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검실의 형광등
부검실의 형광등이 일렬로 켜졌다. 이준호는 시신 앞에 섰다. 40대 여성. 의무기록에는 '수술 중 심정지'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서울의료대학교병원 심장외과 의뢰.
손가락으로 시신의 좌측 상박부를 따라 올렸다. 주사 자국이 세 개. 그 중 두 개는 정맥 라인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위치였다. 하지만 세 번째 자국은 달랐다. 상완이두근과 상완삼두근 사이, 깊숙이 근육층을 관통한 흔적. 의료진이라면 절대 그곳에 주사를 놓지 않는 위치였다.
메스를 들었다. 손목의 움직임은 정확했다. 5년이 흘렀지만 근육은 기억하고 있었다. 조직을 절개하며 현미경 준비를 지시했다. 동료 법의관 최지훈이 표본을 슬라이드에 올렸다.
"뭔가 있나?"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대안렌즈를 조정했다. 400배 확대. 조직 세포의 괴사 패턴이 보였다. 약물에 의한 화학적 손상. 근육 섬유가 녹아내린 흔적이 명확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5년 전. 그 날의 마취 기록지가 떠올랐다. 수정 흔적이 있던 그 기록지. 수술 후 3시간 뒤에 소급 수정되었던 수치들. 당시 이혜진 검사도 의심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되었던 그 사건.
이것은 같은 패턴이었다.
"이건 의료사고가 아니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 최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이준호는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료 네 개를 더 채취했다. 폐 조직. 간. 신장. 심근. 모두 같은 패턴을 보였다. 세포 괴사의 균일성. 약물이 혈류를 통해 전신에 퍼진 흔적. 이것은 의료 절차의 합병증이 아니었다.
"약독성 패턴이야. 마취제 과다 농도."
"수술 중이라면서?"
"정맥 주사가 아니다. 근육 주입."
메스로 상박부를 다시 절개했다. 주사 부위의 근육을 적출해 분석용 용기에 담았다. 혈액 검사. 독성 검사. 조직 화학 분석. 모든 절차가 자동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인을 뭐로 쓸 거야?"
최지훈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타살. 약물에 의한 중독."
침묵. 최지훈이 부검실 벽시계를 봤다. 오후 2시 47분.
"그 병원이 신고한 거잖아. 의료사고라고."
"의료사고가 아니다."
이준호는 부검 기록지에 검사 결과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5년 전의 그 날처럼. 마취 기록지 위에 펜을 굴리던 그 때처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에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부검실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법의관실 부장 오영준이 들어왔다. 60대 초반, 관료적 무게감을 몸에 둘렀다.
"준호, 이 사건 검시 끝났나?"
"타살 판정."
오영준의 눈썹이 올라갔다.
"의료사고 신고였는데?"
"의료사고가 아니다. 약물 주입에 의한 중독. 타살이 맞다."
오영준이 시신 쪽으로 갔다. 부검 기록지를 읽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 결론이 확실한가?"
"확실하다."
"조직 검사 결과는?"
"내일 오전에 나온다. 하지만 육안 소견만으로도 충분하다."
오영준이 돌아섰다. 이준호와 최지훈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의 신호. 오영준이 복도로 나갔다.
"준호, 그 병원이야?"
최지훈이 물었다. 이준호가 대답 없이 부검 기록지를 정렬했다. 펜으로 서명하는 순간 손가락이 떨렸다. 처음으로. 5년 만에 처음으로.
"5년 전에 그 병원에서 환자 죽었어. 마취 중에."
"아, 그 사건."
최지훈이 알아챘다. 법의관실에서 '그 남자'로 불리던 이준호의 사건. 면허 박탈. 복귀. 그리고 지금.
"같은 패턴인가?"
"모르겠다. 아직."
이준호가 부검실 냉동고 쪽으로 갔다. 시신을 다시 정리했다.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에 남은 포르말린 냄새. 죽음의 냄새. 이 냄새를 5년 동안 맡지 않았다. 아니, 맡지 않으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부검 기록지를 놓았다. 환자명: 박수진. 51세 여성. 진단: 급성 심근경색. 수술 과정: 응급 관상동맥 우회술. 수술 소견: 심정지 발생.
