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냄새가 진동했다.
강남 뒷골목의 낡은 호프집. 오후 11시 반, 한준혁은 이미 세 잔을 마신 상태였다. 소주잔을 돌리는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가 마주 앉자 한준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나타났어. 왜 지금."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한준혁은 손가락을 깨물었다. 손톱 주변이 헐었다. 그는 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또 마셨다. 잔 가장자리에 닿은 손가락 끝이 파르르 울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뭔가를 결심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때 당신이 무죄라는 거, 나 알았어."
말이 나왔다. 오래 삼켜두던 것처럼. 한준혁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의료기록이 조작되는 거 봤어. 내 눈으로. 김태욱이 마취 기록지를 가져가서 직접 손을 봤어. 산소포화도, 심박수, 맥박—다 바꿨어. 손가락 필적이 달랐거든."
이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왜 말하지 않았어."
"말할 수 있었겠어?"
한준혁이 턱을 떨었다. 술이 코에서 흘렀다. 그는 손등으로 닦았다.
"병원이 모두를 소집했어. 회의실에. 김태욱이 말했어. 이준호가 마취 깊이를 잘못 판단했다고, 그렇게 증언해야 한다고. 거부하는 사람 있으면 병원 떠나야 한다고."
"그리고 넌 증언했다."
"응."
목이 메었다. 한준혁은 또 술을 마셨다.
"넌 내 인생이 끝난 거 몰라? 그 이후론… 계속 술이 필요해. 자기 전에, 깨어난 후에. 환자를 볼 때도 떨려. 저 환자가 죽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만."
이준호는 한준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부어 있었다. 혈관이 터질 듯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넌 뭘 원해."
"뭘?"
"왜 나를 만났어."
한준혁이 손가락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메모리 카드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차갑고 단단했다.
"5년 전 원본 수술 기록. 내가 복사본을 몰래 빼뒀어. 매일 집에서 들었어. 그 기록을 보면서 '이건 다 거짓이야, 당신이 무죄야'라고 중얼거리고. 미쳤지?"
메모리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준호가 손을 뻗었다. 카드를 집어 들었을 때 그의 눈빛이 변했다. 동공이 확대되었다. 입술이 일직선으로 다물어졌다. 호흡이 깊어졌다. 한준혁은 그 얼굴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너도 알지."
"알아."
이준호가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증언해. 법정에서."
한준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려다 멈췄다.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잔을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피했다. 그리고 다시 마주쳤다. 그 눈에는 죄책감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
"못 해. 난…"
"못 하면 끝이야. 그럼 난 이걸 증거로 제출할 수 없어. 컴퓨터 데이터는 위조 가능하다고 변호사가 주장할 거고, 넌 그걸 따라 할 거고. 그럼 모두가 자유야. 김태욱도, 병원도."
"준호…"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이준호가 일어섰다.
"넌 할 수 있는 게 있어. 한 가지라도. 한준혁, 너는 그것조차 못 하겠어?"
한준혁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침을 삼켰다.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몇 초가 지났다. 그의 손이 떨렸다.
"내가… 하겠어."
목소리가 나왔다. 약했지만 분명했다.
"당신이 무죄라는 거 알았고, 내가 거짓 증언했고, 그 때문에 당신이 5년을 버텼다면… 내가 책임져야지."
한준혁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눈물이 흘렀다.
"법정에서 증언할 거야. 내일 오전에 당신한테 연락할 테니까 증거로 제출해."
이준호는 한준혁을 바라봤다. 그 결정의 무게를 읽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인생이 다시 끝나갈 것이라는 것을.
"고마워."
호프집을 나올 때 밤 공기가 얼굴을 쳤다. 강남역 방향으로 흐르는 거리, 네온사인이 반복되는 간판들,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준호는 그 모든 것을 지나갔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원석이었다.
"준호?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일."
"상층부에서 너 수사 지시가 이상하게 내려온다고. 의료사고 관련 부검은 모두 상급자 승인을 받으라고. 넌 지난주부터 뭐 건드렸어?"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박수진 사건 말이야. 검사 이혜진이 기소를 미루고 있어. 상층부 지시라고. 근데 진짜 이상한 게, 검사 이혜진이 너 만나라고 했어. 비공식적으로. 오늘 밤."
