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닫혀 있는 동안, 준호는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

은서는 침실에서 나오다가 준호의 모습을 보고 멈췄다. 정장 위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의 표정은 어제 밤과 달랐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결정한 직후의 무표정이었다.

"나가자."

"지금요?"

"지금."

은서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준호가 이 목소리를 낼 때는 대답할 여지가 없었다. 외투를 입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강남의 거리가 창밖으로 흘러갔다. 서초동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향하는 길. 준호는 핸들을 쥔 손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빼고 있었다. 은서는 그걸 봤다.

한남대교를 건너기 직전, 준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네."

"박상훈한테도."

"네."

한남동의 골목진 곳. 빌딩 하나가 둘을 맞았다. 낡았다. 강남의 펜트하우스와는 차원이 다른 낡음이었다. 벽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현관 옆에는 '한남 오피스텔'이라고 쓰인 간판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준호는 은서의 손을 잡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4층까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준호는 빠른 속도로 걸었고, 은서는 그 뒤를 따랐다.

401호.

준호가 열쇠를 꽂았다. 문이 열렸을 때 은서의 호흡이 멈췄다.

어둠이 먼저 들어왔다. 그 다음이 냄새였다. 먼지와 습기가 섞인, 오래된 공간의 냄새. 준호가 불을 켜자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완전히 밝혀졌다.

좁은 거실. 낡은 소파 하나. 창문은 두터운 커튼으로 덮여 있었고,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침실로 통하는 문. 작은 주방 겸 식탁 공간. 누군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다는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쓸쓸했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멈춰놓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은서는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 소파에 앉지 않았다. 창가에 섰다. 커튼 사이로 한남동의 거리가 보였다. 펜트하우스의 서울 야경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더 낮은 층. 더 어두운 조명. 더 가까운 건물들.

"이 공간이 뭐예요?"

은서의 질문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준호는 대답하는 데 2초를 썼다.

"내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오는 곳이야."

"얼마나 자주요?"

"가끔."

거짓이었다. 은서는 그걸 알았다. 준호의 호흡이 얕아져 있었다. 거짓을 말할 때 나타나는 신체 신호였다. 은서가 이미 배운 준호의 언어.

준호가 침실로 들어갔다. 은서가 따라갔다.

침실도 비슷했다. 더블 침대 하나. 옆에는 오래된 나이트 스탠드. 침대 맞은편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단지 벽만 있었다. 은서는 그 벽을 봤다. 마치 그 벽이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기서는 거짓말 하지 말아."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은서가 돌아봤다. 준호의 눈이 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펜트하우스에서 본 무감정한 표정과 달랐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여기서는 진짜를 보여줄 수 있어."

은서는 조용했다. 거실의 형광등 소리만 들렸다. 깜빡거리는 음전자 소리. 준호가 기다렸다. 은서의 대답을.

"저는 진짜가 뭔지 모르겠어요."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 대답은 자신이 원했던 말이 아니었다. 준호는 한 발 다가갔다.

"거짓말이지?"

"네."

그 '네'도 거짓인지 진짜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은서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이 자신의 진짜가 되어버린 것인지. 그 차이는 영원히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준호가 침대에 누웠다. 은서는 그대로 섰다. 준호의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리듬 없이 떨렸다. 은서는 그것을 봤다. 처음이었다. 준호가 감정적 반응을 신체에 드러내는 것을. 펜트하우스의 완벽한 통제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

은서가 한 발 다가갔다. 침대 옆에 섰다. 준호의 떨리는 손을 본다. 손을 뻗는다. 손가락이 준호의 손에 닿으려 한다. 그 순간, 손을 내린다.

손가락이 준호의 손등에서 떨어지는 그 찰나, 은서의 마음이 무너졌다. 자신이 뭘 하려던 건지, 왜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준호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모든 게 들통 날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이. 자신의 약함이. 펜트하우스에서 완벽하게 유지해온 거짓이.

준호는 은서가 손을 내렸음을 느꼈다. 닿지 않은 손길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거부였다. 은서의 거부. 준호의 심장이 파고들어 왔다. 가슴 한가운데를 누군가 주먹으로 치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은서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신을 버린다는 뜻 아닌가.

오피스텔의 침실에 침묵이 흘렀다. 2분이 지났다. 3분이 지났다. 준호의 손이 계속 떨렸다.

