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열한 시 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자료실의 형광등이 유독 밝았다.
이준호는 박소은의 의료기록 원본 앞에 앉아 있었다. 종이 파일은 두껍고 낡았다. 5년 전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기록지 위를 따라 움직였다. 마취 기록지. 맥박, 산소포화도, 혈압, 호흡수. 모두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 장면은 정상이었다. 오후 2시 13분, 마취 시작. 맥박 72. 산소포화도 98%. 혈압 128/82. 기록은 5분 간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후 3시 47분.
맥박 68, 산소포화도 96%.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그 아래 줄은 오후 3시 52분. 맥박 71, 산소포화도 97%.
필기구의 색이 달랐다.
검은 볼펜으로 기록된 부분과, 그 아래 파란 겔펜으로 기록된 부분. 글씨의 필압도 다르고, 숫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중에 기록을 추가했다는 뜻이었다.
이준호는 책상 옆의 현미경을 집었다. 기록지를 렌즈 아래 올렸다. 배율을 높였다.
검은 잉크는 종이 섬유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반면 파란 잉크는 표면에만 얇게 묻어 있었다. 현미경의 배율을 더 높였다. 파란 잉크의 입자가 선명해졌다. 종이 표면의 미세한 요철 위에만 걸려 있었다. 기록 시간의 차이는 적어도 며칠 이상. 어쩌면 주 단위일 수도 있었다.
"같은 손이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필기 스타일, 숫자 표기법, 약자 사용 방식. 모두 동일인의 손길이었다. 마취과 의사 또는 간호사가 의료기록을 나중에 위조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명확했다. 오후 3시 47분에 환자의 생체 신호가 비정상이었음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했다. 국과수 시스템에 등록된 서울의료대학교병원 관련 사건들을 검색했다.
지난 5년. 의료사고 신고: 8건. 그 중 부검 진행: 3건. 나머지 5건: 민사 합의로 종결.
3건의 부검 기록을 열었다.
첫 번째 사건. 2021년 6월, 52세 남성. 위암 수술 중 심정지. 부검 결과: 마취 중독으로 인한 급성 폐부종. 마취 기록지를 다시 들었다. 현미경으로 확대했다. 오후 1시 28분부터 산소포화도 수치가 이상하게 상승했다가 다시 정상화된 구간. 그 구간의 필기구 색이 달랐다.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같은 손의 필체였다.
두 번째 사건. 2022년 3월, 61세 여성. 담낭절제술 중 심정지. 부검 결과: 약물 중독으로 인한 쇽. 마취 기록지를 꺼냈다. 오후 2시 42분의 맥박 기록. 현미경 아래서 그 부분이 드러났다. 종이가 벗겨진 흔적. 지워졌다가 다시 쓰인 자국. 그 위에 덧칠해진 새로운 기록. 필기구의 색은 역시 파란색이었다.
세 번째 사건. 2023년 1월, 박소은, 34세 여성. 자궁근종 제거술 중 심정지. 부검 결과: 급성 약물 중독.
이준호가 세 건의 마취 기록지를 나란히 놓았다. 현미경으로 하나씩 다시 들었다. 필기구의 색상, 숫자의 형태, 위조된 구간의 길이. 모두 동일한 패턴이었다.
같은 손.
같은 방식.
다른 것은 피해자뿐이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5년 전의 기억이 밀려왔다. 그때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작은 이상. 그것이 거대한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리고 그 거짓을 마주했을 때의 무력함. 그의 손이 떨렸다. 책상을 내려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현재로 그를 돌려놨다.
휴대폰을 집었다. 박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 있어요?"
박은지의 목소리는 밤 열한 시 반이라는 시간을 무시하고 깨어 있었다. 아마도 잠을 자지 못했던 것 같았다.
"편의점 근처. 왜요?"
"당신 딸의 의료기록을 봤어요."
침묵. 3초가 길었다.
"그리고요?"
"마취 기록이 위조되었습니다. 생체 신호 수치가 나중에 수정되었어요."
박은지의 숨이 끊겼다.
"어떤 증거가 있어요?"
이준호는 마취 기록지를 다시 들었다. 화면을 통해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이것은 원본 문서였고, 법적 증거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할 수 있었다.
"필기 색상이 다릅니다. 검은 펜과 파란 펜으로 기록된 부분이 섞여 있어요. 같은 손의 필체인데 나중에 추가된 흔적이 명백합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의료기록을 조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건 당신 딸만의 사건이 아니에요."
"뭔 소리... 더 말해요."
"지난 5년간 같은 병원에서 같은 방식의 마취 기록 위조가 최소 3건 더 있었습니다. 모두 환자 사망 사건입니다."
박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였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5년을 짓눌러온 슬픔이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누가... 누가 한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딸을 죽인 놈을 찾은 거? 정말로?"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취 기록을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입니다. 마취과 의사, 간호사, 또는 의료기록팀. 그리고 기록을 나중에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
"마취과 과장이지."
