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준호의 손이 떨렸다.
펜트하우스 침실, 오후 2시 30분. 거울 앞에 선 그가 손가락을 펼쳤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사회 회의를 앞두고 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에서 은서가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펼쳤지만 화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준호가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어요?"
목소리가 낮았다. 준호는 그 낮음 속에서 절망을 들었다.
"할 수 있어."
"거짓말하지 마요."
은서의 눈이 준호를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준호는 그 공백 자체가 절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서."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나한테 뭐라고 해. 뭐 하고 싶어?"
은서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침묵 속에는 말할 수 없음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으니, 원하는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호는 자신의 계획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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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성그룹 본사 회의실, 오후 3시.
이사회 임원 일곱 명이 테이블을 둘러앉았다. 준호는 테이블의 끝에 앉았다. 정윤철의 최후통첩이 아침에 도착했다. 은서의 진단 기록을 공개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언론에 폭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윤철은 그 기록이 자신의 치료 이론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은서의 감정표현장애는 병이 아니라 성숙함의 증거라는 그 황당한 주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사장님, 정 박사의 요구에 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박 이사였다. 그는 항상 조심스러운 톤으로 말했다.
"진단 기록이 공개되면 회사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 정 박사와 합의하는 것이..."
"합의는 없다."
준호가 끊었다.
"그럼 공개할 건가요?"
"그렇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임원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봤다.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박 이사가 다시 말했다.
"정 박사는 우리 회사의 주요 고객입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관계는 이미 끝났다."
준호가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은서는 회사의 것이 아니다. 정윤철의 것도 아니다. 그 진단 기록을 공개하는 것이 은서를 보호하는 길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사회에 있을 필요가 없다."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테이블을 떠났다. 회의실을 나가며 그는 자신이 방금 뭘 했는지 생각했다. 그는 은서의 감정표현장애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그녀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은서를 다시 상처 입히는 건 아닐까?
그의 손이 더 크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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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오후 5시.
준호가 돌아왔을 때 은서는 여전히 거실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닫혀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일렁이고 있었다.
"한남동으로 가자."
은서가 고개를 돌렸다.
"뭘 해야 할까요?"
"가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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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오피스텔, 오후 6시 30분.
낡은 건물, 낡은 문. 준호가 문을 열었다. 거실의 불이 켜졌다. 은서는 천천히 들어왔다. 그녀는 벽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명수의 사진들이 여전히 있었다. 준호의 아버지. 그의 공포의 근원.
"앉아."
준호가 소파를 가리켰다. 은서가 앉았다. 준호는 그 옆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내가 이사회에서 결정했어. 너의 진단 기록을 공개하기로."
은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그게 너를 보호하는 길이야. 정윤철이 너를 이용할 수 없도록."
"아버지가..."
은서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아버지가 뭘 하실까요?"
"상관없어. 내가 처리할 거야."
준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주먹으로 쥐어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는 말을 멈췄다. 은서를 봤다.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표현되지 않는 얼굴. 그것이 은서였다.
그 순간, 준호 내부의 무언가가 부서졌다.
"미안해."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벽을 쳤다.
음.
그것은 둔탁한 소리였다. 은서가 움찔했다. 준호는 다시 벽을 쳤다. 그리고 또 쳤다. 그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울음에 가까운 그 소리는 침묵 속에서 메아리쳤다.
"미안해."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가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그의 감정 억압 체계가 폭발하고 있었다. 20년을 억눌러온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은서는 일어섰다.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은 멈췄다.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그 거리.
호흡이 얕아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 언저리의 근육이 실룩거렸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내려왔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 말도 거짓이었다. 괜찮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준호의 손이 멈췄다. 그의 호흡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은서도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 안 돼. 왜냐하면 그러면 넌 날 떠나갈 거니까."
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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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다시 말했다.
"지금 뭐 하고 싶은 거야?"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음성이 나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경직된 것처럼 보였다.
"말해. 뭐든 말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애원이었다.
은서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 계약을 끝내자."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은서의 손이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표정으로도, 말로도.
"뭐?"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계약. 끝내자. 이 거짓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알겠어요."
