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침대 위에서 준호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천장의 형광등이 세 개처럼 보였다가 하나로 수렴했다. 다시 흐려졌다.
"시력이 안정되는 데 최소 72시간 필요합니다."
의료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준호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무거웠다. 어제 경기에서 절대 감각을 아홉 번 발동했다. 박준영 감독의 지시였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이 경기가 필수였고, 준호는 그 필수를 신체로 치러야 했다.
"손가락 저림은?"
"신경 손상 초기 단계입니다. 한 번 더 반복되면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준호의 주먹이 떨렸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움직이는데 자기 손가락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 감각을 발동할 때마다 신경이 타들어갔다. 마치 손가락 끝에 번개가 흐르는 것 같은.
의료진이 나갔다. 병실이 조용해졌다.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절대 감각의 대가가 이렇게까지 클 줄 몰랐다. 에너지 소모는 예상했다. 하지만 신경 손상까지? 의료진의 말이 반복되었다. '회복 불가능.'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채은'이라고 떴다. 준호는 받지 않았다. 울림이 멈췄다. 곧 메시지가 들어왔다.
'준호 오빠, 괜찮아? 내일 병원 가도 돼?'
준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채은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세터에서 공격수로 바꾼 것도, 절대 감각도, 모든 게 옳은 선택이었나? 은퇴를 앞둔 순간 회귀했을 때 느꼈던 절박함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이기고 싶었다. 완벽하게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절대 감각을 사용했다. 계속 사용했다.
병실 문이 열렸다. 준호는 눈을 떴다. 시력이 흐린 상태에서 실루엣만 보였다.
"오빠."
채은이었다.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흐린 시야 속에서 채은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녀의 눈이 빨갛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료진한테 들었어. 신경 손상이라고."
"괜찮다."
"괜찮지 않잖아!"
채은이 침대 옆에 앉으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오빠, 진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자꾸 혼자 하려고 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세터로서 토스가 부족해서? 도현이 리베로로서 패스가 부족해서? 우리가 너를 못 믿어서?"
채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잖아. 넌 우리를 믿지 않는 거야. 넌 항상 완벽한 토스만 원했어. 완벽한 패스만 원했어.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준호는 천장을 봤다.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세터로서 자신은 완벽했다. 근데 팀은 언제나 부족했다. 공격수들의 타이밍이 안 맞았다. 리베로의 수비가 느렸다. 모든 게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시했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완벽하게.
"대학교 때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넌 왜 이 정도 토스도 못 받아? 세터 자질이 없는 거 아니야?'"
채은이 눈물을 흘렸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그 말 때문에 한 달 동안 자살 생각까지 했어. 넌 알아? 넌 몰랐지. 넌 그냥 자기 완벽함만 생각했어."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을 할 때 자신은 아무 죄책감도 없었다.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코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넌 뭐 해? 또 같은 짓 하고 있잖아. 절대 감각이라고 혼자 모든 걸 하려고 해. 우리 신뢰 안 하고. 우리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것들 받지 않고."
채은이 손을 뻗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손상으로 인한 떨림이었다. 채은은 그 떨림을 느끼며 더 세게 쥐었다.
"나 이제 너를 포기할 거야. 아니, 우리가 너를 포기할 거야. 넌 혼자 절대 감각으로 우승해. 혼자."
채은이 일어났다. 준호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손가락이 아닌 것 같았다.
"난 내일 경기에 출전 안 할 거야. 감독한테 말할게. 너한테 토스 주는 거 그만하겠다고."
"채은."
처음으로 준호가 말했다.
"미안해."
채은이 멈췄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준호는 다시 혼자 남겨졌다.
병실의 침묵이 준호를 짓눌렀다. 채은의 눈물,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자꾸 맴돌았다. 자살 생각까지 했다니.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손상의 떨림이 아니라 자책의 떨림이었다.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완벽함이라는 이름으로 팀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코칭이라고, 지적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배였다. 절대 감각이라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이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더 심해졌다. 손이 경련하는 듯했다. 신경이 손상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채은이 자살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이 준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순간, 깨달음이 밀려왔다. 절대 감각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능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팀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함께 이기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절대 감각 없이도 이길 수 있을까? 팀이 자신을 받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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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오프 결승전 이틀 전, 준호는 병실을 나왔다. 시력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 저림도 계속됐다. 의료진은 경기 출전을 권장하지 않았다. 박준영 감독은 다르게 생각했다.
