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재회

이혜진 검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시간은 오후 3시 47분이었다. 이준호는 복도의 벽시계를 확인했고, 정확히 그 시간에 검사실 내부에서 "들어와"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전히 시간에 정확한 사람이었다.

"오래간만이네요."

"5년 2개월 18일."

이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볼펜을 놨고, 모니터 화면을 꺼냈다. 그녀의 얼굴은 5년 전과 달랐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고, 턱선이 더 각져 있었다. 법정에서 지낸 시간이 그렇게 쌓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확하네요. 여전히."

"검사님도 여전히 일 중에 있군요."

이준호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검사실의 책상 맞은편 의자는 방문객용이었고, 그는 방문객이 아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5년 전에도, 지금도.

"준호 씨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이혜진이 말을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박수진 사건 부검 결과, 봤어요?"

"네."

"나도 봤어. 지난주에 당시 사건 기록을 다시 꺼내봤는데."

이혜진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노란색 파일이 나왔다. 그 위에 검은 펜으로 'LEE JUNHO / 2019.11.15'이라고 적혀 있었다. 5년 전 이준호의 사건 기록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쳤고, 옆에 박수진 사건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뭔가 이상했어."

"어떤 부분이요?"

"마취 기록지. 당신의 기록과 박수진 사건의 마취 기록이... 거의 같은 패턴으로 조작되어 있어. 수정액 흔적, 데이터 입력 순서, 마지막 기록 시간대 전부."

이준호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 문장을 들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엔 증거가 불완전했어. 의료기록 원본과 부검 소견만으로는 법정에서 기소할 수 없었어. 의료과실 판단 기준이 너무 높았고, 전문가 증인들도 '통상적 범위'라고 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내가 못해줬어. 그때."

"지금은 다르신가요?"

이혜진이 파일을 닫았다. 천천히. 마치 시신을 수의로 감싸는 것처럼.

"지금도... 쉽지 않아. 하지만 당신이 맞았어. 당신의 판정이 맞았어."

5년 만에 누군가로부터 나온 그 말은 작은 폭발이었다. 이준호의 호흡이 한 박자 멈췄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의료기록 위조를 입증할 수 있으신가요?"

"그게..." 이혜진이 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이준호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결정을 앞두고 있는 침묵이었다. "박수진 사건과 당신의 사건에서 패턴을 찾았어. 같은 병원, 같은 마취과, 같은 수정 방식. 하지만 당신 사건은 5년이 지났고, 원본 의료기록을 다시 요청해야 해."

"원본을요?"

"병원이 원본을 보관하고 있거든. 우리가 요청하면 제출해야 해."

이혜진은 전화기를 들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지켜봤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선번호를 누르는 것을 봤다. 병원 연락 담당자로 연결되는 데 2분이 걸렸다.

"서울의료대학교병원 의무기록 담당자 부탁합니다. 네, 서울중앙지검 검사 이혜진입니다."

통화 중 이혜진의 얼굴이 변했다. 눈썹이 내려갔고, 입술이 일직선이 되었다. 이준호는 그 변화를 정확히 봤다.

"...네? 기록이 없다고요?"

"뭐라고요?"

이준호가 물었다. 이혜진은 손가락으로 '잠깐'이라는 신호를 했다.

"5년 전 환자 기록을 찾아달라고 했을 때 시스템상 기록이 없다니요? 네, 환자명은 이준호 의사의 마취 사건과 관련된... 아,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었다. 이혜진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확신이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뭐라고 했어요?"

"병원이 말하기를, 당신의 마취 기록은 시스템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손실되었대. 2022년에 병원 전산 시스템을 교체했을 때 일부 오래된 기록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의료기록법상 최소 5년은 보관해야 합니다."

"알아. 알아."

이혜진은 다시 침묵했다. 이준호는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의료기록 파기는 위법이다. 하지만 시스템 오류라는 명목 하에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 병원은 '시스템 업그레이드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손실'이라 주장할 것이고, 그것을 법적으로 의도적 파기라 증명하려면 별도의 전산 감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요청하려면 검사장의 승인이 필요하다.

"검사장에 보고하셨어요?"