이준호가 컴퓨터를 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사건 관리 시스템에 접속했다. 검색창에 'S대병원'을 입력했다.
지난 2년 4개월 동안 S대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신고된 사건이 17건이었다. 그 중 부검까지 진행된 것은 3건. 모두 '의료 과실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 형사 고소 없음. 민사 합의 종결.
이준호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3건의 사건 기록을 열었다. 첫 번째: 67세 남성, 뇌출혈 수술 후 감염으로 사망. 두 번째: 58세 여성, 담낭 절제술 중 혈관 손상으로 사망. 세 번째: 45세 남성, 척추 수술 중 신경 손상으로 사망.
모두 다른 과. 다른 증상. 다른 이유.
하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모두 법의관 최지훈이 검시했고, 모두 '의료 과실'로 판정했다.
이준호가 5년 전 자신의 사건 기록을 열었다. 파일명: 이준호_의료사고_5년전. 사진들이 나타났다. 수술실 CCTV. 마취 기록지. 모니터링 수치. 모두 '정상 범위'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그 기록지는 위조되었다. 수술 후 3시간 뒤에 소급 수정되었다. 당시 검사 이혜진도 의심했다. 하지만 증거 부족으로 기소 불가 판정. 결국 무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혜진'이라는 이름이 떴다.
"준호, 이 사건 봤어?"
검사의 목소리가 빨랐다.
"지금 부검 끝났다."
"타살인가?"
이혜진의 질문에 이준호가 멈췄다. 검사가 어떻게 알았을까.
"왜?"
"내가 그 병원 의료기록을 따로 분석했어. 박수진 환자. 수술 기록지에 모니터링 수치 수정 흔적이 있어. 날짜 메타데이터로 추적했더니 수술 3시간 뒤에 소급 수정됐어."
이준호의 턱이 조여졌다.
"그게 다가 아니야. 지난 2년 그 병원에서 신고된 의료사고 중 비슷한 패턴이 또 있어. 수술 기록지 위조. 모니터링 수치 변조. 모두 수술 후 수 시간 뒤에 소급 수정된 것들."
"몇 건?"
"지금까지 찾은 건 6건. 하지만 더 있을 수 있어."
이준호가 책상 위의 부검 기록지를 들었다. 손가락이 환자명에 멈췄다.
"이 사건은 타살이다. 약물에 의한 중독. 마취제 과다 농도."
"증거가 충분한가?"
"충분하다."
이혜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그 숨소리 속에서 검사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확신과 두려움이 섞여 있는 숨소리.
"상층부에서 이 사건 수사를 지연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왜?"
"모르겠어. 검사장 명의는 아니고, 어딘가 상위에서. 내가 감지한 건 그 정도야."
이준호의 눈이 모니터 위의 5년 전 기록지로 돌아갔다. 손가락이 화면을 따라 움직였다.
"이게 조직적인 거야. 그 병원이 단독으로 하는 게 아니야."
"알아. 그래서 전화한 거야. 이 사건이 너의 예전 사건과 연결된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어."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5년 전의 그 기록지를 다시 읽고 있었다. 한 글자씩. 자신이 작성했던 모든 글자를.
"준호?"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같은 병원. 같은 패턴. 같은 위조 방식. 5년 전 내 사건도 같은 방식으로 증거가 조작됐어."
이혜진이 숨을 쉬었다.
"그럼 너의 무죄가..."
"증명될 수 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실했다. 5년 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의심과 죄책감이 한 점으로 수렴하는 느낌. 그것이 확신이었다.
"내일 보자. 모든 자료를 들고."
"알겠어."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사무실의 불을 껐다. 모니터가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모니터 위의 반사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보였다. 5년 전의 그 얼굴과 같은 표정으로.
부검실을 나가는 복도에서, 동료 법의관들이 이준호를 봤다. 시선이 따라왔다. 말없는 시선. '그 남자가 또 뭔가 했나'라는 시선.
