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법원의 회의실은 회색이었다

법원의 회의실은 회색이었다. 벽, 책상, 서명 펜까지 모두 같은 톤의 회색. 이준호는 혼인신고서에 펜을 대며 생각했다. 한 번의 서명으로 6개월이 결정된다. 그 6개월 동안 감정 표현은 금지된다. 계약 위반 시 즉시 해지.

즉시 해지.

그 세 글자가 준호의 손을 떨리게 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떨림. 펜이 종이에 닿는 순간, 손가락이 제어 불능 상태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아버지가 늘 말했다. 감정은 죽음이다.

준호는 숨을 고르고 서명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정은서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마치 감정을 소유한 적 없는 인간처럼. 준호는 그것을 보며 안도했다. 자신이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감정의 진동 없는 공간. 상대방의 감정 반응으로 인한 자신의 감정 폭발을 차단할 수 있는 벽.

은서가 펜을 집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준호는 그 손을 바라봤다. 정말 떨리지 않았다. 어떤 미세한 긴장감도 없었다. 그것이 좋았다. 동시에,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혼인신고가 완료되었다.

법원을 나올 때 준호는 은서에게 말했다. "계약 조건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그들은 청계천 옆 벤치에 앉았다. 봄날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6개월. 감정 표현 금지. 계약 위반 시 즉시 해지."

준호가 읊조렸다.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그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번의 실수면 모든 게 끝난다. 한 번의 감정 표현이면 자신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도 감정이 없었다.

"혹시 문제 있어?"

"없어요."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이 침묵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 공허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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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는 강남의 하늘 위에 있었다. 거울과 유리로 된 개방적인 구조. 어디서나 서울이 보였고, 어디서나 자신이 보였다.

준호는 거울 앞에서 표정을 점검했다. 각진 턱, 차가운 눈, 일직선의 입. 완벽했다. 감정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웃음을 시뮬레이션했다. 입 꼬리가 1밀리미터 올라갔다. 다시. 이번엔 더 낮게. 완벽했다. 슬픔.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제거해야 한다. 다시.

화.

콧구멍이 벌어졌다. 통제 불가능.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랐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그 얼굴이 죽음을 불러왔다. 준호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누르며 표정을 지웠다.

"감정이 얼굴에 새겨지는 순간이 죽음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구별이 되지 않았다.

거실의 소파에서 은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표정을 점검하는 준호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고정된 시선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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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식탁 위에는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소고기 스테이크, 아스파라거스, 레드와인. 준호와 은서는 마주 앉았다.

"뭐라도 필요하면 말해."

준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감정의 진동이 없었다. 마치 녹음된 음성처럼 균일했다.

"필요한 게 없어요."

은서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을 상정하지 않는 음성이었다. 준호는 안도했다. 이것이다. 이 공허함.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와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 속에서 준호는 평온함을 느꼈다. 아무도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눈빛으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서의 표정을 다시 보는 순간, 준호의 가슴에 미세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너무 완벽했다. 차갑고, 담담하고, 감정이 없었다. 마치 감정을 소유한 적 없는 인간처럼.

그것이 이상했다.

준호는 포크를 내려놨다. "음식이 어때?"

"괜찮아요."

그 대답도 자동적이었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응답처럼. 준호는 다시 포크를 집었다.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자신이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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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이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였다. 준호의 비서는 20년을 그의 곁에서 지낸 사람이었다. 준호가 아침에 몇 잔의 커피를 마셨는지, 회의 중에 몇 번 손가락을 굽혔는지, 저녁에 창밖을 몇 초간 바라봤는지 아는 사람. 그 사람의 눈에는 준호의 모든 것이 읽혔다.

"정말 이 결혼이 필요했나요?"

박상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있었다. 준호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박상훈은 거실을 둘러봤다. 그리고 은서를 보았다. 은서는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가구의 일부처럼.

"그 여자,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너무 차갑다."

박상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는 즉시 대답했다. "그게 좋은 거다."

하지만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느꼈다. 정확히는, 자신의 말이 진실과 거짓의 중간쯤에 있다는 것을. 좋은 부분도 있고, 불편한 부분도 있고,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고 '좋다'고 말한 것이다.

박상훈은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20년의 경험 속에서, 그는 준호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턱이 조금 팽팽해졌고,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고, 호흡이 조금 빨라졌다.

