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펜트하우스
펜트하우스 거실. 야경이 검은 유리창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준호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고, 은서는 주방 카운터 너머에 섰다. 둘 사이에는 저녁 식사의 흔적이 놓여 있었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들. 아무것도 치워지지 않은 채로.
"우리 계약, 6개월 후에 갱신할 거야?"
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렇게 들리도록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 안에 있는 것은 평탄함이 아니었다. 질문 속에 숨겨진 것들—불안, 거부의 두려움, 끝남의 신호를 읽으려는 필사적인 노력들—이 있었다.
은서는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불이 꺼진 주방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녀의 윤곽만 보였다.
"모르겠어요."
세 글자. 준호는 그 세 글자를 반복해서 들었다. 모르겠어요. 그것은 거부인가? 무관심인가? 아니면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준호의 손가락이 소파 쿠션을 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멈췄다. 표정이 움직이면 안 된다. 눈동자가 흔들리면 안 된다. 호흡이 빨라지면 안 된다.
"알았어."
그 말을 내뱉는 데 걸린 시간은 0.3초였지만, 그 안에 그가 견뎌낸 것들—은서의 대답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동시에 거부당하는 것이 맞다고 느끼는 마음, 둘 사이의 충돌 속에서 자신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인식—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정상적인 속도의 숨.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은 호흡. 그런데 그 정상성이 가장 비정상이었다.
그녀가 준호의 불안감을 감지했다. 은서는 언제나 그렇게 했다. 상대방의 감정이 공기를 파고드는 순간, 그것을 포착했다. 하지만 포착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그것이 은서의 생존 전략이었다.
주방의 불이 켜졌다. 은서가 손을 움직였고, 조명이 밝아졌다. 그녀는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밥그릇을 들고, 국그릇을 들고, 반찬 그릇들을 한 손에 모아 들었다. 음악처럼 흐르는 동작.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도 완벽한 배우의 몸짓.
준호는 그 모습을 봤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회피였다. 은서의 회피. 자신의 불안감에 응하지 않기 위한 의도적인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자신을 더욱 깊은 불안으로 밀어 넣는 것을.
밤 11시 30분. 거실의 스탠드 불이 꺼졌다.
준호와 은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30센티미터. 영화가 재생 중이었다. 화면 속 여자 배우가 울고 있었다. 남자 배우가 떠났고,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살아서 뭐 하려고..."
화면 속 여자의 목이 끊어졌다. 울음이 아니라 비명에 가까웠다. 몸 전체가 흔들리는 울음. 통제 불가능한 눈물. 입 밖으로 쏟아지는 절망.
준호의 호흡이 변했다.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 그리고 눈가에 맺혀 있는 것—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얼굴을 돌렸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화면에서 눈을 떼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의 야경. 검은 하늘과 불빛들의 조합. 그 속에서 자신의 눈물을 몰래 닦을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스쳤다. 한 번, 두 번.
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화면에 없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 모여 있었다. 준호의 호흡 변화. 준호의 몸이 굳어진 방식. 준호의 얼굴을 돌린 각도. 그리고 손가락이 눈가를 스친 그 미세한 움직임.
준호의 눈물. 은서는 그것을 감지했다.
화면 속 여자의 울음이 계속되었다. 한 숨, 또 한 숨.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울음. 그 울음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손을 휘두르는 팔.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
그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준호는 일어났다. "화장실."
은서는 여전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준호가 나가간 후 5초. 그제야 그녀의 어깨가 움직였다. 숨을 쉬는 동작. 아주 천천히, 아주 의식적으로, 마치 호흡을 배우는 것처럼.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이 약간 빨개져 있었다. 눈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그는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손을 얼굴에 대고, 차가운 물이 피부를 흐르게 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표정 점검. 왼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정면. 입모양. 눈의 각도. 모든 것이 무감정으로 돌아왔는가? 확인했다. 다시 확인했다. 세 번째 확인.
"감정이 얼굴에 새겨지는 순간이 죽음이야."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소리 내지 않고.
밤 1시 15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윤철이었다. 은서의 아버지. 준호는 한 초 동안 통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준호 씨, 은서가 잘 지내고 있나요?"