이준호는 시선을 외면했다. 대신 손가락으로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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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이준호의 사무실에 서민준이 들어섰다. 병원 법무팀장. 검은 정장. 냉정한 표정. 그의 옆에는 경찰청 수사과 과장 최원석이 있었다.
"이준호 법의관."
서민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는 책상 앞에 섰다. 이준호는 앉아 있었다. 의도적인 배치였다.
"박수진 환자 부검 결과를 먼저 전달받았습니다. 타살 판정이라고요?"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맞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환자는 수술실에 있었고, 모든 의료진이 생명 유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약물이 근육에 직접 주입됐다."
"의료 과정의 일부입니다."
"그 위치에는 정상적인 의료 절차에서 주사를 놓지 않는다."
서민준이 책상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민준이 부검 기록지를 집어 들려 했다.
"그건 법의관 기록물이다."
이준호가 손을 뻗었다. 서민준과 이준호의 손이 기록지 위에서 마주쳤다. 몇 초간 팽팽한 긴장. 최원석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서민준이 손을 거두었다.
"당신이 5년 전에도 비슷한 판정을 했었죠."
서민준이 책상에서 떨어져 섰다. 이번에는 이준호를 내려다보는 각도였다.
"결국 무죄가 됐고, 당신은 면허를 박탈당했습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포르말린 냄새가 아직도 손에 남아 있었다.
"그 판정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 지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건가요?"
"실수가 아니다. 증거는 명확하다."
서민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준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준호 법의관, 당신의 판정이 틀리면 병원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서민준은 계속했다.
"그리고 법의관으로서 당신의 증거 수집 절차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격 박탈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죠."
이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자격 박탈. 그 단어는 5년 전 악몽을 되살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숨을 다시 쉬려 해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느낌. 하지만 그 순간, 분노가 솟아올랐다. 손가락이 책상을 누르며 힘을 담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 병원은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서민준이 책상 앞으로 다시 다가섰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공간이 압박했다.
"당신의 명예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가족도, 당신의 경력도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민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위협의 톤이 명확했다.
"당신이 정말 확신하는지 묻는 겁니다. 이번에는."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5년 전 그 법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증거 부족. 기소 불가. 무죄. 그리고 면허 박탈.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이준호가 눈을 떴다.
"확신한다."
서민준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는 부검 기록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 이준호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리고 이준호 법의관, 당신이 증거 수집 절차를 투명하게 진행하지 않았다는 제보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서민준이 기록지를 읽었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문이 열렸다. 서민준이 나갔다. 최원석이 그 뒤를 따랐다.
이준호는 혼자 남았다.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 책상 위에는 부검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5년 동안 억눌렀던 분노가 손가락 끝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최원석이 돌아왔다. 서민준이 나간 지 몇 분 뒤였다.
"준호, 저 변호사 말이 협박인가?"
"협박이다."
"그럼 신고해."
"신고해봐야 소용없다. 법적으로 문제 삼을 게 없어. 모두 법적 가능성으로 포장되어 있어."
이준호가 부검 기록지를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타살 판정 부분을 눌렀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 판정은 바뀌지 않는다."
"알겠어. 그럼 나한테 모든 증거를 주면 내가 검사에게 보고하겠어. 그리고 이 협박 건도 기록해두겠어."
"이미 검사에게 보고됐다."
"그런데도 저 변호사가 왔다는 건 뭔가 상층부에서 압박이 들어온 거야. 검사장도 모르는 상위 지시가."
최원석이 일어섰다. 복도로 나가는 발걸음이 빨랐다.
이준호는 혼자 남았다.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 책상 위에는 부검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부검 기록지 최하단에 있는 사인(死因) 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타살. 약물에 의한 중독. 의도적 주입.
이준호는 기록지를 다시 읽었다. 한 글자씩. 자신이 작성했던 모든 글자를. 조직 검사 결과. 현미경 소견. 약독성 패턴. 모든 것이 명확했다.