박은지가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절망이 깔려 있었다. 5년간 합의금을 받고 입을 다물었던 자신의 죄책감. 그것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마취과 과장이 한 거네요?"
"아직은 추론입니다. 증거가 필요해요."
"증거?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증거 아니에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은지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
"법원에서 안 먹히는 거네요."
"네."
"뭐가 필요한데요?"
"당신 딸이 수술 받을 당시 마취과 의사의 증언. 그리고 마취 기록지가 위조되었다는 객관적 증거. 기록지의 나이 측정, 잉크 분석, 필기 감정. 이 모든 것이 법적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박은지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깊은 숨이었다.
"언제까지 걸려요?"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그 놈들은?"
박은지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국과수 소장 김영수로부터의 문자였다.
**"준호, 소장실 와."**
시간은 밤 12시 5분이었다.
"박기자님, 저 지금 소장실로 불렸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
전화를 끊고 이준호는 자료실을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깊은 밤의 정부 기관은 유령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의 발걸음만이 타일 바닥에 울렸다.
소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김영수 소장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나이는 환갑을 넘었고,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서민준이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 얼굴에는 냉정한 미소가 떠 있었다. 이준호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박은지를 협박했던 바로 그 변호사였다.
"이 분이 서민준 변호사시고, 서울의료대학교병원 법무팀장입니다."
김영수 소장이 소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편함이 묻어 있었다.
"준호, 이분이 당신에 대해 고소장을 제출하겠다고 하는데요."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민준이 입을 열었다.
"법의관 이준호 님. 당신이 당신의 직권을 남용하여 본 병원의 의료기록에 무단으로 접근했습니다."
"의료기록은 법적 절차에 따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요청 목적이 불명확했습니다. 당신은 박수진 사건의 법의관으로서 그 사건의 의료기록만 요청할 권한이 있습니다. 박소은 사건의 의료기록에 접근할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이준호의 눈이 찬 빛으로 변했다. 서민준의 말이 정확했다. 그것이 더 위험했다.
"박소은 사건은 부검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과수 시스템에 등록된 사건입니다. 저는 법의관으로서 부검 기록과 관련된 모든 의료기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박소은 사건을 조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사건의 담당 법의관이 아닙니다. 당신은 박수진 사건의 담당 법의관입니다."
서민준이 한 발 더 나아갔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우리 병원은 당신이 당신의 직권을 남용하여 법적 근거 없이 환자 의료기록에 접근했다고 판단합니다. 이는 의료법 위반이자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입니다. 우리는 고소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의료기록을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언론에 유포한다면, 우리 병원은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역고소하겠습니다."
이준호가 서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차가웠다.
"당신은 법률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알 겁니다. 의료기록 위조는 형사 범죄입니다. 의료법 26조, 의료기록의 위조·변조·은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환자 사망으로 이어졌다면, 살인죄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추정일 뿐입니다. 증거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병원에 의료기록을 요청한 것입니다."
서민준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였다.
"당신이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당신의 요청은 '직권 남용'입니다. 당신이 증거를 찾는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입니까? 언론에 유포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합니다. 법원에 제출합니까? 그렇다면 법정에서 우리의 의료 전문가들이 그 증거를 무효화시킵니다."
"그것이 법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세상을 모르는군요."
서민준이 일어섰다. 그는 김영수 소장을 바라봤다.
"소장님, 당신의 직원이 우리 병원을 괴롭히지 않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관도 이 문제에서 면책되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섰다. 문을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준호를 봤다.
"법의관 이준호 님, 당신이 부검 기록을 조작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당신의 모든 부검 기록을 다시 검토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과거... 5년 전의 사건도 말입니다."
문이 닫혔다.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5년 전. 그 시간. 그 사건. 모든 것이 다시 떠올랐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마치 그때처럼. 그 법정에 서 있을 때처럼. 자신의 부검 기록이 의심받고, 자신의 전문성이 부정당했던 그 순간들이 영상처럼 흘러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먹을 더 깊이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김영수 소장이 한숨을 쉬었다.
"준호,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직무입니다."
"직무? 당신은 박수진 사건의 법의관이야. 다른 사건까지 파고드는 게 직무인가?"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민준의 말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당신의 과거. 5년 전의 사건. 그것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었다. 그의 과거는 그의 약점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나가면 우리 기관 전체가 법적 문제에 휩싸인다고. 의료 기득권이 얼마나 큰 조직인지 알지? 그들은 법원, 검사, 경찰까지 연결되어 있어."
"그래서 더 해야 합니다."
"뭘?"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김영수 소장이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피곤한 얼굴. 하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걱정. 아니, 그 이상의 것. 이해. 그리고 그 이해 속의 절망.
"준호, 당신이 이기는 경우는 없다고. 당신이 법의관으로 돌아온 지 3개월도 안 됐어. 다시 떨어져 나가고 싶어?"
