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망령의 숲

새벽 5시 58분. 정태민은 던전 입구 앞에서 손을 떨고 있었다.

창을 들었지만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어제 저녁 이준호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절망 속에 있었다. E급이라는 낙인, 10년을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경험, 자살을 생각한 밤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했다. '약자도 변할 수 있다.' 정태민은 그 말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돌아가도 달라질 게 없다. 10년을 더 E급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변할 것인가.

정태민은 이를 악물고 한 발을 내디뎠다.

이준호가 손전등을 켰다. 광선이 흙먼지를 헤치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망령의 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단순한 낙엽 지대였지만, 협회 등급판정표에는 'F급 · 저위험 · 보상 미미'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100만 원에 낙찰받은 던전. 아무도 손도 대지 않은 곳.

"여기가 정말 F급일까?"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협회 판정이 틀릴 수도 있지."

이준호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두운 숲을 정밀하게 훑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희미한 적색의 눈빛들이 보였다. 여럿. 아주 많은 수.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것은 여우 크기였다. 하지만 가시털이 온몸을 덮고 있었고, 입에서는 검은 액체가 흘렀다. 망령의 숲 F급 판정이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도 재평가를 요청하지 않은 지 몇 년.

"뒤로."

이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정태민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그 순간, 여우 몬스터가 울음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속도가 빨랐다. F급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난 속도였다.

이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검이 나타났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검이 휘어졌다.

—스킬 변조. 발동.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S급 '검의 진수'를 F급으로 위장하라. 이 기술은 강현철이 남긴 것이다. 그가 죽음 앞에서 남긴 마지막 선물. 이제 그것을 사용할 시간이다.

순간, 이준호의 손톱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종이처럼 얇아졌다. 혈색이 빠져나가는 느낌. 그리고 그 순간 검이 빛났다.

F급 헌터가 휘를 수 없는 각도로.

F급 헌터가 낼 수 없는 속도로.

여우 몬스터의 몸이 반으로 나뉘었다. 정태민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준호가 뒤를 봐달라는 눈짓을 했으니까.

그다음은 빠른 연쇄였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튀어나온 가시 박쥐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들. 하나, 둘, 셋. 순간 이준호의 시야에 5마리가 동시에 들어왔다. 이건 F급 던전이 아니었다. 이건 C급이었다.

그의 호흡이 깊어졌다. 스킬 변조를 유지하는 동안 그의 수명이 흘러나가고 있었다. 1분마다 2일. 10분마다 20일. 1시간이면 2개월.

검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원형 패턴으로. 5마리가 동시에 공중에서 떨어졌다. 정태민은 그 장면을 보고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이게 진짜인가. 저 F급 헌터가 저렇게 싸우는가.

"계속 진행해."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이마에는 얇은 땀이 맺혀 있었다. 스킬 변조 사용 시간: 15분. 수명 손실: 30일.

정태민은 따라갔다.

던전 깊숙이 들어갈수록 몬스터들의 개수는 늘었다. 협회가 F급이라고 판정한 지역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준호는 그들을 하나둘 정리해나갔다. 스킬 변조를 켠 그의 움직임은 낭비가 없었다. 매 검격이 정확히 생명을 거두었다.

하지만 가격이 있었다.

30분 사용. 60일 수명 손실.

이준호의 손톱은 완전히 검어졌다. 피부는 종이처럼 얇아져 혈관이 비쳤다. 얼굴도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뼈가 더 도드라지는 느낌. 눈동자가 흐려지는 느낌. 이것이 수명을 깎는다는 것의 의미였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45분 사용. 90일 수명 손실.

던전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네 발 달린 큰 짐승이 있었다. 늑대. 하지만 협회 기준으로 C급 몬스터인 것이 명백했다. F급 헌터가 혼자 상대할 수 없는 것.

이준호의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 목소리의 톤도 미세하게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검은 여전히 가볍게 들려 있었다.

"이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

정태민에게 말했다.

"안 괜찮아?"

정태민이 묻자 이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를 생각해봐. 약자도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지.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정태민의 눈이 흔들렸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중이었다. F급이라는 낙인 아래 살아가던 자신 같은 약자를 위해서.

이준호가 움직였다. 늑대 몬스터는 울음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검과 발톱이 맞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이건 검과 발톱이 아니라 S급 기술과 C급 몬스터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협회가 보면 F급 헌터의 무모한 도전일 뿐이었다.

1시간 사용. 120일 수명 손실.

이준호의 목에 핏줄이 두드러졌다. 손가락은 완전히 검어졌다. 호흡은 가빠졌다. 하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매 검격마다 정확히 생명을 거두었다. 낭비 없는 동작. 절대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늑대 몬스터의 다리가 끊어졌다. 그 다음, 목.

마침내 고요해졌다.

던전 중심부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정태민은 이준호를 봤다. 그의 모습은 마치 10년을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검어진 손가락, 함몰된 뺨, 축 늘어진 어깨.

"다 했어."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약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언가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

그들은 던전을 빠져나왔다.

