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함 위의 손가락이 떨렸다.
서울 엘리트, 세 개의 별이 박힌 로고. 준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서 명함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어제 로비에서 받은 것이다. 이성준 운영팀장의 명함. 그의 손글씨로 '박준영 감독님과의 면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준호는 침을 삼켰다. 세 개의 별. 그 팀이 자신을 버렸을 때도 별은 반짝였을 것이다.
경기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서울 엘리트 홈 경기장. 준호는 한 번도 선수로 돌아올 줄 몰랐던 곳이었다. 프로 입단 계약식은 조용했다. 박준영 감독은 준호를 맞이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준호를 불편하게 했다.
"이준호 선수, 드디어 돌아왔군요. 절대 감각이라는 능력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박준영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없었다. 마치 기계를 점검하는 엔지니어처럼 준호를 훑어봤다.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말을 아꼈다.
탈의실에 들어서자 임준석이 있었다. 세터. 준호의 옛 포지션을 차지한 남자였다. 임준석은 준호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어라, 세터님이 공격수를 하신다고요? 재능만으로는 부족한데요."
그 말이 준호의 가슴에 박혔다. 정확하게, 마치 겨냥된 것처럼. 임준석은 공을 내려놓고 준호를 똑바로 봤다. 눈빛이 차갑고 단호했다. 자신이 준호를 완전히 대체했다는 확신이 어깨에 묻어났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로커로 향했다. 어깨에 손이 얹혀진다. 최동욱이었다. 국가대표 공격수. 선발전에서 맞붙은 적 있는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이번 시즌 잘 부탁합니다."
최동욱의 인사는 정중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준호를 외면했다. 마치 경계해야 할 물체를 보되, 보이지 않는 척하는 방식으로. 준호는 그 미묘한 거리감을 감지했다.
첫 공식경기는 인천 원정이었다. 준호가 프로 무대에 서는 순간이었다. 세터에서 공격수로 전환한 지 정확히 43일째. 신체는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간헐적으로 저렸다. 하체 안정성도 부족했다. 하지만 절대 감각은 깨어 있었다. 끝내 깨어 있었다.
1세트 중반, 준호가 처음으로 킬러 패스를 받았다. 임준석의 토스였다. 정확하지 않은 토스였다. 준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어깨가 높았고, 타이밍이 0.3초 늦었다. 완벽한 토스가 아니었다.
그 순간, 절대 감각이 발동했다.
상대 수비진이 느려 보였다. 0.5초의 시간 차이. 그 사이에 준호는 완벽한 공격각을 본다. 리시버의 손목 각도, 그 너머의 방어선 공백, 최적의 타이밍. 모든 것이 선명했다.
준호의 팔이 휘었다. 스파이크가 상대 코트로 날아간다. 상대 리베로가 반응하지 못했다. 킬.
탈의실에서 경기가 끝난 후, 준호는 6번 연속으로 킬을 기록했다. 모두 절대 감각 발동 후였다. 킬 성공률 100%. 팀은 3-0으로 이겼다. 준호는 최다 득점자였다.
박준영 감독이 경기 분석실에서 준호를 불렀다. 모니터에 준호의 공격이 프레임으로 나뉘어 떴다.
"보시겠습니까? 1세트 7번 플레이, 2세트 4번, 3세트 6번. 모두 동일한 패턴입니다. 절대 감각 발동 직전에 좌측 어깨가 0.2초 상승합니다. 상대 팀은 이 신호를 학습할 겁니다."
박준영의 손가락이 화면 위의 준호 어깨를 가리켰다.
"그리고 발동 후 시간차가 정확히 0.51초. 변동폭이 매우 좁습니다. 패턴이 고착되면 우리 팀의 약점이 됩니다. 절대 감각 사용을 제한하세요. 일반 공격으로 상대 방어를 흔들어야 합니다."
준호는 그 말을 들었다. 들었지만, 박준영의 목소리가 자신을 도구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절대 감각을 '활용해야 할 자산'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약점'으로 본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이 팀의 전술 시스템에 맞춰져야 한다는 듯이.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밤, 채은의 전화가 왔다.