"조심하세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정말 감정이 없는 건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결혼이 당신을 지켜주기는커녕 더 깊은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박상훈이 말했다. 그것은 경고였다. 하지만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준호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박상훈은 은서를 조사하겠다는 의도를 담아 눈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그 시선을 받으며 불안감을 느꼈다. 박상훈이 은서를 조사한다면 무엇을 발견할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계획을 무너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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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0분. 준호는 펜트하우스의 창가에 서 있었다. 강남의 야경이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수백만 개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감정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기쁨,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분노. 준호는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었다. 아니,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통제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너질까봐 두려웠다.

그 순간, 준호는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은서였다. 그녀는 거실에서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준호는 몸을 돌렸다.

은서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 질문이 떠올랐다.

이 여자는 진짜 감정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 질문은 준호의 뇌 속에서 끝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준호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질문. 의심. 확신 없음.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씨앗.

은서는 여전히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 속에, 준호는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준호는 창가로 돌아섰다. 야경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깜박거림 속에, 준호의 질문도 함께 깜박거리고 있었다.

은서는 거실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없었다. 마치 공기를 밟듯이. 준호는 그 소리 없는 움직임을 뒤에서 감지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동요가 얼굴에 드러날 것 같았다.

펜트하우스의 침묵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준호와 은서 사이의 거리는 5미터였지만, 그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는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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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웠을 때, 준호의 손이 떨렸다.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그 미세함조차 자신을 배신하는 것 같았다.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변기 앞에서 몸을 구부렸다. 가슴이 뒤틀렸다. 목구멍이 타올랐다. 무언가가 올라오려 했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신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토해낼 수 없었다. 그것이 증거가 될 것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 속의 자신은 완벽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눈썹도 일직선이었다. 입가도 평평했다. 광대뼈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무표정.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갑옷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동공이 확장되었다 수축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떠었다. 떨림이 사라졌다.

"감정이 얼굴에 새겨지는 순간이 죽음이다."

거울 속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것도 감정 표현이 될까봐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침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준호는 은서의 침실 문을 봤다. 문이 닫혀 있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 이미 자고 있을 것이다. 준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은서가 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감정의 증거였다. 준호는 생각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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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준호는 6시에 깼다. 은서는 이미 거실에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마치 밤새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왜 거기 있었던 걸까.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잤나?"

준호가 물었다. 그것은 배려 같은 질문이었지만, 사실은 정보 수집이었다. 은서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였다.

"네."

은서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준호는 그것이 거짓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불확실성이 자신을 미치게 할 것 같았다.

"오늘 스케줄이 있다. 회의가 2시간 있고, 오후에 이사회 회의가 있다. 저녁은 9시쯤 돌아올 것 같다."

준호가 말했다. 정보 전달이었다. 감정 없는 일정 보고였다.

"알겠어요."

은서가 대답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덧붙이려다 멈췄다. 준호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은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말하려다 말은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증거였다. 그런데 은서는 그것을 감춘 것이다. 의도적으로.

"뭐라고 하려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것은 규칙 위반이었다. 계약 위반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질문이었다. 호기심. 의심. 관심. 모두 감정이었다.

은서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움직였다. 동공이 확대되었다. 호흡이 미세하게 변했다. 마치 뭔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서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소파 쿠션을 응시했다. 마치 거기에 답이 써 있는 것처럼. 하지만 준호는 그 대답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서의 눈동자 확대, 호흡의 변화—그것은 객관적인 신체 신호였다. 거짓을 말할 때 나타나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인가? 아니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거짓인가? 준호는 침묵 속에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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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성그룹의 이사실은 43층에 있었다. 준호는 회의 테이블의 끝에 앉았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들, 임원들, 비서들. 그들은 준호의 얼굴을 읽으려고 했다.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닫았다. 완벽하게.

"이번 분기 실적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재무이사가 보고했다.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굴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썹도. 입가도. 그것이 권력이었다. 무반응의 압력. 침묵의 위협.

"원인이 무엇입니까?"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는 기계 같았다.

"마케팅 부서의 캠페인이 예상보다 반응이 저조했고, 해외 시장에서의 수출이 관세로 인해 지연되었습니다."

"담당자는?"

"김 부장입니다."