그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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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울렸다.
준호가 화면을 봤다. 박상훈이었다.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정 박사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 박사가 당신의 결정에 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은서 양의 안전을 위해 클리닉으로 데려왔다고..."
"뭐?"
준호가 일어섰다.
"은서를 데려왔다는 거냐?"
"정 박사가 직접 오피스텔에 가셔서..."
준호는 통화를 끊었다. 은서를 봤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버지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저를 데려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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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오피스텔을 나갔다. 차를 타고 강남역 방향으로 향했다. 정윤철의 심리 클리닉이 그 근처에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흘러갔다. 불빛들이 깜빡였다.
15분 후, 그는 클리닉 건물 앞에 섰다.
1층 로비로 들어갔을 때, 복도 끝에서 정윤철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있었다.
"준호군, 오셨군요."
정윤철이 다가왔다.
"은서는 제 환자이자 제 딸입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윤철을 지나쳐 클리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정윤철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은서의 진단 기록을 공개하려고 했다고요? 너무 늦었습니다."
정윤철의 눈이 반짝였다.
"저는 이미 그 기록을 언론에 보냈습니다. 내일 아침 신문의 헤드라인이 될 겁니다. '재벌 총수의 아내, 감정표현장애 진단 기록 공개.' 얼마나 멋진 기사일까요?"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은서는 그냥 당신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게 은서는 제 이론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입니다."
정윤철이 웃었다.
"당신이 그 아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이해하셨을 거 같은데요?"
준호는 정윤철의 손을 벗었다. 그의 손이 다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의 떨림이었다. 호흡이 깊어졌다. 콧구멍이 벌어졌다.
"은서를 내놔."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아니면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을 거야. 당신의 진료실, 당신의 평판, 당신의 자유. 모든 것."
정윤철의 얼굴이 굳었다. 그 순간, 클리닉 내부에서 문이 열렸다.
은서가 나타났다.
그 뒤로 최유진이 따라 나왔다. 그녀는 은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은서를 클리닉에서 나오도록 설득한 것은 최유진이었다.
"준호."
최유진이 말했다.
"은서가 날 부르더라.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준호는 은서를 봤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표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최유진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은서의 표현이었다.
정윤철이 준호를 밀어냈다.
"나가세요."
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의료인의 따뜻함은 사라지고,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가면만 남았다.
"당신은 제 딸의 치료에 방해가 됩니다. 은서는 지금 혼란 상태입니다. 당신과 떨어져야 회복됩니다."
준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비명에 가까웠다.
"치료? 당신이 하는 게 치료라고? 은서를 감옥에 가두고 그걸 성숙함이라고 부르는 게 치료라고?"
정윤철의 얼굴에 색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의료 전문가가 아니십니다. 제 진료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이 뭔지 안다."
준호가 한 발 더 나아갔다.
클리닉의 복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윤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순간,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은 첫 번째 눈물이었다. 이 순간에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신체적으로 표현했다. 정윤철의 얼굴에는 충격과 분노,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공포가 섞여 있었다. 자신의 이론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서, 당신은..."
"저는 나가요."
은서가 말했다.
그녀는 최유진을 바라봤다. 최유진은 즉시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우리 나가자."
최유진이 말했다.
그들이 움직이려 했을 때, 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은서가 멈췄다. 그녀의 어깨가 경직됐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동공이 준호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음성이 나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경직된 것처럼 보였다.
"말해. 뭐든 말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애원이었다.
"저는..."
은서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매우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저는 뭐예요?"
준호가 한 발 더 다가갔다. 정윤철이 막으려 했지만, 준호는 그를 보지 않았다.
"당신이 뭔지 모르겠어요."
은서가 말했다.
"당신이 뭔지, 저한테 뭔지, 이게 뭔지... 아무것도."
그녀의 목소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로.
"그럼 우리가 뭔가?"
준호가 물었다.
"우리가 뭐야, 은서?"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최유진의 손을 놓았다. 그 손이 준호를 향해 움직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화염을 만지는 것처럼.
최유진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은서?"
"저... 가야 해요."
은서가 말했다.
"어디로?"
"모르겠어요."