은서가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았다. 벽을 봤다. 그 낡은 벽에는 뭔가가 붙어 있었다. 못. 그 못에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낡은 사진. 은서가 일어나 가까이 봤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와 어린 준호.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은서는 그 얼굴을 봤다. 그것이 준호의 아버지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린 준호는 그 분노한 얼굴 앞에서 무표정했다. 마치 감정 자체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준호가 거실로 나왔다. 은서가 사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준호는 벽장으로 향했다. 작은 벽장. 안에는 상자가 있었다. 준호가 상자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상자 안에는 사진들이 가득 있었다. 모두 같은 남자의 사진이었다. 이명수. 준호의 아버지.

어떤 사진에서는 웃고 있었다. 어떤 사진에서는 화를 내고 있었다. 어떤 사진에서는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항상 어린 준호였다. 어린 준호는 항상 무표정했다. 어떤 사진에서도 표정이 없었다. 마치 얼굴이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준호는 그 사진들을 천천히 들었다. 손이 계속 떨렸다. 손가락이 사진의 모서리를 누르면 구부러질 것 같았다.

은서는 준호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움직이고 있었다. 호흡이 빨라져 있었다. 준호가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은서는 깨달았다. 그것은 박상훈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자신을 만든 사람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은서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도 거짓을 계속 유지해야 해요?"

준호가 돌아봤다. 은서의 눈이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그의 입은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신체는 거부했다.

그 순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사장님, 정윤철 박사가 찾고 있다고 해요. 정 여사의 진단 기록을 보고 싶다고. 무슨 일인지 아세요?"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에 들려 있던 사진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은서는 사진들을 봤다. 이명수의 얼굴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떤 사진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어떤 사진에서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

박상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네. 알겠어."

준호가 전화를 끊었다. 은서를 봤다. 그 눈빛이 펜트하우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완벽한 무감정으로. 하지만 은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무감정 너머에 뭐가 있는지를.

은서는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을 봤다. 이명수의 분노한 얼굴이 여러 장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이명수는 어린 준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준호는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은서가 이미 사진을 들어올렸다.

"이분이 아버지셨어요?"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너무 차가워서 오피스텔의 낡은 벽이 더욱 으스스해 보였다.

"됐어. 돌려놔."

"이 사진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어요?"

은서가 물었다. 사진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준호를 향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 때문이었다. 이 사진 속의 아이가 준호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됐어."

그 단어는 경고였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하지만 은서는 이미 준호의 패턴을 알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거부가 강할수록, 그것은 상처가 깊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당신을 때렸어요?"

"그만해."

"당신은 왜 이 사진들을 보관해요? 왜 버리지 않아요?"

은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터져 나왔다. 펜트하우스에서 절대 드러내지 않던 감정. 분노. 동정. 그리고 뭔가 더 복잡한 것. 준호를 향한 이해와 공포가 섞인 감정.

"그만!"

준호가 소리쳤다. 은서가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는 은서에게 다가갔다. 사진을 빼앗아 상자에 집어넣었다. 손가락이 사진을 집어넣을 때 구부러질 뻔했다.

"여기는 내 공간이야. 너는 여기 올 이유가 없어."

"그런데 저는 왔어요. 당신이 날 데려왔어요."

"그렇지."

준호가 상자를 벽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았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은서는 이미 봤다. 준호가 자신의 손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펜트하우스에서의 완벽함이 여기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은서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준호는 그대로 섰다. 얼굴을 돌렸다. 은서를 보지 않으려고.

"정윤철이 뭘 원하는 거야?"

은서가 물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완벽한 무감정의 톤. 하지만 그 아래 뭔가 흐르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은서의 공포.

"내 진단 기록이 있어. 아버지가."

은서가 대답했다.

"감정표현장애?"

"그렇다고 적혀 있어."

준호가 은서를 봤다. 은서는 여전히 벽을 보고 있었다.

"넌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우리 계약이 필요했던 거야."

"네."

"아버지가 넌 완벽하다고 생각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걸 성숙함이라고."

"네."

은서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준호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도피였다. 질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정윤철이 그 기록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준호가 물었다. 은서가 조용했다. 3초. 5초. 10초. 그 침묵 속에서 은서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분노를 누르고, 두려움을 감추고, 다시 무감정으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 딸이 완벽하게 결혼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 같아요."

은서가 말했다. 그 말이 나왔을 때, 준호는 은서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음을 봤다. 그것은 감정이었다. 아주 작은, 거의 감지할 수 없는 감정. 분노였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

"넌 그걸 원해?"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였다. 은서는 정말로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과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준호가 은서 옆에 앉았다. 거리를 두고. 한 팔 길이 정도. 그들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펜트하우스의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와 대리석이 아니라, 낡은 벽과 오래된 가구 속에서.

