 박시연에게 핸드폰으로 말했다.

"차량 탑승자 분석하세요."

박시연의 답이 왔다.

"이미라(E급 헌터), 정태민(E급 헌터), 그리고... 김민재 기사가 방금 협회를 나갔습니다. 현재 추적 중입니다."

임준석의 얼굴이 굳었다.

"김민재가?"

"네, 회장님. A급 기사가 용의자 편에 섰습니다."

임준석은 모니터를 끄고 다시 켰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다시 켜졌다. 하지만 영상은 왜곡되어 있었다.

이혜원이 웃음을 흘렸다. 냉랭한 웃음이었다.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임준석은 입을 다물었다. 화면 속 왜곡된 영상을 바라봤다. 그 안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모니터를 끄고, 창밖을 봤다.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어딘가에서 이준호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남자를 제거하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임준석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향했다.

---

한강 다리 위. 차가 정지했다.

이준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정태민과 이미라도 나왔다.

"이건... 뭐예요?"

정태민이 물었다. 다리 위에는 이미 수십 대의 차가 정차해 있었다. 그 차들에서 내리는 사람들. 모두 헌터들이었다. 협회 앱에 등록된 약자 헌터들이었다.

한강 다리 위로 계속 차들이 몰려들었다. 50명, 100명, 200명. 처음엔 느릿하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약자연대 채팅방의 메시지를 본 헌터들이 일어선 것이었다. 직장을 나가고, 던전을 버리고, 자신들의 신분증을 들고 다리로 향했다.

"약자연대의 응답이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한강 다리 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처음엔 234명이라던 채팅방의 숫자를 훨씬 넘었다. 300명, 400명, 500명. 계속 늘어났다. 더 이상 화면 속 숫자가 아니었다. 실제 인간의 몸뚱이가 다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미라가 소리쳤다.

"이건 어떻게... 언제 준비한 거예요?"

"준비한 게 아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그냥 모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았으니까."

정태민이 휴대폰을 들었다. 약자연대 채팅방을 봤다. 메시지가 폭주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준호】 모두 지금 당신이 있는 던전을 버려라. 모두 지금 당신의 길드 신분증을 버려라. 모두 지금 당신의 등급을 잊어라.

우리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약자연대 응답 중... 234명】 【약자연대 응답 중... 456명】 【약자연대 응답 중... 678명】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었다. 다리 위에 서 있는 실제 인간들의 결집이었다. 각자의 선택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다른 차가 다리 위로 올라왔다. 김민재가 내렸다. 협회 제복을 입은 채로.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협회를 떠나 있었다.

"미안합니다."

김민재가 이준호에게 말했다.

"늦었습니다."

"기사님이 왔으면 됩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협회 체포팀이 다리 양쪽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렸다. 스피커가 울렸다.

"이준호 용의자, 항복하세요. 저항 시 강제 진압합니다."

박시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다리 위에서 한강을 바라봤다.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어떻게 끝날지는 당신들 손에 있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다리 위의 모든 약자 헌터들이 듣고 있었다.

"항복하거나, 함께 걷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협회 체포팀 사령관의 무전기가 울렸다. 협회 본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강제 진압. 허가."

사이렌이 울렸다.

---

협회 특수팀이 양쪽에서 동시에 진입했다. 방탄 복장, 전기 곤봉, 포박용 와이어. 500명을 제압하기 위한 장비들이었다.

정태민이 창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준호, 우리...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냥 서 있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특수팀이 다가왔다. 50미터. 30미터. 20미터.

이미라가 소리쳤다.

"이준호! 뭐 하는 거야! 도망쳐!"

"도망칠 곳이 어디 있겠어요?"

이준호가 대답했다. 한강을 향해 한 발 더 앞으로 나갔다. 다리 난간까지 불과 5미터 남았다.

협회 특수팀이 멈췄다. 상황이 이상했다. 용의자가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다가오고 있었다.

"이준호 헌터, 지금 움직이면 무력 진압합니다!"

스피커가 울렸다. 박시연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이준호가 난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멈춰."

김민재가 앞으로 나섰다. A급 기사의 몸. 협회 제복을 입은 채로. 특수팀과 이준호 사이에 선 것이었다.

"김민재 기사, 물러나세요!"

박시연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김민재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10년을 협회에서 일했습니다. 10년을 이 시스템을 믿고 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보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공포가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수팀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김민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 이름으로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단지 다른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기사님, 물러나세요. 명령입니다!"

"명령을 거부합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협회 기사가 명령을 거부했다. 그것도 공식 무전에서.

