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의 숲
쥐굴 던전에서 나온 이준호의 손가락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창상 처리는 따로 필요 없었다. 수명을 깎아 먹는 능력의 대가는 눈에 띄지 않는 곳부터 조용히 시작되는 법이었다.
협회 게시판을 열었을 때, 이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경매 목록이 떠올랐다. 화면을 스크롤하며 본 것들은 모두 F·E급 던전이었다. 그것도 '저평가된' 것들. 협회의 분류법으로는 위험도가 낮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진입하지 않는 곳들이었다. 기득권 길드는 절대 눈길도 주지 않는 자리들.
'망령의 숲(F급)' — 보상: 50만 원 / 예상 소요 시간: 2시간 / 위험도: 낮음 / 평가: 저평가 우려
이준호는 해당 던전 정보를 클릭했다. 지난주 재평가 신청이 기각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신청자는 한 개인 헌터였고, 협회는 '충분한 근거 부족'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던전 내부 기록을 보면, 5년 전 누군가 이 던전을 혼자 클리어했다. 클리어 시간은 1시간 23분. F급 헌터가 치고 나온 속도치고 빠르긴 했지만, 특별히 의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진입 기록이 거의 없었다.
이준호는 경매 신청 버튼을 눌렀다.
—
협회 지하 3층의 경매장은 회색 콘크리트 벽과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했다. 한 줌의 헌터들이 자리를 채웠는데, 대부분은 길드의 매니저들이었고, 소수의 개인 헌터들이 나머지를 채웠다.
"다음 던전은 '망령의 숲'입니다. F급, 보상 50만 원. 시작가 100만 원입니다."
경매인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화면에 던전의 3D 맵이 떠올랐다. 울창한 숲,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구조물들. 어딘가 낡아 보였다.
침묵이 흘렀다.
30초. 1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100만 원에서 시작합니다. 혹시—"
"100만 원."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경매장의 눈빛이 한 점으로 모였다. 낡은 조끼, 해진 청바지, 운동화. F급 헌터의 전형적인 차림새였다.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F급이 뭐 하려고?"
"100만 원은 너무 비싸지 않나요? 대출이라도 받으셨어요?"
경매인은 이준호를 향해 확인했다. "정말 100만 원?"
"네."
"다른 입찰자 있으신가요?"
침묵.
"그렇다면 '망령의 숲'은 이 분께 낙찰되었습니다."
경매장에서 나오며 이준호는 카드로 결제했다. 통장에 남은 잔액은 50만 원. 생활비를 생각하면 한 달을 버티기 어려운 액수였다. 하지만 이미 손을 놨으니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경매장 로비로 나오는 계단에서 누군가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혹시... 당신 F급 헌터세요?"
이준호가 돌아봤다. 초라한 복장의 남자였다.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눈빛은 이준호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다. 얼굴에는 자조 섞인 웃음이 떠 있었다.
"그런데요."
"아, 미안합니다. 저는 정태민이라고 합니다. E급 헌터고요."
정태민은 이준호의 손목을 잡은 채로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 던전에서 뭔가 찾으셨어요? 아, 아니면... 혹시 당신도 나처럼 그냥... 절망적인 거예요?"
이준호는 정태민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절망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다. 희망을 갈구하는 간절함.
"우리 같은 약자들도 진짜 변할 수 있을까요?"
그 한 문장에 10년이 담겨 있었다. 10년을 F급으로 살며 자신이 가진 모든 질문, 모든 분노, 모든 절망이 그 말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뭐라고 말할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변할 수 있어."
정태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처럼.
"정말요?"
"우리가 약해 보일수록, 더 강해질 수 있어. 그게 약자의 무기야."
이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있었다. 정태민은 그 확신에 끌렸다. 자신이 10년간 찾던 것이 바로 이런 목소리였다.
정태민의 어깨가 떨렸다. 눈빛의 검은색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하는 순간을 이준호는 분명히 봤다. 정태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10년 만의 진정한 웃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태민은 이준호의 손목을 놓지 못했다. 마치 이 순간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
그 밤, 집에 돌아온 이준호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강현철의 글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 능력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수명 따위는 싼 값이다.'*
이제 그 뜻을 알았다.