확신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은지'라는 이름이 떴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름을 알았다. 의료 전담 기자. 5년 전부터 자신을 추적했던 여자.
"이준호 법의관입니까?"
목소리가 낮고 빨랐다.
"누구신가요?"
"박은지라고 합니다. 기자입니다. 박수진 환자의 타살 판정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타살 판정을 내렸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그 병원은. 하지만 이건 당신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당신의 5년 전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됐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맞았어요. 저는 그 사건을 재수사한 결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병원의 기록 위조 증거. 당신을 무죄로 만들 수 있는 증거들."
이준호의 숨이 가빠졌다. 침묵이 흘렀다. 박은지가 계속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가 9명입니다."
9명.
그 숫자가 이준호의 머릿속에 박혔다. 9명의 죽음. 9명의 기록 위조. 9명의 조직적 은폐.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 숫자를 손으로 세고 있는 것처럼.
"만나서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당신의 판정과 제 자료를 맞춰보면 이 병원의 전체 구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죄도 증명할 수 있어요."
"기자와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언제든 연락 주세요. 이건 당신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병원이 저질러온 모든 일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박은지의 목소리가 끝까지 명확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사무실의 불을 껐다. 모니터가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모니터 위의 반사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보였다. 5년 전의 그 얼굴과 같은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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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이준호는 자신의 아파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5년 전의 부검 기록과 오늘의 부검 기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비교 분석.
5년 전 사건 - 마취제 과다 농도. 근육 주입 위치. 주사 자국 깊이 1.2cm. 조직 괴사 범위 5×3cm. 모니터링 기록지 수정 흔적. 수술 후 3시간 뒤 소급 수정.
오늘의 사건 - 마취제 과다 농도. 근육 주입 위치. 주사 자국 깊이 1.2cm. 조직 괴사 범위 5.1×3.2cm. 모니터링 기록지 수정 흔적. 수술 후 2시간 52분 뒤 소급 수정.
패턴이 일치했다. 완벽하게.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두 기록을 가리켰다. 먼저 5년 전 기록의 주사 자국 사진을 확대했다. 상완이두근과 상완삼두근 사이. 정확한 위치. 그리고 오늘의 사진. 같은 위치. 같은 각도. 같은 깊이.
그 다음 조직 사진. 5년 전의 근육 괴사 패턴. 세포가 녹아내린 형태. 약물이 퍼진 방향. 오늘의 조직 사진과 겹쳐졌다. 마치 같은 손으로 같은 방식으로 주입된 것처럼.
마지막으로 모니터링 기록지. 5년 전 기록지의 수정 흔적. 펜으로 지워지고 다시 쓰인 수치들. 수술 후 3시간 뒤에 변조된 타임스탬프. 오늘 기록지의 수정 흔적도 동일했다. 같은 방식. 같은 손법. 같은 은폐 방식.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다.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5년 전 자신의 판정이 맞았다는 증명이었다.
5년의 시간을 뚫고, 죽음이 다시 말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박은지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이준호 법의관?"
박은지의 목소리가 즉시 나왔다. 마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만나겠습니다."
"언제요?"
"내일. 아침."
"좋습니다. 제가 장소를 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박은지가 숨을 쉬었다.
"5년 전 사건. 그 병원의 첫 번째 피해자는 박수진이 아닙니다. 더 전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기록들이 모두 위조되었습니다. 당신의 판정이 맞았어요. 5년 전에도."
이준호의 손가락이 책상 위의 두 기록지 사이를 오갔다. 주사 자국. 조직 괴사. 모니터링 수치. 모든 것이 일치했다.
"그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지금까지 찾은 건 9명입니다. 하지만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침묵.
"이준호 법의관, 당신의 확신이 맞았습니다. 이제 그것을 증명할 차례입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책상 위의 두 기록지를 들었다. 5년 전. 그리고 지금.
손가락이 5년 전 기록지의 한 구석으로 갔다. 자신이 작성했던 글자들. 타살. 약물 중독. 의도적 주입.
그 글자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한 글자씩 따라가며 읽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확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