"어디서."
"서울중앙지검 7층 카페. 밤 1시. 그게 다야. 조심해."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메모리 카드를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가늘게 빛났다. 5년 전의 진실이 이 작은 칩 안에 있었다. 원본이. 위조되지 않은, 변조되지 않은 기록이.
그때 박은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준호 선생님, 긴급입니다. 박수진 환자 유족이 병원 응급실에 나타났습니다. 박수진의 남편입니다. 병원이 자녀에게 마취 수액을 강제로 주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응급실에서 경찰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현장에 있습니다.』
이준호의 몸이 움직였다. 거리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택시를 잡았다. 주소를 외쳤다.
"서울의료대학교병원. 응급실."
차가 출발했다. 밤하늘은 검었다. 강남의 모든 불빛도 그 검은 하늘을 밝힐 수 없었다.
응급실의 형광등은 너무 밝았다. 이준호가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그 빛이 망막을 자극했다.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박수진의 남편 박준영(55)이 접수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목이 터질 듯한 비명이었다.
"당신들이 살인자들이에요! 우리 딸이 뭐 했는데! 뭐 했는데!"
경찰관 둘이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려는 자세였다. 박준영의 손에는 딸의 사진이 쥐어져 있었다. 얼굴이 핏빛으로 붓기까지 했다.
박은지가 복도 모서리에 서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벌어진 거야."
이준호가 박은지에게 다가갔다.
"박수진 남편이 2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술실 CCTV 영상을 입수했대요. 딸이 마취 상태에서 간호사가 정맥주사를 추가로 주입하는 장면. 그리고 그 직후 딸의 생체신호가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
"영상이 있어?"
"병원이 지금 그걸 부인하고 있어요. 기술 문제라고. 근데 박준영 씨가 직접 봤다고 해요. 명확하게."
이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응급실 의사 한 명이 박준영에게 다가갔다. 젊은 의사였다. 이름표에는 '신재훈'이라고 적혀 있었다.
"환자분, 진정하시고 대화를 해봅시다. 의료 기록을 확인하시면 모든 처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검 결과도 자연사로 판정되었고—"
"자연사? 우리 딸이 건강한 여자였어요! 수술 전에 검진을 다 받았어! 그리고 영상이 있다니까요!"
박준영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서 화면을 제대로 못 켰다. 경찰관이 팔을 살짝 잡았다.
"영상을 보고 싶으시면 경찰에 신고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의료 기록에 따라서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나왔을 때 응급실 뒤쪽에서 병원장 김태욱이 나타났다.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표정은 근심 어린 의료인의 그것이었다. 연기였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께 진심으로 애도를 드립니다. 저희 병원도 매우 유감입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의료 기록에 의존해야 하며, 이미 의료심판원의 판정도 완료된 상황입니다. 추가적인 조사는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 뒤에 법무팀장 서민준이 붙어 있었다. 검은 정장, 차가운 눈빛. 그는 박은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자분이시네요. 현재 병원은 개인 정보 보호 차원에서 취재에 응할 수 없습니다. 또한 부정확한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박은지가 휴대폰을 내렸다.
"공중 보건과 관련된 뉴스는 공익적 사실 적시이므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CCTV는 병원 시설이므로 유족이 요청할 경우 공개 대상입니다."
"법적 해석은 법원에서 판단합니다."
서민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이준호가 박준영에게 다가갔다. 경찰관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박수진 씨의 남편이신가요."
박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흘렀다.
"법의관 이준호입니다. 당신의 딸에 대해 부검을 진행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우리 딸을 본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도 알아야 해요. 저 병원이 뭘 했는지. 당신이 본 거 있어요?"
이준호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이 김태욱을 지나갔다. 김태욱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준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응급실의 모든 소음이 그 목소리 앞에서 멈춘 것처럼 보였다.
