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남동 오피스텔의 침대는 좁고 낡았다.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면서 먼지 입자들이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은서가 눈을 떴을 때, 준호는 이미 깨어 있었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다시 견고해져 있었다. 어제밤의 결정이 오늘 아침이 되자 돌로 변한 것 같았다.
은서는 일어나 앉았다. 침대가 작아서 움직임이 준호에게 닿았다. 준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를 데려갈 거 같아요."
은서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준호는 그 음성 속에서 떨림을 감지했다. 성대의 긴장. 호흡의 불규칙함. 일반인이라면 절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신체 신호.
"안 돼."
준호가 말했다. 단호했다.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으신데요."
"관계없어."
준호는 돌아누웠다. 천장을 봤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악력이 강해져 있었다. 손가락이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있었다.
은서는 그것을 봤다. 준호가 손을 쥐고 있는 방식.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의 차가움은 연기였다. 내면에서 뭔가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은서가 물었다.
"뭐?"
"날 지키려고 하세요. 왜요?"
침묵이 들어찼다. 길었다. 준호의 눈이 천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말해야 할 것들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내 아버지 얘기해 줄까?"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은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의 손이 여전히 시트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인 것처럼.
"아버지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주 낮아졌다.
"감정이 폭발하면 모든 걸 집어던졌어. 엄마를 때렸고, 나를 때렸고, 회사를 부쉈어. 감정 때문에."
은서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천천히.
"그걸 봤어. 여러 번. 감정이 뭔지 알아? 약함이야. 남자가 감정을 드러내면 끝나는 거야. 아버지는 감정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그래서 난..."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감정을 없애기로 했어."
그 떨림. 은서는 그것을 들었다. 그 떨림이 무엇인지 알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준호는 계속했다.
"너는 감정이 없다고 했고, 나는 감정이 없다고 했어. 그래서 우린 잘 맞는 줄 알았어. 서로를 위협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일어나 앉았다. 창밖을 다시 봤다. 한남동의 오래된 건물들이 햇빛 속에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너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야. 표현할 수 없는 거야. 나는 감정이 있는데 감춘 거야. 우린 다르다는 거 알아?"
은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거울로 갔다. 벽에 붙어 있는 낡은 거울이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평탄했다. 여전히 고요했다.
"아버지는 내 감정을 병이라고 생각했어요."
은서가 말했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서.
"감정표현장애라고. 병이니까 치료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내 방식이라고."
그녀는 거울에서 돌아섰다. 준호를 봤다.
"아버지는 내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가르쳤어요. 감정을 표현하면 나는 결함 있는 인간이 되니까. 그래서 난 감정이 없는 척했어요. 아니, 감정을 표현할 수 없게 된 거예요."
은서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눈의 각도가 변했다. 입술의 가장자리가 움직였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움직임들이었지만, 준호에게는 거대한 파열이었다.
"표현할 수 없어요. 감정이 있어도. 느껴도. 표현할 수 없어요."
은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준호는 일어났다. 그리고 은서에게 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럼 넌 나한테 뭐야?"
준호가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뭐야?"
은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그 속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감정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고, 그리고 표현 불가능함도 있었다.
"우린 서로의 거짓을 위한 거울일 뿐이야?"
준호가 다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러질 것 같았다.
"아니에요."
은서가 말했다.
"뭐가 아니야?"
"거울이 아니에요."
은서의 목소리는 다시 평탄해졌다.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그 평탄함이 무엇인지. 그것은 침묵이었다. 감정의 침묵이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침묵이었다.
준호는 은서를 안았다. 그녀의 머리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은서는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음. 그것이 유일한 언어였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밖의 햇빛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계약, 6개월 후에 갱신할 거야?"
준호가 물었다. 은서의 머리 위로.
"모르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준호는 그 대답을 들었다. 그것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한 대답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른다는 것.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표현 불가능함이었다.
오피스텔을 떠난 것은 정오가 지났을 때였다. 준호의 차는 강남으로 향했다. 펜트하우스로. 현실로. 그들이 연기해야 하는 세계로.
은서는 창밖을 봤다. 한강이 보였다. 회색 수면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이 투영되어 있었다. 거울처럼.
펜트하우스의 현관에서 준호는 휴대폰을 켰다. 11개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모두 박상훈이었다. 준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현실로의 귀환이었다.
"들어와."