"정윤철이 네 기록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할까?"

"제 이미지를 관리하려고 할 거 같아요. 심리 치료사로서. 제가 완벽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자신의 치료 이론이 성공했다는 증거로."

은서가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미 여러 번 생각해본 말. 여러 번 예상한 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뉘앙스가 있었다. 자신의 결혼이 아버지의 학문적 업적이 되어 있다는 깨달음.

"그럼 넌?"

"저는... 신경 안 써요."

은서가 거짓말했다. 준호는 알았다. 은서의 호흡이 변했기 때문이다. 아주 미세하게, 코로 마시는 숨이 한 박자 길어졌다. 그것이 은서의 거짓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 거짓 너머에는 깊은 두려움이 있었다.

준호가 일어났다. 창문으로 갔다. 한남동의 야경이 보였다. 아파트 불빛들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펜트하우스에서 보는 강남의 야경과는 다르다. 더 낡고, 더 어둡고, 더 가까웠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정윤철한테 뭐라고 말해야 해?"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네 진단 기록을 줄 거야?"

"아니요."

"왜?"

"그러면 더 꼬일 거 같아서요."

은서가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은서는 자신이 뭘 피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가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기가 들통 나는 것을. 아버지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준호가 돌아봤다. 은서를 바라봤다.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넌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어?"

"네. 최유진한테만."

"그 친구가 알아?"

"네. 처음부터."

준호가 다시 창문을 봤다. 그의 손이 창틀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다시. 또 다시. 그 손떨림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마치 신체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두려움이 신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정윤철이 우리 결혼을 알고 있어?"

"네. 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싶어 해요. 제 모든 것을."

은서가 말했다. 그 문장에는 뭔가가 숨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은서의 아버지가 단순히 딸을 관심 있게 보는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감시였다. 통제였다. 준호가 자신의 감정으로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은서는 자신의 무감정으로 아버지를 피하고 있었다. 둘 다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었다.

"그럼 우리 계약을 정윤철이 알아?"

"네."

"어떻게?"

"제가 말했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준호가 은서를 봤다. 은서는 여전히 벽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우리가 잘 맞는다고. 그게 아버지의 이론을 증명한다고."

준호가 이해했다. 정윤철은 자신의 딸의 감정표현장애가 병이 아니라 '성숙함'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은서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것은, 그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증거였다. 은서의 결혼은 아버지의 치료 이론의 성공 사례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은서 자신을 위한 결혼이 아니라, 아버지의 학문적 성공을 위한 결혼이었다.

"우리가 정윤철의 학문적 업적이 되어 있다는 거네."

준호가 말했다.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정윤철이 우리 기록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뭐야?"

준호가 물었다.

"제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뭐가?"

"저를. 제가 변하고 있다고."

그 말이 나왔을 때, 준호는 은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은서가 자신을 향해 감정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오피스텔에서 손을 뻗었던 것처럼. 펜트하우스의 거울 앞에서 표정을 점검했던 것처럼. 은서는 변하고 있었다. 거짓에서 진실로. 무감정에서 감정으로.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이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준호가 은서 옆에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거리를 좁혔다. 한 팔 길이가 아니라, 어깨가 거의 닿을 정도로.

"정윤철한테 뭘 줄 거야?"

"모르겠어요."

"우리 계약서?"

"아니요."

"그럼?"

"아무것도."

은서가 말했다. 그 말은 단호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 선언.

준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정윤철이 내일 오후 3시에 사무실로 온다고 했습니다. 정 여사의 진단 기록을 가져오라고.]

준호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삭제했다. 은서는 그것을 봤다. 준호가 선택한 침묵. 선택한 무시. 하지만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벌 뿐이었다.

"내일 오후 3시면 아버지가 올 거 같아요."

은서가 말했다.

"알았어."

준호가 대답했다.

"뭘 할 거예요?"

"모르겠어."

준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준호도 정말로 몰랐다. 자신의 아버지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는 공간에서, 은서 앞에서, 정윤철이라는 또 다른 통제자의 위협 앞에서, 준호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다. 기록을 주거나, 주지 않거나. 하지만 둘 다 위험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어요?"

은서가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은서의 손을 찾았다. 손가락이 은서의 손등에 닿았다. 이번에는 은서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주 세게.