"아직 공식적으로는... 어렵다고 해."

"왜요?"

"현재 상황이 복잡해. 박수진 사건도 상층부에서 지연 지시가 나왔고, 당신 사건을 다시 들추면... 그 병원이 상층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이준호는 그 말을 천천히 씹었다. 의료기록 원본 소실. 상층부의 지연 지시. 병원과 상층부의 유착. 이것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상층부가 누굴 말하는 건가요?"

"검사장 위쪽. 그 위쪽의 위쪽. 의료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쪽과, 그쪽 사람들이 의료협회 인맥들과..." 이혜진이 말을 흐렸다. "구체적으로는 말 못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그 구조를 이해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검시 결과는 검사의 기소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검사의 기소 판단은 경찰의 수사 방향을 좌우한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 방향은 상급 기관의 지시를 따른다. 그 상급 기관이 정치인들과 의료계 인맥을 가지고 있다면, 수사는 자동으로 멈춘다. 이것이 5년 전의 구조였고, 지금도 같은 구조였다.

"그럼 박수진 사건은?"

"기소할 수 있을 거 같아. 증거가 충분하고, 의료기록 조작의 흔적도 명확해. 다만 시간이 걸릴 거 같아."

"얼마나요?"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할 거야."

이혜진은 다시 파일을 들었다. 이번엔 박수진 사건 기록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쳤고, 각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마취 기록, 간호 기록, 의료기록, 부검 소견.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당신의 사건을 다시 열려면 원본 기록이 필요해. 그 기록이 없으면 법정에서 '시스템 오류'라는 병원의 주장만 남아. 그럼 기소할 수 없어."

"그럼 박수진 사건으로 병원을 기소하고, 그 과정에서 당신 사건의 패턴을 증거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 속에 무언가 희미한 불이 켜진 것 같았다.

"가능할 수도 있겠네. 만약 박수진 사건에서 마취 기록 조작을 증명하면, 그 조작 방식이 5년 전 당신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법정에서 주장할 수 있어. 그럼 당신 사건도 같은 방식의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될 수 있고."

"그럼 내 무죄도 입증될 수 있다는 거네요."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법정에서 그것이 인정될지는... 모르겠어."

침묵이 다시 길어졌다. 이준호와 이혜진은 그 침묵 속에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했다. 5년 전의 무죄, 그리고 지금의 가능성. 그 사이에 있는 거대한 간극.

"검사님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박수진 사건에서 최대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 의료기록 조작의 증거, 병원의 은폐 의도, 다른 사건들과의 패턴. 그걸 모두 모아서 법정에서 싸우는 것. 그리고..."

이혜진이 다시 침묵했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침묵.

"당신 사건의 의료기록 원본을 찾아야 해. 병원 외부에. 혹은 병원 내부의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마취과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중에 당시 기록을 따로 보관했을 수도 있어."

"한준혁이요?"

이혜진이 놀랐다.

"알아?"

"마취과 과장입니다. 당시 제 사건 때 증언했던 의사예요."

"그 의사가 기록을 가지고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물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은데."

이준호는 일어섰다. 검사실의 창밖으로 서울의 도시가 보였다. 오후의 햇빛이 고층 건물들의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

"뭘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이준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로 나가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혜진은 책상에 앉아 두 개의 파일을 다시 나란히 놓았다. 5년 전의 무죄, 그리고 지금의 가능성. 그 사이에 있는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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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이준호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박은지 기자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준호 씨, 중요한 정보 있어요. 지난 2년간 서울의료대학교병원에서 의심사망으로 신고된 케이스가 47건이에요. 그 중 부검이 진행된 건 8건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족 반대로 보류된 상태예요. 패턴이 있을 것 같은데 만나서 이야기해요.'

이준호는 박은지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오후 6시, 서울역 근처의 카페.

박은지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노트북이 열려 있었고, 화면에는 47건의 환자 정보가 스프레드시트로 정렬되어 있었다. 환자명, 나이, 사망 일자, 사망 진단, 신고자, 부검 여부.

"47건이 모두 다른 패턴이라면 우연이겠지만, 패턴이 있다면 의도가 있다는 뜻이에요."