준호가 은서에게 말했다. 그들은 현관을 넘어갔다. 거울과 유리로 된 개방적 공간.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거실의 소파에 박상훈이 앉아 있었다.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사장님."
박상훈이 일어났다.
"뭐야?"
준호의 목소리는 다시 차가웠다. 그의 표정은 다시 견고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윤철 박사가..."
박상훈이 말을 시작했다.
"...정 여사를 데려가려고 합니다."
준호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진단 기록이 언론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 여사의 감정표현장애 진단이. 그것을 이용해서 당신을 압박하려고."
박상훈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명확했다.
"결혼을 무효화하고, 정 여사를 데려가겠다고. 그래야만 진단 기록이 언론에 나가지 않는다고."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시트를 움켜잡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박상훈이 계속했다.
"...정 여사의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 펜트하우스에서."
침묵이 들어찼다. 준호의 눈이 박상훈을 바라봤다. 그 속에는 결정이 있었다.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은서를 지키는 것. 계약을 깨뜨리는 것. 모든 거짓을 무너뜨리는 것.
"불러."
준호가 말했다.
"뭐라고요?"
"정윤철을 불러. 오늘 저녁에. 여기로."
준호는 돌아섰다. 은서를 봤다. 은서는 거실의 창가에 서 있었다.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거울처럼.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박상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20년을 함께한 비서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사장님, 정말입니까?"
박상훈의 목소리에는 신뢰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이 결정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준호를 따라온 20년의 무게도 있었다.
"정말이야."
준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확정적이었다. 더 이상 흔들림의 여지가 없었다.
박상훈은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마치 이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잡으려는 듯이. 20년의 신뢰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바로?"
"지금 바로."
준호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회장실 회의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와 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소파의 팔걸이에서 떨리고 있었다.
박상훈은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울렸다. 한두 번. 세 번. 정윤철이 받았다.
"박상훈입니다. 이준호 회장님께서 오늘 저녁 펜트하우스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박상훈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거절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기업 비서의 목소리였다.
"시간은 저녁 7시 30분으로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박상훈은 준호를 봤다.
"받으셨습니다. 7시 30분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창밖의 서울을 바라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오후 3시였고, 남은 시간은 4시간 30분이었다.
은서가 움직였다. 창가에서 떨어져 나와 거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발걸음이었다.
"저 잠깐 있어도 될까요?"
은서가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어디 가?"
준호가 물었다.
"제 방."
은서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펜트하우스의 오른쪽 끝, 창문이 많은 그 방으로. 준호는 그녀를 보냈다. 말없이.
박상훈이 준호에게 더 가까이 걸어왔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의 진단 기록이 정말 나갈까요?"
"모르지."
준호의 대답은 간결했다.
"하지만 나갈 거라고 가정하고 준비하는 게 맞아."
"대응 전략을 짜야 하나요?"
"아니야. 그냥 맞아주면 돼."
박상훈의 눈이 깜빡였다. 그것은 준호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준호가 이렇게 수동적으로 나올 리가 없다고 박상훈은 생각했을 것이었다. 기업 전략의 최고 권력자가 언론의 공격을 맞아주다니.
"뭐라고요?"
"은서의 진단 기록이 나가도 괜찮아. 사실이니까."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뭐요?"
"정윤철이 은서를 데려가려고 하는 걸 막는 거야."
박상훈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얼굴에는 결정의 선명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박상훈은 20년을 준호 곁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감정 억압에서의 이탈. 계약 정신에서의 벗어남.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세계를 얼마나 흔들 것인지도 알았다.
"그럼 정 여사는?"
박상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톤이 담겨 있었다.
"은서는 내가 지켜."
준호가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박상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20년의 신뢰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불안한 눈으로.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박상훈이 나가자, 펜트하우스는 조용해졌다. 준호는 소파에 혼자 남겨졌다. 거울과 유리로 된 공간에서. 모든 것이 비쳐지는 그 공간에서.
손이 떨렸다. 여전히. 조용히. 소파의 팔걸이에서.
준호는 일어섰다. 거실을 돌아다녔다. 창문에 갔다. 거울 앞에 갔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표정은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눈빛도. 입꼬리도.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떨림을 숨겼다. 그렇게 숨기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20년간 그렇게 해왔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시간이 흘렀다. 오후 4시였다. 3시간 30분이 남았다.
준호는 은서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에 멈췄다. 호흡을 정돈했다. 심장박동을 진정시켰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렸다.
