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을 믿는 법, 다시 배우기
세 번째 킬. 손가락이 저렸다.
또 혼자 했다. 채은의 토스를 믿지 못하고 절대 감각에만 의존했다. 그게 자신을 버린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준호는 코트 위에서 손가락을 부들거리며 펴고 오그렸다. 시력도 흐릿했다. 마치 안경을 쓴 상태에서 김이 서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듯한 그 감각. 준호는 벤치에 앉으며 심호흡을 했다.
3세트는 상황이 달랐다. 2세트 막판부터 시작된 시력 흐림이 계속되자, 준호는 절대 감각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공격. 채은의 토스가 들어왔다. 준호는 순간 절대 감각을 켜려다 멈췄다. 손가락이 저렸다.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했다. 대신 토스를 받자마자 생각하지 않고 쳤다. 결과는 킬이었다.
다시 킬. 또 킬.
경기는 25대 16으로 끝났다.
탈의실 문이 닫혔다. 도현이 준호를 바라봤다. 주장의 눈은 차갑지 않았지만, 엄했다.
"넌 또 했어."
준호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다 멈췄다.
"토스가 완벽하지 않으면 짜증 냈어. 세트 초반부터 넌 계속 절대 감각을 쓰려고 했어. 우리가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넌 우리를 믿지 않는 거야."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각 단어가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 "우리를 봤냐? 우리는 계속 따라가고 있어. 넌 왜 계속 혼자 하려고만 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현이 탈의실을 나갔다. 나머지 선수들도 하나둘 나갔다. 체육관은 점점 조용해졌다. 준호만 남았다. 벤치에 앉아 손가락을 굽혔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여전히 저렸다.
계단 참에서 채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 괜찮아?"
준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채은이 한 발 내려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한 계단이 있었다.
채은이 준호의 손을 들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채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손을 자신의 손에 올려놨다. 따뜻한 터치였다. 준호의 손가락이 채은의 손등을 세 번 톡톡 쳤다. 과거의 신호처럼.
"이번엔 달라질 수 있을까?" 채은이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준호는 채은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에는 예전과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희망.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진심으로."
채은이 준호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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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뒤, 대학 리그 다음 경기였다.
준호는 코트에 들어서면서 무언가를 내려놓기로 했다. 절대 감각에 매달리는 습관. 혼자 완벽해지려는 욕망.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만 믿기로. 토스를. 채은을.
하지만 코트에 서자 손가락이 자꾸 저렸다. 절대 감각을 켜려는 충동이 몸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감각이 얼마나 편한지, 얼마나 확실한지 준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알고 있었다. 혼자. 항상 혼자.
준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을 억눌렀다.
1세트 초반, 준호는 킬을 노렸다. 채은의 토스가 들어왔다. 높이가 조금 낮았다. 완벽하지 않았다. 과거의 준호라면 짜증을 냈을 것이다. 절대 감각을 켜서 그 불완전함을 자신의 방식으로 보정했을 것이다.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절대 감각의 문을 열려는 신호였다. 손끝에서부터 팔뚝으로 퍼지는 그 익숙한 따끔거림. 한두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충동은 강했다. 그 낮은 토스를 자신의 방식으로 보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준호는 멈췄다.
채은의 토스 속에서 타이밍을 읽었다. 상대 블로커의 점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높이는 실수가 아니었다. 의도였다. 채은이 만든 선물이었다. 준호는 토스보다 조금 더 앞서 스파이크를 쳤다. 공은 상대 블로커의 손끝을 스치고 코트 너머로 날아갔다.
킬 포인트.
도현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채은이 웃었다. 그 웃음이 준호의 가슴을 채웠다.
2세트에 접어들자 준호의 호흡이 깊어졌다. 절대 감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토스만 믿으면 된다는 깨달음이 몸에 스며들었다. 채은의 토스 하나하나가 이제는 신뢰였다. 불완전한 토스도 신뢰였다. 왜냐하면 채은은 자신을 위해 그 토스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3세트 중반, 경기는 18대 14로 준호팀이 리드하고 있었다.
상대가 공을 올렸다. 도현이 레시브했다. 채은이 토스를 올렸다. 토스는 낮았다. 정말 낮았다. 거의 네트 근처였다.
