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증언

밤 11시 52분. 국과수 부검실의 불이 모두 꺼진 지 10분 전이었다.

이준호는 의료기록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감정을 소진한 몸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이준호."

박은지가 부검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검은 정장 차림이었고, 손에는 또 다른 파일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병원 회계 기록에서 또 다른 걸 찾았어."

이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뭔가."

"5년 전 박수진 사건 때 의료과실보험 청구 기록. 그런데..."

박은지가 파일을 펼쳤다.

"서명자가 김태욱이 아니야. 마취과 부과장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런데 이 의사는 지금 병원을 그만뒀어. 2년 전에."

이준호가 문서를 집어 들었다. 복사본이었다. 손글씨는 흔들렸다.

"법정에 제출할 수 있나."

"아니."

박은지가 즉각 대답했다.

"복사본이고, 원본의 진위 여부가 법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기소 불가 판정이 난 사건이야."

이준호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법정에서는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군."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법정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준호는 부검실의 조명을 모두 켰다. 밝은 불빛이 시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47명의 죽음 중 한 명. 그 얼굴은 이미 변색되어 있었고, 신원 확인은 DNA로만 가능했다.

"박은지."

"네?"

"의료 기자 김현수 있잖아. 너 알아?"

박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 비리 기사를 많이 써. 신뢰도 높아."

"그 사람에게 연락해 줄 수 있나. 내가 만나고 싶어."

박은지의 눈빛이 변했다. 기자의 본능이 깨어났다.

"뭘 할 거야?"

"내 이야기를 해야 해. 법정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준호는 부검대에서 시신을 바라봤다. 47명의 한 명. 그 죽음이 법정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세상은 알아야 했다.

"내가 해줄게."

박은지가 핸드폰을 꺼냈다. 밤 11시 55분이었다. 기자들은 밤을 새운다.

"그리고..."

이준호가 덧붙였다.

"내가 발견한 모든 증거와 의료 기록 분석 자료를 의료 개혁 재단에 기증하고 싶어."

박은지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법정을 포기하는 거야?"

"법정은 이미 나를 포기했어. 5년 전에."

이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순간, 부검실 문이 다시 열렸다. 한준혁이었다. 마취과 의사. 5년 전 증언을 강요받았던 인물.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부어 있었다.

"이준호. 미안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아. 증언할 수 있는 방법.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의료진들이랑 함께."

이준호가 한준혁을 바라봤다.

"병원에서 알면 넌 끝이야."

"알아. 하지만..."

한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이미 끝난 사람이 됐잖아. 5년 전에. 그런데도 계속 싸우고 있어. 나는 왜 안 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정 밖에서 증언해. 기자 앞에서, 언론 앞에서. 법정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말해."

"알겠어."

한준혁이 방을 나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부검실의 불이 다시 꺼졌다. 이준호와 박은지만 남았다.

"박은지."

"응?"

"네 딸. 박소은이 몇 살이었어?"

박은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스물두 살. 막 대학을 졸업했어. 교사 자격증을 딸 참이었어."

이준호는 박은지를 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울음이 아니었다. 단지 숨을 쉬는 것도 무거웠다.

"소은이는..."

박은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평범하고 착한 아이였어. 왜 그런 아이가..."

이준호는 그녀를 더 안았다.

"적어도 세상이 알게 될 거야. 법정에서는 못 이겨도, 적어도 세상이 알게 될 거예요."

밤 12시 15분. 이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최원석 경사였다.

"이준호. 나 이제 할 말이 있어."

이준호가 전화를 받았다.

"뭔가."

"공식적으로는 못 도와도, 개인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있어. 너 기자 앞에서 증언할 때 필요한 자료들. 경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들. 나한테 물어봐. 비공식적으로 줄 수 있어."

이준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마워."

"미안해. 조직 때문에 많이 못 도와줬어."

"괜찮아. 이제 충분해."

전화가 끊겼다. 부검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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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신문사 회의실.

의료 기자 김현수는 이준호가 가져온 자료들을 손에 들었다. 부검 소견서, 의료기록 분석, 마취 기록지의 위조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들.

"이 정도면..."

