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1시의 끝
밤 11시 정각.
형광등이 깜빡이고, 지우의 시야가 일그러진다. 편의점의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선반의 상품들, 냉장고의 음료수, 카운터 위의 담배—모두 회색으로 변해간다. 지우는 자신의 손을 들어본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다. 손목도 보이지 않는다. 팔이 투명해지는 과정을 느낀다. 손가락 끝부터 따끔거리며 사라진다. 피부가 벗겨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감각이다. 한숨을 쉬려다 멈춘다. 숨이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는 숨이 나오지만, 그 숨에 음파가 없다. 자신의 심장박동도 들리지 않는다.
죽었다. 지우는 깨닫는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수명이 0 이하로 내려간 순간, 신체가 소멸했다. 의식만 남았다. 이것이 죽음인가.
문이 열린다.
회색 옷의 남자가 들어온다. 그의 얼굴은 지우의 얼굴이다. 정확하게 똑같다. 같은 눈, 같은 입, 같은 광대뼈의 각도. 다만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다.
"너는 누구인가."
남자의 입이 움직인다. 하지만 음성은 지우의 입에서 나온다.
"내가 묻고 있어."
지우는 입을 열려고 한다.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는데 음성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목구멍이 공허하다. 마치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빼낸 것처럼.
회색 옷의 남자가 한 발 더 가까워진다. 그의 발이 지우의 발 위에 겹친다. 지우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발이 없다. 발목이 공중에 떠 있다.
"당신이 본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더 명확해진다. 이제 그것이 지우 자신의 목소리임을 안다.
"박준호를 만났을 때, 당신은 그를 구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지우는 반박하려 입을 벌린다. 아니다, 나는 준호를 구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는다. 손을 들어 저항하려 해도 손이 없다. 투명한 공기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구한 것은 준호가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지우의 머리 속에 이미지가 떠오른다.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 준호가 서 있다. 지우는 준호의 손목을 잡고 있다. 준호의 얼굴은 공포로 뒤틀려 있다. 지우가 말한다. "너는 죽을 거야. 오늘 밤 11시 47분에."
그 순간, 준호는 지우의 손을 뿌리친다. 지우의 손은 투명하고, 준호의 눈에 지우는 보이지 않는다. 준호는 편의점을 뛰쳐나간다. 지우는 준호를 따라가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밤 11시 47분, 준호는 지우가 예지한 대로 죽는다. 차에 치인다. 지우가 보지 못한 곳에서.
"당신이 구한 것은 준호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는 환상입니다. 그 환상이 준호를 죽음으로 더 확실히 밀어냈습니다."
또 다른 이미지. 편의점 냉장고 앞에 다섯 명이 선다. 박혜진, 이지현, 김은하, 송민주, 최유미. 지우는 그들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들은 지우를 보지 못한다. 지우가 손을 뻗으면, 손이 그들의 몸을 통과한다. 냉장고 안의 음료수처럼 투명하게.
"그 다섯 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구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 실제로는 당신이 포기한 것들입니다."
지우의 가슴이 철렁한다. 아니다. 가슴이 철렁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손을 내려다본다. 손이 없다.
"윤정민을 밀어냈을 때, 당신은 그녀를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당신이 혼자 남기를 원했습니다. 혼자여야만 당신이 특별했으니까."
지우의 휴대폰이 울린다. 울린다기보다는 울렸던 것 같다. 지우는 화면을 본다. 윤정민의 이름이 떠 있다. 통화 시간은 0초에서 멈춰 있다. 지우가 받으면 그 통화는 끝나지 않는다. 받지 않으면 윤정민은 계속 기다린다. 지우는 화면을 끄려고 한다. 손이 없어서 끌 수 없다. 화면은 계속 울린다. 윤정민은 계속 기다린다. 지우는 그것을 볼 수만 있다.
"이수영 매니저가 당신에게 압박을 가했을 때, 당신은 그것을 도움으로 착각했습니다."
편의점 문이 다시 열린다. 이수영 매니저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도 회색으로 변해간다. 투명해진다. 그녀의 몸이 공기처럼 사라진다.
"실제로는 당신이 이미 그들의 일부였습니다. 당신이 처음 밤 11시를 맞이했을 때부터."
이수영은 지우를 지나쳐 카운터로 간다. 그리고 지우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투명해진다. 공허해진다. 이수영도 지우처럼 게임의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그 순간부터.