"넌 이 팀의 에이스야. 플레이오프는 절대 감각 없이 이길 수 없어."
감독실에서 박준영이 준호를 마주봤다. 그의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준호는 도구였다. 우승의 도구였다.
"감독님, 저는…"
"넌 뭘 하고 싶어? 은퇴하고 싶어? 이미 기회는 끝났다. 이 경기가 마지막이야. 모든 게."
박준영의 말이 맞았다. 이 경기를 이기지 못하면 준호는 버려질 것이다. 서울 엘리트는 우승팀이었다. 우승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준호는 경기장에 섰다. 플레이오프 결승전. 상대는 전년도 준우승팀이었다. 상대팀의 주전 공격수는 국가대표 경험이 있는 선수였다.
첫 세트가 시작됐다.
채은의 토스가 준호에게 날아왔다. 예전처럼 완벽하지는 않았다. 5센티미터 떨어져 있었다. 준호는 절대 감각을 발동했다. 상대 블록이 0.5초 느려 보였다. 준호는 스파이크를 날렸다. 킬 포인트.
하지만 손가락이 타들어갔다.
준호는 벤치로 내려가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의료진이 손가락을 고정시켰다.
"한 경기만 더 버티면 돼."
의료진의 말이 아니었다. 박준영 감독의 말이었다. 감독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할 수 있어. 넌 항상 혼자 했잖아."
준호는 다시 경기장에 섰다.
두 번째 절대 감각. 세 번째. 네 번째.
매번 손가락이 타들어갔다. 시력도 흐려졌다. 하지만 박준영은 계속 지시했다. 절대 감각을 사용하라고. 더 많이, 더 자주.
2세트가 끝났을 때 준호는 벤치에서 손가락을 펼 수 없었다. 손가락이 굽어진 채로 경직되어 있었다. 신경 손상이 심각해졌다. 손가락의 경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절대 감각을 한 번 더 발동하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채은이 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이 다시 빨개졌다. 하지만 이번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마치 준호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우리를 믿어.'
3세트 시작 직전, 준호는 결정을 했다.
절대 감각을 사용하지 않기로.
박준영은 준호에게 다가왔다. 감독의 얼굴에는 계산이 가득했다. 절대 감각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넌 뭐 해?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감독님, 저는 팀을 믿겠습니다."
"뭐라고?"
"절대 감각 없이 이기겠습니다."
박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경기는 멈추지 않았다. 3세트가 시작됐다.
채은의 토스가 날아왔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다. 6센티미터 떨어져 있었다.
준호는 토스를 받았다. 절대 감각 없이. 신체의 본능만으로.
그 순간,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신경 손상으로 인한 떨림이 아니라, 선택의 떨림이었다. 완벽함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손끝에서 파동쳤다. 절대 감각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팀이 정말 자신을 받아줄까? 그 불안감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감이 밀려왔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느낌. 팀에 책임을 나누는 것의 가벼움.
준호의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토스의 궤적을 읽었다. 채은이 어떤 의도로 올렸는지, 어느 지점에서 떨어질 것인지. 손목이 회전했다. 상대 수비수들의 위치를 계산했다. 누가 어디에 서 있고, 블록이 어디를 향하는지. 팔이 뻗어나갔다. 도현의 패스 위치까지 고려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공을 튕겨냈다.
스파이크가 상대 코트에 떨어졌다. 킬 포인트.
도현이 일어났다. 그 다음 다른 팀메이트들도.
준호는 채은을 봤다. 채은의 입이 떠있었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은 토스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호가 그것을 살려냈다.
다음 공. 채은의 토스가 조금 높게 왔다. 준호는 절대 감각을 쓸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면 그 느낌이 돌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았다.
대신 도현의 패스를 믿었다. 도현의 레시브가 정확했다. 준호의 타이밍이 맞았다.