김현수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법정에는 못 가도, 기사로는 충분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준호가 또 다른 파일을 내밀었다.

"내 에세이. 법의관의 증거가 법정에서 왜 무시되는지에 관해서. 그리고 의료 기득권이 어떻게 진실을 짓밟는지에 관해서."

"이거 출판할 수 있어?"

"기사로 연재하면 돼. 세상이 알면 돼."

김현수는 이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의 눈에는 법정의 패배가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것도 있었다. 결연함이었다.

"알겠어. 일주일 안에 기사를 낼게. 병원의 조직적 비리, 의료 시스템의 투명성 문제로."

"고마워."

이준호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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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신문 1면.

"47명의 침묵 - 대학병원의 조직적 살인 의혹, 법정은 외면했다"

기사는 이준호의 부검 소견, 의료기록 분석, 그리고 한준혁을 포함한 병원 내부 의료진들의 증언을 담았다. 법정에서는 채택되지 않은 증거들이었지만, 신문의 지면에서는 생생하게 살아났다.

SNS는 들끓었다. 의료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국회의원들이 성명을 냈다. 의료계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법정은 여전히 침묵했다. 김태욱은 여전히 병원장이었다. 형사 판결은 무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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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김태욱의 집.

김태욱은 신문을 집어 던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병원 이사회였다.

"병원장님, 상황이 심각합니다. 의료진들이 언론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마취과 의료진들입니다. 익명으로 보호되고 있지만, 내용상 우리 병원 직원들이 분명합니다."

김태욱의 얼굴이 굳었다.

"기자 박은지를 찾아."

"뭐 하시려고요?"

"그 여자가 모든 것의 중심이야. 딸 때문에 복수하는 거지. 개인적인 감정으로 우리 병원을 공격하고 있어."

김태욱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여자를 멈춰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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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국과수 부검실.

이준호는 새로운 시신 앞에 서 있었다. 또 다른 대학병원에서의 의료사고. 48세 남성. 복부 수술을 받았고, 마취 중 심정지로 사망했다.

이준호는 메스를 들었다. 손은 여전히 정확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메스가 시신의 가슴을 가르자, 폐가 드러났다. 색깔이 비정상이었다. 폐부종. 마취 깊이 조절의 실패.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같은 패턴이었다.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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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시 15분. 국과수 사무실.

박은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신문사 보도국장이었다.

"48세 환자 부검 결과가 나왔어?"

이준호가 부검 기록을 보여줬다.

"폐부종. 심한 정도로 봐선 마취 깊이가 극도로 얕았어. 이 병원도 같은 메커니즘을 썼다."

박은지가 기록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대학병원이 같은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네. 이걸 기사로 낼 수 있을까?"

"법정에서는 못 이기지만, 적어도 패턴을 드러낼 수 있어. 의료 시스템 전체의 문제로."

이준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절망이 없었다. 대신 냉철한 결의가 있었다.

박은지가 노트북을 켰다.

"그럼 이 사건부터 시작해. 첫 번째 기사는 '47명의 침묵'이었고, 이번엔 '48번째 증언'으로 가자."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더 필요해."

"뭐?"

"병원 내부 증인. 이 대학병원 의료진 중에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박은지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찾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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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신문 1면.

"48번째 목소리 - 또 다른 대학병원, 같은 살인의 메커니즘"

기사는 이번 환자의 부검 소견과 함께, 이 병원의 마취 기록 위조 패턴을 상세히 분석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병원의 마취과 전공의가 직접 증언한 내용이었다.

"저희 과장님은 마취 깊이를 의도적으로 얕게 유지합니다. 환자가 깨어나면 수술 중 움직임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하고, 그것이 마취 과실로 기록되지 않도록 기록을 수정합니다."

신문사는 그 의료진의 신원을 보호했지만, 내용은 명확했다.

SNS는 다시 들끓었다. 해시태그 #의료개혁 #투명성 #생명이_돈이_아니다가 트렌드에 올랐다. 국회는 긴급 국정감시청문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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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신문사 기자실.

박은지의 책상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소포였다. 발신인은 없었다. 박은지가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사진들이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촬영한 사진. 그녀의 딸 박소은의 묘지 사진. 그리고 한 장의 메모.