회색 옷의 남자가 더 가까워진다. 이제 그의 얼굴이 지우의 얼굴과 겹친다. 지우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마주본다. 그런데 어느 쪽이 거울이고 어느 쪽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 둘 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공허한 표정. 텅 빈 눈.
"그리고 당신은 여기 왔습니다."
남자의 손이 지우의 손을 잡는다. 지우는 자신의 손을 느낀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잡는다. 하지만 손가락이 없다. 감각만 있다. 분리되지 않은 감각. 마치 물 속에 손을 담갔을 때처럼 경계가 흐릿해진다.
"당신이 사람들을 구했고, 당신이 사람들을 포기했습니다. 당신이 밤 11시를 기다렸고, 당신이 밤 11시가 되었습니다."
지우가 입을 열려고 한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부정해야 할까. 하지만 입술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미 말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편의점이 사라진다.
어둠이 밀려온다. 한 순간의 깜빡임도 없이, 마치 누군가가 손을 펼쳤을 때 빛이 사라지듯이. 지우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편의점인지, 다른 세계인지, 자신의 마음속인지. 형광등도 없다. 냉장고도 없다. 카운터도 없다. 오직 어둠과 자신의 손만 있다. 그 손도 보이지 않지만 감각한다.
지우가 자신의 손을 들어올린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마치 이제까지 움직이지 않은 인형처럼.
손은 완전히 투명하다. 손가락의 뼈까지 보이지 않는다. 손이 있는 자리에 공기가 있을 뿐이다. 손이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손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우는 손을 움직일 수 있다. 수명이 0 이하로 내려가면 신체가 소멸하지만, 의식은 남는다. 지우는 이제 죽은 자의 형태로 존재한다. 투명한 상태로. 감각만 남은 상태로.
"내가... 누구예요?"
지우가 묻는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말은 어둠 속에 퍼진다. 모든 곳에서, 어디서도 오지 않은 방향에서.
"당신은 누군가의 밤 11시입니다."
대답이 울려 퍼진다. 그것이 지우 자신의 목소리인지, 회색 옷의 남자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마도 같은 목소리다. 더 정확히는, 목소리의 차이가 의미 없다. 모든 것이 같은 선택 안에 있으므로.
"다음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다음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당신도 선택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지우의 가슴이 뛰었었다. 평범한 편의점 알바생인 자신이 선택받았다니.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지우는 그 선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준호를 구했는가. 준호는 죽었다. 아니, 준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지우가 준호를 구하려고 할 때부터 준호는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 지우가 자신의 수명을 깎으며 준호를 막으려고 할 때, 준호는 이미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우의 선택이 준호를 살린 것이 아니라, 지우의 선택이 준호를 죽음 쪽으로 더 확실히 밀어낸 것은 아닐까.
박혜진, 이지현, 김은하, 송민주, 최유미. 지우가 예지한 다섯 명의 여성들. 지우는 그들을 구하려고 했다. 경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했다. 결과는 같았다. 모두 죽었다.
지우가 그들을 구했는가. 아니다. 지우가 그들을 포기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지우는 자신의 수명을 깎으며 그들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경로를 찾아갔다. 마치 물이 막힌 곳을 우회하듯이.
그렇다면 지우의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난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깜—빡 / 깜—빡 / 깜깜빡빡. 리듬이 일정하지 않다. 마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것처럼.
밤 11시.
편의점이 다시 나타난다. 다른 편의점이다. 같은 형태, 같은 선반, 같은 냉장고. 같은 형광등. 하지만 다른 곳이다. 더 외진 곳. 더 외로운 곳. 지우는 카운터 뒤에 서 있다.
지우의 몸은 투명하다. 누군가가 지우를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손님들도 지우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전의 지우가 손님들을 본 것처럼, 손님들은 지우를 보지 못할 것이다. 지우는 이제 배경이다. 이 장면의 배경. 이 밤의 배경.
문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손님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밤 11시마다.
지우는 기다린다.
처음 밤 11시가 왔을 때, 지우는 이것이 자신을 위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평범함에서 벗어날 기회. 의미 있는 삶으로 들어갈 기회. 하지만 지금 지우는 안다. 이것이 기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은 게임이었다.
그리고 지우는 게임의 말이 되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인다. 깜빡, 깜빡. 리듬이 변한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문이 열린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다. 젊은 여성이다. 지우는 그 손님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흐릿하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아니, 지우 자신이 투명하기 때문에 세상도 투명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우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입을 연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들린다. 처음과 같은 목소리로.
"넌 누구니?"