"부검 기록에 비정상 소견이 있습니다. 혈액 내 약물 농도가 정상 범위를 크게 초과하고 있습니다. 의료 기록상 투여 용량과 맞지 않습니다."
박준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절망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럼 우리 딸이 살인당한 거예요?"
이준호는 박준영의 눈을 마주쳤다. 그의 턱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한 음절씩, 무게 있게.
"의료 기록과 부검 소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는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응급실이 조용해졌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김태욱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민준이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가 계획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법의관님, 당신의 의견은 개인적 판단일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판정은 의료심판원과 검사의 결정에 따릅니다."
김태욱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차분했다. 위협적이었다.
"또한, 당신이 현재 진행 중인 조사가 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만약 증거를 부정확하게 수집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당신이 져야 합니다."
이것은 협박이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박은지도 알았다. 박준영도 느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우리 딸을 죽인 건 당신들입니다."
박준영이 소리쳤다.
"법정에서 봅시다."
경찰관이 박준영의 팔을 잡았다.
"신고는 접수되었습니다. 조사는 경찰과 검사가 진행할 것입니다."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박준영과 경찰관들이 먼저 나갔다. 박은지가 이준호의 곁에 섰다.
"지금 상황이 복잡해졌어요. CCTV 영상이 증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병원이 기술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도 봤겠지만, 저쪽에서는 이미 역공을 준비하고 있어요."
"메모리 카드가 있어."
이준호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5년 전 원본 수술 기록. 의료기록 위조의 증거야."
박은지의 눈이 커졌다.
"누가 줬어요?"
"한준혁. 마취과 의사. 법정에서 증언하기로 했어."
박은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증거가 확보된 거네요."
"그래. 이제 이 카드를 이혜진 검사에게 전달해야 해. 그리고 너는?"
이준호가 박은지를 바라봤다.
"CCTV 영상은 어떻게 되고 있어?"
박은지가 주저했다.
"병원 IT 담당자에게 연락했어요. 서버 접근을 시도했는데, 보안이 생각보다 강했어요. 대신 박준영 씨가 유족으로서 직접 영상 공개를 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파일을 받을 수 있었어요."
"영상을 확보했다는 뜻이네."
"네. 근데…"
그녀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과정에서 제 신원이 노출될 수 있어요. 기사를 올리면 더 위험해질 거고요."
"위험해. 그걸 하면 너도 증거 조작 혐의를 받을 수 있어."
"이미 당신은 그 위험에 있잖아요. 그리고 저도 필요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이준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여자는 감정이 아니라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1시에 이혜진 검사를 만나야 해."
"서울중앙지검?"
"응. 너는 영상 확보에 집중해. 그리고 기사를 올려. 지금 바로."
박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결연함이 드러났다.
"지금 올릴 거예요. 제목은 '서울의료대학교병원 의료사고 의혹 — CCTV 영상 공개'로. 그럼 병원이 함부로 영상을 삭제할 수 없게 돼요. 여론이 개입되니까."
"조심해."
"당신도."
박은지는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기사를 최종 검토하고 있었다. 법적 표현을 다시 확인하고, 증거 이미지를 첨부하고, 발행 준비를 마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발행' 버튼 위에서 멈췄다.
"이제 올라가요."
손가락이 화면을 눌렀다. 기사가 플랫폼에 올라갔다. 실시간으로 조회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30, 50, 100, 200. 불이 붙었다.
"됐어요. 이제 끝입니다."
이준호는 택시를 다시 잡았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흘러갔다. 모든 불빛이 거짓처럼 보였다.
지검 7층 카페에 도착했을 때 이혜진은 이미 앉아 있었다. 커피 한 잔이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이준호를 봤을 때 약간 놀란 듯했다.
"늦지 않았나."
"정확히 1시 2분."
이준호가 앉았다.
"박수진 사건이 터졌어. 유족이 CCTV 영상을 입수했고, 응급실에서 소동이 있었어. 그리고 박은지 기자가 기사를 올렸어. 지금 이 시간에도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을 거야."
이혜진이 커피잔을 들었다 놨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준호를 피했다.
"예상했어. 병원이 유족을 과도하게 진정시키려고 할 때는 보통 다른 증거가 나타날 때야."
