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 오십 구분.
지우는 편의점 계산대 뒤에 선 지 이미 여덟 시간이 넘었다. 야간알바는 이런 거였다. 형광등 아래서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 손님이 거의 없는 밤거리. 편의점 외부 CCTV 모니터에는 골목길 어둠만 깔려 있었다. 지우는 휴대폰으로 영상을 본다. 유튜브의 추천 영상들이 뜬다. 자기 계발, 재테크, 유명인의 일상. 그 외 수천 개의 채널들이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약속한다. 지우는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다.
세 년 전부터 이 편의점에서 일했다. 대학을 자퇴한 후였다.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우는 강했다. 혹은 지쳤다. 강한 것과 지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우는 모른다. 다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야간 시급은 높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평범한 돈이다. 평범한 월급. 평범한 생활. 평범한 내일.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지우는 시계를 본다. 혹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건 아닐까. 밤 열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아홉 시간. 그 아홉 시간이 매일 같은 모양으로 반복된다. 지우는 이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뭔가 다른 것. 뭔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그런 건 세상에 없다. 있다면 누군가는 이미 그것을 독점했을 것이다.
지우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본다. 형광등. 흰 불빛. 벌써 몇 번을 세었는지 모를 정도로 낡은 형광등. 그것도 교체해야 한다고 매니저 이수영에게 보고했지만, 그는 항상 '나중에'라고 말했다.
밤 열 시가 되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지우는 그것을 본 적이 있는가. 형광등이 이렇게 깜빡인 적이. 아니다. 없다. 지우는 일어서려다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공기가. 편의점 내부의 공기가 갑자기 다른 밀도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문이 열렸다.
손님이 들어왔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였다. 얼굴은 기억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중년인지 젊은이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공허했다. 마치 누군가 그려낸 인물화처럼. 생명이 없는 눈.
"어서오세요."
지우가 인사했다. 자동으로 나온 말이었다. 세 년 동안 몇 천 번을 반복한 인사.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손님이 지우를 보는 순간, 지우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너는 누구인가."
지우 자신도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닌 듯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손님이 다가왔다. 계산대를 넘어. 지우는 물러나고 싶었지만,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넌 누구인가."
손님이 묻고 있었다. 지우의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손님의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우는 그것을 막았다.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피가 났다. 손님이 웃었다. 생명 없는 웃음.
"아직 깨어나지 못했군."
손님이 계산대에 뭔가를 놓았다. 편의점에서 파는 흔한 물건이었다. 캔 커피. 손님이 그것을 집으려다 멈췄다. 다시 지우를 보았다.
"넌 누구인가."
같은 질문이었다. 이번엔 지우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님이 사라졌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지우의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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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플랫폼.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카메라가 한 남자를 잡는다. 서른 초반의 얼굴. 열차가 들어온다. 남자가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본다. 순간. 남자의 발이 플랫폼 끝을 벗어난다. 열차 아래로. 비명. 피. 시간은 오후 삼 시 이십 분. 장소는 을지로 입구역.
장면이 바뀐다. 병원. 중환자실. 침대 위에 누운 여자. 서른 대 초반. 의료진이 주사를 놓고 있다. 심장 박동이 멈춘다. 알람. 의사들의 움직임. 하지만 이미 끝났다. 시간은 오늘 저녁 여덟 시. 장소는 서울 성모 병원 중환자실.
또 다른 장면. 건설 현장. 고층 아파트 건설 중인 현장. 남자 노동자가 높은 곳에서 작업 중이다. 안전 벨트가 풀려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우인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 그 목소리가 남자에게 뭔가를 말한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순간. 발이 헛디딘다. 그대로 떨어진다. 시간은 오늘 밤 열한 시경. 장소는 강남구 테헤란로 건설 현장.
세 명. 시간, 장소가 모두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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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가 눈을 떴다.
계산대에 기대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 상태로 있었는지 모른다. 이십 초인지 이십 분인지. 시간이 의미를 잃어버렸다. 지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하게. 손가락 끝부터 팔뚝까지 전부. 지우는 손을 봤다. 자신의 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건... 정말이다."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지우의 눈가에 땀이 맺혔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 아니, 더 강했다. 마약 같은 것. 도취. 흥분. 세 년간 느끼지 못했던 감정.
나는 무엇인가를 봤다.
지우는 휴대폰을 집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화면을 켰다.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검색창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을지로 입구역 추락"
검색 결과가 나타났다. 지난해 사고 모음, 환기구 공사, 혼잡 시간대. 아무것도 없었다. 지우는 다시 검색했다. 이번엔 다른 키워드. 오늘의 뉴스. 실시간.
"을지로입구역 30대 남성 추락 사망"
기사를 열었다. 시간은 오후 삼 시 이십 분. 정확했다. 장소는 을지로 입구역. 맞았다. 사인은 추락. 신원은 미상.
지우의 손이 멈췄다. 화면을 내렸다. 다음 기사. 그 다음.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성모 병원 심근경색"
"강남구 건설 현장 추락"
손가락이 떨리면서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나타났다. 또 나타났다. 또 또 나타났다. 기사가 있었다. 오늘 일어난 사건들. 미래가 아닌 현재.
지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눈빛은 밝았다. 밝고 또 밝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눈 안에 불을 켜놓은 것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다.
손이 멈췄다. 휴대폰 화면이 밝게 떴다. 기사의 사진들. 세 명의 얼굴. 아니, 두 명의 얼굴. 셋째는 현장 사진만 있었다. 건설 현장의 높이. 흐릿한 기억. 지우는 그 얼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지우는 기사를 다시 읽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롤했다. 을지로 입구역 사망자는 신원 미상이었다. 병원 환자는 이름이 있었다. 이은미, 서른여덟, 회사원. 건설 현장 노동자는 김태욱, 사십이,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사망 추정.