정윤철이 앞으로 나섰다.
"은서, 이건 당신의 혼란 상태입니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진 상태예요. 이 남자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정윤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것이 더 독이 되었다.
"아버지."
은서가 말했다.
"저는 혼란 상태가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저는..."
은서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도 표현이 없었지만,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공기 자체가 변했다.
"저는 도망쳤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으로부터. 항상."
정윤철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인가요?"
"감정표현장애는 성숙함이 아니에요. 그건... 감옥이에요. 당신이 만든 감옥."
은서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저는 감정을 느껴요. 항상 느껴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는 느끼지 않는 척했어요. 당신의 이론이 맞다고 증명하기 위해."
은서가 준호를 봤다.
"그리고 이 사람은 같은 거였어요. 거짓으로 거짓을 덮으려는 거.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하지만?"
준호가 다가갔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거짓을 할 수 없어요. 표현할 수 없어도, 거짓은 할 수 없어요."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또 다른 눈물. 그리고 또 다른 눈물.
정윤철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은서, 나와 함께 있어야 해요. 이 남자는 당신을..."
"저는 나가요."
은서가 말했다.
그녀는 최유진을 바라봤다. 최유진은 즉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하지만 은서는 그 손을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준호 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최유진이 은서의 팔을 잡으려 했다.
"은서, 뭐 하는 거야?"
"미안해요."
은서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찾았다. 검은 동공이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눈 속에는 처음으로 무언가가 있었다. 표현이 없으면서도 표현되는 그 무언가.
"나랑 가."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은서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준호도 따라나갔다. 정윤철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 그는 클리닉의 복도에 혼자 남겨졌다.
최유진도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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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밖, 밤의 서울 거리. 강남역 근처의 불빛들이 깜빡였다.
은서는 멈춰 섰다. 준호와 최유진이 그녀의 양옆에 섰다.
"어디 갈 거야?"
최유진이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준호를 봤다. 준호도 그녀를 봤다.
"내 집에 와."
최유진이 말했다.
"일단 아버지 있는 데 있으면 안 돼."
은서는 여전히 준호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유진이 은서의 팔을 잡았다.
"은서, 나랑 가. 지금은 이 사람이랑 있으면 안 돼."
"왜요?"
은서가 물었다.
"왜 안 돼요?"
"왜냐면... 이 사람이 너를 이용했잖아."
"저도 이 사람을 이용했어요."
은서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뭔가요?"
그녀는 준호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최유진의 손을 놓았다. 그 손이 준호를 향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준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랑 가."
준호가 말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준호의 옆에 섰다. 최유진을 보지 않고.
최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은서, 진짜..."
"미안해요."
은서가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녀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준호와 함께 걸어갔다. 강남역 거리를 지나, 어딘가로.
최유진은 뒤에 남겨졌다. 밤의 불빛 아래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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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차. 한남동으로 향하는 길.
은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불빛이 흘러갔다. 준호는 핸들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뭐 할 거예요?"
은서가 물었다.
"뭐?"
"진단 기록. 내일 신문에 나온대요."
"알아."
"그럼?"
"그럼 뭐."
준호가 말했다.
"우린 그 기록과 함께 살아갈 거야."
"함께?"
은서가 그를 봤다.
"계약 끝낸다고 했잖아요."
"그래. 계약은 끝났어."
준호가 말했다.
"이제 우린 뭐야?"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함께 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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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오피스텔.
준호는 문을 열었다. 거실의 불을 켰다. 침실의 불도 켰다. 베란다의 불도 켰다. 모든 불을 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은서는 거실에 앉았다. 준호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뭐 할 거예요?"
은서가 물었다.
"모르겠어. 넌?"
"저도."
그들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밤의 서울이 창밖에서 깜빡였다. 불빛들이 흘러갔다.
"내일이 무서워요."
은서가 말했다.
"신문이 나올 거고, 사람들이 알 거고, 아버지는 뭐라고 할 거고..."
"알아."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
"정말요?"
은서가 물었다.
"정말이야."
준호가 대답했다.
그들은 다시 침묵 속에 앉았다. 밤이 깊어갔다. 창밖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