박시연은 협회 본부로 보고했다.

"회장님, 김민재 기사가... 항명했습니다."

---

협회 회장실. 임준석이 모니터를 봤다. 한강 다리 위의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특수팀이 김민재를 지나쳐 이준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이혜원이 물었다.

"명령 위반자는 즉시 구속입니다. 협회의 규칙입니다."

임준석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마우스를 누르는 손가락이.

"진압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이 내려지는 순간, 모니터에 이상이 생겼다. 화면이 끊겼다가 다시 켜졌다. 하지만 영상이 왜곡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신호를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뭐가 된 거예요?"

임준석이 소리쳤다.

"신호 방해, 회장님. 협회 시스템에 불법 접근이 감지됩니다!"

기술팀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

한강 다리 위. 특수팀이 더 가까워졌다. 10미터.

이준호가 난간을 꽉 잡았다. 다리 아래로는 한강의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준호!"

정태민이 소리쳤다.

"뛰어내릴 거야?!"

이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정태민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무언가 더 있었다. 희망이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김민재의 선택을 봤어요.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봤어요."

이준호가 난간 위로 몸을 날렸다.

한강 위로 몸을 던졌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것처럼. 8미터 높이에서 낙하하는 신체. 하지만 그 낙하는 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이준호가 회전했다. 검을 뽑았다. 그 검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S급의 검이었다.

'스킬 변조.'

이준호의 몸이 변했다. F급의 신체에서 S급의 신체로. 아니, 더 높은 것으로.

공중에서 검술이 펼쳐졌다. 한강 위에서 검의 궤적이 빛으로 그려졌다. 첫 번째 휘둘음. 손가락부터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이 빨려나가는 것처럼. 검이 공기를 가르며 음파를 만들었다. 두 번째 휘둘음. 손목이 굳어갔다. 뼈가 부스러지는 고통이 팔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다리의 난간이 갈라졌다. 세 번째 휘둘음. 팔 전체가 얼어붙는 느낌. 근육이 말라가고, 신경이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강의 수면이 폭발했다.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특수팀이 멈췄다. 그들이 본 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공중에서 이준호의 신체는 붕괴하고 있었다. 가슴팍까지 창백해졌다. 마치 시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살갗이 말라가고, 뼈가 부스러지는 감각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절망적인 고통. 그것이 스킬 변조의 대가였다. 수명이 초 단위로 소진되는 신체적 고통.

"2시간 사용. 240일 소진."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입술이 파래지고 있었다.

공중에서 착지했다. 한강 다리의 반대편. 협회 특수팀이 있던 쪽의 반대편.

다리 난간을 넘어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준호가 그곳으로 달렸다.

"추격!"

박시연의 명령이 내려졌다.

특수팀이 달렸다. 하지만 김민재가 막아섰다.

"이 사람들은 먼저 가세요."

김민재가 말했다. 손에 검을 들고. A급 기사의 검을.

"우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500명의 약자 헌터들이 움직였다. 협회 특수팀을 막기 위해 손을 맞잡고. 몸을 맞대고. 약한 자들의 벽을 만들었다.

첫 충돌 순간, 특수팀의 밀침에 앞줄 헌터들이 밀려나갔다. 한 명의 E급 여성 헌터가 밀려갈 뻔했다. 옆에 서 있던 D급 남자 헌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손가락이 떨렸지만 놓지 않았다.

"버티자!"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더 많은 손들이 연결되었다. 약자들의 손. 그 손들이 만드는 벽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협회 특수팀이 밀었다. 하지만 밀리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약자들의 연대였다.

---

한강 다리 아래. 계단을 내려가며 이준호가 휴대폰을 켰다.

협회 긴급 공지가 떠 있었다.

【긴급 공지】 이준호 헌터(F급), 등급 위변조 혐의로 전국 수배 중. 신고 시 협회 포상금 10억 원 지급. 위험한 용의자입니다. 접근하지 마세요.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얼마나 남았지?"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휴대폰 화면에 나타나 있었다. 스킬 변조의 설정 화면. 그 안에 수명 카운터가 있었다.

【남은 수명: 8년 3개월 12일】

26년에서 18년이 사라졌다. 2시간의 검술 사용이 18년의 수명을 앗아간 것이었다. 한강 위에서 펼친 그 절망적인 검술이 이준호의 남은 인생을 산산조각 낸 것이었다.

이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절망적인, 하지만 어딘가 해방된 웃음이었다.