목소리는 따뜻했다. 심리 치료사의 목소리. 공감과 배려가 묻어나는 톤. 하지만 준호는 그 목소리 아래에 있는 것을 들었다. 감시. 통제. 그리고 은서를 자신의 이론 속에 가두려는 의지.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좋네요. 은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성숙한 여자예요. 그런 은서를 이해해 주실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부디 그 완벽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완벽함. 그 단어가 준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 뭔가가 명확해졌다. 은서의 무감정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 그 '완벽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 억압이 은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준호는 갑자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후, 준호는 침실로 갔다. 은서는 이미 자고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천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얼굴은 베개에 묻혀 있었고,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준호는 침대 옆에 섰다. 그리고 은서의 얼굴을 봤다.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평온한 표정.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은 얼굴.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없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감정표현장애가 없었던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이 계획대로인 것처럼.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은서와 거리를 두고. 그리고 천장을 봤다. 검은 천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아침 6시 45분. 펜트하우스의 욕실.
준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고 있었다. 면도칼이 턱을 스쳤다. 왼쪽 턱, 오른쪽 턱. 매일 같은 동작. 매일 같은 각도. 면도 후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상. 모든 것이 정상.
문이 열렸다. 은서가 들어왔다. 욕실 거울 앞에서. 그녀도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둘은 거울 속에서 마주쳤다.
정확히는, 거울 속 자신들을 점검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준호의 얼굴은 거울의 왼쪽에 있었고, 은서의 얼굴은 오른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그 둘이 겹쳐지는 지점에—무언가가 생성되었다.
인식. 동시성의 인식.
둘 다 자신의 표정을 점검하고 있었다. 동시에. 같은 시간에. 같은 거울 앞에서.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짓의 동시성이었다.
준호의 눈이 은서의 눈을 찾았다. 거울 속에서. 은서의 눈도 준호의 눈을 찾았다. 거울 속에서. 그들의 눈이 거울 속에서 마주났을 때, 무언가가 부서졌다.
그것은 무엇인가? 신뢰? 아니었다. 거기엔 신뢰가 없었다. 안도감? 아니었다. 거기엔 안도감도 없었다. 그것은 인식이었다. 상호적 인식. 우리는 둘 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식. 우리는 둘 다 표정을 관리하고 있다는 인식. 우리는 둘 다 완벽한 배우라는 인식.
그리고 그 인식 속에서, 또 다른 인식이 생겨났다. 만약 그녀도 거짓말하고 있다면, 그녀의 무감정도 거짓일 수 있다는 것. 만약 그녀의 무감정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의 무감정도 거짓이 아닌가? 자신도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준호의 입이 열렸다. "넌 항상 그렇게 자연스럽게 무감정인가?"
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의 그녀. 그녀의 눈이 거울 속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거짓이었다. 준호는 알았다. 그 대답이 거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자신도 모르지만, 알았다. 마치 자신의 거짓을 알아채는 것처럼, 그녀의 거짓도 알아챘다.
하지만 준호는 그 거짓을 믿기로 했다. 아니, 그 거짓을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거짓이 깨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계산이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통제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방어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준호가 말했다. 거울을 통해. 거울 속의 은서에게. 그리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은서는 거울 앞을 떠났다. 세면대로 갔다.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이 흘렀다. 비누 거품이 생겼다. 그리고 손가락들이 마찰했다. 왼손과 오른손이.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단순한 손씻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동작이었다. 거울 속에서 마주친 준호의 눈을 떨쳐내려는 동작. 자신의 거짓이 노출되는 것을 떨쳐내려는 동작. 그 순간 은서의 손이 멈췄다. 거울에 비친 준호의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 그녀의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준호도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 경직된 손가락 속에 은서의 진정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오후 3시 30분. 준호의 회의실.
박상훈이 들어왔다. 휴대폰을 들고.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사장님."
준호는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서류들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시선이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울의 낮. 회색 하늘. 그 아래의 건물들. 그 중 어딘가에 은서가 있을 것이다. 아니,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뭐야?"
"한남동 오피스텔에서 불이 났어요."
준호의 시선이 박상훈에게로 향했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지하 주차장에서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불을 낸 것 같다고 경찰에서 말했어요. CCTV 영상을 확인했대요."
한남동. 그 이름이 준호의 뇌에 박혔다. 한남동 오피스텔. 자신이 몰래 소유하고 있는 그 공간. 아무도 모르는 그 공간. 아니, 은서를 제외하고는.
"어제 밤 10시 정도에 누군가가 그 건물에 들어갔었대요. 여자였어요."
