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패턴

카페 입구에서 박은지를 만난 것은 오후 3시 정각이었다. 이준호는 일찍 도착해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기자 박은지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자신의 호흡이 얕아지는 것을 느꼈다. 5년 전의 끔찍한 기억이 한 사람의 얼굴 위에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박은지는 이준호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눈가의 주름은 깊었고, 그 깊이는 단순한 시간의 경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앉으면서 카페 라떼를 마시기 전에 두 손을 한 번 비비는 습관을 보였을 때, 이준호는 그것이 신경증의 신호임을 알아챘다.

"5년 전에도 이 카페를 왔었어요."

박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딸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였어요. 병원이 합의금 5억을 제시했거든요. 그 돈이 입 다물 돈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때만 해도."

이준호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십 번 들어봤지만, 첫 번째 문장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이 진실을 향한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박소은이라고 해요. 만 22살이었어요. 서울의료대학교병원에서 맹장 절제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실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고 했어요. 의료기록에는 '예측 불가능한 합병증'이라고만 적혀 있었어요."

박은지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젊은 여성의 사진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 밝은 눈, 미소. 죽음이 닿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준호는 그 사진을 3초 이상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오래 보면 객관성을 잃기 때문이었다.

"병원이 합의금을 제시하기 전에, 저는 의료기록을 봤어요. 복사본이었지만."

"어떤 부분이 이상했나?"

박은지가 라떼 잔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모니터링 기록이요. 심박수, 산소포화도, 혈압이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수치들이 깔끔했어요. 너무 깔끔했어요. 제가 의학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건 느낄 수 있었어요."

"기록지 자체는 어떻게 생겼나?"

"종이에 인쇄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박은지가 말을 멈췄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조용해 보일 정도로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은 5년의 무게를 실었다.

"손가락 자국이 있었어요. 맨 아래쪽에."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호흡이 한 박자 깊어졌다.

"손가락 자국?"

"네. 마치 누군가 종이를 적신 손가락으로 만진 것처럼요."

박은지가 휴대폰 화면을 돌렸다. 의료기록 사본의 사진이 나타났다. 이준호는 화면을 확대했다. 기록지의 하단부에 명확한 지문 흔적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보였다. 종이 표면이 약간 주름진 흔적도 보였다. 습기 있는 손이 닿은 자국이었다.

이준호는 즉시 휴대폰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그리고 메모 앱을 켜 기록했다.

**손가락 자국 - 엄지손가락, 습기 흔적 명확. 의료기록 위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형적 증거. 원본 기록 스캔 후 수정, 재인쇄 단계에서 작업자의 손이 종이에 접촉. 습도 환경에서 더 선명하게 남음.**

"이 사진은 언제 촬영한 건가?"

"3년 전이에요. 제가 처음 의료기록을 받았을 때 촬영해뒀어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이준호는 사진의 메타데이터를 확인했다. 촬영 날짜, 시간, 위치 정보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법정에서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형태였다.

"이 손가락 자국을 병원에 말했나?"

"네. 의료기록이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 순간 병원 법무팀이 나타났어요. 서민준이라는 변호사였어요. 그 사람이 '어머니가 의료기록을 손으로 만지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합의금을 받으시면, 이런 언급을 공개적으로 하시면 안 된다'고 했어요."

이준호는 서민준의 이름을 들었을 때 턱이 조였다. 5년 전에도 그 남자가 자신의 사건을 처리했다. 같은 변호사가 같은 병원의 연속된 사건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직적 비리의 증거였다.

"당신이 의료기록 사본을 여전히 가지고 있나?"

"네. 합의 후에도 원본은 반환했지만, 촬영본은 따로 보관했어요.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요."

이준호는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쳐 있었다. 5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같은 깊이에서 보고 있었다.

"5년 전에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취 기록이 조작되었고, 그걸 증명할 원본 의료기록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증언을 강요받았다. 내가 한 거짓 증언은 환자의 사인을 '자연사'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마취 중 오류로 인한 사망이었는데도."

박은지가 이준호를 직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의심과 희망이 동시에 떠 있었다.

"그럼 당신도 피해자라는 거네요?"

"그렇다."