"그만해. 아니면 넌 또 다른 죽음을 보게 될 거야."

박은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즉시 이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준호. 나 지금 위협을 받았어. 편지가 왔어. 소은이 묘지 사진이 들어 있어."

전화 너머에서 이준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경찰에 신고해."

"이건 김태욱이야. 분명해."

"증거가 있어?"

"편지와 사진이 있어."

"그걸 경찰에 제출해. 그리고 지금 신문사에서 나가지 마. 누군가 있어?"

"응. 동료들이 있어."

"좋아. 나도 지금 가."

전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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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국과수 소장실.

소장이 이준호를 불렀다.

"법의관 이준호. 당신의 부검 기록과 기자 박은지의 기사가 국회에서 증거로 제출되었습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법정에서는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자료들입니까?"

"예. 하지만 국회 청문회에서는 다릅니다. 법정이 아닌 입법부의 영역에서 진실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소장이 잠깐 멈췄다.

"당신이 원하던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병원 측에서 기자 박은지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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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청문회.

이준호는 증인석에 앉았다. 법정이 아닌 다른 무대였다.

의원들의 질문은 법관의 그것과 달랐다.

"법의관님, 당신의 부검 결과에 따르면 이 세 병원의 의료사고들이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인다는 건가요?"

"예. 마취 기록지의 위조, 폐부종의 흔적, 그리고 마취 깊이 조절의 실패. 세 건 모두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별 의료진의 과실이 아니라, 시스템적 문제라는 뜻인가요?"

이준호가 깊게 숨을 쉬었다.

"법정에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라면 답할 수 있습니다. 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대학병원의 위계 구조 속에서 하급 의료진들이 상급자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 의료 기록 위조를 적발할 감시 시스템의 부재. 의료과실보험이 비리를 은폐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현실. 그리고 법정에서 법의관의 증거가 무시되는 사법부의 한계."

의원들이 메모를 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5년 전에도 비슷한 증거를 제시했지만 법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는 한 명의 죽음이었습니다. 지금은 48명입니다. 법정은 개별 사건의 증거만 판단하지만, 여기서는 시스템적 패턴을 봅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의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법의관님, 당신의 증언 이후 기자 박은지가 위협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병원 측의 보복이 있을까 우려되십니까?"

이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네, 우려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위험해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의원들이 다시 메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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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5분. 국과수 부검실.

청문회를 마친 이준호는 다시 메스를 들고 있었다. 또 다른 시신이 앞에 있었다. 또 다른 의료사고.

박은지가 부검실 유리창 너머에서 보고 있었다. 경찰의 신변보호 요청으로 이제 그녀는 신문사 내에서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기록했다.

이준호가 메스를 움직였다. 정확하고, 신중했다.

"당신도 말해야 합니다."

메스가 시신의 가슴을 가르자, 폐가 드러났다. 또 다른 폐부종.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폐부종의 정도가 더 심했다. 마취 기록지의 위조 흔적이 더 명백했다. 그리고 부검 소견서에 적힌 의료진의 이름이 처음 두 사건과 달랐다.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새로운 의료진. 새로운 병원. 하지만 같은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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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2시. 국과수 사무실.

박은지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부검 결과가 나왔어?"

이준호가 부검 기록을 보여줬다.

"폐부종. 심한 정도로 봐선 마취 깊이가 극도로 얕았어. 그런데 이번엔 다른 점이 있어."

"뭐?"

"의료진이 달라. 처음 두 사건과는 다른 병원, 다른 의료진. 하지만 메커니즘은 같아. 이건 더 이상 개별 사건이 아니야. 시스템 차원의 문제야."

박은지가 노트북을 켰다.

"그럼 이걸 어떻게 보도할 거야?"

"유족들이 고소를 진행하고 있어. 이제는 수사 단계에서 의료기록 위조를 집중 조사해야 해. 법정이 아니라 검찰이 움직여야 해."

박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기사를 낼게. '48번째 증언'이 아니라 '시스템적 살인'으로 제목을 바꾸자."

"좋아."

---

6개월 후. 의료 개혁 재단 세미나.