오전 9시 42분. 망령의 숲 입구에서 이준호가 터벅터벅 나타났다. 정태민은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 거리에서. 혹시 몬스터가 튀어나올까봐.

"정말 했어요."

정태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혼자서."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약함이 최고의 위장이네."

그 순간 정태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 남자가 뭔지 아는가. 이 남자는 자신 같은 약자가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를 만들고 있었다. 협회의 등급 판정을 무시하고, 기득권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깎아가며.

"우리도... 할 수 있겠네요."

정태민이 말했다.

"왜 못 하겠어. 너도 이제 알았잖아. 등급은 능력이 아니라는 걸."

이준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다. 피로가 얼굴 곳곳에 묻어났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밝았다. 폐허 던전에서 강현철의 시체 옆에서 습득한 그 능력이 이미 그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약함을 무기로 삼는 법을.

---

협회 본부. 12층 감시실.

박시연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이준호와 정태민의 던전 진입 기록, 클리어 시간, 전투 데이터. 모두 그녀의 손에 있었다.

화면에는 적외선 카메라 영상이 떴다. 이준호의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F급이 보여줄 수 없는 스피드. F급이 낼 수 없는 위력. 그녀의 A급 감지 능력은 그것을 정확히 포착했다.

박시연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피사체: 이준호 헌터 (F급 등록) 활동 지역: 망령의 숲 (F급 평가) 진입 시간: 05:58 클리어 시간: 03:44 (단독) 전투 데이터 분석: 이상 감지'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다음 줄을 작성해야 했다. '권장 사항: 회장에게 보고' 또는 '보안 유지'.

박시연은 화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이 데이터를 임준석에게 보고하면 이준호는 감시 대상이 된다. 아니, 그 이상이 된다. 협회는 움직인다. 그리고 협회가 움직이면 헌터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녀는 강현철을 알고 있었다. 협회에서 일한 지 10년, 그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폐허 던전의 시체. 손목의 추적 표식.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것.

박시연은 자신의 직책을 생각했다. A급 감시관. 협회의 신뢰. 10년 동안 쌓은 모든 것.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지키는가?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 아래서 짓눌린 강현철 같은 사람들.

그녀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다음 문장을 타이핑해야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현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폐허 던전에서 발견된 그의 시체. 그리고 이준호. 그 남자도 강현철처럼 될 것인가.

박시연은 삭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보고서 전체를 지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르지 않았다.

대신 저장했다.

파일 이름: 'unusual_data_20240415'

폴더: '개인 기록'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박시연은 모니터를 꺼버렸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협회의 감시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비밀 지킴이가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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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협회 게시판.

이준호의 기록 아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 그 F급이?'

'뭐 어떻게 했어? 혼자?'

'망령의 숲이 정말 F급이었나?'

'우리도 해볼 수 있을까?'

'저 헌터 누구야?'

'정태민과 함께 갔다더라. 정태민은 E급 아닌가?'

댓글이 계속 늘었다. 오후 5시. 이미 100개를 넘었다. 저녁 7시. 500개.

F급 헌터들이 읽기 시작했다. 그들이 본 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증거였다. 약자도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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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강남역 카페.

이준호는 정태민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두 명이 더 있었다.

"이준호님이 맞나요?"

첫 번째 남자가 물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이름은 최준영. 협회 등록 F급 헌터. 정태민이 게시판을 통해 연락한 사람이었다.

"네."

이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시판에 올라온 거 봤어요. 망령의 숲. 혼자 클리어했다고."

옆의 여자가 말했다. 이름은 박지은. 역시 F급. 최준영과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네."

"그거... 진짜예요?"

최준영이 물었다. 그의 눈에는 희망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진짜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박지은이 물었다. 정태민이 그 질문을 들었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이준호는 두 사람을 봤다. 그리고 정태민을 봤다. 정태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자리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어. 함께라면."

이준호가 말했다.

"함께요?"

"약자도 연대하면 강해진다. 그게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던전에 들어가고, 함께 돌아오고, 함께 기록을 남긴다. 그렇게 하면 협회도 무시할 수 없다."

이준호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검어진 손가락이 보였다.

"이게 대가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보여주면, 다른 약자들도 일어날 거야."

정태민이 이준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최준영과 박지은도 따라했다. 네 개의 손이 겹쳐졌다.

그 순간, 세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약자들의 연대. 협회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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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협회 회장실.

임준석이 모니터를 봤다. 박시연의 보고서는 여전히 올라오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정보가 들어왔다. 협회 게시판의 클리어 기록. 그리고 그 아래 쌓여가는 댓글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정보.

"이준호가 강남역 카페에서 F급 헌터들과 만났습니다."

정보팀 담당자가 보고했다.

"누가?"

"최준영, 박지은. 모두 F급입니다."

임준석은 의자에 기댔다. 이준호. 강현철. 그리고 이제 다른 F급 헌터들.

패턴이 보였다.

"박시연은?"

"아직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임준석의 눈이 차가워졌다.

"박시연을 불러라."

임준석은 명령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약자의 움직임이 시스템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임준석은 이미 결정했다. 추적팀을 출동시킬 것을. 이준호라는 변수를 제거할 것을. 강현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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