"그럼 당신이 이걸 밝혀낼 수 있다는 거죠? 법의학적으로?"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박은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 얼굴에는 5년의 절망이 새겨져 있었고, 동시에 이제 누군가 자신의 딸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감정이었다. 법의학은 희망을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법의학은 증거만을 다룬다.

그러나 이준호는 그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당신의 딸이 죽은 이유를 알아내겠습니다."

박은지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정말요?"

"네."

카페의 음악이 바뀌었다. 피아노 소나타였다. 그것은 장례식에서 자주 나오는 곡이었다. 박은지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손으로 눈을 닦지 않았다. 눈물을 그대로 놔둔 채로 이준호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한 시간이 더 지났다. 박은지는 47명의 환자 목록과 자신이 수집한 기사 자료들을 이준호에게 건넸다. 그 자료들 중에는 의심사망 신고 기록, 유족들의 인터뷰, 그리고 병원의 공식 입장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박은지가 수집한 정보의 깊이는 전문 기자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 자료들은 어떻게 모았나?"

"유족들이에요. 제 딸이 죽은 후에 저는 자조모임을 만들었어요. 같은 병원에서 같은 방식으로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찾아다녔어요. 처음엔 몇 명뿐이었는데, 지금은 47명이 되었어요."

이준호는 그 숫자를 다시 들었을 때 호흡이 깊어졌다. 47명. 그것은 단순한 의료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적 살인이었다.

"당신은 왜 이걸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나?"

"했어요. 여러 번. 하지만 답이 없었어요. 경찰은 '의료사고는 민사 사건'이라고 했고, 의료심판원은 '증거 부족'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박은지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병원이 우리를 찾아왔어요. 유족들 하나하나를 찾아가서 '추가 기소를 진행할 경우 역으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변호사가 또 서민준이었어요."

이준호는 이 정보를 메모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서민준은 병원의 방패였다.

카페에서 나간 것은 저녁 5시였다. 박은지는 이준호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건넸고, 이준호는 그것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박은지는 이미 모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준호는 지하철에 타면서 휴대폰을 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메일을 확인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이혜진 검사로부터의 메일이 하나 있었다.

**"박수진 사건의 추가 감정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병원 측에서 의료기록 원본을 제출하겠다고 했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이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료기록 원본. 그것이 위조되었다면, 지난 2년간의 모든 증거가 한꺼번에 드러날 것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였다. 이준호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박은지가 건넨 자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47명의 환자, 47개의 의료기록, 47가지의 죽음. 그것들 사이에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었다.

밤 10시를 넘어가며 이준호의 분석이 심화되었다. 각 환자의 사망 시점을 추적했다. 모두 회복실 단계에서 심정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회복실이라는 것은 마취에서 깨어나는 과정이었다. 그 시점에서 심정지가 발생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취 기록이었다. 이준호는 각 환자의 마취 기록을 세밀하게 비교했다. 47명 모두의 기록에서 마취약물의 투여량이 정상 범위 내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치들은 자연스러운 변동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동일한 패턴으로 조정되어 있었다. 마치 템플릿처럼.

이준호는 스프레드시트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환자별 마취제 종류, 투여량, 투여 시간, 심정지 발생 시간. 각 항목을 비교하자 명확한 규칙성이 드러났다.

**공통점 1: 모두 회복실 심정지 - 마취 각성 단계의 급성 심부전을 의미. 극히 드문 사례.**

**공통점 2: 마취 기록 수치 조작 - 정상 범위 내에서 반복되는 동일 패턴. 의도적인 마취 과다 투여 후 기록 위조를 시사.**

**공통점 3: 마취제 투여량 계산식 일치 - 환자 체중별 표준 투여량 대비 실제 투여량 간 편차 없음. 자동 계산 시스템 또는 사전 템플릿 사용 가능성 높음.**

**공통점 4: 심정지 발생 시간대 일치 - 모든 사망이 수술 후 30~50분 사이에 발생. 마취제 대사 시간과 정확히 일치.**

**공통점 5: 모든 사망이 '예측 불가능한 합병증'으로 분류 - 법적 책임 회피의 명백한 의도.**

이준호는 노트에 손으로 기록했다. 마취 기록의 위조 방식, 예상되는 마취제 종류(프로포폴 또는 세보플루란), 과다 투여로 인한 심근억제 가능성. 모든 증거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획된 살인이었다.

