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펜트하우스

펜트하우스의 거울 앞에 섰을 때,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6개월 전이라면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을 읽었을 것이다. 눈가의 미세한 주름, 입꼬리의 움직임, 이마의 긴장도. 모든 것을 점검했을 것이다. 감정이 얼굴에 새겨지는 순간이 죽음이라고 중얼거리며. 하지만 지금 준호는 거울을 피했다. 거울을 바라봤지만 자신을 보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에서 은서를 찾았다.

은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도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얕았다. 얼굴은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준호는 안다. 무언가 달라졌다. 은서의 눈동자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그곳에는 자신을 보려는 의지가 있다.

펜트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박상훈이 들어섰다. 밤 11시였다. 비서가 이렇게 늦게 남아 있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박상훈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박상훈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있었다. 준호의 표정을 읽으려는 긴장. 20년을 함께한 비서가 처음으로 준호의 얼굴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긴장이었다.

"이사회 긴급 소집, 정윤철의 언론 공개 폭로. 모두 대응 완료했습니다."

박상훈이 보고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다. 거울 속의 은서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박상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장님, 그 여자가 정말로..."

박상훈이 말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은서의 신원을 조사한 파일을 꺼내려는 듯한 제스처였다. 20년간 준호의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해온 비서의 습관이었다.

"비서 역할만 해줘, 상훈."

준호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 차갑음은 예전과 달랐다. 감정 없음이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둘은 다르다. 세상은 그 차이를 모르지만, 준호는 안다. 은서도 안다.

박상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공중에 멈춰 있었다. 그 손가락에는 은서에 대한 조사 자료가 들려 있을 것이었다. 가족 관계, 정신 병력, 재정 상태. 모든 것. 20년간 박상훈이 모아온 모든 것이.

"사장님, 제 충고를 받아주십시오. 그 여자는..."

박상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더 강하게.

"당신을 파괴할 겁니다."

준호가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처음으로 박상훈을 직접 마주봤다. 그 눈빛은 예전의 준호가 아니었다. 감정 없는 남자의 눈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남자의 눈이었다.

"상훈아. 이미 파괴됐어. 6개월 전부터. 그리고 그게 좋아."

박상훈의 눈이 흔들렸다. 20년을 함께한 비서가 처음으로 준호에게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박상훈은 손에 들려 있던 파일을 내려놨다. 그것은 은서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파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펼쳐 보이려다 멈췄다. 결국 펼치지 않았다. 그저 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20년을 함께한 남자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박상훈은 파일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폴더의 모서리를 짚었다. 펼칠지, 말지. 그 선택의 무게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결국 그는 파일을 내려놨다. 천천히. 마치 자신의 20년을 내려놓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박상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는 돌아섰다. 하지만 현관으로 가지 않았다.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20년간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살아온 남자의 모습. 그리고 그것이 이제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거울에 닿았다. 자신의 손이 거울 속의 손과 만나는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사장님."

박상훈이 한 번 더 말했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이제 두려움이 없었다. 대신 무언가 해방된 것이 있었다.

"행복하세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박상훈은 펜트하우스를 떠났다. 파일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것은 준호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은서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파일이 펼쳐진 채로.

준호는 그 파일을 보지 않았다. 집어 들지도 않았다. 단지 은서를 바라봤다. 은서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준호를 따라가고 있었다.

---

한남동 오피스텔은 낡았다. 벽지는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고, 창문은 결로로 흐렸다. 이곳은 준호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오는 곳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6개월 전 처음 은서를 데려온 날, 그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도 침대 끝에 앉았다. 말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밤을 새웠다. 감정 없는 계약. 그것이 시작이었다.

3개월째, 은서는 창문 옆에 서기 시작했다.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준호는 그 옆에 섰다. 손가락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계약이었으니까. 그 밤, 준호는 혼자 남겨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은서가 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이 계약을 깨는 첫 번째 신호였다. 준호는 그것을 견뎠다. 감정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밤도, 그 다음 밤도, 계약은 계속 흔들렸다.

---

오늘, 은서는 창문 옆에 섰다. 불빛들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감정 속에는 뭔가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감지했다. 6개월 동안 배운 언어로.

"난 더 이상 감정을 없애고 싶지 않아."

준호가 말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가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 견디고 있다는 신호였다.

"난 감정을 느껴. 너 때문에. 그리고 그걸 죽이고 싶지 않아. 어떤 이유로든."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것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노출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무너지는 것도 이제는 괜찮았다. 은서 옆에서라면.

은서가 천천히 돌아섰다. 준호를 마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난 감정을 표현하고 싶지만, 할 수 없어요."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것을 받아줄 수 있냐는 질문이.

준호는 한 발 다가섰다. 은서와의 거리가 팔 길이만큼 남았다.

"6개월 동안 넌 내게 뭘 가르쳐줬는지 알아?"

준호가 말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것도 사랑이라는 걸."

은서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난 너 없는 게 더 무서워."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준호의 손이 떨렸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6개월 전 거울 앞에서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감정이 신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떨림. 목소리 변화. 호흡 불안정. 모든 것이 말해지고 있었다.