여자. 그 단어가 준호의 가슴을 뚫었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분노. 아니, 분노보다는 뭔가 더 복잡한 것. 은서가 그곳에 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누구라고 했어?"
박상훈이 말하지 않았다. 준호가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 했어?"
"CCTV 영상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사장님의 이름으로 등록된 건물인 만큼, 사장님이 경찰에 출석해야 할 수도 있다고..."
준호는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그는 박상훈에게 휴대폰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령이었다.
경찰청. 오후 5시.
CCTV 영상을 본 것은 준호였다. 화면 속 여자.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몸의 움직임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그 걸음걸이. 그 어깨의 기울기. 그 모든 것이 은서였다.
은서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은서가 계단을 오르는 순간. 은서가 3층에서 멈추는 순간.
그 3층. 그 오피스텔. 그곳이 무엇인지 준호는 알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았다. 그곳에 왜 은서가 가면 안 되는지도 알았다.
"이 여자가 누구신지 아세요?"
경찰이 물었다. 준호의 턱이 팽팽해졌다. 침을 삼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돌아오는 길. 펜트하우스. 밤 8시.
준호는 거실에 서 있었다.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서는 회사에 있었다. 아니, 회사에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은서는 한남동 오피스텔에 있었다. 그것도 어제 밤에.
은서가 펜트하우스에 들어왔을 때, 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봤다. 그리고 은서도 준호를 봤다. 그 순간, 은서는 알았다. 준호가 안다는 것을. 그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제가... 그 오피스텔에 갔어요."
은서가 먼저 말했다. 침묵보다 먼저. 거짓보다 먼저.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그 안의 무언가는 흔들리고 있었다.
"왜?"
준호가 물었다. 한 글자. 왜. 그 단어는 칼처럼 예리했다. 그 안에는 단순한 질문이 아닌 다른 것들이 담겨 있었다. 배신감. 두려움. 그리고 자신이 은서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에 대한 깨달음.
은서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반복. 마치 물고기처럼. 공기 중에서 숨을 쉬려고 애쓰는 물고기처럼.
"말해 봐."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낮아졌다. 그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은서가 자신을 떠나려고 한다는 두려움. 은서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은서가 자신의 과거를 알았다는 두려움.
"제가..."
은서의 목소리가 나왔다. 매우 작게. 마치 자신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제가 당신을 알고 싶었어요."
"뭐?"
"당신이 그토록 숨기는 곳이 뭔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어요."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한 번, 두 번.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눈이 은서를 찾았다.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녀의 표정을 본다. 무감정의 가면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본다.
"넌 나한테 뭐야?"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설계되지 않은 것이었다. 계획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다시 쥐었다. "아내? 계약 상대? 아니면..."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은서가 자신에게 정확히 무엇인지.
"뭐라고 하고 싶으신데요?"
은서가 역으로 물었다. 그 질문은 회피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준호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당신도 모르면서 날 묻나요? 당신도 거짓을 말하면서 날 추궁하나요?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상훈이었다.
"사장님, 한남동 오피스텔에서 뭔가 발견됐어요."
준호는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처럼. 하지만 이번엔 거울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뭐가 발견됐어?"
박상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장님의... 아버지 사진이요. 그리고 봉인된 편지가 있었어요. 뒤에 글씨가 있는데..."
"뭐라고?"
"'준호에게'라고 적혀 있어요. 사장님의 이름이요."
준호의 손이 흔들렸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이. 귀에 대고 있던 손이. 그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은서에게도 보였다. 은서의 눈이 그 손을 따라갔다. 준호의 떨리는 손. 준호의 깨지는 통제.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어?"
"아직 열지 않았어요. 사장님께 먼저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기만 귀에 붙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편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남긴 말.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긴 무언가. 그것이 지금 그 오피스텔에 있었다. 그리고 은서가 그것을 찾아갔었다.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은서를 봤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준호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봤다. 무감정의 가면 뒤에 있는 것. 은서의 진짜 표정. 그것은 동정이 아니었다. 연민도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은서의 두려움. 자신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자신이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은서도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은서도 거짓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은서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준호의 분노는 은서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윤철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향했다.
"그 오피스텔에서 뭘 봤어?"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전의 차가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채워져 있었다. 호기심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은서가 자신의 과거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고 싶은 절박함. 그리고 그것이 은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고 싶은 절박함.
은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눈을 찾았다. 거울 속이 아닌, 현실의 거울 속이 아닌, 직접적인 눈 맞춤.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