그 순간,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 블로커 세 명이 모두 네트 위쪽에 떠 있었다. 그들의 손은 이미 내려오고 있었다. 절대 감각이 아니라 경험이 보여줬다. 이 타이밍이 기회라는 것을.
준호는 그 낮은 토스를 받아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스파이크를 쳤다. 공은 상대 블로커의 손끝 아래를 통과했다. 코트에 꽝 하고 떨어졌다.
킬 포인트.
그 순간, 준호는 알았다. 이게 혼자 하는 완벽함이 아니라는 것을. 채은과 도현이 만든 신뢰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낮은 토스도, 불완전한 세팅도,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경기장이 들썩거렸다. 준호팀 벤치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도현이 준호에게 달려와 손을 맞춰 쳤다. 채은도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준호를 향한 것이었다.
경기는 25대 18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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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 도현이 준호를 불렀다. 주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경기 끝난 후 박준영 감독 관계자들이 왔어. 서울 엘리트 운영팀이야."
준호의 몸이 굳었다.
"넌 모르겠지만, 대학 리그는 생각보다 프로팀의 스카우트들이 많이 온다. 특히 넌 오늘..." 도현이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넌 오늘 뭔가 달랐어. 절대 감각을 안 썼잖아. 그런데도 공격이 살아났어. 그게 더 위험해."
"위험해?"
"완벽함이 아닌 신뢰가 무기라는 게 감독들 입장에선 가장 무섭거든. 왜냐하면 그건 세팅이 나쁜 날도 있지만, 그래도 이기는 팀이 된다는 뜻이니까."
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프로 스카우트가 너를 봤대. 서울 엘리트 관계자도 있었다고 한다."
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비 입구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니, 본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다. 영상으로 여러 번 봤던 얼굴이었다.
서울 엘리트의 운영팀장, 이성준.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입술이 말을 거부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이준호 선수?"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의도치 않게 경직된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 엘리트 운영팀의 이성준입니다." 그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준호는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명함이 손에 닿는 순간, 시력이 한 번 더 흐렸다. 호흡이 짧아졌다. "좋은 경기 봤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박준영 감독과 한 번 뵙고 싶으신데요."
박준영.
그 이름은 준호의 두 번째 인생에서 처음 들었지만, 첫 번째 인생에서는 수백 번 들었다. 자신을 버린 사람의 이름이었다.
"감독께서 직접 시간을 내셨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 오후, 저희 트레이닝 센터로 오실 수 있을까요?"
준호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도현이 옆에서 준호의 팔을 톡톡 쳤다. 신호였다. 대답하라는.
"네... 알겠습니다."
이성준이 명함을 준호의 손에 밀어넣었다. "그럼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독께서 많이 기대하고 계세요."
그 말을 남기고 이성준은 돌아섰다. 준호는 명함을 들었다. 손이 계속 떨렸다.
도현이 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박준영이 뭐 하는 사람인데?"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현을 보는 준호의 눈은 마치 과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버린 감독이야."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 혹은 내가 어딘가에서 부상당했고, 그 팀이 날 포기했어. 세터로서 끝났다고 생각했어. 은퇴할 준비까지 했어."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감정이 가득했다. "그런데 목요일에 그 감독을 봐야 한다고?"
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는 명함을 다시 들었다. 글자들이 흐려 보였다. 손가락이 떨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감독의 판단? 자신의 약함? 다시 버려질 것?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준호."
도현이 다시 준호를 불렀다.
"이번엔 다르다. 넌 세터가 아니야. 넌 공격수가 됐어. 그리고 오늘 넌 뭘 보여줬냐면, 완벽함이 아니라 신뢰를 보여줬어. 박준영이가 뭐라고 하든, 그건 바뀌지 않는다."
준호가 도현을 봤다. 도현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서울 엘리트. 박준영. 그리고 자신을 대체한 임준석.
로비의 불빛 아래, 준호의 손에 들린 명함이 희미하게 빛났다. 연락처 옆에는 작은 글씨로 회사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세 개의 별 모양. 서울 엘리트의 심볼.
준호는 명함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절대 감각을 켜려는 충동은 사라졌지만, 다른 종류의 공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과거가 돌아오고 있다는 공포.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