그녀가 손가락을 테이블에 톡톡 쳤다.
"당신이 가진 게 뭐야."
이준호가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작고 단단한 칩이 형광등 아래에서 빛났다.
"5년 전 원본 수술 기록. 의료기록 위조의 증거야."
이혜진이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이걸 어디서 얻었어."
"증인이 제공했어. 당시 수술 팀 의사야. 그리고 그 증인이 법정에서 증언하기로 했어. 오늘 밤 결정했어."
이혜진이 카드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검사는 증거를 평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 카드가 원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야. 병원 측 변호사가 먼저 '컴퓨터 데이터는 조작 가능하다'고 주장할 거야. 그럼 이것도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증인 증언이 필요한 거야. 한준혁이 법정에서 '이것이 원본이고, 병원의 기록은 위조된 것'이라고 증언하면, 카드와 의료기록을 비교 감정할 수 있어. 그의 증언이 있으면 데이터의 신뢰성이 확보돼."
"그 의사가 증언할 거라고 보니."
이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커피잔을 다시 집었다가 놨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병원이 이미 그를 압박하고 있을 거야. 당신도 알겠지만, 의료계는 내부 고발자에게 매우 냉정해. 경력 단절, 괴롭힘, 전직 불가 같은 보복이 일어나."
"그래서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증인 신청을 지금 바로 해야 해. 그 전에 병원이 그를 설득하거나 협박하기 전에."
이혜진이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피했다가 다시 마주쳤다.
"위험한 일이야. 당신도, 그 의사도, 그리고 나도."
"알아."
"내가 이 카드를 법원에 제출하면, 병원 측은 반박 증거를 준비할 거야. 그리고 당신의 증거 수집 절차를 문제 삼을 거야. 혹은 당신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을 수도 있어. 5년 전 일을 아직도 집착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들이 뭘 하든 상관없어. 증거만 맞으면 돼."
이혜진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내가 상층부에 보고했어. 박수진 사건 기소 의향서를 제출했어. 의료기록 위조 혐의와 살인 혐의로."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반응이 뭐야."
"잠깐 기다리라고. 의료 전문가 의견을 더 들어야 한다고. 그런데 그 '기다리라'는 게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어. 상층부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거든."
"상층부가 누구야."
"나도 모르는 사람이 지시를 내려. 내 상사를 거쳐서. 그 상사도 그 위에서 지시를 받는다고 해. 지시 체계가 불투명해. 내 상사한테 '누가 지시했냐'고 물으면 '위에서 그렇게 했다'고만 해. 기소 미루기의 기간도, 상층부 지시의 구체적 내용도 전혀 알 수 없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이혜진이 커피를 마셨다. 식은 커피였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다시 잔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졌다.
"당신이 뭘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당신을 막으려고 해.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도 막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
이준호가 테이블에 손을 놨다.
"그럼 빨리 움직여야 해. 증인 신청부터."
"내일 오전에 신청할 거야. 하지만 한준혁이 법정에 나타날 때까지는 알 수 없어. 그게 가장 큰 변수야."
이혜진이 주머니에서 폴더를 꺼냈다. 얇은 종이 폴더였다. 그 안에는 의료기록이 들어 있었다. 5년 전의 것이었다.
"이건 당신 사건 기록이야. 아카이브에서 찾은 거. 원본이 손실되었다고 했는데, 사본이 남아 있었어. 당신의 마취 기록, 당신의 환자 모니터링 기록. 모두."
이준호가 폴더를 받았다.
"이것도 조작됐어?"
"그렇게 보여. 특히 맥박과 산소포화도 수치가 수상해. 필기체로 수정된 흔적이 있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쓴 흔적.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의 수기 기록이라서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어."
이준호가 기록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5년 전의 자신의 진실이 이 종이 위에 있었다.
"이것도 법정에 제출할 거야."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증거의 출처가 명확하거든. 그리고 당신의 메모리 카드와 비교하면, 두 기록이 다르다는 걸 입증할 수 있어. 그럼 의료기록 위조가 확정돼."