"너 어때? 경기 잘했다고 들었어."
채은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준호는 그 밝음을 감지했다. 의도적으로 밝게 연기한다는 것을.
"응, 괜찮아."
"진짜? 그런데 왜 목소리가 그래?"
침묵. 준호는 대답을 미뤘다.
"채은아, 넌 어때?"
"나? 난 좋아. 대학 졸업하고 프로 입단 시험 봤어. 2주 뒤에 결과 나와."
"그래, 화이팅."
"준호, 너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넌 항상 그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혼자 삭혀."
그 말에 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채은은 계속했다.
"프로에 가서도 팀을 못 믿고 있는 거지? 임준석 세터 토스 받을 때 표정 봤어. 너 토스 의심했어."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런 게 아니구나. 그럼 뭔데?"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은의 음성이 선명했다. 왜냐하면 채은이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는 임준석의 토스를 받을 때 신체 전체가 경직되었다. 어깨가 위로 솟아올랐고, 무릎이 구부러졌다. 마치 완벽하지 않은 것을 받아내려는 거부 반응처럼.
"준호, 넌 완벽한 토스만 받으려고 해. 그게 문제야. 세터가 완벽할 수는 없어. 리베로가 꺼낼 수도, 속도가 흐릴 수도 있어. 그런데도 공격수가 신뢰하지 않으면, 팀은 무너져."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 말고 정말 해. 다시 반복하지 마. 너 때문에 상처받은 팀메이트들도 있고."
전화가 끊겼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채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준호는 세터였다. 그리고 완벽한 토스만 고집했다. 공격수들이 나쁜 토스를 받을 때 준호는 책임을 물었다. '왜 그 토스를 받아내지 못했냐'고. 공격수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세터의 완벽함이 팀의 기초라고 믿었으니까.
이제 그 역할을 바꿨다. 공격수가 된 준호는 세터를 믿어야 했다. 하지만 세터가 자신이 아니면 신뢰할 수 없었다.
다음 경기는 인천으로부터 3일 뒤였다. 홈 경기였다. 서울 엘리트의 잔디 구장. 준호는 아침부터 경기장에 들어갔다. 혼자. 다른 선수들이 오기 전에.
경기장은 고요했다. 준호는 코트 위를 걸었다. 라인을 따라, 네트를 따라. 마치 자신이 이 공간에 맞춰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워밍업이 시작됐다. 준호는 절대 감각을 다시 느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발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킬러 패스를 받을 때만 발동했다. 그게 규칙이었다.
박준영 감독이 지시했다. "절대 감각 사용 금지. 일반 공격으로만 진행하세요."
준호의 얼굴이 경직됐다. 절대 감각을 봉인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뭐가 남는가? 기술? 경험? 하지만 그것들은 최동욱도 가지고 있었다. 준호는 절대 감각만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감각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도구. 평범한 도구일 뿐.
"알겠습니다."
준호의 대답은 기계적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상대는 대전 아쿠아스. 약팀이었다. 준호가 절대 감각 없이도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준호는 느꼈다. 무언가 빠졌다. 토스를 받을 때마다 불안감이 떠올랐다. 완벽하지 않은 토스를 받을 때마다 신체가 거부했다.
1세트, 임준석의 토스가 왔다. 높이가 낮았다. 준호는 신체를 늘여야 했다. 일반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준호의 신체는 그 토스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마치 그것을 받으면 패배한다는 생각처럼.
준호는 강제로 신체를 늘였다. 스파이크를 쳤다. 상대 수비가 막았다. 토스 때문에 공격 각도가 좋지 않았다.
"세터! 토스 높이!"
준호가 소리쳤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마치 대학 시절 세터였던 자신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임준석의 얼굴이 굳었다. 최동욱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차갑지 않았다. 차라리 동정적이었다.
도현의 전화는 시즌 중반에 왔다. 도현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고, 일본 리그로 나갔다. 준호는 전화를 받았을 때 놀랐다. 이 시간에 도현이 전화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준호, 너 뉴스 봤어?"
"뭔데?"
"정수연 기자 기사. '버려진 천재, V리그 신성으로 떠오르다. 하지만 팀 내 불화는?'"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기사가 있었나? 준호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뭐하는 거야?"
