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 거실의 야경이 심장박동처럼 맥동했다. 준호는 그 표현을 잊을 수 없었다. 은서의 입에서 나온 은유. 감정이 없는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언어.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은서는 부엌에서 차를 우리고 있었다. 따뜻한 수증기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준호는 그 모습을 관찰했다. 관찰이 아니라 감시라고 불러야 할까. 그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무의식적인 움직임. 그는 즉시 멈췄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은서의 질문이 실내를 가로질렀다. 그녀는 두 잔의 차를 들고 소파로 돌아왔다. 하나를 준호 앞에 놓았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확대되었다. 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는 행위 자체가 이상했다. 계약 위반이 아니었지만, 계약의 경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는 침묵했다.
은서는 자신의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그 평온함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감정의 파편을 찾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은서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준호의 침묵을 채우기 위한 제안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 속에서 자신과 은서가 이미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묵의 언어. 감정의 부재로 가장한 감정의 과잉.
준호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은서가 포착했다. 그녀의 호흡이 아주 살짝 변했다. 준호는 자신의 호흡이 가빨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가슴이 조여오는 감각.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 표정. 그것을 피하기 위해 준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무덤에 묻었다. 하지만 무덤은 얕았다. 흙이 걷혀나갈 때마다 뼈가 드러났다.
"그래서 넌 그런 아버지와 어떻게 지냈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은서는 그 떨림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감정 부재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쉬웠는지, 아니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은서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찻잔을 떠났다.
"적응했어요."
단 두 글자. 하지만 그 두 글자 속에는 준호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적응. 생존. 순응. 변형. 모든 것.
침묵이 길어졌다. 준호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은서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밤이 깊어졌을 때였다.
준호는 침실에서 나왔다. 물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거실의 소파 모서리에 은서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
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한 발 더 다가갔다가 멈췄다. 은서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의 떨림이 더 커졌다. 그 떨림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마치 신체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잊었다가 다시 기억해내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규칙하고, 그래서 더욱 절실했다.
준호는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그 소리에 은서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눈물을 닦는 동작이 너무 빨랐다. 너무 능숙했다.
"먼지가 들어갔어요."
거짓.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거짓을 받아들이려 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거짓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거짓의 언어. 침묵의 언어.
"그래. 조심해."
준호는 입을 다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은서의 눈물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은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움직이지 않는 채로.
"넌 왜 우는 거야?"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준호는 자신이 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계약 위반. 감정의 노출. 그것을 은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수 없었다.
은서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이해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 대답이 나오자 준호는 자신의 모든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이 없는 사람과의 계약은 감정이 없는 상태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정이 없는 척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자신의 감정은 더욱 크게 울려 퍼진다.
준호는 침실로 돌아갔다. 그의 마음은 거실에 남아 있었다. 은서의 눈물이 자신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준호는 느꼈다. 은서가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거부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그 구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약 은서가 정말 모른다면, 자신은 그녀를 깨워야 한다. 하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자신은 이미 졌다는 뜻이었다.
아침이 왔다.
준호는 펜트하우스에서 나갔다. 회사로 가는 길에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이 되었다.
준호는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은서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기계적이었다. 칼질. 냄비. 불. 모든 것이 정해진 리듬으로 움직였다. 준호는 그것을 지켜봤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오늘 밤에도 거실에 앉아 있을 거야?"
은서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준호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네. 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 그냥 궁금했어."
준호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은서는 계속 요리를 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의심. 감시. 거짓.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정. 이해. 그것도 함께.
밤이 깊어졌다.
준호는 침실에서 나와 거실을 봤다. 은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울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냥 앉아 있었다. 창밖의 야경을 보며. 준호는 그 모습을 봤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은서가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눈과 만났다.
"계약, 잘 지키고 있어요?"
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그 질문의 의미는 명확했다. 감정 표현을 하지 말라는 계약. 그것을 지키고 있는가. 그런데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그럼."
거짓.
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은서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미세한 변화였다. 동공의 확대. 눈썹의 수축.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은서는 준호의 거짓을 감지했다.
"계약을 지키고 있다고요?"
은서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더 천천히. 마치 준호에게 기회를 주는 듯이. 그러나 그것은 기회가 아니라 덫이었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대답하면 거짓이 드러난다. 대답하지 않으면 침묵이 증거가 된다.
"너도 지키고 있나?"
역질문. 준호의 단골 수법이었다. 공격받으면 공격으로 돌려받는 것. 하지만 은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고, 여전히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감정 없이 살고 있어요."
그 대답에서 준호는 뭔가를 포착했다. 문장의 끝이 올라갔다. 마치 확신이 없다는 듯이. 마치 자신도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준호가 거실의 불을 껐다. 어둠이 펼쳐졌다. 야경만 남았다. 심장박동처럼 깜박이는 서울의 불빛들.
"감정이 있으면 몸이 반응한다는 거죠?"
은서가 조용히 물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 보였다.
"그래."
"당신도 손이 떨렸어요."
침묵.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어둠 속에서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숨기려고 주먹을 쥐었다.
"나는 감정이 없다."
"네. 알고 있어요."
그 대답 속에는 모순이 있었다. 알고 있다면서도 그것을 지적하는 것. 마치 준호를 시험하는 듯이. 마치 준호가 그 거짓을 언제쯤 포기할지 기다리는 듯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건가요?"
은서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그 질문은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거였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준호는 자신이 무언가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거짓의 무게. 통제의 욕망. 모든 것.
침묵이 흘렀다. 길고 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은서는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보였다.
"그래서 폭발했어요?"
은서의 질문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질문이면서 동시에 선언이었다.
준호는 일어섰다. 거실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내가 거짓을 말했어. 계약을 지키지 않았어. 처음부터."
그 말이 나오자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엔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당신은?"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은서에게 같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은서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저도 거짓을 말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명확하게 떨렸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할 수 없었던 거예요. 아버지 때문에. 계속 표현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은서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눈물. 하지만 이번엔 그것을 닦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옆에 있으니까... 자꾸 표현하고 싶어졌어요."
준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은서의 눈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돌아왔다. 은서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야경을 보며.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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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준호는 은서를 찾았다. 그녀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것은 거짓의 무표정이 아니라, 노력하는 무표정이었다.
"계약 갱신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준호가 말했다.
은서의 손이 멈췄다.
"네?"
"6개월이 다 되어간다. 계약을 갱신할 건지 정해야 한다."
은서는 천천히 준호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두려움. 기대. 절망. 모든 것. 그리고 하나 더. 결정.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준호는 알았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은서가 정말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던지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라는 것을.
"그럼 난 알아."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계약을 갱신하고 싶다."
은서의 눈이 커졌다.
"왜요?"
"넌 왜 우는 거냐고 물었을 때, 넌 모르겠다고 했어. 그리고 어제 밤에 넌 표현할 수 없었다고 했어. 그 말들이 모두 진짜였어. 너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할 수 없었던 거고, 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아니라 표현할 수 없었던 거야."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거짓 위에 서 있었어. 하지만 그 거짓 위에서 뭔가가 자라고 있었어. 작고, 약하고, 하지만 확실한 것들이."
은서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표정의 탈이 벗겨지려고 하는 순간.
"계약을 갱신하면, 우리는 뭐가 될까요?"
은서가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알고 싶어."
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넌?"
은서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눈물. 하지만 이번엔 그것이 두려움의 눈물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네. 갱신하고 싶어요."
그 말이 나오자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은서도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