문을 열었다.
은서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뭐 해?"
준호가 물었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뭘?"
은서가 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은 평탄했다. 하지만 그 평탄함 아래에는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움직임을. 감정의 움직임을.
"아버지가 뭘 할 건지. 그리고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은서가 말했다.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준호가 말했다.
"난 할 수 없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데려갈 거예요. 저는 표현하지 못하니까, 저를 통제할 수 있으니까."
준호는 은서 옆에 앉았다. 침대가 그들의 무게로 내려앉았다.
"그럼 나는?"
준호가 물었다.
"날?"
은서가 준호를 봤다.
"나는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아?"
침묵이 들어찼다.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표현 불가능함이었다. 그녀의 침묵이었다.
준호는 은서의 손을 잡았다.
"정윤철이 올거야. 저녁 7시 30분에."
"알았어요."
은서가 말했다.
"난 그를 만날 거야. 그리고 넌 여기 있으면 돼. 내가 처리할 테니까."
"처리요?"
은서가 물었다.
"계약을 깨뜨릴 거야. 너를 지키기 위해."
은서의 눈이 깜빡였다. 그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대신 너도 해야 할 게 있어."
준호가 계속했다.
"뭐요?"
"거짓을 멈춰. 적어도 여기서는."
준호가 은서를 봤다.
"날 봤어. 한남동에서. 내가 얼마나 거짓말하고 있는지. 그럼 이제 넌 내 앞에서 거짓을 멈춰. 표현 못 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의도적으로 거짓을 만들지는 마."
은서의 얼굴이 움직였다. 미세하게. 눈썹이 아래로 내려오고, 눈가가 좁혀졌다. 그것은 거의 표정이 아니었다.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봤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버지가 저를 어떻게 할 건데요?"
은서가 물었다.
"모르지. 하지만 그건 내 문제야.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럼 당신은?"
은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준호는 그 떨림을 들었다. 그것이 감정이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준호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
준호가 말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은서에게는 그것을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오후 6시였다. 1시간 30분이 남았다.
준호는 거실로 돌아갔다. 박상훈이 준비를 마쳤다. 거실은 정돈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듯이.
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감정이 새어나갈 틈이 없도록.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오후 7시 25분. 초인종이 울렸다.
정윤철이 도착했다.
준호는 문을 열었다. 정윤철은 맞은편에 있었다. 심리 치료사의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아래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였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정윤철이 인사했다.
"들어와."
준호가 말했다.
거실에 들어온 정윤철은 둘러봤다. 거울과 유리로 된 공간.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멋진 집이네요."
정윤철이 말했다.
"우리 은서가 여기서 행복할까요?"
준호는 정윤철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차가움이 가득했다.
"아니. 은서는 여기서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렇죠?"
정윤철이 웃었다.
"그래서 제가 왔어요. 제 딸을 데려가러."
"은서는 내 아내야."
준호가 말했다.
"법적으로는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정윤철이 가까워졌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 딸이 당신과의 결혼으로 인해 변하고 있어요. 그건 좋지 않습니다. 제 딸은 완벽했는데. 감정표현장애 같은 거 없이. 그냥 성숙한 딸이었는데."
"그건 거짓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은서는 감정을 느껴왔어. 계속 느껐어.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
정윤철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말씀을?"
"은서의 진단 기록을 봤어. 당신이 감정표현장애를 성숙함의 증거라고 기록한 거. 당신은 은서를 병으로 보지 않았어. 당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도구로 봤어."
정윤철의 눈이 좁혀졌다.
"제 딸의 진단 기록은 기밀이에요. 어디서 그걸?"
"상관없어."
준호가 말했다. 그는 정윤철을 마주 보기 위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심리 치료사와 회장 사이의 거리가.
"중요한 건 은서는 내가 지킨다는 거야. 당신의 압박도, 당신의 통제도, 당신의 진단 기록 공개도 상관없어. 은서는 여기 있을 거야."
정윤철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준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럼 제 딸의 진단 기록이 언론에 나갈 텐데요?"
정윤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나가."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결정적이었다.
"상관없어. 그게 나가는 것보다 은서가 너한테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해."
정윤철의 입가가 비틀렸다. 따뜻한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고, 그 아래의 것이 드러났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소유자가. 통제욕의 화신이.
"계약을 깨뜨리면 진단 기록이 나갈 거예요."