"기자가 너한테 물어봤었잖아. 넌 대답 안 했고. 대신 나한테 물어봤어. 너의 성장 과정이 뭐냐고. 나는 대답했어. 너의 변화가 뭐냐고."
도현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근데 기사에 이런 얘기도 있어. '절대 감각으로 연속 킬을 성공시키며 개인 성과로 경기를 이기지만, 팀메이트와의 불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그럼 뭘 하라고?"
"준호, 넌 또 실수하고 있어."
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팀을 믿어야 해. 절대 감각으로 모든 걸 하려고 하면 안 돼. 완벽한 토스만 받으려고 하면 안 돼. 너는 세터였을 때도 그랬고, 공격수가 되어서도 그래. 넌 항상 완벽함만 고집해. 그래서 팀메이트들이 상처받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계속했다.
"나는 이제 일본에 있어. 너의 변화를 직접 볼 수는 없어. 하지만 기사를 읽고 알았어. 넌 아직도 변하지 못했어. 아직도 혼자 모든 걸 하려고 해. 그래서 팀은 넌 걸 안 믿어. 넌 팀을 안 믿으니까."
준호는 말했다. 처음으로 반박했다.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완벽하지 않은 걸 받으면 그게 내 실수가 되지 않아?"
"그게 실수가 아니야. 그게 팀이야. 세터와 공격수가 함께 만드는 게 팀이야. 넌 그걸 아직도 몰라."
도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넌 절대 감각이 있으니까 혼자도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절대 감각 없이는 넌 누구야? 그걸 생각해 봐."
전화가 끊겼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시력이 흐려졌다.
준호가 눈을 비볐다. 화면이 일렁였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것은 절대 감각 과다 사용의 신호였다. 시력 흐림. 신체 에너지 소모. 다음 경기는 불참해야 할 신호.
준호의 손가락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더 깊은 것이 있었다.
도현의 말이 맞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 회귀 후 1년 반, 포지션을 바꿨고, 절대 감각을 각성했고, 대학 우승을 이뤘고, 프로에 입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팀을 믿지 못하는 자신.
준호는 경기장을 바라봤다. 밤 10시, 서울 엘리트 경기장은 어두웠다. 조명이 켜지지 않았다. 마치 준호의 시력처럼. 흐릿하고, 불확실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준호의 주먹이 더 깊게 쥐어졌다. 이번엔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 전체가 떨렸다. 뭔가를 결정하려는 듯이. 뭔가를 감수하려는 듯이.
그 시점에 도현의 전화는 끝났고,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다음 경기는 3일 뒤였다. 그때까지 시력이 돌아올까? 절대 감각이 다시 작동할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자신이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
준호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시력이 돌아오는 데 36시간가 걸렸다.
준호는 그 시간을 숙소에서 보냈다. 불을 끈 방, 커튼을 닫은 창문.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절대 감각의 궤적을 더듬었다. 킬러 패스를 받은 순간의 그 0.5초. 상대 수비가 느려 보이는 그 찰나. 그 감각이 신체에서 뭔가를 빨아당기는 느낌을 다시 한 번 명확히 감지했다. 마치 혈관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에너지가 빠져나갔다. 한 번 발동할 때마다.
3일 뒤 경기 전, 준호는 임준석을 찾아갔다.
세터 전용 코트. 임준석은 혼자 토스 연습 중이었다. 공을 던지고, 수신하고, 다시 던지고. 반복. 준호를 본 임준석의 손이 멈췄다.
"뭐 하러 왔어?"
준호는 임준석의 토스를 봤다. 높이 3.2미터. 각도 정확. 회전 없음. 매뉴얼대로. 완벽했다.
"토스 높이 얘기 말고."
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너의 토스를 믿고 싶어."
임준석의 얼굴이 굳었다. 그 다음은 웃음이 터졌다. 짧은 웃음. 조롱 섞인 웃음.
"무슨 소리야? 몇 주 전에 토스 높이를 지적했잖아. 완벽한 토스만 원한다고 내 토스를 깎아내렸는데?"
