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검실의 조명은 차갑고 일정했다
부검실의 조명은 차갑고 일정했다.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누운 시신은 56세 남성 이문철. 서울의료대학교병원 순환기내과에 입원했다가 흉부 통증을 호소한 지 6시간 만에 심정지로 사망했다.
이준호는 관상동맥을 따라 메스를 움직였다. 조직 절편을 채취하고 색깔을 관찰했다. 폐 조직의 비정상적 담홍색. 그리고 혈액 샘플의 독성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손가락이 멈췄다.
약물 농도가 정상 치료 범위의 8배였다.
베타차단제의 정상 혈중 농도는 0.5~2.0ng/mL. 이 환자는 16ng/mL. 심정지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농도. 의도적 과다 투여를 의미하는 수치였다.
박수진 사건과 정확히 같은 수치였다.
5년 전 자신이 마취 중에 잃었던 환자. 그때도 같은 약물, 같은 농도. 같은 병원.
손가락이 떨렸다. 이 기록을 어디에 제출할 것인가. 누가 이것을 증거로 받아줄 것인가. 그리고 이 약물이 자신의 아내에게도...
부검 기록지에 손을 올렸다. 펜을 집었다. 손가락이 멈췄다.
국과수 부검실의 문이 열렸다. 소장 김영수가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이준호 법의관."
"네."
"고소 통보가 들어왔다. 병원의 법무팀장 서민준 변호사가 너를 '부검 증거 조작 혐의'로 고소했다. 동시에 경찰청 감찰실에도 진정서가 올라갔다."
이준호는 말이 없었다.
"당분간 이 사건에서 손을 떼야 한다. 부검 기록은 다른 법의관이 작성한다. 넌 근무 중단 상태로 들어간다."
"이문철 부검 결과는?"
"네가 작성하지 않는다."
약물 농도 발견에서 고소 통보까지. 2시간. 병원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온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준혁이었다.
"준호. 미안해."
"뭐가?"
"병원이 나한테 압박을 줬어. 법무팀장이 직접 전화했는데, 증언하면 내 경력이 끝난다고. 그리고..."
한준혁이 쉬었다.
"내 가족도 피해를 볼 수 있다고 했어. 아내 직장에 연락할 수도 있고, 아이들 학교에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고. 난..."
"증언하지 않겠다는 거네."
"미안해. 정말."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한준혁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도 피해자였다. 조직의 압박 앞에서 무너지는 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자신도 그런 압박을 받았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알고 있었다.
최원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과장. 상층부 압력이 있나?"
"어... 너한테 말할 수 없어. 지금 통화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
"..."
이준호는 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최원석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준호, 미안해. 난 할 수 없어."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복도에 서 있었다. 국과수의 야간 조명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사람은 모두 떠났다.
부검실로 돌아갔다. 이문철의 시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준호는 부검 기록 양식을 들었다. 펜을 집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증거가 있었다. 명확한 과학적 증거가. 혈액 검사, 조직 표본, 약물 농도. 모든 것이 의도적 과다 투여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증거를 어디에 제출할 수 있을까.
국과수 소장은 이미 그를 내쳤다. 경찰은 상층부 지시를 받고 있었다. 검사 이혜진은 법적 증거만을 기소할 수 있었고, 이미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다. 법정에서는 의료 전문가들이 '의료 관행상 일반적'이라고 증언할 것이었다.
죽음의 진실이 침묵 속에 묻혀간다.
야근실에 앉았다. 밤 1시를 넘어섰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빌딩들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혜진이 들어왔다. 검사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아래에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준호."
"검사님."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 있어."
이혜진은 파일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병원의 기록을 찾았어. 지난 10년간의 의료사고 신고 건수, 합의금 규모,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났다.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건 법정에 제출할 수 없어. 개인정보보호법상 위반이고, 검찰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을 거야. 적발되면 나도 처벌받을 수 있어."
이혜진이 파일을 펼쳤다.
"하지만 내 딸도 같은 나이에 의료사고로 죽었어. 12년 전이지만, 그 기록들이 말해주는 게 있어."
이준호는 검사를 바라봤다. 이혜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총 47건의 의료사고 신고. 그 중 43건이 합의금으로 종료됐어. 평균 합의금은 3억에서 7억 원대. 모두 사건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3개월."
"의료심판원 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모두 합의되었다는 뜻이야. 그들은 법적 절차가 진행되기 전에 입을 다물게 하는 거야."
이준호는 파일을 집었다.
"나머지 4건은?"
이혜진이 페이지를 넘겼다.
"박수진. 2019년 마취 중 심정지. 의료심판원 기각. 미해결."
"그 다음은?"
"이문철. 2024년 순환기내과 입원 중 심정지. 부검 의뢰 중. 미해결."
이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나머지 둘은?"
"이민영. 2024년 3월 자궁근종 제거술 중 심정지. 부검 의뢰 없음. 유족 합의 거부. 미해결."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이민영. 자신의 아내의 호적명.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혜진이 기록을 읽었다.