스킬 변조를 써서 강력한 기술을 펼칠 수도 있었다. 폐허 던전에서처럼 S급 검술을 꺼내 던전을 무참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속도는 빠를 것이다. 하지만 들킬 것도 빠를 것이다.
협회는 이상 고속 클리어를 감시한다. 한 번 감시 대상이 되면, 끝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약함을 유지하되, 결과는 다르게 만드는 것.
약함이 위장이 되고, 위장이 진짜 무기가 될 것이다.
이준호는 '망령의 숲'의 던전 정보를 다시 스캔했다. 5년 전 누군가가 1시간 23분에 클리어했다는 기록. 그 사람이 정말 F급이었다면, 분명히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혹은 스킬 변조를 썼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강현철이었거나.
이준호는 손가락을 봤다. 손끝이 떨렸다. 수명이 계속 깎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손가락의 창백함이 더해졌다. 손톱 아래까지 핏기가 빠져가고 있었다.
1시간 위장. 2개월 손실.
이미 쓴 시간을 계산해보니,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정태민의 눈빛을 본 순간, 이준호는 알았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이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빛이 맺혔다. 스킬 변조의 신호였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일은 정태민과 함께 망령의 숲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다음 날 오전 5시 50분, 이준호는 망령의 숲 입구에 섰다.
어두운 숲이었다. 나뭇가지들이 마치 뼈처럼 엉켜 있었고, 안개가 입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5년 동안 아무도 진입하지 않은 공간의 침침함이 풍겼다.
정태민이 나타났다. 숨이 가쁜 모습이었다. 아마 뛰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제와 달랐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강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형! 왔습니다!"
"준비됐어?"
"네! 근데... 이 던전에서 뭘 할 거예요?"
이준호는 정태민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약자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기득권 길드들이 무시한 던전을 우리가 정리할 수 있다는 걸."
"정말요?"
"응. 그리고 그게 시작이 될 거야."
이준호는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정태민이 따라왔다.
어둠 속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망령의 숲 내부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나뭇가지들이 얽혀 만든 미로 같은 통로, 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정태민은 이준호의 뒤를 따랐다.
첫 번째 몬스터가 나타났다.
망령의 형태였다. 반투명한 몸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검은 에너지. F급 던전의 몬스터치고는 꽤 섬뜩했다.
"형! 몬스터!"
정태민이 외쳤다. 공포가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이준호는 움직였다. 스킬 변조를 발동했다. 1시간 사용. 2개월 수명 손실.
창술을 F급으로 위장한 채, 실제로는 S급의 강도로 강화시켰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손끝에서 창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손가락으로 만든 창이었지만, 그것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공간 자체가 일그러졌다.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준호는 창을 내질렀다.
망령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마치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반투명한 몸체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검은 에너지는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전투는 3초 만에 끝났다.
정태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준호는 F급이었다. F급이 저런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이게 우리의 무기야."
이준호가 말했다. 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다시 평범한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손끝의 창백함은 더 진해졌다. 수명이 깎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약함이 무기가 되는 거야. 상대가 우릴 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틈을 노려."
정태민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공포에서 신뢰로. 절망에서 각성으로.
더 많은 망령들이 나타났다. 5마리, 10마리, 그 이상. 숲 전체가 울음소리로 진동했다.
이준호는 계속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만든 창, 손가락으로 만든 검, 손가락으로 만든 창술. 모든 것이 S급의 강도로 구현되었다. 매 공격마다 공간이 일그러졌고, 망령들은 비명을 질렀다.
망령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정태민은 뒤에서 이준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이 남자는 단순히 강한 게 아니었다. 이 남자는 약함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강함을 숨기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형, 저도... 뭔가 할 수 있을까요?"
정태민이 물었다. 목소리에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이준호는 정태민을 바라봤다.
"넌 E급이지? 넌 뭐가 특별해?"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E급이고..."
"그럼 이렇게 생각해. 넌 약하니까 상대가 널 무시할 거야. 그 순간이 기회야."
이준호는 정태민의 손을 잡았다.