"맞아."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준호가 임준석의 눈을 봤다. 세터는 공을 내려놨다. 천천히. 마치 준호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시간을 버는 듯이. 그 동작에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절대 감각이 있어도 세터 토스가 없으면 못 써. 너의 토스가 필요해. 완벽하지 않아도."
임준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늦었어. 넌 이미 최동욱한테 집중하고 있어. 나는 대체 세터일 뿐이야."
"그게 아니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너는 절대 감각이 있으니까 나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지? 그런 태도가 가장 싫었어. 세터였을 때부터."
임준석이 돌아섰다. 준호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팽팽했다.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임준석은 준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준호를 믿을 이유도 없었다. 준호가 만들어낸 상처가 너무 컸으니까.
탈의실로 돌아온 준호는 최동욱을 만났다.
"오! 준호. 요즘 뉴스 봤어? 넌 V리그의 신성이래. 버려진 천재가 돌아왔다고."
최동욱이 웃으며 어깨를 쳤다. 그 손길이 따뜻해 보였지만, 준호는 그 뒤의 의도를 읽었다. 신성. 천재. 그 단어들 뒤에는 '현재는 아직'이라는 암시가 숨어 있었다. 최동욱은 준호를 경쟁자로 이미 인정했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경기 잘 부탁해."
준호가 말했다.
"응, 너도."
최동욱의 웃음이 계속됐다.
경기는 오후 7시에 시작됐다. 상대팀은 강팀이었다. 서울 엘리트의 우승 경로 중 가장 만만하지 않은 팀. 준호는 워밍업 때부터 손가락 끝에 따끔거림을 느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신체였다. 절대 감각의 후유증이 남아있었다.
1세트.
준호는 절대 감각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도현의 말이 맴돌았다. 팀을 믿어야 한다. 임준석의 토스를 믿어야 한다.
첫 공격. 임준석의 토스가 날아왔다. 높이 3.15미터. 약간 낮다. 완벽하지 않다. 준호는 신체 전체를 느꼈다. 어깨가 올라가려 했다. 무릎이 구부러지려 했다. 거부 반응. 하지만 준호는 강제로 그것을 누르고 스윙을 했다. 손가락에 통증이 흐르면서 스파이크가 나갔다. 상대 블로킹을 넘겼다. 킬 포인트.
박준영 감독이 박수를 쳤다.
2번 공격. 임준석의 토스. 이번엔 더 낮다. 2.9미터. 준호의 신체가 다시 거부했다. 완벽한 토스를 기다리는 본능이 깨어났다. 하지만 준호는 다리를 굽혔다. 이 토스를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스파이크. 또 킬.
3번 공격. 토스가 조금 치우쳤다. 왼쪽.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신체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몸을 날렸다. 손가락이 악을 쓰며 공을 때렸다. 킬. 3연속.
박준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대신 임준석을 봤다. 세터의 눈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준호를 무시하는 눈이었다. 그 다음엔 경계하는 눈이었다. 지금은 다른 무언가였다. 아직 신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정이 생겼다.
경기는 계속됐다.
4번 공격. 5번. 6번. 준호는 절대 감각 없이 싸웠다. 신체 에너지를 아끼면서. 토스를 믿으면서. 1세트는 25:18로 이겼다.
2세트로 넘어가면서 상대팀의 수비가 강해졌다. 준호는 더 이상 단순한 공격만으로는 점수를 낼 수 없었다. 상대 블로킹이 높아졌다. 준호의 스파이크 성공률이 떨어졌다.
12:12. 동점.
박준영이 타임아웃을 불렀다.
"준호, 이제 써야 해."
감독이 준호의 눈을 봤다. 그 시선에는 명확한 지시가 있었다. 절대 감각을 사용하라. 지금 필요하다. 약점이 아니라 자산으로서. 이제 그것을 전술의 일부로 재분류하겠다는 신호였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순간, 임준석이 보였다. 세터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1세트에서 준호가 보여준 신뢰가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 감각이 필요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토스가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준호는 타임아웃 동안 임준석과 눈을 맞췄다. 세터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온 준호는 절대 감각을 발동했다.
