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견제와 의심

박상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준호를 압박했다.

"사장님."

준호는 서재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후 3시, 창밖으로는 강남의 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박상훈이 문을 닫고 들어섰을 때, 준호는 이미 그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20년을 함께한 사람의 침묵 길이로 감정을 읽는 데 능숙해져 있었으니까.

"그 여자가 정상이 아니에요."

박상훈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서 있는 채로 말했다. 준호의 앞에서 의자를 거부하는 것은 그의 긴장 신호였다.

"상훈아."

"감정 표현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 정윤철 박사의 진료 기록을 보면..." 박상훈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병원 문서가 떴다. 진단명이 선명했다. '감정표현장애(Expressive Emotional Disorder)'.

준호의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그만해."

"사장님, 이건..."

"그만하라고 했어."

박상훈은 침을 삼켰다. 준호의 목소리 톤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 아래 흐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박상훈은 20년 동안 그것을 배웠다. 준호가 침묵할 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박상훈이 나간 후, 준호는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감정표현장애. 그 단어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은서를 생각했다. 펜트하우스에서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녀의 침묵을, 그녀의 완벽한 무표정을.

그것이 무감정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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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거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거울 같은 유리벽, 개방된 공간,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조. 은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한강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차가웠다.

준호는 문을 닫지 않고 들어섰다.

"정윤철 박사, 알지?"

은서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매우 작은 반응이었지만, 준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은서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마주쳤다.

"네. 아버지예요."

"뭔가 숨기고 있어?"

"아니에요."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준호는 알았다. 은서의 목소리 톤, 그 아래 흐르는 무언가가.

"그래."

준호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2미터였다. 그 2미터 안에 모든 거짓이 떠다니고 있었다.

은서는 다시 창밖을 봤다. 그녀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리듬을 치고 있었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감정 표현이 불가능한 여자가 드러낸 유일한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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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은 준호의 사무실로 들어오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정윤철의 진료실에 전화를 걸었다. 의료 비서를 사칭해 은서의 진료 기록을 요청했고, 거절당했다. 그 다음 정윤철의 일정을 추적했다. 오후 5시, 강남의 한 카페에서 학회 관계자와의 미팅.

박상훈은 준호에게 보고했다.

"정윤철 박사의 행동이 의심스럽습니다. 은서 씨의 진료 기록도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고, 은서 씨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 같습니다."

"뭘 하고 싶은 건데?"

"은서 씨를 펜트하우스에서 옮기는 것을 고려해 보세요. 최소한 오늘 밤만이라도. 정윤철 박사가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준호는 박상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의 신호.

"상훈아, 넌 왜 자꾸 은서를 의심해?"

"의심이 아닙니다. 보호입니다."

"그게 같은 거 아닌가?"

박상훈은 입을 다물었다. 준호의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예리한 무언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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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이 가져온 파일은 얇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정윤철 심리 클리닉의 진료 기록.

환자: 정은서

진단: 감정표현장애

치료: 불필요

비고: 성숙함의 증거. 감정 표현 억제는 자아 발달의 한 형태. 치료하지 말 것.

준호는 그 문서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은서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거구나.

그 깨달음은 준호의 내부에서 무언가를 뒤흔들었다. 자신의 거짓과 은서의 거짓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준호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착각 위에 서 있었는지 깨달았다.

준호는 감정을 억압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은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도적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

펜트하우스는 밤 9시의 어둠으로 잠겨 있었다.

준호는 은서를 찾았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축축한 머리, 수증기 냄새. 그녀는 준호를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넌 감정이 없어? 아니면 표현하지 못하는 거야?"

은서가 멈췄다. 그녀의 손가락이 타월에서 떨어졌다.

"뭐예요?"

"대답해봐."

은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준호는 은서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었나. 감정인가, 아니면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 고통인가.

"한남동에 가자."

은서의 눈이 떨렸다.

"지금요?"

"지금."

준호는 가방을 들었다. 은서는 준호의 뒷모습을 봤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처럼.

은서는 준호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타월을 감싼 채로 밤거리로 나가는 모습은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가 누구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준호는 핸들을 잡은 채로 앞을 봤다. 은서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흐르고 있었다. 강남의 불빛에서 한남동의 어둠으로 향하는 길.