이혜진이 일어섰다. 이준호도 일어났다. 카페는 밤 1시가 되었는데도 한두 명이 앉아 있었다.
"당신은 지금부터 조심해야 해. 증거를 가진 사람은 항상 표적이 돼. 특히 권력자들 앞에서는."
"알아."
"한준혁도 보호해. 증인이 위협받으면 증언이 나올 수 없어. 그리고 박은지 기자도. 그 여자가 기사를 올렸으면 병원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미 움직이고 있을 거야. 이 시간에도."
이준호가 카페를 나왔다. 밤하늘은 여전히 검었다. 서울의 불빛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어둠만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원석이었다.
"준호, 긴급이야. 너 지금 어디야? 경찰청에서 너한테 수사 협조 요청이 들어왔어. 박수진 사건 관련해서. 그런데…"
"뭐가 문제야."
"상층부에서 너한테 이 사건 수사 참여 금지 지시가 내려왔어. 당신은 객관성이 없다고. 5년 전 사건과의 개인적 관련이 있다고. 그래서 다른 법의관이 재부검을 진행할 거래."
이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법의관이… 누구야."
"정준영. 보수적인 놈이야. 병원이랑 친한 거로 알려져 있고. 준호, 뭔가 이상해. 너 뭘 건드렸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이 얼마나 큰 판인지.
"최원석."
"응?"
"박수진 사건의 원래 부검 기록. 내 부검 기록. 모두 보관해. 아무도 건드리지 않도록."
"뭔가 이상하잖아. 뭐 하고 있는 거야?"
"일."
이준호가 휴대폰을 내렸다.
지검 앞 거리에서 밤 1시 반, 이준호는 하늘을 봤다. 여전히 검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검은 하늘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빛이 될지, 더 깊은 어둠이 될지는 몰랐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준혁이었다.
"준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목소리가 떨려 있었다.
"뭐가 일어났어."
"김태욱이 나한테 전화했어. 넌 뭘 했어? 박수진 사건을 건드렸어? 넌 알면서도 우리한테…"
"한준혁. 진정해. 뭐라고 했어?"
"김태욱이 내 진료를 제한한다고 했어. 환자 진료 금지. 그리고 의료윤리 위반 혐의로 의료심판원에 신고하겠다고. 내가 뭘 했는데…"
한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근데… 난 괜찮아. 이미 각오했어. 당신한테 증언하기로 했으니까. 법정에서 다 말할 거야. 모든 걸."
전화가 끝났다.
그때 경찰청에서 또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
"법의관님? 경찰청 수사과입니다. 박수진 사건 재부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당신은 참여 불가이며, 정준영 법의관이 새로이 부검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존 부검 기록은 검찰에 인계하시기 바랍니다."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지검 앞 거리는 여전히 고요했다. 밤 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박은지의 기사는 이미 온라인에 올라가 있었다. 조회수는 5만을 넘었다.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분노, 의심, 공감.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병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시간 동안 검찰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시간 동안 경찰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준호는 알았다. 이제 증거 전쟁이 아니라 권력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죽은 자의 목소리는 그 전쟁에서 가장 약한 무기라는 것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박은지였다.
"준호 선생님! 기사 조회수가 10만을 넘었어요. 언론사들이 연락을 받기 시작했어요. 대형 뉴스로 터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지금 어디야."
"친구 변호사 집이에요. 안전한 곳으로 피했어요. 근데…"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병원에서 제 신원을 파악했을 거예요. 법무팀이 움직이고 있을 거고요. 그리고 당신도 조심해야 해요.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에요."
이준호는 박은지의 경고를 들었다. 그리고 그 경고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느꼈다.
밤거리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준호가 받았다.
"법의관 이준호?"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남자였다.
"누세요."
"당신이 가진 메모리 카드. 그것을 넘기면 모든 게 끝나. 당신도, 한준혁도, 박은지도. 모두 안전해져."
"누구세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의 선택이야. 카드를 넘기거나, 아니면…"
전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밤 2시 반. 아직 4시간이 남아 있었다. 4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메모리 카드는 주머니 안에서 가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