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의 폭발
펜트하우스의 거울 앞에 섰다. 아침 햇살이 유리 표면을 가로질렀다. 준호의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근육 이완. 눈썹 각도 조정. 입가 중립화. 모든 것이 정확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얼굴은 낯설었다.
어제의 기억이 뒤틀려 들어왔다. 한남동 침대 위의 은서.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심장 박동을 느끼려는 듯한 그 손길.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다. 감정이 있는 인간인가, 아니면 감정을 억누른 기계인가.
손이 떨렸다.
거울을 놓쳤다. 유리가 세면대에 떨어지며 갈라졌다. 금이 거울을 가로질렀다. 마치 얼굴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정 여사가 클리닉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최유진 씨와 함께 강남역 근처에 있습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상훈이 다시 말했다.
"사장님?"
"위치를 보내."
차 안에서 준호의 발가락이 가속 페달을 누르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들이 흐릿하게 스쳐갔다. 강남대로, 테헤란로, 논현로. 도시는 거대한 미로였고 준호는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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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소: 펜트하우스**
거실이 비어 있었다. 침대도 비어 있었다. 준호는 은서가 누워 있던 침대 위에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침대를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온기도 없었다.
**두 번째 장소: 한남동 오피스텔**
문을 열었을 때 공기가 정체되어 있었다. 침대, 소파, 책상. 모두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은서는 없었다. 준호는 침실로 들어갔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향수가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 눈이 흐려졌다.
**세 번째 장소: 정윤철의 클리닉**
수신호에 응하는 직원들만 있었다. 준호가 물었다.
"정은서는?"
"죄송합니다. 그런 분은 없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정은서. 30대 초반. 여자. 여기 있었어?"
직원이 뒤로 물러났다. 준호의 얼굴에 감정이 뒤틀려 있었다. 두려움. 분노. 절망. 모든 것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네 번째 장소: 최유진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또 다시. 손가락이 계속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최유진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비어 있었다.
"은서가 어디 있어?"
최유진이 말했다.
"준호, 들어와."
거실에 앉았다. 최유진은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거웠다. 최유진이 입을 열었다.
"은서는 자신이 뭔지 모르는 거야."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거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고 있어.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은서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어.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냥 아버지의 이론 속에서 '성숙한 딸'로 살아온 거야."
호흡이 변했다. 흉부가 뜨거워졌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자신도 같은 실수를 했다. 자신도 아버지의 두려움 속에서 감정 없는 남자로 살아왔다.
그런데 은서는 다르다. 은서는 자신의 거짓을 깨닫고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준호가 최유진에게 물었다.
"은서가 뭐라고 했어?"
"자기는 표현할 수 없다고. 감정을 느끼는데 말을 할 수가 없대. 그것 때문에 자신이 감정이 없는 인간 같아서 싫다고."
호흡이 급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은서가 느끼는 그 고통—감정과 표현 사이의 끝없는 간극. 자신은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버텨왔지만, 은서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최유진이 계속했다.
"은서는 지금 자신 자신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어. 누군가가 그 말 못 하는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해."
준호가 서 있었다. 최유진의 말이 자신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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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밤이 되었다. 거울은 여전히 금이 가 있었다. 준호가 거울 앞에 섰다. 표정을 정리하려고 했다. 근육 이완. 눈썹 각도. 입가 중립화.
손가락이 떨렸다.
다시 한 번. 근육 이완.
손가락이 더 떨렸다.
거울을 내려다봤다. 거울 속의 얼굴은 붕괴되어 있었다. 감정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눈가에 선이 그어져 있었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다.
한남동 오피스텔로 갔다.
벽장을 열었다. 그 안에 상자가 있었다. 손을 뻗었다. 사진이 나왔다. 아버지의 얼굴.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그 얼굴.
손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 시야가 순간 흐릿해졌다.
손가락이 사진을 집어 던졌다.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유리가 깨졌다. 몸이 경직되었다.
"아버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떨림이 목을 타고 흘렀다.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손가락이 더 이상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해. 난 더 이상 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감정의 폭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폭발이 자신을 파괴할까봐.
하지만 지금, 그 폭발 속에서도 자신은 살아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사장님, 정 여사가 강남역에 있습니다."
차에 탔다. 거울을 보지 않았다.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감정이 가득했다. 눈은 빨갛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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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지하 광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군중을 뚫고 나갔다.
은서가 서 있었다.
최유진 곁에서, 은서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감정 뒤에 있는 것을 이제 알았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 자신 자신을 증오하는 눈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 여자.
걸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은서의 눈이 발견했다. 그 순간, 은서의 얼굴에 무언가가 흔들렸다. 표정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은서에게 다가갔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얼굴에는 감정이 가득했다. 더 이상 감정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은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경직되어 있었다.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이 너무 커서 언어로 변환될 수 없었다.