준호는 김 부장을 바라봤다. 김 부장의 얼굴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준호의 눈 한 번으로 경력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김 부장, 이 실패에 대해 설명하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시장 변수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예측이 당신의 일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것은 선고였다. 김 부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이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준성그룹의 문화였다. 감정을 드러내는 자는 약자다. 약자는 제거된다.

"개선안을 제출하세요. 1주일 내에."

준호가 말했다. 그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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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후, 박상훈이 준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회의 잘 끝났습니다."

박상훈이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확인이었다. 준호가 통제를 잃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응."

준호가 대답했다.

"그런데 회의 중에 당신의 호흡이 조금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여섯 번 구부렸습니다. 불안의 신호입니다."

박상훈이 지적했다. 준호의 내부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상관없다."

"아, 그리고 오늘 정 여사가 전화했습니다."

"뭐라고?"

준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박상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준호의 불안감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당신과 정 여사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서가 당신과 잘 지내고 있는지도요."

"뭐라고 했어?"

"당신이 기분 좋게 지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정 여사는 여전히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당신이 은서를 제대로 대하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것처럼요."

박상훈이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의문이 떠 있었다. 박상훈도 준호의 거짓을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박상훈은 은서를 조사할 것이라는 의지도 담아 준호를 바라봤다.

"고생했다."

준호가 말했다. 그것으로 박상훈을 내보냈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준호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또다시. 주먹을 쥐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까지 떨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빨라졌다.

준호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글을 썼다.

6개월. 감정 표현 금지. 계약 위반 시 즉시 해지.

자신의 손으로 쓴 글씨를 바라봤다. 그것이 자신의 감옥이었다. 자신이 만든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은서라는 다른 죄수가 생겼다. 손이 계속 떨렸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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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준호는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울렸다. 준호는 받았다.

"네?"

"이 준호 회장이신가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모르는 목소리였다.

"누신가요?"

"저는 최유진이라고 합니다. 정은서의 친구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은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 말 속에는 의심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감지했다. 은서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했다는 뜻이었다. 은서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했다는 뜻이었다.

"은서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로요? 은서가 당신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은 들으신 적 없으신가요?"

최유진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고였다. 그것은 질책이었다. 준호를 향한 압박이었다.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헤어질 준비.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서가 이미 이 결혼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은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은서가 당신과의 결혼이 계약일 뿐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6개월이 지나면 헤어지기로 했다고요. 하지만 은서는 그 6개월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더 빨리 끝낼 수도 있다고요."

최유진이 말했다. 그 말은 준호의 모든 계산을 무너뜨렸다. 은서가 이미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서의 무표정, 은서의 침묵, 은서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연기였다.

"네?"

"당신이 은서를 상처 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거든요."

최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숨겨질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준호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작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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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30분, 준호는 펜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은서는 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가 들어왔을 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봤어?"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을 숨기려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다.

"야경이요."

은서가 대답했다.

"야경?"

"네. 불빛들이 계속 깜박거려요."

은서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준호는 그 침묵 속에서 뭔가가 올 것을 느꼈다.

"마치 심장박동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은유. 감정 표현. 은서가 은유를 사용했다. 그것은 감정이었다. 감정이 없다고 했던 사람이 은유를 사용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심장박동처럼?"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준호는 자신의 신체 반응을 통제하려 했지만 통제되지 않았다.

"네. 계속 뛰어요. 멈추지 않아요."

은서가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와 은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준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흡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목이 메었다. 이 모든 것이 신체 반응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준호는 은서를 바라봤다. 그 무표정 뒤에 뭔가가 있었다.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은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호흡이 조금 빨라졌다.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그것은 객관적인 증거였다. 은서도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연민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자신을 조종하기 위한 계산인가.

준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창가로 향했다. 은서에게 등을 돌린 채로, 준호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엔 숨길 수 없었다. 이번엔 멈출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준호는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이것은 통제 불능이었다. 이것은 죽음이었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은서에게 말해야 할까. "넌 거짓말하고 있어." 그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이 결혼을 지금 당장 끝내야 할까. 계약서를 찢고 펜트하우스를 나가야 할까.

모든 계산이 무너졌다. 은서가 거짓이었다. 이 결혼이 거짓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은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도 거짓이었다.

준호는 돌아섰다. 은서를 마주했다. 그 순간, 준호는 결정했다.

"넌 거짓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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