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남역 지하 광장의 형광등이 준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은서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넌 나한테 뭐야?"

은서의 눈이 흔들렸다.

"사랑해?"

입술이 움직였다. 분명히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또 다시. 목구멍이 말을 거부했다.

준호는 그 침묵을 읽었다. 그 침묵 안에 있는 절망을.

은서가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흔들리다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자신의 옷자락을 꼬아 쥐었다.

"미안해요."

그 말이 나왔을 때, 준호는 은서가 처음으로 진짜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았다.

"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준호는 들었다. 그 목소리 속의 균열을.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감정을 표현하면 나는 결함 있는 인간이 된다고.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은서의 말이 계속됐다.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면서도 감정을 담을 수 없는 목소리로.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정보를 읽는 것처럼.

"아버지는 내 장애를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성숙함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걸 믿었어요."

은서의 눈빛이 준호를 마주쳤다. 눈 속에 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그래서 난 표현하지 않았어요. 표현할 수 없게 자신을 만들었어요. 그게 생존 방식이었거든요."

준호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이제는?"

"이제도... 모르겠어요."

은서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호흡이 변했다. 그 호흡이 한 번, 두 번, 떨렸다.

준호는 은서를 안았다. 팔로. 온 몸으로.

은서의 얼굴이 준호의 가슴에 묻혔다. 목이 움직였다.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소리는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은서는 울고 있었지만 울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은서의 울음이었다.

준호는 그 울음을 느꼈다. 음성이 없는 울음을. 신체에만 새겨진 슬픔을.

"괜찮아."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계속 표현 못 해도 괜찮아. 난 알게 됐으니까. 이미."

은서의 어깨가 더 깊이 떨렸다.

형광등은 계속 깜박였다. 지하 광장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은서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천천히 펼쳤다. 저항은 없었다. 은서의 손이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이 모든 말이었다.

준호는 은서를 더 가깝게 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자신의 어깨에 닿았다. 호흡이 일치했다. 한 번, 두 번.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말 없이 서 있었다.

은서의 몸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호흡은 더 깊어졌다. 작은 떨림이 그녀를 통과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신체의 언어로 표현되는 감정. 은서가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순간.

"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은서가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예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때였다.

"은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에서.

정윤철이 지하 광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화면에 무언가 띄워진 상태로.

"은서, 뭐 하는 거야?"

정윤철의 얼굴이 굳었다. 처음으로 당황이 묻어났다.

"뉴스 봤어? 너 때문에 아버지의 이론이 무너지고 있어. 언론에서 난리야. 감정표현장애 진단 기록이 공개되고..."

정윤철이 화면을 보였다. 뉴스 기사들. 심리 치료사의 딸이 감정표현장애를 숨기고 있었다는 제목들.

"넌 완벽했어. 왜 이런 짓을 했어?"

정윤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진짜 감정이었다.

은서가 준호의 팔에서 벗어났다. 천천히. 그리고 정윤철을 봤다.

"아버지, 난 완벽하지 않았어요."

은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난 부서진 거예요."

정윤철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내 감정표현장애를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숙함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그걸 받아들였어요. 나를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은서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난 표현하지 못했어요.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완벽한 딸이 되기 위해."

정윤철의 손이 흔들렸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

"은서, 넌 내 가장 큰 성공 사례야."

"아니에요."

은서가 말했다.

"난 아버지의 이론의 희생자였어요."

정윤철이 한 발 뒤로 물렀다. 그 순간, 준호가 은서의 옆에 섰다.

"더 이상 충분합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은서는 당신의 증명 대상이 아닙니다."

정윤철이 준호를 봤다. 그 눈에는 혼란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당신이 누구길래..."

"은서의 남편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딸에게 사과하는 것입니다."

정윤철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난...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준호가 말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은서가 지금 이 상태라는 게."

정윤철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은서를 봤다. 자신의 딸을. 자신이 만든 완벽한 피조물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이사회 긴급 소집. 정윤철 박사의 기자 회견. 준성그룹의 위기.

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은서, 가자."

준호가 은서의 손을 잡았다.

은서가 정윤철을 한 번 더 봤다. 그 눈빛은 이미 과거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은서가 말했다.