토스가 날아왔다. 높이 3.2미터. 완벽하다.
그 순간, 준호의 신체가 반응했다. 절대 감각이 발동됐다. 상대 수비가 0.5초 느려 보였다. 블로커의 손이 올라오는 과정이 스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준호는 그 틈을 봤다. 정확한 각도. 완벽한 타이밍. 스파이크.
킬.
13:12. 역전.
박준영의 박수가 울렸다. 최동욱이 준호를 쳐다봤다. 그 눈에는 이미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임준석은 다르게 반응했다. 세터는 준호에게 등을 돌렸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준호는 계속했다.
14번 공격. 절대 감각 발동. 손가락 끝이 날카롭게 저렸다. 시야 가장자리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킬.
15번. 발동. 손가락이 거의 감각을 잃었다. 시력이 한 층 더 흐려졌다. 킬.
16번. 발동. 손가락이 떨렸다. 손톱과 살 사이의 경계가 아프게 느껴졌다. 시력이 계속 흐려졌다. 킬.
3연속 절대 감각 킬. 상대팀의 수비 흐름이 끊겼다. 준호의 신체에서는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혈관에서 피가 흘러나가는 것처럼. 하지만 박준영은 준호를 계속 경기장에 내보냈다. 절대 감각이 필요한 국면마다. 경기를 이기기 위해.
2세트는 25:20으로 끝났다.
3세트. 준호는 이미 피폐했다. 손가락은 거의 감각을 잃었고, 시력은 계속 흐려졌다. 하지만 박준영은 준호를 경기장에 계속 내보냈다. 절대 감각이 필요한 국면마다.
준호는 토스를 받고, 절대 감각을 발동하고, 킬을 기록했다. 반복. 손가락의 저림이 점점 깊어졌다. 시야의 흐림이 점점 빨라졌다. 마치 물속에 빠져가는 것처럼. 5연속. 6연속. 7연속.
3세트는 25:16. 경기는 3:0으로 끝났다.
준호는 경기장을 나갔다. 팀메이트들의 환호가 들렸다. 박준영의 박수가 들렸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대신 임준석의 얼굴을 봤다.
세터는 준호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있었다. 실망.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것. 절망.
임준석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토스가 준호에게 필요 없다는 것을. 절대 감각이 있으면 완벽하지 않은 토스도 상관없다는 것을. 자신은 단지 공을 던지는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준호는 그것을 증명했다.
준호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에서 준호는 거울을 봤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 밑에 그림자가 졌다. 절대 감각 과다 사용의 신호들이었다. 시력은 여전히 흐렸다. 다음 경기까지 3일이 있었지만, 이 상태로는 부족할 수도 있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도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넌 또 실수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 준호는 그것을 증명했다. 팀을 믿지 않았다. 임준석의 토스를 받아냈지만, 결국 절대 감각에만 의존했다. 완벽한 토스를 받기 위해 절대 감각을 썼다. 다르지 않았다. 세터였을 때와.
휴대폰이 울렸다.
채은이었다.
"준호, 경기 봤어. 너 진짜 미쳤다. 7연속 절대 감각? 그게 가능해?"
"응."
"근데 이상한데. 넌 또 혼자 했어. 팀을 안 믿고."
채은의 목소리가 준호를 관통했다. 같은 말이었다. 도현과 같은 말.
"절대 감각 없이도 이길 수 있었어. 1세트는 그렇게 이겼잖아. 왜 또 그런 거야? 왜 또 완벽함만 고집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임준석이를 봤어. 표정 봤어? 그 애는 지쳤어. 너 때문에. 세터로서 자신감이 없어진 거야. 너처럼."
"채은."
"뭐?"
"내가 뭘 해야 해?"
처음으로 준호가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채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절대 감각에 의존하는 마음을 포기해. 그것만이 너를 살릴 수 있어. 그것만이 팀을 살릴 수 있어."
전화가 끝났다.
준호는 거울을 봤다. 그 안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후 1년 반. 포지션을 바꿨고, 절대 감각을 깨웠고, 대학 우승을 했고, 프로에 입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 정신. 영혼. 그 무언가.