"의료 시스템의 투명성을 위하여 - 죽음의 증언으로 읽는 한국 의료의 현재"

이준호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검사 이혜진, 기자 박은지, 그리고 한준혁이 있었다.

청중은 의료인, 법조인, 언론인, 그리고 피해자 유족들이었다.

이준호가 말했다.

"법정은 여전히 병원에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형사 책임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은 그 죽음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준혁이 일어섰다. 그는 5년 전의 죄책감을 이제 증언으로 바꾸고 있었다.

"저는 당시 거짓 증언을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의 죄책감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리고 기사를 통해, 그리고 국회 청문회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입니다."

박은지가 이어 말했다.

"법정에서 진실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론과 여론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이제 국회는 의료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학병원들은 자체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법정의 패배가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혜진 검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법정은 증거의 한계로 인해 판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도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 세미나가 그 한계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청중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세미나 진행자가 이준호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법의관님, 죄송하지만... 긴급 연락이 있습니다."

이준호가 무대를 내려왔다.

"뭔가."

"검찰에서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김태욱 병원장이 해외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인천공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박은지가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뭐라고?"

"그리고..."

진행자가 계속했다.

"의료기록 위조 혐의로 추가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번에는 경찰과 검찰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다른 떨림이었다. 희망의 떨림이었다.

박은지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기자실로 가야 해. 이 소식을 기사로 내야 돼."

그녀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법정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여론이 법정을 움직였어."

세미나 홀의 불이 켜졌다. 청중들은 아직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박수의 의미가 달라졌다.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변화의 신호였다.

이준호는 무대를 내려왔다. 최원석 경사가 입구에 서 있었다.

"이준호. 너 이제 뉴스 봤나?"

"아니. 뭐가 있어?"

"김태욱이 체포됐어. 그리고 경찰이 병원 회계 기록을 압수수색했어. 의료과실보험 청구 기록 원본을 찾았대. 서명자가 정말 마취과 부과장이었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5년 전 부검실에서 본 복사본이 이제 법정의 증거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최원석이 계속했다.

"그 마취과 부과장이 증인으로 출석하기로 했어. 이번엔 자발적으로."

이준호의 눈이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떠졌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단지 숨을 쉬고 있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깊게 숨을 쉬고 있었다.

박은지가 돌아왔다.

"이준호. 기자실에서 연락 왔어. 내일 1면에 이 소식을 낼 거야. '법정의 귀환 - 47명의 죽음, 마침내 재수사로'라는 제목으로."

이준호는 박은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야 해.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재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증거들이 나올 거고, 또 다른 병원들의 비리도 드러날 거야."

이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는 다시 국과수를 향해 걸어갔다. 부검실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죽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죽음들은 더 이상 법정 밖에서만 증언되지 않을 것이었다.

법정이 귀환했다.

여론의 힘으로.

밤 11시 30분. 국과수 부검실.

이준호는 새로운 부검 의뢰서를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대학병원. 또 다른 의료사고. 또 다른 죽음.

그의 발걸음이 부검실을 향했다.

최원석 경사가 옆에서 걸어왔다.

"또 같은 패턴인가?"

"아직 모르지. 해봐야 알아."

"그럼 또 국회에 보고할 건가?"

이준호가 부검실 문을 열었다.

"이번엔 검찰에 직접 보고할 거야. 수사 단계에서부터 의료기록 위조를 집중 조사하게 할 거고."

최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네. 수사 단계에서 필요한 자료들이 있으면 말해."

"고마워."

부검실의 불이 켜졌다.

이준호는 메스를 들었다.

"다시 시작이다."

메스가 시신의 가슴을 가르자,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났다. 폐부종. 마취 기록지의 위조. 그리고 또 다른 의료진의 이름.

47명의 죽음이 법정에서 무죄로 판결받았지만, 그 죽음들은 신문의 지면에서, 국회의 청문회에서, 의료 개혁 재단의 세미나에서, 그리고 이제 다시 법정에서 증언하고 있었다.

법정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다시 법정을 움직였다.

메스는 계속 움직였다.

정확하고, 신중하고, 그리고 따뜻했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무기로 싸우고 있었다.

죽음의 증언이라는 무기로.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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