킬 포인트.
그 다음, 그 다음.
채은의 불완전한 토스가 올 때마다, 준호는 먼저 공을 읽었다. 토스가 어떤 각도로 올라오는지, 어느 지점에서 떨어질 것인지. 손목의 각도를 조정했다. 상대 수비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누가 어디에 서 있고, 블록이 어디를 향하는지. 팔의 힘을 조절했다. 도현의 패스 위치까지 계산했다. 발의 위치를 미세하게 이동시켰다. 호흡을 맞췄다.
절대 감각이 없어도 가능했다. 왜냐하면 절대 감각은 처음부터 관찰과 계산의 극단화였기 때문이다.
절대 감각이 아니면서도 절대 감각처럼.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지만, 그 떨림 속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형성되고 있었다. 완벽함이 아닌, 신뢰. 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신을 믿는 팀에 대한 믿음.
최동욱이 준호를 마주했다. 3세트 중반, 최동욱이 준호에게 블록을 씌웠다.
"넌 절대 감각을 못 쓰고 있네?"
최동욱의 목소리가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채은을 봤다. 채은이 토스를 올렸다. 불완전한 토스였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받았다.
손목이 회전했다. 팔이 뻗어나갔다.
스파이크가 최동욱의 블록을 뚫고 코트에 떨어졌다.
최동욱의 얼굴이 굳었다.
3세트가 끝났을 때 스코어는 25-18이었다. 서울 엘리트가 우승했다.
경기장이 환호로 들썩였다. 팀메이트들이 준호에게 달려왔다. 도현이 먼저 준호를 안았다.
"해냈어. 혼자가 아니라 함께 했어."
준호는 도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 순간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준영 감독이 경기장 끝에서 준호를 바라봤다. 감독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우승은 했다. 하지만 준호가 변했다. 그것이 감독에게는 예상 밖이었다. 절대 감각에 의존하던 선수가 팀 신뢰로 전환했다. 이것은 준호라는 도구의 성능 변화를 의미했다. 감독이 계산한 우승 방정식이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감독의 눈이 움직였다. 계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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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후 45분, 박준영이 준호를 감독실로 불렀다.
준호는 긴장하며 들어갔다. 우승했는데도 감독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넌 정말 변했어."
박준영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측정하는 눈이었다.
"절대 감각 없이 플레이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
"네."
"그런데 왜 했어?"
"팀을 믿기로 했습니다."
박준영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국가대표 스쿼드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나?"
국가대표. 준호는 잠깐 침묵했다. 국가대표는 모든 선수의 꿈이었다. 최고의 무대였다. 하지만 준호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감독님, 저는 팀을 위해 준비하겠습니다."
박준영의 눈이 움직였다.
"국가대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팀을 위해서입니다."
박준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준호를 지나쳐 창문을 열었다. 밖에는 경기장의 조명이 떨어지고 있었다.
"넌 국가대표 선발전 때 떨어졌지. 알지?"
"네."
"그때 최동욱이 합격했어. 알지?"
"네."
"그게 바뀔 가능성이 생겼어."
박준영이 뒤를 돌아봤다.
"국가대표 감독이 내일 온대. 너를 보러."
준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국가대표 감독.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또 다른 전투였다.
"그런데 넌 뭘 할 거야? 절대 감각으로 이길 거야? 아니면 또 팀을 믿을 거야?"
박준영의 질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그 질문 뒤에는 더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감독은 준호가 국가대표로 가면 팀 운영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고 있었다. 에이스의 이탈. 팀 동력의 약화. 그리고 우승팀의 해체. 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준호를 잃는 것은 단순한 선수 이탈이 아니라, 우승 구조의 붕괴를 의미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절대 감각은 강했다. 하지만 절대 감각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팀이 있을 때만, 팀을 믿을 때만, 진정한 승리가 가능했다.
그런데 국가대표는 어떨까?
국가대표는 팀이 아니라 국가였다.
박준영이 책상에 앉았다. 준호는 여전히 서있었다.