"저는 이미 떨어졌습니다."
"그럼 다시는 안 된다고. 이번엔 형사 고소까지 들어올 거야. 증거 조작 혐의. 직권 남용.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다 먹을 수 있어."
이준호가 말했다.
"박소은은 34세였습니다. 자궁근종 제거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시간은 27분이었습니다. 그 수술에서 그녀는 죽었습니다. 마취 중독으로. 그리고 그녀의 의료기록은 위조되었습니다."
"그건 민사 사건이야. 의료과실보험에서 배상하고 끝나는 거야."
"아니, 그건 타살입니다."
김영수 소장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은 정신이 온전한가?"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그는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이 온전한가? 아니면 그가 5년 전에 이미 부서져 있고, 지금 그 파편들이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초. 2초. 3초. 그 침묵이 자신을 더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박소은의 마취 기록지가 다시 떠올랐을 때 그 의심은 사라졌다. 두 가지 색의 펜. 같은 손의 필체.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거짓 아래에는 죽음이 있었다. 그 죽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예."
이준호가 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이 방을 나가. 그리고 더 이상 박소은 사건에 접근하지 마. 박수진 사건에만 집중해."
이준호가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다리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그 지시를 내리면 저는 그 지시를 거부하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쫓겨난다."
"알겠습니다."
이준호가 문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느렸다. 마치 물 속을 걷는 것처럼.
"준호!"
소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이준호는 멈췄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누군가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 아니야. 그건 당신 자신을 위한 거야. 당신의 복수심. 당신의 자존심. 그걸 위해 당신은 모든 걸 잃을 거야."
이준호는 돌아섰다. 소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 아래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절망. 그리고 결연함.
"당신은 모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박소은의 어머니는 5년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딸이 자살한 줄 알면서. 그 죄책감 속에서. 그리고 지금 그녀는 알았습니다. 자신의 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이준호가 다시 문을 향해 걸었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거라는 걸 모르니?"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그의 등에 박혔다. 재현. 트라우마. 그 단어들은 그를 흔들었다. 5년 전, 자신의 부검 기록이 의심받았던 그 법정. 자신이 거짓으로 낙인찍혔던 그 순간. 그것이 지금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닐까?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의 발걸음만이 타일 바닥에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 발걸음이 더 빨랐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휴대폰이 울렸다. 최원석이었다.
"이준호, 지금 어디 있어?"
"국과수."
"나가. 지금 나가. 그리고 한동안 모습을 감춰."
"왜요?"
"왜냐고? 서민준 변호사가 검사 이혜진에게 고소 통보를 했어. 그리고 우리 경찰청에도 민원이 들어왔어. 이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당신 혼자가 아니야. 박은지 기자도 명예훼손 고소 예정이고, 국과수도 법적 문제에 휩싸일 거야."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당신은 지금 고립된 상태야.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어. 나도 도울 수 없어."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자료실로 돌아갔다. 박소은의 의료기록을 다시 손에 들었다. 마취 기록지. 그 위에는 여전히 두 가지 색의 펜으로 기록된 거짓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거짓 아래에는 한 명의 죽음이 있었다.
이준호는 복사기로 향했다. 마취 기록지를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윙윙거렸다. 한 장, 두 장, 세 장. 복사본이 나왔다. 그는 원본과 복사본을 분리했다. 원본은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복사본은 봉투에 넣었다.
그의 손이 다시 떨렸다. 이번엔 분노가 아니라 다른 감정이었다. 결연함. 그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절망.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박은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박기자님."
"네?"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뭐가 문제가 있어요?"
"저한테 고소 통보가 들어올 겁니다. 그 전에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
박은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깊은 숨이었다.
"내일 오전 10시. 서울역 앞 카페.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준호는 자료실의 불을 껐다. 복도로 나왔다. 밤 12시 30분. 정부 기관은 이미 유령의 집이 되어 있었다.
그는 국과수를 나갔다. 주차장에서 차를 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자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울의료대학교병원.
밤의 도시를 지나 그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 밤 1시. 응급실만 불이 켜져 있었다. 이준호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병원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의 창문들이 검은 눈처럼 보였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아직 깨어 있을 것이었다. 마취과 과장. 또는 그의 지시를 받은 누군가. 그들은 지금 이준호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었다.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준호의 손이 조종간을 더 세게 잡았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증거는 사라질 수 있고, 증인들은 침묵할 수 있고, 기록들은 조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준호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밤의 병원은 고요했지만 위협적이었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지나갔다. 마취과 과장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박은지를 만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증거를 확보하고, 증인을 찾고, 법정에 선다. 그것이 이준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다시 차에 올랐다. 엔진을 켰다. 차는 밤의 거리로 나아갔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가속화될 것이었다. 내일의 대면. 증거의 확보. 그리고 다음 단계로의 진입.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고, 끝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