---

한남동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반이었다. 준호가 문을 열었다. 그 좁은 공간, 회색 벽지, 낡은 조명. 은서는 처음 온 것처럼 둘러봤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온 곳이었다.

"이 방에서 뭘 했어?"

준호가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었어? 거울을 봤어?"

은서의 눈이 벽장을 향했다. 준호는 그 시선을 따라 벽장을 열었다. 그의 아버지 사진들이 그대로 있었다. 검은 프레임, 엄격한 표정, 시간이 멈춘 얼굴들.

은서의 몸이 굳었다.

"이 사람 때문에 왔어?"

준호가 물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긍정이었다.

"무서워?"

은서의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은 거짓이 깨지는 신호였다.

"......네."

은서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한 글자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두려움, 억압, 그리고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

준호는 사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신이 열 살일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내 아버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어. 그냥 터뜨렸어. 화, 욕망, 모든 게. 그래서 집이 무너졌어."

준호의 목소리가 변했다. 감정을 억누르려 해도 새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난 다르기로 결심했어. 감정을 느끼지 않기로. 아니, 느껴도 보이지 않기로."

은서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말 속에는 자신과 같은 것이 있었다.

"넌 왜 표현 안 해? 표현할 수 없는 거야, 아니면 표현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은서의 눈이 사진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얼굴 위의 아들의 얼굴. 그 얼굴 속에 지금의 준호가 있었다.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이 모든 것을 말했다. 표현할 수 없음 자체가 그녀의 대답이었다.

준호는 사진을 내려놨다.

"정윤철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은서의 눈이 준호를 마주쳤다.

"넌 감정표현장애가 아니라 성숙함이라고. 그것을 깨뜨리면 안 된다고."

은서의 몸이 굳었다.

"진단 기록을 봤어. '감정 표현 억제는 자아 발달의 한 형태'라고 적혀 있었어. 치료하지 말 것이라고."

은서는 벽에 기대앉았다. 그 좁은 방, 회색 벽, 낡은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너무 작아 보였다.

"내 아버지도 그래요. 나를 자신의 성공 사례로 생각했어요. 감정표현장애를 치료하지 않고도 성공적인 삶을 사는 딸. 그게 자랑이었어요."

은서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말을 대신했다.

"그래서 난 표현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매우 약한 음성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지만 그게 이제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더 이상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뭐?"

"이제는 날 가두고 있어요."

은서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그 눈물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고통을 증명했다.

준호는 은서 옆에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손가락 하나 정도였다. 그 거리는 가장 가깝고 동시에 가장 먼 거리였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어?"

은서는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 그의 눈, 그 안의 무언가. 그 안에는 자신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의 고통. 억누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

"우리 계약......"

은서가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이제 그것은 선택의 침묵이 아니었다.

"......갱신할 거예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너무 크고, 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계약인가, 아니면 관계인가. 의무인가, 아니면 선택인가.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은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 둘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준호가 은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맥박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의 증거. 감정이 있는 것의 증거.

은서의 손가락이 준호의 손 위에서 움직였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넌 뭐야?"

준호가 다시 물었다. 같은 질문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계약 상대가 아니라, 상대방으로서. 거짓이 아닌 진실로서.

은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말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것의 침묵.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침묵. 그 침묵 속에는 준호에 대한 감정이 있었고, 없었고, 동시에 존재했다.

"여기 있고 싶어?"

준호가 물었다.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이 '네'를 말했다.

그들은 그 밤을 한남동의 낡은 오피스텔에서 보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말하지 않은 말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밤. 준호는 은서의 손을 놓지 않았고, 은서는 그 손의 온기를 느꼈다. 그 온기는 감정이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가 펜트하우스로 왔습니다. 은서 씨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상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

"경찰을 데려왔습니다. 은서 씨를 미성년자 납치 혐의로 신고했다고 합니다."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은서를 봤다. 그녀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동시에 모든 것이 있었다.

준호는 결정했다. 정윤철에게 은서를 주지 않기로. 그리고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직면하기로.

그 순간, 은서의 눈이 떠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두려움. 그리고 선택.

준호의 손이 은서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 압력은 약속이었다. 약속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 행동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억압된 감정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결연함이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 대한 거부였다.

"도망치자."

준호가 말했다.

은서는 준호를 봤다.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명확한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고, 의무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로 한 선택이었다.

은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것은 웃음이었을 수도 있고, 눈물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표현이었다.

"네."

그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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