"내일 오는 감독 이름은 이기호야. 국가대표 감독이지만, 사실 해외리그 스카우트들도 함께 온대. 유럽 리그에서 너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거든."
준호의 귀가 쫑긋 섰다. 해외리그. 그건 프로 선수들이 꿈꾸는 최고의 무대였다.
"넌 어떨 것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정직하네."
박준영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봐. 만약 넌 국가대표도 하고, 해외리그 제의도 받으면? 그럼 서울 엘리트는?"
"감독님."
준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국가대표 감독을 만나지 않았고, 해외리그 제의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내일 그 감독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박준영이 준호를 다시 봤다. 그 눈빛이 달랐다. 위협하는 눈이 아니라, 측정하는 눈이었다. 준호가 얼마나 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는지, 얼마나 자신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눈이었다.
"좋아. 내일 오전 10시. 경기장 회의실에서 만나. 그전까지 쉬어."
"네, 감독님."
준호는 돌아섰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준호."
박준영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이번 경기에서 넌 정말 달랐어. 절대 감각 없이도 킬을 만들었잖아. 그게 뭐였어?"
준호는 멈췄다. 손을 문고리에 얹었다.
"토스를 받으면서 본 것들입니다."
"뭘 본 거야?"
"상대 수비수의 움직임, 채은의 토스가 어떤 의도로 올라왔는지, 도현이 어디에서 패스를 받았는지. 그 모든 게 보였습니다."
박준영이 침묵했다.
"절대 감각이 아니면서 절대 감각처럼?"
"그런 것 같습니다."
준호는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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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준호는 호텔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국가대표 감독. 이기호. 준호는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55세, 국가대표 3년차 감독. 전적 32승 8패. 국제 토너먼트에서 여러 메달을 따냈다. 박준영과는 다른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채은이었다.
"너 정신 차려? 아직도 깨어있어?"
"응. 넌?"
"나도. 경기 때문에 잠이 안 와. 준호, 너 정말 잘했어. 절대 감각 없이도 스파이크 성공시킨 거, 진짜 멋있었어."
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근데 왜 갑자기 절대 감각을 안 썼어? 박준영 감독이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그냥... 내가 결정했어."
채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팀을 믿기로?"
"응."
"좋아. 그런데 국가대표 감독이 온다고 들었어. 준호, 이건 큰 기회야. 정말로."
"알아."
"근데 넌 뭘 할 거야? 국가대표를 선택할 거야? 아니면 서울 엘리트를 선택할 거야?"
그것이 바로 준호의 고민이었다. 채은은 그걸 정확히 짚어냈다.
"아직 모르겠어. 내일 만나고 결정할 것 같아."
"그래. 그런데 준호, 하나만 기억해.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있어. 어디를 가든 그걸 잊지 마."
준호는 목이 메었다.
"응."
전화를 끊고 준호는 천장을 봤다. 절대 감각. 팀. 국가대표. 해외리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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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10시.
준호는 경기장 회의실에 들어갔다.
박준영과 다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50대 후반의 단정한 인상의 남자였다. 이기호 감독이었다. 다른 한 명은 40대 초반, 짙은 수염을 기른 외국인이었다.
"준호, 이분이 국가대표 이기호 감독이고, 이분이 스페인 라리가 발렌시아의 스카우트 마르코 감독이야."
박준영이 소개했다.
준호는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기호 감독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준호 선수. 경기 잘 봤습니다. 어제 플레이오프 결승전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특히 3세트. 절대 감각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는데, 그게 의도적이었나요?"
준호는 잠깐 생각했다.
"네. 의도적이었습니다."
"왜요?"
"팀을 믿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기호 감독이 웃음을 흘렸다.
"박준영 감독도 그렇게 말했어요. 준호 선수가 변했다고. 절대 감각에서 팀 플레이로. 그게 사실인가요?"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그의 한국어는 어색했지만 명확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당신의 절대 감각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럽 리그에서 생존할 수 없어요. 우리는 당신이 팀과 어떻게 조화하는지 보고 싶습니다."
준호는 마르코를 봤다.
"유럽 리그 제의인가요?"
"아직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국가대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때 정식 제의를 할 것입니다."