"난 이제 아버지를 위해 살지 않을 거예요."

정윤철이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준호와 은서는 지하 광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정윤철은 뒤에 남겨졌다. 휴대폰을 들고. 하지만 더 이상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않는 기계를 들고.

서울의 밤하늘이 그들을 맞이했다. 남산의 불빛. 강남 빌딩들의 야경. 모든 것이 계속 반짝이고 있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박상훈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준호는 받지 않았다.

강남역에서 가까운 한강공원으로 그들은 걸어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공원은 거의 비어 있었다. 한강의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의 조명이 수면에 부서지고 있었다.

"우리가 거짓말을 했잖아."

준호가 말했다.

"난 감정이 없다고 했고. 넌 감정이 없다고 했고."

"근데 둘 다 거짓이었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내 거짓과 네 거짓은 달랐어."

준호가 말했다.

"난 감정이 있는데 표현하지 않았어. 넌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어."

"그래도 같은 거였어요."

은서가 준호를 봤다.

"둘 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준호가 물었다.

은서가 한강을 봤다. 물 위의 불빛들.

"이제는... 모르겠어요."

같은 대사였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이번엔 거부가 아니었다. 회피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이사회의 긴급 상황. 정윤철이 기자 회견을 열었다. 준성그룹의 이미지가 손상되고 있다. 준호가 즉시 돌아와야 한다.

준호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끼웠다.

"계약이 끝나면 뭐 할 거야?"

은서가 물었다.

"계약을 갱신하면?"

"그건 모르겠어."

은서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너한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 말이 나왔을 때, 준호의 손이 은서의 손을 찾았다.

한강의 야경이 계속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 속에서, 두 개의 거짓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도 감정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은서는 여전히 표현할 수 없었고, 준호는 여전히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는 바뀌어 있었다.

"6개월이 끝나면?"

은서가 다시 물었다.

"우리 어떻게 될까?"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은서를 봤다.

그 눈 속에는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억압을 벗어난 감정들. 계약의 조건을 무너뜨린 감정들.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함께 알아가자. 천천히."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역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빛이 깊어졌다. 동의의 신호였다.

준호가 은서를 안았을 때,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소리 없는 울음. 준호는 그 떨림을 느꼈다. 흔히 말하는 울음이 아니었다. 눈물도 없었다. 하지만 은서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진정한 감정이었다.

"넌 내 생명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은 강남역 지하 광장에서 이미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그 말이 진짜였다. 그 말과 함께 준호는 은서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사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택을 담아.

은서가 준호의 팔에 기대었다. 말 대신 몸으로 대답했다.

펜트하우스의 거울이 깨져 있었을 것이다. 이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다. 정윤철의 기자 회견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강 옆에서, 준호와 은서는 그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또 다시. 박상훈의 이름이 떴다. 이번엔 준호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봤다. 그리고 통화를 수락했다.

"박상훈입니다."

박상훈의 목소리가 급박했다.

"준호, 지금 어디야? 이사회가..."

"이사회는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내일 사직서를 제출하겠습니다."

"뭐라고? 준호, 이게 무슨..."

"더 이상 설명할 게 없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준성그룹의 구조 개편을 제안합니다. 정윤철 회장의 권한을 제한하고..."

"준호, 진정해. 일단 돌아와서..."

준호가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은서가 준호를 봤다. 눈빛이 다르게 빛났다. 호흡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당신이 그런 선택을..."

은서가 겨우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준호가 은서를 봤다.

"넌?"

"난..."

은서가 말을 멈췄다. 입술이 움직였다. 여러 번.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 속에 물이 맺혔다. 눈물이 흘러내릴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 자체가 은서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난 당신을 믿어요."

은서가 겨우 말했다.

"그게 전부예요."

준호가 은서를 안았다. 한강의 야경 속에서.

"그게 충분해."

준호가 말했다.

"그게 모든 거야."

한강의 물이 흘러갔다. 서울의 조명이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개의 거짓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이름 붙지 않은 감정. 표현되지 않은 사랑. 하지만 확실한 것.

펜트하우스의 거울은 여전히 깨져 있었을 것이다. 그 파편들 사이로,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한강 옆에서,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가장 크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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