"우린 약자가 아니야. 우린 사냥꾼이야. 약함은 우리의 위장이고, 그게 우리의 가장 큰 무기야."
정태민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변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각성으로.
두 사람은 계속 나아갔다.
망령의 숲 깊숙한 곳으로.
—
협회 본부 5층의 모니터실에서 박시연 감시관이 화면을 주시했다.
던전 내부의 신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준호와 정태민의 위치, 그들의 생명 신호, 그리고 던전 내부의 에너지 변화.
에너지 변화가 이상했다.
망령들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었다. F급 던전의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속도가 비정상이었다. 보통 F급 헌터가 이 정도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박시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이 기록을 상관에게 보고할 수도 있었다. 프로토콜에 따르면 비정상 신호는 즉시 보고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를 껐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변화가 시작되는군."
협회 본부 최상층, 회장 임준석의 사무실에서 동시에 경고음이 울렸다.
"폐허 던전 네트워크에서 비정상 신호 감지. 망령의 숲 진입 기록. 에너지 변화율 초과."
임준석은 보고서를 읽었다. F급과 E급이 F급 던전을 진입했고, 그 안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클리어 속도였다.
5년 전 1시간 23분의 기록을 이미 추월하고 있었다.
임준석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것은 단순한 이상 신호가 아니었다. 이것은 시스템의 균열이었다.
그는 전화를 들었다.
"이혜원? 나야.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F급 헌터 이준호. 감시를 더 강화해. 그리고 기록하는 모든 에너지 수치를 내게 보내."
전화 너머에서 이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거할까요?"
"아직 아니야. 그의 움직임을 보자. 이 남자가 뭘 하는지 알아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수 있어."
임준석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100년 동안 유지된 등급 시스템이 도시 전체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 빛 속에는 S급의 영광과 F급의 절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임준석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이준호의 프로필이 떴다. F급, 26살, 등록 던전 클리어 기록 없음.
그런데 이 남자가 폐허 던전을 30분에 클리어했다.
그리고 지금, 망령의 숲 내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임준석의 입가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변화를 원하는 자들이 나타났군."
그의 손가락이 데스크에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
망령의 숲 내부, 더 깊은 곳.
이준호와 정태민은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계속 나타났고, 이준호는 계속 그들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몬스터들의 강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F급 던전의 몬스터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령의 크기도 커지고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도 강해지고 있었다.
"형, 이상한데요?"
정태민이 말했다.
"네, 이상해."
이준호도 느꼈다. 이 던전은 단순한 F급 던전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등급을 낮춰놨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5년 전 강현철이 뭔가를 남겨놨을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앞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숲의 끝이었다.
이준호와 정태민은 그 빛 속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앞에 있는 것은 던전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뭔가 있었다.
거대한 망령의 형태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망령과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크기는 3미터를 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검은 에너지가 주변 공기를 흔들었다.
"이건... 보스 몬스터?"
정태민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거대한 망령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것은 뭔가 더 큰 것이었다.
협회는 이 던전을 왜 F급으로 분류했을까?
그리고 5년 전 강현철은 이것을 어떻게 클리어했을까?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수명이 또 깎이고 있었다. 손끝의 창백함이 손가락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손톱이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시간을 이미 넘게 사용했다. 2개월 이상의 수명이 손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할 수 없었다.
정태민은 이준호의 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형... 이건..."
"괜찮아. 우리가 할 수 있어."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거대한 망령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공기가 진동했다.
전투가 시작되려 하는 순간, 이준호는 스킬 변조를 다시 발동했다. 추가 시간 소비. 추가 수명 손실.
그의 손가락에서 더 강력한 빛이 나왔다. S급 검술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이준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공간을 가르며 내려왔다.
거대한 망령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정태민은 갑자기 무언가를 느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뭔가 깨어나는 느낌.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뜨는 것 같은 느낌.
정태민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뭐죠?"
정태민이 중얼거렸다.
이준호는 거대한 망령과 계속 싸우면서도 대답했다.
"그게 바로 약자의 각성이야."
이준호의 손가락이 계속 움직였다. 매 공격마다 공간이 갈라졌다. 거대한 망령의 몸체가 조각조각 흩어져 내렸다.
정태민의 손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이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