이기호 감독이 다시 말했다.
"국가대표는 내달 국제 친선전 3경기가 있습니다. 그 경기에서 당신을 테스트할 겁니다. 절대 감각만으로 이기는 선수인지, 아니면 팀과 함께 이기는 선수인지를 말이에요."
"언제 합류해야 하나요?"
"1주일 뒤입니다. 그 전까지 서울 엘리트에서 충분히 쉬고 준비하세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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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을 나온 준호는 박준영에게 따로 불렸다.
"1주일 동안 넌 쉬는 게 아니라 준비해야 해. 국가대표는 레벨이 다르거든. 절대 감각도 통하지 않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외리그. 그건 또 다른 세계야. 유럽 리그의 리베로 하나가 한국 리그 주전 리베로보다 능력이 훨씬 높아. 알지?"
"네."
"그래도 할 거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박준영의 눈을 봤다.
"감독님. 저는 이제 절대 감각만으로 이기려는 선수가 아닙니다. 팀을 믿고, 팀과 함께 이기는 선수가 되려고 합니다. 국가대표든 해외리그든, 그 원칙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박준영이 긴 침묵을 유지했다. 그 침묵 속에서 감독의 계산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준호는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해. 국가대표 레벨에 맞춰서."
"네, 감독님."
---
준호가 경기장을 나가려 할 때, 도현이 나타났다.
"잠깐, 준호."
준호는 멈춰 섰다.
"국가대표 감독이 왔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야?"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국가대표 스쿼드에 들어갈 가능성이 생겼어. 그리고 해외리그 스카우트도 왔어."
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축하해. 근데 너 괜찮아? 혼자 가는 거."
준호는 도현을 봤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그리고 혼자가 아니야. 너희가 있잖아."
도현이 준호의 어깨를 쳤다.
"맞아. 우리가 있어. 어디를 가든 우리는 너를 응원할 거야. 그리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거 잊지 마."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준호가 경기장을 나가며 채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은, 지금 어디야?"
"집. 왜?"
"만날 수 있어?"
"응, 어디?"
"그 카페. 우리 자주 가던."
"알겠어. 30분 뒤에 봐."
전화를 끊고 준호는 경기장을 떠났다. 하늘은 맑았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카페에서 준호는 채은을 만났다. 채은은 이미 앉아있었다.
"너 뭐 해? 왜 불렀어?"
"그냥... 고마워. 어제 병실에서 했던 말들."
채은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넌 정말 변했어. 절대 감각 없이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
"응. 그리고 너희 덕분이야. 도현도, 다른 팀메이트들도. 그리고 너 특히."
채은이 웃음을 흘렸다.
"뭐 하는 말이야. 우리도 너 때문에 이겼는데."
"채은, 난 국가대표에 들어갈 것 같아."
채은의 표정이 변했다.
"정말?"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내달 친선전에서 테스트를 받을 거야."
"그럼... 너 떠나가는 거야?"
준호는 채은을 봤다.
"모르겠어.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 어디를 가든 너희를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팀을 믿는 법을 배웠으니까, 어디서든 팀을 찾을 거야."
채은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가. 가서 더 큰 무대에서 보여줘. 그리고 나중에 꼭 돌아와."
"응. 약속할게."
---
그 밤, 준호는 호텔 방에서 창밖을 봤다.
1주일 뒤, 모든 답이 나올 것이었다.
절대 감각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배웠다.
팀을 믿을 때 진정한 승리가 가능하다는 걸 배웠다.
이제 준호는 그 원칙을 가지고 더 큰 무대로 나아가려고 했다.
국가대표에서도, 해외리그에서도, 준호는 혼자가 아니라 팀과 함께 이기는 선수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정말로 팀을 신뢰하는 것을 허락할까?
국가대표는 서로 다른 클럽에서 온 선수들의 집합이었다. 채은과 도현 같은 팀메이트가 없었다. 절대 감각 없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팀이 자신을 받아줄까?
그 질문에 준호는 아직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여전히 떨렸다. 신경 손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떨림 속에는 이제 두려움만 있지 않았다.
선택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