밤 11시.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한준혁이었다. 마취과 의사. 5년 전 자신의 사건 당시 증언을 강요받았던 사람이었다.

이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만날 수 있을까? 그때 내가 할 수 없었던 얘기가 있어."**

문자의 뒤에는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가 있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결정이었다.

이준호는 천천히 회신했다.

**"언제 가능한가?"**

한준혁의 답장은 30초 내에 왔다.

**"내일. 새벽 2시. 강남역 역삼동 골목."**

그것은 이상한 시간과 장소였다. 왜 새벽이어야 하고, 왜 골목이어야 하는가. 이준호는 그 의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준혁은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밤 11시 50분.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한강 너머의 야경을 봤다.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각각의 삶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삶들 중 일부는 이미 꺼져 있었다.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서민준이었다.

"이준호."

목소리는 차갑고 정제되어 있었다.

"당신이 박은지를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수집한 모든 자료는 의료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다. 당신이 법의관이라는 신분으로 수집한 정보를 무단으로 제3자에게 제공한 것은 명백한 범죄다."

"내가 박은지에게 제공한 정보는 없다."

"그 정보를 박은지에게 제공했나?"

이준호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사실상의 인정이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피고인은 당신이다. 법의관 신분을 남용한 정보 수집 및 제공, 의료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그리고 명예훼손으로 기소될 것이다. 당신의 면허는 다시 박탈될 것이다."

서민준의 목소리는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이준호의 머리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서민준이 왜 지금 이 전화를 걸었는가. 그것은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다.

누군가 한준혁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한준혁이 이준호를 만나려 한다는 정보가 서민준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민준은 이준호를 먼저 압박하려고 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준호는 서민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협박이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준호는 호흡을 고르고 최원석 경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경사. 나한테 협력해줄 수 있나?"

"뭐하는 거야? 이 시간에?"

"서민준이 내일 오전 10시에 나를 고소한다고 했다. 죄명은 의료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다."

"뭐? 그게 뭔 소리야?"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다. 지금은 한 가지만 해줘. 내가 새벽 2시에 강남역 역삼동에서 누군가를 만날 건데, 당신은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주면 좋겠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최원석은 잠깐 침묵했다.

"뭐 하는 거야, 정말?"

"법의학."

"...알겠어. 2시에 역삼동. 근처에 있을게."

이준호는 전화를 끊고 노트북 앞으로 돌아갔다. 밤새 박수진 사건의 부검 기록과 박소은 사건의 의료기록을 비교 분석했다. 두 기록 사이에는 동일한 패턴이 있었다. 마취 기록의 수치들이 모두 정상 범위 내에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정된 수치였다. 이준호는 확신했다. 이것이 증거였다.

새벽 1시 30분. 이준호는 아파트를 나갔다.

강남역 역삼동 골목은 밤 2시에도 죽어 있지 않았다. 24시간 술집과 편의점들이 희미한 불을 켜고 있었다. 이준호는 약속된 장소 근처의 어두운 건물 옆에 서서 대기했다.

새벽 2시 정각. 한준혁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의 특징적인 증상들이 모두 보였다.

"고마워. 와줘서."

한준혁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5년 전의 일을 말하러 온 건가?"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한준혁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 손가락의 압력은 절박했다.

"나 죽을 것 같아. 정말로."

이준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한준혁의 눈을 직시했다. 거기에는 자살 직전의 사람이 가지는 특별한 공포가 있었다. 이준호는 법의관으로서 그 공포를 여러 번 봤다.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나?"

"서민준 변호사가... 너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그리고 만약 내가 너랑 만나거나 증언한다면, 내 인생이 끝난다고 했어."

한준혁의 손이 더 떨렸다.

"근데 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거 같아. 5년 동안 죽어 있었어. 그 환자 때문에. 그리고 너 때문에."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당시에 너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조직의 압박 앞에서 모두가 무너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환자의 사인을 자연사로 조작하는 거짓 증언을 했다. 그것이 내 죄다. 하지만 그 죄를 지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5년 전 그 사건에서 너는 마취 깊이를 잘못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너는 올바른 마취를 제공했고, 그 후 누군가가 기록을 조작했다. 그 거짓 증언이 너를 죽인 것이다."