"8년. 충분하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준호가 받았다.

"누세요?"

대답이 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침착하고 차분한, 하지만 어딘가 긴장으로 가득한 목소리.

"박시연입니다. 협회 감시관."

"..."

"당신이 하는 일, 제가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박시연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이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는 건가요?"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감시관님은?"

침묵.

"당신도 이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거기 있어요?"

박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떠날 곳이 없어요."

"그럼 오세요."

이준호가 말했다.

"우리 쪽으로."

박시연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감시센터의 모니터들이 계속 켜져 있었다. 30년을 다니던 협회의 시스템들이.

"협회 통신 시스템을 내려놓겠습니다."

박시연이 말했다.

"당신들이 움직일 시간을 벌어주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협회 감시센터. 박시연이 모니터 앞에서 손을 멈췄다. 30년을 다니던 협회. 그곳에서의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이상적인 꿈. 그리고 그것이 점점 사라져 가던 시간들.

박시연은 신분증을 벗었다. 30년간 입었던 협회 배지를 손에서 놨다.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감시센터에 울렸다. 그 소리는 하나의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녀는 키보드를 향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협회 시스템에 접근했다. 그리고 신호를 끊었다.

---

한강 다리 위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약자들과 협회 특수팀의 충돌. 500명 대 50명. 하지만 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신념이 문제였다.

김민재가 검을 휘둘렀다. A급의 검술. 하지만 그 검술은 이제 협회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약자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협회 특수팀의 팀장이 무전을 들었다.

"본부에 보고합니다. 용의자 추격 실패. A급 기사의 항명 확인. 진압 불가능. 지원 요청합니다."

박시연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상했다. 협회 감시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원은 없습니다. 철수하세요."

"감시관님?"

"명령입니다. 철수하세요."

박시연이 협회 본부를 나갔다. 30년 다니던 협회를. 자신의 신분증을 두고.

한강 다리 위에 그녀가 나타났다. 약자 헌터들 사이에서. 협회 제복을 벗고.

정태민이 물었다.

"누세요?"

박시연이 대답했다.

"약자연대의 새로운 멤버입니다."

협회 본부, 회장실. 모니터가 꺼졌다. 임준석이 그것을 봤다.

"회장님, 영상 신호가 완전히 차단됩니다."

기술팀의 목소리였다.

임준석이 이혜원을 봤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혜원이 대답했다.

"이제 가능합니다. 그 남자가 있으면."

임준석이 책상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을 맞댔다. 마치 체스를 하듯이. 다음 수를 계산하듯이.

"중앙정부에 보고합니다. 협회 내부의 배신자가 있습니다."

"누구요?"

"박시연 감시관. 그리고 김민재 기사."

"더 있을 겁니다."

이혜원이 말했다.

"이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임준석이 모니터를 다시 켜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창밖을 봤다.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어딘가에서 이준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럼 더 강하게 눌러야 합니다."

임준석이 중얼거렸다.

"이 남자를 제거하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눌렀다. 협회 전국 지부에 명령이 내려갔다.

【전국 긴급 지령】 이준호 헌터 등급 위변조 혐의 확정. 전국 모든 지부에서 추격 및 체포 권한 부여. 저항 시 무력 진압 허가. 관련 인물 일괄 구속.

---

밤 10시. 여의도 공원 중앙 광장.

이준호가 서 있었다. 그 뒤로 500명 이상의 약자 헌터들이 서 있었다. 정태민, 이미라, 김민재, 박시연. 그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는 사람들.

협회 특수팀이 광장을 포위했다. 1000명. 2000명.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준호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저는 이준호입니다. F급 헌터입니다."

침묵.

"10년을 F급으로 살았습니다. 쥐굴 같은 던전에서, 쥐꼬리 같은 보상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 저는 말합니다. 이 시스템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 시스템은 약자를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협회 특수팀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계속했다.

"그리고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시스템을 부술 것입니다."

협회 특수팀이 광장에 진입했다.

그 순간.

약자 헌터들이 손을 맞잡았다. 500명이. 1000명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이 서로를 잡았다. 약함이 연대했다.

협회 특수팀이 멈췄다. 이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협회 특수팀 사령관이 무전을 들었다. 임준석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후의 명령입니다. 강제 진압. 모든 저항자를 제압하세요."

하지만 그 명령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중앙정부의 목소리였다.

"협회 특수팀, 철수하세요. 이는 중앙정부의 명령입니다."

협회 특수팀이 멈췄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광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준호가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약자 헌터들의 환호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었다. 해방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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