"넌 뭐야?"
은서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박상훈이 다가갔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가 진단 기록 전체를 공개하겠다고 합니다."
박상훈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20년을 함께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감정으로 뒤틀려 있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알던 준호인가? 20년을 함께했는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정윤철을 바라봤다. 정윤철이 한 발 물러났다. 눈이 무서웠다. 감정이 가득한 그 눈이.
"기록을 공개해. 상관없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호흡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하지만 은서는 데려가지 못해."
한 발 더 다가섰다. 정윤철이 또 물러났다.
"그리고 내가 뭐하는지 알아? 난 감정을 억압하는 데 20년을 썼어. 그 억압을 풀려고 또 20년을 쓸 수도 있어. 하지만 은서는? 은서는 표현도 못해. 그래서 더 필요해. 누군가가 그 말 못 하는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박상훈은 준호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차갑고 완벽했던 그 남자가 감정 앞에서 이렇게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박상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은서 쪽으로 돌아섰다.
"넌 뭐야? 난 알아. 넌 내 생명이야."
은서의 얼굴이 움직였다. 표정이 아니었다. 그 깊은 곳에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눈동자가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강남역 지하 광장은 준호와 은서 사이의 침묵으로 채워졌다. 사람들은 그들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교환되고 있었다.
은서의 손을 잡았다.
최유진이 움직였다. 은서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정윤철도 입을 다물었다. 박상훈은 준호의 뒤에서 서 있었다.
오직 준호와 은서만이 남았다.
"우리 계약, 갱신할 거야?"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절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은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만 준호를 보고 있었다.
"넌 날 사랑해?"
은서가 대답할 수 없었다. 감정표현장애는 여전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준호의 손을 꼭 쥐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윤철이 소리쳤다.
"은서! 이 남자로부터 멀어져! 넌 감정이 없는 거야, 이해해? 그것이 넌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라고!"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하지만 은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준호만을 보고 있었다.
최유진이 정윤철을 잡았다.
"박사님, 그만하세요."
정윤철이 버둥거렸다.
"넌 뭘 몰라! 그 여자의 진단 기록은 내 이론의 증거야! 감정표현장애는 성숙함의 증거라는!"
최유진이 말했다.
"아니에요. 그것은 당신의 이론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이었어요."
정윤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와 은서는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강남역 지하 광장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상훈이 준호에게 다가갔다. 혼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사장님, 우리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여기 있어야 해."
"여기서요?"
"응. 여기서 은서를 보호해야 해."
박상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알던 사장인가? 준호는 항상 비즈니스를 우선시했다. 감정은 약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한 여자를 지키려고 한다. 박상훈의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은서를 바라봤다. 은서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감정 속에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했다.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숨겨왔으니까.
강남역 지하 광장은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준호와 은서는 여전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이 아니었다. 호흡이었다. 그 호흡 속에서 은서의 감정을 느꼈다.
"뭐야? 뭐라고 하고 싶어?"
은서가 준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말 없는 대답. 감정표현장애 속에서의 진정한 표현.
은서를 안았다. 팔이 은서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은서의 몸이 떨렸다. 감정이 신체로 표출되고 있었다.
정윤철이 소리쳤다.
"은서! 이건 약함이야! 약함!"
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은서에게 닿지 않았다. 은서는 준호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은서의 등을 쓸어내렸다.
박상훈이 물었다.
"사장님, 그 여자...정말..."
"응. 내 아내야."
그 말은 계약이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강남역 지하 광장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준호와 은서의 세계는 그 불빛 속에서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은서가 준호의 팔을 꼭 잡았다. 손가락이 준호의 팔을 파고들었다. 말 대신 신체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사회 긴급 소집 안내였다. 박상훈이 말했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가 언론에 진단 기록을 공개했습니다. 지금 언론사들이..."
휴대폰을 끄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상관없어.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은서를 안았다. 은서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 박동이 준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어디 갈까?"
은서가 준호의 얼굴을 들고 봤다. 그녀의 눈이 말했다. 어디든 괜찮다고. 넌 어디든지 되니까. 그 무감정 속에서의 절대적인 신뢰.
은서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강남역을 나갔다. 서울의 야경 속으로.
정윤철은 뒤에 남겨졌다. 최유진과 박상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윤철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니라 공허함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딸이 자신의 손을 떠나갔다. 그것이 정윤철에게는 패배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은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이론 속의 딸이 아니었다. 그리고 준호는 더 이상 아버지의 트라우마 속의 아들이 아니었다.
둘은 자신들의 거짓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거짓 너머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되었다.
언론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 준성그룹의 이사회는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철의 진단 기록은 이미 공개되었고, 그 기록 속에는 준호의 이름도 있었다.
"정은서의 계약결혼 배우자, 이준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우려"
그것이 정윤철이 남긴 마지막 무기였다.
준호가 은서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