"2022년 이후로는 이름이 삭제되어 있어. 데이터 손상인 것 같아. 하지만 패턴상 같은 마취과 의사가 담당한 것으로 추정돼."
이준호는 파일에서 눈을 돌렸다. 밤의 사무실이 돌기 시작했다.
"검사님. 그 병원의 마취과 의사들 명단을 알 수 있나?"
이혜진이 파일을 뒤적였다. 조직도 사본이 나왔다. 마취과 전문의 명단. 김준호.
"이 의사가 누군데?"
"이 네 건의 사건에 모두 연루된 의사야. 그리고 그 의사의 지도의사는..."
이혜진이 조직도의 상단을 가리켰다.
"김태욱 병원장."
이준호의 세상이 멈췄다. 김태욱.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그 남자.
이혜진이 손을 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법정에서는 이 증거들이 무력해. 판사는 의료 기득권 앞에서 눈을 감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하나?"
이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법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정의가 법정 밖에서 이루어져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준호는 파일을 들었다. 밤의 국과수 건물 안에서, 죽은 자들의 기록과 함께 서 있었다.
이혜진이 떠났다. 사무실에 이준호만 남겨졌다. 손에는 법정에 제출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들려 있었다.
이준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밤 1시 30분. 국과수 건물은 완벽한 침묵 속에 있었다.
국과수의 검시 데이터베이스. 2024년 3월 15일. 서울의료대학교병원.
환자명 이민영. 나이 47세. 부검 의뢰 없음. 사인 판정 자연사.
의료사고 신고 기록. 유족이 합의를 거부했다고 되어 있었다.
유족이 합의를 거부했다.
그것은 자신이 합의를 거부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신은 의사로서의 판단력을 완전히 잃었었다. 병원이 제시한 어떤 말이든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무엇인가.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합의를 거부했다는 뜻인가.
이준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호흡이 얕아졌다. 밤 1시 45분.
그때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박은지였다. 기자의 눈이 붉어 있었다. 밤새 취재를 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국과수 기자실을 통해 이준호의 위치를 파악했고, 의료기록 접근 권한을 가진 병원 내부 제보자로부터 자료를 받았다.
"준호. 내가 찾았어."
"뭘?"
"그 병원의 비리. 더 깊은 비리."
박은지가 말을 멈췄다. 이준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너 뭐 있어?"
"박은지.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네 딸은... 2024년 3월 15일에 그 병원에서 죽었나?"
박은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알았어?"
"그 날이 내 아내가 죽은 날이야."
침묵이 사무실을 채웠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이 같은 곳에서 비롯되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찾은 게 있어."
박은지가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에 의료기록이 떠올랐다.
"그 병원의 마취과 기록. 2024년 3월 한 달간의 수술 데이터."
노트북의 화면이 이준호에게 향했다. 표와 그래프들이 보였다.
"2022년부터 같은 패턴. 같은 시간. 같은 의사."
박은지가 스크롤을 내렸다. 의료기록들이 나열되었다.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 마취 유도 직후 심정지.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젊은 여성들. 아내도 47세의 여성이었다. 아내도 아침 7시 30분에 마취 유도를 받았었다.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멈췄다. 손이 떨렸다.
"그 의사 이름이 뭔데?"
박은지가 화면을 정지시켰다. 의료기록 상단에 이름이 보였다.
김준호. 마취과 전문의.
이준호의 눈이 화면에 못 박혔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같은 이름. 같은 병원. 같은 죄.
"너랑 같아."
박은지가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찾기 힘들었어. 의료기록 시스템에 검색해도 김준호는 수백 명이 나오니까. 하지만 서울의료대학교병원의 마취과 김준호는 단 한 명이야. 그리고..."
박은지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병원의 인사 기록이 떠올랐다.
"2024년 4월부터 휴직 중이야.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
"건강상의 이유."
"그 전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고소, 수사, 아무것도. 모두 합의금으로 끝났어. 그리고 그 의사는 조용히 사라졌어."
박은지가 노트북을 내렸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뭐가?"
"그 의사가 누군지 알아?"
박은지가 또 다른 화면을 켰다. 병원의 조직도가 떠올랐다. 마취과 전문의 김준호. 그리고 그 옆에 지도의사 명칭이 적혀 있었다.
'지도의사: 김태욱 병원장'
이준호의 세상이 멈췄다.
김태욱.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병원장. 자신의 면허를 박탈하게 만든 남자.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고소를 하고 있는 그 남자.
그 남자가 또 다른 김준호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김준호가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박은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동명이인. 그것도 같은 병원에서. 그리고 5년 전 너한테 일어난 일과 지금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같은 패턴이야. 마취 중 환자 사망. 의료기록 위조. 조직적 은폐. 그게 우연일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획이었다. 자신을 다시 파괴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서 자신의 아내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끼였다.
국과수의 사무실에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실은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법정에 제출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에 전해져야 하는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