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9화

회계 기록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던 이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의료과실보험 청구가 비정상적으로 많았어요. 지난 10년간 매년 평균 4.7건. 같은 규모 병원의 표준은 연 1.2건입니다."

국과수 회의실. 오후 2시 15분. 이혜진이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였다. 엑셀 스프레드시트. 날짜, 환자명, 보험금 청구액. 그리고 승인자 란.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예요."

이혜진이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였다.

"청구를 승인한 사람이 김태욱이 아니라는 거죠. 병원 이사회 의장 이름으로 승인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직책은 공식 기록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준호의 호흡이 변했다.

"그럼 누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이름을 위조해서 청구를 승인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혜진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또 다른 문서가 열렸다. 5년 전 박수진 사건 부검 기록. 마취 기록지 사본.

"당신이 5년 전에 제출했던 이 마취 기록지 말이에요."

종이 한 장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필체 분석 결과.

"이건 당신 필체가 아닙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준호의 손이 종이를 집었다. 마취 기록지.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었던 그 종이. 51세 박수진의 마취 깊이, 산소포화도, 심박수가 기록된 종이.

E-2. 산소포화도 95%. 심박수 72.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글씨를 따라갔다. 자신의 S자는 항상 끝이 위로 휘어졌다. 하지만 이 종이의 S는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숫자 8은 위아래가 일정했지만, 이 종이의 8은 위가 더 컸다. 자신의 괄호는 약간 기울어졌지만, 이 종이의 괄호는 완벽하게 수직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필체를 흉내 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종이를 구기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폐 안의 공기가 역류했다.

"5년 동안..."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한 게..."

손가락의 힘이 빠졌다. 종이가 탁자 위로 떨어졌다.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준호가 얼굴을 들었다. 이혜진의 눈과 마주쳤다. 검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니, 이준호의 눈이 흐려졌다.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렸다는 뜻이겠네."

"그렇습니다."

"그럼 5년 전 사건은 의료사고가 아니라..."

이준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어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단어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그 말이 불완전했다.

5년 전 박수진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을 죽인 것은.

"현재 병원의 의료진 중 누군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특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데, 이 사람은 마취 기록지를 위조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준호가 다시 종이를 집었다. 이번엔 조심스럽게. 마치 시체를 다루듯이.

"필체가 병원 직원과 일치하는지 확인했습니까."

"25명의 필체 샘플을 수집했는데, 일치하는 게 없었어요. 지금 5년 전 근무했던 인물들을 찾는 중입니다."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이 정보는 법정에 제출할 수 없어요."

이혜진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필체 분석은 재판부의 허가 없이는 증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형사 기소를 위해선 다른 증거가 필요해요."

"그럼 나는 또 다시 무죄인가요, 검사님."

침묵이 내려앉았다. 회의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이준호의 손이 종이를 놓았다.

"당신은 결백합니다."

"하지만 법정에선 말할 수 없다."

"네."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박은지의 이름이 떴다.

"이준호님, 지난 며칠간 추적한 결과가 있어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떤 기록입니까."

"마취과에서 나간 직원들의 기록이에요. 지난 5년간 마취과를 떠난 사람이 3명인데, 그 3명 모두 같은 이유로 퇴직했어요."

"그게?"

"'개인 사유'로요. 그런데 같은 병원 보험 기록을 보니까 그 3명이 모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이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을 말해주겠습니까."

"한준혁, 박민호, 그리고..."

박은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김준호예요."

이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김준호?"

"병원장 김태욱의 지도의사예요. 마취과 교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근무 기록이 이상해요. 지난 3년간 매월 특정 날짜에만 병원에 나타나요. 정확히는 수술이 있는 날만."

"수술 환자들은?"

"13명이에요. 모두 젊은 여성들. 30대에서 50대. 수술 이유는 다양한데, 마취 중 심정지로 사망했어요. 그런데..."

박은지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 13명의 마취 기록이 모두 손수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필체가..."

"뭐라고?"

"당신이 제출한 박수진의 마취 기록과 같은 필체예요."

이준호의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그 13명 중에..."

"당신 아내도 있어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상이 멈췄다. 이준호는 회의실의 형광등을 봤다.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이민영. 2024년 3월 15일. 마취 중 심정지."

박은지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이거 맞나요?"

이준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어가 아니었다. 길고 깊은 숨소리였다. 마치 폐에서 모든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음성. 그 순간 회의실의 세계가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종이들이 떨렸다. 아니, 이준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민영..."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죽음을 두 번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5년 전 법정에서 받은 판결문보다 더 무거웠다.

"그 13명의 의료기록을 모두 보내주십시오."

"지금?"

"지금입니다."

이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이혜진이 여전히 앉아 있었다. 검사의 얼굴이 창백했다.

"당신 아내가..."

"네."

이준호가 자리를 떠났다.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복도로 나왔다. 형광등 아래서 이준호는 걷고 있었다. 자신의 발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또 다시 박은지였다.

"이준호님, 이거 봐야 해요. 지금."

"뭡니까."

"마취과 김준호 의사가 13명의 환자를 죽인 게 아니라..."

"뭐라고?"

"기록을 더 파고들었더니 이 의사가 2019년부터 병원에 있는 게 아니라 2015년부터 있었어요. 그럼 당신 아내가 죽은 2024년 3월까지 정확히 9년이에요."