한준혁이 눈물을 흘렸다. 5년간 억눌렀던 죄책감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럼... 넌 왜 지금 다시 이 일을 하는 거야? 넌 이미 충분히 피해를 입었잖아."

이준호는 한준혁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단지 관찰자의 눈이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니까."

"뭐?"

"부검을 할 때, 나는 시체의 목소리를 듣는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시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의료기록은 거짓을 말하고, 증인은 거짓을 말하고, 법정도 거짓을 말한다. 하지만 시체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한준혁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증언하고 싶어. 진짜로."

"그렇다면 증언해.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한준혁은 이준호의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이 이준호의 팔에서 떨어졌다.

"만약 내가 증언하면... 나는 어떻게 돼?"

"보호받을 것이다. 법적으로."

"법적 보호가... 정말 작동할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법적 보호는 종이에 불과했다. 진정한 보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하지만 선택하기 전에 알아둬. 당신이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조직의 압박 앞에서 누구나 무너진다. 하지만 지금부터 당신이 침묵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 된다."

한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 오후 3시에... 서민준이 나를 만난다고 했어. 마지막 확인이라고. 내가 절대 증언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그 만남을 기록해달라. 음성 기록이면 좋겠다."

"음성 기록? 그게... 불법 아닌가?"

"법적으로는 회색 지대다. 하지만 당신의 신체가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증거 수집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휴대폰 녹음 앱을 켜두고, 주머니에 넣어두면 된다. 당신이 서민준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기록될 것이다."

한준혁은 이준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해보겠어."

"위험할 수도 있다. 서민준이 당신을 협박할 수도 있고, 더 심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 기록을 남기면, 그것이 법정에서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한준혁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결연함이 동시에 떠 있었다.

"내가 이걸 못 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겠지?"

"그렇다."

"그럼 내가 해야겠네."

한준혁이 가고 난 후, 이준호는 골목에 서서 강남의 야경을 봤다.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각각의 거짓이 있었다.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최원석이었다.

"다 끝났나?"

"네."

"뭐 한 거야?"

"증인을 확보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3시에 그 증인이 서민준과의 만남을 음성 기록할 것이다."

"음성 기록? 그게 법적으로 유효한가?"

"회색 지대다. 하지만 증인이 협박 상황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증거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최원석은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이 커질 거 같은데... 정말 괜찮겠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한강을 바라봤다. 강물은 밤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흐름이었다.

새벽 4시. 이준호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다시 켰다. 화면에는 47명의 환자 데이터가 떠 있었다. 47명의 죽음. 47개의 거짓. 그리고 하나의 진실.

이준호는 이혜진 검사에게 메일을 보냈다.

**"박수진 사건 의료기록 원본 제출 일정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47건의 연관 사건에 대한 법의학적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원본 의료기록과 부검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추가로, 증인 확보를 통해 의료기록 위조 과정에 대한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긴급 회의를 요청합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이준호는 창밖을 봤다. 새벽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의 머리는 오늘 오후 3시에 벌어질 일에 가 있었다. 한준혁이 정말 음성 기록을 할 수 있을까? 서민준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협박을 넘어 신체 위협까지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병원이 제출하겠다던 의료기록 원본이 정말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이혜진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4시 30분이었다.

"검사님, 죄송합니다. 긴급입니다."

"뭔가?"

"의료기록 원본 제출 일정이 정해졌나요?"

"오늘 오전 10시라고 했습니다. 병원 법무팀이 직접 가져온다고."

이준호의 호흡이 깊어졌다. 오늘 오전 10시. 그리고 한준혁과의 만남은 오후 3시. 시간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 의료기록이 도착하면 즉시 저에게 알려주시겠어요?"

"당연하지. 뭔가 있나?"

"병원이 의료기록을 위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원본이 도착하면 저는 즉시 분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료기록 원본의 도착, 한준혁의 음성 기록, 그리고 자신의 법의학적 분석. 모든 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병원이 정말 위조된 의료기록을 제출할까? 아니면 위조를 감춘 새로운 기록을 제출할까? 그리고 한준혁이 정말 음성 기록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서민준의 압박에 굴복할까?

이준호는 창밖의 밝아오는 하늘을 봤다. 새벽은 지나가고 있었고,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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