오피스텔의 침묵이 깊어졌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펜트하우스라면 이 시간쯤 둘은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를 수 있었다. 여기서는 거짓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다.

은서가 준호의 손을 봤다. 떨림이 조금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은서가 자신의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준호의 손에 닿았다. 아주 가볍게. 손가락이 준호의 손등에 닿았다.

준호가 눈을 감았다. 그 손길은 거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여기서는 거짓말 하지 말자."

준호가 속삭였다.

"네."

은서가 대답했다.

손을 잡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분 단위가 아니라 시간 단위로. 준호의 떨림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은서의 손가락이 준호의 손등을 천천히 그렸다.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이.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순간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내일 오후 3시, 정윤철이 올 것이고, 준호는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고, 은서는 다시 무감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내일 뭘 할 거야?"

은서가 물었다.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기록을 줄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

"주면 어떻게 돼요?"

"넌 더 깊이 빠진다. 아버지의 이론에."

"안 주면?"

"정윤철이 뭘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박상훈도."

은서가 조용했다.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우리가 계속 거짓을 유지해야 해요?"

"여기서는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펜트하우스에서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대답이었다.

외부 세계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정윤철은 내일 사무실에 올 것이고, 박상훈은 계속해서 보고할 것이고, 준성그룹의 임원들은 준호의 감정을 읽으려고 할 것이었다. 그리고 준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록을 주거나, 주지 않거나. 은서를 지키거나, 자신을 지키거나. 하지만 그 둘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준호가 은서를 봤다. 은서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준호의 손등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말이 아닌 언어였다. 준호는 그것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은서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기록을 안 주면..."

은서가 말을 시작했다.

"응?"

"정윤철이 뭘 할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문을 봤다. 한남동의 야경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거리. 변하지 않은 건물들. 변하지 않은 어둠.

"기록을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는 거네요."

은서가 말했다.

"그렇지."

준호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는?"

"모르겠어."

준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은서는 준호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저는... 당신을 지킬 수 없어요."

은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넌 충분해."

준호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는 당신 아버지를 이길 수 없어요. 당신 아버지처럼 당신을 통제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넌 나한테서 떨어져 나가야 해?"

준호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두려움. 절망. 그리고 간절함.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것이 모든 대답이었다.

시간이 더 지났다. 밤 11시 반.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피스텔의 침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펜트하우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 정윤철이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준호는 은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은서도 준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앉아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기록을 줄 수 없다면..."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네?"

"정윤철에게 거짓을 말해야 해."

은서가 준호를 봤다. 준호는 창문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요?"

"우리가 완벽하다고. 우리 결혼이 완벽하다고. 너의 변화는 없다고."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거짓이었다.

"그럼 저는?"

"여기서는 진짜를 보여줄 수 있어. 하지만 펜트하우스에서는 계속 거짓을 유지해야 해."

준호가 은서를 봤다. 그 눈빛은 펜트하우스의 무감정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알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임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임.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임. 그리고 준호와 함께 거짓을 유지하기로 한 결정.

준호는 은서의 손을 놓았다. 일어났다. 창문으로 갔다. 한남동의 야경을 봤다. 그 야경 너머에는 펜트하우스가 있었다. 그 펜트하우스 너머에는 정윤철이 있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 정윤철은 올 것이었다.

준호는 결정했다. 기록을 주지 않기로. 거짓을 유지하기로. 그리고 은서와 함께 이 거짓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우리 가자."

준호가 말했다.

"펜트하우스로요?"

"응."

은서가 일어났다. 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펜트하우스로 가는 길에서.

오피스텔을 나가는 순간, 준호의 얼굴은 다시 무감정으로 돌아갔다.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짓의 가면을 다시 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차 안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펜트하우스의 현관 앞에서도.

준호가 현관문을 열었다. 불이 켜졌다. 거울이 반사되었다. 대리석이 빛났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은서와 준호는 거울 속의 자신들을 봤다. 완벽한 부부. 완벽한 거짓. 완벽한 연기.

그리고 내일 오후 3시, 정윤철이 올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 거짓을 유지해야 했다. 이 완벽한 거짓을.

준호는 은서의 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잡았다. 그것이 그들 사이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 손길 속에 담긴 약속. 여기서는 거짓말 하지 말자는 약속. 하지만 펜트하우스에서는 거짓을 유지하자는 약속.

은서는 그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모든 거짓을. 모든 고통을.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준호와 은서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 그 손도 놓아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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