은서가 한 발 다가섰다. 준호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이었다. 그냥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 안에는 6개월이 담겨 있었다.

은서는 준호를 안으려다 멈췄다. 팔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할 수 없는 몸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하려다 말았다. 다시 말하려다 말았다. 목이 아팠을 것이다. 감정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그 감정을 밖으로 꺼내려고 해도, 몸이 거부했을 것이다. 준호는 그 몸을 안다. 6개월 동안 그 몸의 언어를 배웠다.

준호는 그 팔을 잡았다. 은서의 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은서는 그대로 준호에게 안겼다.

말 없이. 표현 없이. 그저 함께.

---

최유진은 은서에게 물었다.

"넌 진짜 괜찮아? 저 남자 때문에?"

둘은 한 잔의 커피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은서는 한 번 깜빡였다. 아주 천천히.

"모르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아빠한테 전화했어요. 처음으로."

최유진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난 감정표현장애가 있다고 했어요."

은서의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자신을 인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빠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냥 내 일부라고."

최유진은 은서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이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만들었어?"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모르는 게 두렵지 않아요."

은서가 대답했다.

"모르는 것, 표현할 수 없는 것, 감정을 느끼면서도 말할 수 없는 것.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죽음이 아니에요. 그냥 내 일부예요."

---

정윤철은 펜트하우스 거실에 들어섰다.

박상훈이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정윤철 자신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심리 치료사는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본다. 펜트하우스의 보안 코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은서의 심리 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준호가 들어섰다. 은서는 거실의 한구석에 서 있었다. 정윤철이 들어온 순간 그녀의 몸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억누르는 손가락.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공포가 있었다. 아버지라는 공포, 진단이라는 공포, 자신이 다시 '환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

"이준호 회장님."

정윤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권위가 없었다. 대신 뭔가 부서진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론이 거짓임을 알게 된 남자의 목소리.

"제 딸을 돌려주세요."

정윤철이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이 은서와의 관계를 끝내고, 그 여자가 제 병원의 치료 프로그램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회사, 당신의 평판, 모두요."

정윤철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은서의 심리 기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진단서들. 그는 그것을 준호의 앞에 펼쳤다.

"감정표현장애. 불안정한 성격장애의 징후. 사회 부적응.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와 함께라면, 당신도 함께 망가질 겁니다."

정윤철의 말이 끝났을 때, 준호는 웃었다. 아니, 웃음이 아니라 한숨이었다.

"은서는 제 딸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준호의 말이 나가는 순간, 정윤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누군가 그의 내부에서 뭔가를 빼내간 것 같았다. 자신의 딸을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던 남자가, 거래 불가능한 것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진단서들, 그 기록들. 모두 거짓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은서는 감정표현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해야 할 병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윤철은 준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파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은서의 기록들이 흩어졌다. 그것들을 보면서 정윤철의 눈물이 흘렀다. 심리 치료사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패배였다. 자신의 이론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남자의 눈물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흩어진 기록들을 줍기 위해.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그 기록들을 다시 만질 수 없었다.

정윤철은 펜트하우스를 떠났다.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거울 앞에 서 있던 남자만 남겨두고.

---

펜트하우스의 거울 앞에 둘이 섰다.

준호와 은서가 나란히. 거울 속에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준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무언가 살아 있었다. 은서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감정 속에는 무언가 선택이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거울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거울 속에서 은서를 찾았다.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울 속에서 준호를 찾았다.

둘은 손을 잡았다. 거울 속에서도, 거울 밖에서도.

"계약서를 갱신할까? 아니면 새로 쓸까?"

준호가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계약 갱신 여부도, 감정의 진정성도, 거짓의 깊이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은서가 입을 열었다.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크기로.

"계약은 필요 없어요."

그것이 그녀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준호가 은서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손가락이 은서의 손등에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팔뚝을 지나 어깨에 닿았다. 은서는 그 손을 느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느꼈다.

"그럼 우리 뭐라고 부를까?"

"모르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하지만 함께 있고 싶어요. 이렇게."

준호는 은서를 돌려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거울 속의 둘이 아니라, 거울 밖의 둘이. 은서의 얼굴이 준호에게 가까워졌다. 준호의 입술이 은서의 이마에 닿았다. 그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약속이었다. 말 없는 약속.

그리고 준호의 팔이 은서를 감싸 안았다. 깊게. 은서의 머리가 준호의 가슴에 닿았다. 거기서 준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빠르게. 불규칙하게. 감정이 신체로 새어나오는 소리.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모든 것이 말해지는 침묵이.

거울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닦으면서 거울을 더럽히는 것처럼. 하지만 두 사람의 손은 여전히 잡혀 있었다. 준호의 팔은 은서를 놓지 않았다. 거울이 완전히 흐려질 때까지도.

화면이 서서히 검게 변했다. 거울 속의 둘이 사라지고, 거울 밖의 둘도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말해졌다.

마지막 불빛이 꺼졌다.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