박은지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스크린을 스크롤하면서 특정 케이스들을 표시했다.

"이 케이스들 봐요. 사망 진단이 모두 '급성 심근경색' 또는 '뇌출혈'. 그런데 환자들이 모두 기저질환이 없거나 아주 경미한 질환만 있었어요. 그럼 왜 갑자기 심근경색이나 뇌출혈이 생겼을까?"

"약물 중독."

이준호가 말했다. 박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 47건의 사망이 모두 '수술 중' 또는 '회복실' 단계에서 발생했다는 거예요. 즉, 병원 내에서 의료진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박은지는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번엔 47건 중 일부 케이스의 상세 정보가 나타났다.

"이건 3년 전 사건인데, 60대 남성 환자가 충수염 수술 중 갑자기 심정지로 사망했어요. 당시 병원은 '기저질환으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합병증'이라고 했고, 유족은 합의금 5억 원을 받았어요."

"그 환자의 부검은?"

"거부됐어. 유족이 이미 합의금을 받았으니까."

이준호는 스프레드시트를 자세히 봤다. 47건 중 39건이 부검 없이 종료되었다. 8건만 부검이 진행되었고, 그 중 몇 건은 이미 종료된 사건이었다. 박수진 사건은 그 8건 중 하나였다.

"이게 5년 전 당신 사건부터 시작된 거 같아요."

박은지가 말했다.

"제가 조사해 본 결과, 당신이 처벌받은 이후 병원이 의료사고 은폐 체계를 구축했던 것 같아요. 합의금으로 유족을 침묵시키고, 부검을 거부하게 만들고, 의료기록을 조작하는 방식. 이 모든 게 5년 전부터 반복되었어요."

이준호는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47건의 환자 이름들.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은폐되었다. 박수진, 김미영, 이순철, 박명희... 이름들이 화면을 채웠다.

"제 딸도 이 목록에 있어요."

박은지가 조용히 말했다. 마우스를 움직여 한 줄을 표시했다. '박소은, 28세, 2020년 8월 15일 사망, 진단: 급성 심근경색, 신고자: 어머니 박은지'.

"당시 병원은 제 딸이 기저질환이 있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 딸은 건강했어요. 대학병원에 건강검진으로 입원했다가, 간단한 용종 제거 수술을 받다가 죽었어요."

박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옆으로 밀었다. 가방에서 USB를 꺼냈다.

"이 USB에 47건의 모든 환자 정보, 의료기록, 사망 진단서가 다 들어 있어요. 제가 의료기록 정보공개 청구로 얻은 거예요. 당신이 필요하면 분석해 봐요."

USB는 작은 검은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박은지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준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집었다. 손가락에 전달되는 무게는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무거웠다. 47명의 죽음. 47개의 의료기록. 47명의 진실.

"왜 이 정보를 주세요?"

"제 딸을 위해서예요.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박은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USB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 사건도 이 패턴 안에 있어요. 5년 전 당신 사건이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어요. 그 당시 병원이 당신을 희생양으로 삼고, 자신들의 비리를 은폐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로 47명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어요. 당신이 당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동시에 이 47명의 죽음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준호는 USB를 들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만졌다. 그 안에 있을 47개의 파일. 47명의 환자명. 47개의 사망 진단.

"알겠습니다."

"당신의 무죄도, 제 딸의 죽음도, 그리고 이 47명의 죽음도. 모두 같은 진실이에요."

박은지가 일어섰다. 카페를 나갔다. 이준호는 테이블에 남아 USB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손가락으로 USB의 표면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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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 이준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왔다. 책상 위에 USB를 꽂았다. 파일이 열렸다. 47개의 폴더. 각각의 폴더 안에는 환자 정보, 의료기록, 사망 진단서, 가능한 경우 의료기록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이준호는 첫 번째 폴더부터 시작했다. '김미영, 55세, 2019년 11월 20일'. 5년 전 이준호의 사건 5일 후였다. 진단: 급성 심근경색. 수술 중 사망. 부검: 거부됨.