이준호가 멈춰 섰다.

"9년?"

"그리고 이 9년간의 모든 수술 기록을 추적했어요. 지난 며칠간 2015년부터의 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한 결과, 마취 기록이 손수정된 환자는 13명이 아니라..."

박은지가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47명이에요."

47명.

이준호의 눈 앞이 흐려졌다. 아니, 세상이 흐려졌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다시 켜졌다. 또 깜박거렸다.

"그 47명 중에 당신 5년 전 사건의 박수진도 있고, 당신 아내 이민영도 있어요."

박은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준호는 그 말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준호님..."

기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47명을 죽인 건 의료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에요."

이준호가 벽을 짚었다. 손가락이 벽면을 파고 들었다. 손톱이 페인트를 긁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복도에 울렸다.

"그런데 더 문제가 있어요."

박은지가 계속했다.

"이 김준호 의사는 작년 8월에 병원을 그만뒀어요."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신원 정보가 없어요. 병원 기록상 사직원 이후로요."

"그럼 지금..."

"당신 아내가 죽은 지 정확히 3개월 뒤, 응급실에 입원한 기록이 있어요. 2024년 6월 15일. 약물 중독으로."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 사람이?"

"그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간호사 이혜영도 응급실에 들어왔어요. 역시 약물 중독으로."

박은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혜영은 살아났어요. 하지만 김준호는..."

"뭐라고?"

"사망했어요. 입원 3일 뒤."

이준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어가 아니었다. 깊은 숨소리였다.

"이준호님,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국과수입니다."

"지금 나가세요. 경찰한테 가세요. 이거 모두 신고해야 돼요."

이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다. 박은지의 이름이 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받지 않았다.

국과수의 부검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2층. 부검실의 문이 보였다. 유리창을 통해 안이 보였다.

하얀 조명 아래 부검대가 있었다. 비어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들어 부검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마취제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 죽음의 냄새.

부검대 옆에 섰다. 손을 뻗어 그 위에 놨다. 차가웠다. 죽음의 온도였다.

이민영. 박수진. 그리고 이름 없는 45명.

"이제..."

이준호의 목소리가 부검실 안에 울렸다.

"말해줄 거야."

하지만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법정은 이미 이준호를 외면했다. 검사는 이미 무력함을 보였다. 경찰은 이미 수사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법정 밖의 누군가에게.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는 누군가에게.

이준호가 부검대에서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부검실을 나갔다. 복도로 나왔다. 계단을 올라갔다. 국과수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소장의 문이 보였다. 이준호는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갔다. 소장이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이준호, 너 얼굴이..."

이준호는 소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소장님, 제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5년간 억눌렀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법정 밖에서 증언하겠습니다."

"뭐?"

"47명의 죽음이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증거들이지만, 그들의 죽음은 실재합니다. 그 죽음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것이 법의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준호, 이건 너의 입장을 더 악화시킬..."

"알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돌아섰다.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었다. 박은지의 전화를 받았다.

"이준호님, 당신 지금..."

"기자회견을 준비해주십시오."

"뭐?"

"내가 말할 게 있습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부검실의 차가운 공기 같았다.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절박했다.

"47명의 죽음에 대해서."

밤 11시 47분. 이준호는 국과수 앞 광장에서 박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 별이 없었다. 어두운 밤. 그의 등 뒤로 국과수 건물이 서 있었다. 죽음을 보관하는 그 건물.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준호가 받았다.

"이준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한준혁이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어?"

"왜요."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당신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그리고 내 이름도 있다고."

"네."

한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준호, 제발. 제발 이거 하지 마."

"왜 말입니까."

"당신도 모르는 게 있어. 내가 직접 말할 거야. 내일. 당신 기자회견 때."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밤하늘을 봤다. 여전히 별이 없었다.

한준혁의 말이 맴돌았다. '당신도 모르는 게 있어.'

이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한준혁이 마취과를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이유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한준혁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공범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 답은 내일 나올 것이었다.

박은지가 차에서 내렸다. 손에 폴더를 들고 있었다.

"준비됐어요?"

이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어요."

박은지가 폴더를 펼쳤다.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마취과 의사 김준호의 사진. 30대 중반의 남자. 차분한 표정.

"이 사람의 최종 기록을 찾아냈어요. 당신 아내가 죽은 지 정확히 3개월 뒤, 응급실에 입원했어요. 약물 중독으로."

이준호의 눈이 떨렸다.

"간호사 이혜영도 같은 시간에 들어왔어요. 이혜영은 회복했어요. 하지만 김준호는..."

박은지가 기록지를 넘겼다.

"3일 뒤 사망했어요. 약물 중독으로 인한 장기 부전."

세상이 다시 멈췄다. 이준호는 밤하늘을 봤다. 여전히 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어두움 속에서 47명의 죽음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부검대 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법정 밖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세상 밖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5년 전 함정에 빠뜨려진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법정이 외면한 진실을 법정 밖에서 증언하는 것. 죽은 자들을 위해 말하는 것.

이준호가 박은지를 바라봤다.

"기자회견을 시작해주세요."

"지금?"

"지금입니다."

밤 11시 52분. 국과수 정문에 조명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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