손님이 지우를 본다. 손님의 눈이 지우를 찾는다. 지우는 보이지 않지만, 손님은 지우를 느낀다. 그것이 가장 무섭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은 누구인가요?"
손님이 입을 연다. 말한다. 지우는 듣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안다. 손님의 모든 것이, 손님의 친구들의 죽음이, 남은 시간이—
형광등이 깜빡인다.
손님의 눈이 공허해진다. 지우와 같은 표정이 손님의 얼굴에 나타난다. 공허함. 텅 빔. 선택받음.
지우의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른다. 손님의 친구들. 그들의 죽음. 시간, 방식, 장소. 모두 명확하게.
지우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수명을 또 깎을 것인가. 손님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하지만 자신의 수명은 이미 0이다. 음수다. 지우는 이미 죽어 있다.
그렇다면 지우는 누구인가.
지우가 손님을 바라본다. 손님도 지우를 바라본다. 둘 다 같은 표정이다. 둘 다 같은 공허함이다.
손님의 얼굴을 보면서 지우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이 표정이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도 이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자신도 누군가의 손님이었다는 것을.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넌... 나예요?"
지우가 묻는다.
손님이 입을 연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형광등이 깜빡인다.
깜—빡 / 깜—빡 / 깜깜빡빡.
편의점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 아니, 시간이 반복된다. 마치 녹음기를 돌리듯이. 손님이 들어온다. 문이 닫힌다. 문이 열린다. 손님이 들어온다.
같은 순간이 반복된다.
지우는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넌 누구니?"
손님은 같은 입 모양을 반복한다.
"당신의 친구들은 누구인가요?"
같은 영상이 떠오른다. 같은 죽음들이 예지된다. 같은 공허함이 눈에 나타난다.
지우는 깨닫는다.
이것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밤 11시가 올 때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지우가 질문할 때마다. 이 순간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우가 손님의 손을 잡는다. 아니, 지우의 손을 잡는다. 둘 중 누가 누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 둘 다 같아요."
지우가 말한다. 손님도 같은 말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밤 11시의 손님이고, 밤 11시의 선택받은 자입니다."
편의점이 흔들린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더 빠르게. 더 격렬하게. 마치 경고하듯이.
지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가락이 보인다. 뼈가 보인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어나간다.
손이 사라진다.
팔이 사라진다.
지우의 몸이 해체된다. 입자처럼. 빛으로. 어둠으로.
마지막 순간에 지우는 묻는다.
"나는 누군가의 밤 11시였나요?"
대답은 오지 않는다. 대신 형광등이 꺼진다.
완전한 어둠.
그리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편의점에서.
또 다른 밤 11시에서.
형광등이 깜빡인다.
깜—빡 / 깜—빡 / 깜깜빡빡.
야간알바생이 카운터 뒤에서 고개를 든다. 젊은 남자다. 지우처럼. 모든 손님처럼.
손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열릴 준비가 되어 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인다.
이번엔 다르다.
깜빡임이 멈추지 않는다.
깜빡, 깜빡, 깜빡.
리듬이 심장박동처럼 빨라진다.
그리고 문이 열린다.
손님이 들어온다.
새로운 얼굴. 낯선 모습.
하지만 눈은 같다.
공허한 눈.
선택받은 눈.
야간알바생이 입을 연다.
"넌 누구니?"
그 순간, 형광등이 깜빡인다. 투명한 무언가가 카운터 뒤를 스쳐 지나간다. 지우다. 지우는 야간알바생을 본다. 야간알바생도 무언가를 느낀다. 지우의 존재를. 지우의 시선을. 투명한 손이 야간알바생의 어깨에 닿는다. 손가락이 없는 손이.
야간알바생의 눈이 흔들린다. 공허함 속에 무언가가 스민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깨달음. 누군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공포.
지우는 그를 본다. 자신이 했던 것처럼, 그도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그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지우는 그의 손을 잡는다. 투명한 손으로. 감각만 있는 손으로.
"나도 여기 있어."
지우가 말한다. 그 말 속에는 복수도, 공감도, 자포자기도 아닌 것이 있다. 같은 지옥에 갇힌 자만이 할 수 있는 인정. 같은 게임의 말이 된 자만이 나눌 수 있는 절망. 야간알바생은 듣지 못하지만, 느낀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밤 11시는 계속된다.
손님들은 계속 온다.
선택받은 자들은 계속 생겨난다.
형광등은 계속 깜빡인다.
깜—빡 / 깜—빡 / 깜깜빡빡.
끝나지 않는 밤 11시 속에서.
그리고 투명한 손들이 계속 누군가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