두 번째 폴더. '이순철, 62세, 2019년 12월 3일'. 진단: 뇌출혈. 회복실 중 사망. 부검: 거부됨.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두 같은 패턴이었다. 수술 중 또는 회복실에서 사망. 급성 심근경색 또는 뇌출혈. 부검 거부. 합의금. 종료.

하지만 여덟 번째 폴더부터 달랐다. '박수진, 51세, 2024년 3월 18일'. 부검: 진행 중. 그리고 의료기록 이미지들. 마취 기록, 모니터링 기록, 수술실 기록.

이준호는 박수진의 의료기록을 하나씩 확인했다. 마취 기록지의 맥박 수치. 140에서 시작해 145, 150, 155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120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갔다. 그 패턴이 반복되었다. 정확히 10분 간격으로.

이준호의 눈빛이 변했다. 정확한 간격. 의도적인 약물 주입. 타살.

그는 박소은의 폴더를 열었다. 의료기록 이미지들이 나타났다. 모니터링 기록을 확인했다.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시간 간격. 같은 패턴.

이준호는 박소은의 의료기록 이미지를 확대했다. 마취 기록지의 한 줄. 맥박: 145 → 150 → 155 → 120.

그 기록 옆에 손으로 적힌 글씨가 있었다. 작은 글씨로, 펜으로. '정상 범위 내 변동. 특이사항 없음.'

이준호는 그 글씨를 오래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사진 속 박소은의 얼굴이 보였다. 의료기록 첫 장에 붙은 작은 신분증 사진. 28세의 젊은 여성. 눈이 맑고,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있었다.

이제 그 여성은 없었다. 그녀의 죽음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기록한 의료기록.

밤 11시. 이준호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47개의 환자 정보가 떴다. 그 중 부검이 진행된 8명을 별도로 표시했다. 박수진을 포함해 8명. 그리고 그 8명의 의료기록에서 같은 패턴을 발견했다.

정확한 시간 간격. 같은 약물의 같은 용량. 같은 방식의 모니터링 기록 조작.

47명이 죽었다. 그 중 39명은 부검 없이 종료되었다. 8명만 부검이 진행되었고, 그 8명 중 이준호가 이미 검시한 박수진을 포함해 5명의 사망 원인이 명확했다. 타살. 약물 중독.

이준호는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47명의 죽음. 그 죽음들이 모두 같은 손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39명은 부검도 없었다. 39명의 시체는 이미 화장되었거나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의료기록에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의료기록마저 조작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USB를 빼냈다. 책상 위에 놓았다. 다시 꽂았다. 파일을 다시 열었다. 47명의 이름들. 47개의 폴더. 47개의 죽음.

밤거리는 조용했다. 한밤중의 서울은 다른 도시였다.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들, 야근 중인 직장인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기록하는 법의관. 이준호는 사무실을 나갔다.

거리를 걸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시체는 말한다. 부검 테이블 위에서 시체는 자신의 죽음의 원인을 말한다. 칼자국, 타박상, 독극물, 질식의 흔적. 모든 것이 거기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법정에 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법관은 시체의 말을 듣지 않는다. 법관은 증거를 듣는다. 그리고 증거가 없으면 시체의 말은 무의미해진다.

이준호는 발걸음을 멈췄다.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준혁의 연락처를 찾았다. 마취과 과장. 5년 전 이준호의 사건 때 증언했던 의사.

통화를 걸었다. 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한준혁 과장님이신가요? 저는 이준호 법의관입니다. 5년 전에..."

"알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만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이준호는 세었다. 3초, 4초, 5초.

"내일 오후 2시. 병원 지하 카페."

한준혁이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이준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야간 조명이 하늘을 밝혀 별을 가렸다.

47명의 죽음. 그 죽음을 증명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한준혁을 찾아가는 것. 그가 가지고 있을 원본 의료기록을 얻는 것. 그것이 이준호가 할 수 있는 다음 단계였다.

이준호는 발걸음을 옮겼다. 밤거리를 걸으면서 그는 47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박수진, 김미영, 이순철, 박명희, 박소은... 그들의 죽음은 더 이상 의료기록 속의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누군가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증명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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