정윤철이 협박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거의 위협하는 톤으로.
"제 딸의 평판도 당신의 평판도. 모두 끝날 거예요. 당신이 감정표현장애를 가진 여자와 결혼한 회장이라는 사실도 나갈 거고. 제 딸이 정신질환자라는 것도 나갈 거예요. 당신의 회사 주가도 떨어질 거고."
정윤철은 더 가까워졌다. 준호의 얼굴 가까이. 그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그래도 상관없으세요?"
준호는 정윤철을 똑바로 봤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변했다. 차가움이 아니라 다른 것이. 결정이었다.
"알아. 그래도 괜찮아."
준호가 말했다.
정윤철은 침묵했다. 그의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마치 처음으로 준호를 보는 듯이. 자신의 협박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이.
"당신, 미쳤나요?"
"아마도."
준호가 대답했다.
정윤철은 돌아섰다. 거실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준호의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한 가지 더."
준호가 말했다.
정윤철이 멈췄다.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준호를 향해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은서에게서 손을 떼. 다시는 그 진단 기록을 꺼내지 마. 다시는 그 아이를 통제하려고 하지 마."
준호가 가까워졌다. 정윤철의 뒤에서.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위협이 아니라 확정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준호는 정윤철의 옆에 섰다. 정윤철의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난 너를 완전히 부수게 될 거야. 준성그룹의 법률팀을 동원해서. 당신의 치료사 자격을 박탈하고, 당신의 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거야. 당신이 한 모든 치료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서. 당신이 환자를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서."
정윤철의 어깨가 움직였다. 떨렸다.
"이해했어?"
준호가 말했다.
정윤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갔다. 펜트하우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박상훈이 그를 배웅했다. 문이 닫혔다.
거실에 준호만 남겨졌다.
손이 떨렸다. 심하게.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것은 감정 폭발의 신호였다. 준호가 두려워하던 그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감정이 조절 불가능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
준호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려다 멈췄다. 몸이 떨렸다. 얼굴이 굳어졌다. 눈빛이 흐려졌다. 목이 메었다.
그는 거실의 테이블을 내려쳤다. 유리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서졌다. 소리가 울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그것이 그의 내면을 대변하는 소리였다.
그는 거울 앞으로 갔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것은 낯선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안 돼."
준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주먹이 벽으로 향했다. 하지만 벽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무릎이 꺾였다.
펜트하우스의 바닥에 준호가 무너졌다. 어깨가 떨렸다. 호흡이 끊겼다 다시 나왔다. 눈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20년간 흘러본 적 없는 것이 흘렀다.
은서가 나타났다. 자신의 방에서 나와 거실로. 준호를 봤다. 그의 상태를 봤다. 무너진 그를 봤다.
은서는 움직였다. 준호에게. 그녀는 준호의 옆에 앉았다.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그 평탄함 아래에는 무언가 있었다. 위로가 있었다. 감정의 표현 불가능한 위로가.
준호는 은서를 봤다. 얼굴을. 눈을. 손을.
그리고 울었다. 처음으로. 계약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감정 억압의 20년 이후 처음으로.
은서는 그를 안았다. 말없이. 침묵으로. 표현 불가능한 위로로.
시간이 흘렀다. 밤이 깊어갔다. 펜트하우스의 거울과 유리는 그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처럼.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처럼.
준호의 울음이 차분해졌다. 호흡이 정돈되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은서를 놓지 않았다. 은서의 팔에 감겨 있었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현실인 듯이.
"미안해."
준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은서가 물었다.
"너한테 이렇게 보여줘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약하지 않아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평탄함이 아니라. 감정이 있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당신은 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거짓을 깨뜨렸어요. 그게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에요."
준호는 은서를 바라봤다. 얼굴을. 그 평탄한 얼굴 아래의 모든 것을.
"우리 계약은?"
은서가 물었다.
"깨졌어."
준호가 대답했다.
"이제 뭐 하죠?"
"모르지."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모른다는 게 두렵지 않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문자 메시지였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의 진단 기록이 방금 언론에 나갔습니다. 현재 여러 매체에서 보도 중입니다. 대응 방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은서를 봤다.
"나갔어."
"알았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현실이 또 다시 들어섰다. 거짓의 겹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준호는 알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계약을 깨뜨렸다는 것을.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을.
아버지처럼 되는 길로 한 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은서의 손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