준호는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이 필요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니까.
밤 11시, 준호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인: 정수연 기자.
"준호 선수, 기사 봤나요? 반응 좋습니다. 다음 인터뷰 시간 내실래요? 당신의 진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절대 감각의 대가, 팀 내 불화, 그리고 진정한 승리가 뭔지."
준호는 메시지를 읽고 화면을 껐다.
그 순간, 시력이 다시 흐려졌다. 이번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절대 감각 과다 사용의 또 다른 신호였다. 신체 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쳤다.
다음 경기는 3일 뒤였다.
준호가 그때까지 회복할 수 있을까? 그보다 중요한 것—자신이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 절대 감각 없이도 이길 수 있을까? 팀을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
준호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임준석의 이름을 검색했다. SNS, 뉴스, 인터뷰. 임준석이 어떤 선수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한 기사를 발견했다.
「세터 임준석, '완벽함의 압박에서 벗어나다'」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임준석은 준호가 입단하기 전, 서울 엘리트의 절대 세터였다. 준호의 부상 당시 영입된 신입이지만, 3년 만에 팀의 중심 세터로 성장했다. 하지만 준호의 귀환으로 인해, 임준석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한 관계자는 말했다. '임준석은 준호를 대체한 세터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의심받고 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처 주었는지, 그제야 명확히 보였다.
임준석. 박준영. 최동욱. 채은. 도현. 정수연.
그들 모두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각의 이유로. 각각의 기대로. 각각의 실망으로.
준호는 그 무게 속에서 움직였다. 절대 감각으로만. 완벽함으로만. 혼자서만.
3일이 지났을 때, 준호의 시력은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는 여전히 흐렸다.
경기 전, 준호는 임준석을 찾아갔다.
세터 전용 코트. 임준석은 토스 연습 중이었다. 준호의 모습을 본 임준석은 공을 멈추고 돌아섰다.
"뭐 하러 왔어?"
"경기 전에 말하고 싶어."
준호가 임준석의 눈을 봤다. 세터는 준호를 외면하고 있었다.
"1세트 때 넌 나한테 신뢰를 보여줬어. 완벽하지 않은 토스를 던졌는데도, 나는 그걸 받아냈고 점수를 냈어. 너도 느꼈을 거야. 그게 팀이라는 걸."
임준석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준호는 계속했다.
"그런데 2세트부터 내가 절대 감각을 썼어. 넌 그걸 봤을 거야. 내가 너의 토스를 믿지 않고, 절대 감각으로 완벽함을 만들었어. 그건 배신이야. 너한테 한 약속을 깼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해. 정말로."
임준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조금씩 변했다. 절망에서 다른 감정으로.
"다음 경기에서 절대 감각을 쓰지 않을 거야. 상관없이 경기가 어렵든, 박준영이 원하든. 너의 토스를 믿고, 그 토스로 점수를 낼 거야. 비록 내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가능해?"
임준석이 처음으로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의심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해야 해. 너를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다르게.
"이번 경기 끝까지 함께 하자. 절대 감각 없이."
임준석은 그 손을 봤다. 며칠 전과 같은 제안이었지만, 준호의 눈빛이 달랐다. 더 이상 명령이 아니라 진정한 청원처럼 보였다.
"알겠어."
임준석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준호는 결심했다.
이번 경기에서 절대 감각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상관없이 상대가 강팀이든, 박준영이 원하든, 경기가 어렵든.
오직 임준석의 토스를 믿고, 팀을 믿고, 자신의 신체 능력만으로 싸우겠다고.
하지만 그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여전히 낯설었다.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거부감일 수도 있었다. 절대 감각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준호는 그 두려움을 감춘 채 경기장으로 나갔다.
그 순간, 박준영 감독이 준호를 불렀다.
"준호, 잠깐."
준호가 멈춰 섰다. 감독의 눈이 준호를 관통했다.
"절대 감각을 쓸 준비 해. 2세트부터 필요할 거야."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준석의 손을 떠올렸다. 세터의 눈빛을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준호의 대답은 기계적이었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려 할 때,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은 절대 감각의 신호가 아니었다. 선택의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