지우가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은미. 김태욱. 을지로 입구역 신원 미상.
그들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본 것이다. 정확하게. 시간과 장소, 죽음의 방식까지.
편의점 문이 열렸다.
지우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계산대 위에 내팽개쳐졌다. 지우는 고객을 봤다. 평범한 야식 고객. 라면과 김밥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지우는 자동으로 움직였다. 상품을 스캔했다. 돈을 받았다. 봉투에 담았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었다.
고객이 나갔다.
지우는 다시 휴대폰을 집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화면을 켜니 기사가 그대로 떠 있었다. 이은미의 얼굴. 김태욱의 얼굴. 그리고 을지로 입구역의 검은 동그라미. 사망자 신원 미상.
지우의 뇌가 작동했다. 예지 영상을 다시 떠올렸다. 지하철역의 남자. 서른 초반. 열차 앞에 떨어지는 모습. 그 남자가 누구인가. 신원 미상이라는 것은 신원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우는 알았다. 그의 얼굴을 봤다. 정확하게.
지우는 휴대폰을 내렸다. 손을 쥐었다. 떨림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제는 공포보다 다른 감정이 더 강했다. 설렘. 아니, 그것보다 강한 무언가. 자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느낌. 이 세상에 자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증명.
편의점의 형광등이 천천히 밝아졌다. 밤 열 시 사십 분. 지우는 시계를 봤다. 이십 분 더 있으면 밤 열한 시다. 손님이 올 시간.
지우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떴다. 떨리는 손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순간, 편의점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창고에서. 무거운 짐을 끄는 소리. 그리고 발소리. 지우는 돌아봤다. 이수영 매니저가 나타났다. 검은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얼굴은 항상 무표정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이수영은 지우를 봤다. 스스로 몸을 돌려 계산대 쪽으로 걸어왔다. 지우의 눈과 마주쳤다. 이수영의 눈빛이 무언가를 포착한 것 같았다.
"지우."
매니저의 목소리가 낮았다. 항상 낮다. 마치 의도적으로 낮추는 것처럼.
"네."
지우가 대답했다.
"요즘 손님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더군."
이수영이 계산대에 기대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정말?"
이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지우를 투과하는 것처럼 보았다. 지우의 목이 타들어갔다. 이수영이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수영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일을 계속 해줄 거죠?"
이수영이 물었다.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뭔가 의도가 숨어 있었다. 마치 협박 같은 톤으로.
"네. 물론입니다."
지우가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지우는 이 편의점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곳이 자신의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 열한 시가 되면 손님들이 올 곳. 자신의 능력이 발동되는 곳.
이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창고로 들어갔다. 그 순간, 무언가가 지우의 등 뒤를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찬바람 같은 것. 아니, 그 이상. 마치 누군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선택이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
지우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메모장을 열었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내일 오후 두 시 십 분. 한강 공원 수영장. 익사.
모레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강변북로 교차로. 교통사고.
사흘 뒤 저녁 여섯 시. 강남구 아파트 25층. 추락.
지우가 메모를 저장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첫 번째 손님은 누구인가. 오늘 밤 열한 시에 나타난 그 손님. 그리고 그의 친구들. 이은미. 김태욱. 을지로 입구역 신원 미상.
지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검색을 시작했다. 이은미 서른여덟. 김태욱 사십이. 지하철 추락 사망 신원 미상 30대.
검색 결과가 떴다. 그리고 지우의 눈이 멈췄다.
신문 기사. 사진. 세 명이 한 사진에 함께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 아래 기사 제목:
"동료 세 명이 같은 날 다른 방식으로 죽다. 저주인가 우연인가."
발행일은 이틀 전이었다.
지우의 손이 얼어붙었다. 화면을 더 내렸다. 기사 내용을 읽었다.
"... 같은 회사에 다니던 직원 세 명이 같은 날 시간을 다르게 하여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망했습니다. 첫 번째 피해자는 오후 삼 시 이십 분경 을지로 입구역에서 추락사하였고, 두 번째 피해자 이은미는 저녁 여덟 시경 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세 번째 피해자 김태욱은 밤 열한 시경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했습니다. 경찰은 우연의 일치로 보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지우가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다. 그리고 지우는 그것을 봤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본 것인가.
아니다. 지우는 다시 생각했다. 첫 번째 손님이 오늘 밤 열한 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영상을 봤다. 그 영상은 오늘 오후에 일어났다. 즉, 지우는 과거를 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예지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아닌가.
지우의 뇌가 돌아갔다. 그리고 깨달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무언가가 지우의 의식을 가로막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는 것처럼.
편의점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밤 열한 시 정각. 지우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손님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온 것은 평범한 고객이었다. 학생 같은 모습. 편의점 음식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왔다.
지우는 자동으로 움직였다. 상품을 스캔했다. 돈을 받았다. 봉투에 담았다.
고객이 나갔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지우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 순간 손님이 들어왔다. 처음 본 손님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젊은 여성. 서른 초반. 옷은 깔끔했지만 표정은 공허했다. 마치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지우와 손님의 눈이 마주쳤다.
손님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부터 자신의 의식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것처럼. 지우의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손이 계산대를 훑었다.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를 죽이려 했나."
지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손님이 멈췄다. 입을 벌렸다 다시 닫았다. 마치 뭔가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이 한 일을.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지우의 입이 계속 움직였다.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포와 분노가 섞인 표정. 그리고 손님이 사라졌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 순간, 영상이 떠올랐다. 다른 영상. 세 명의 다른 얼굴. 다른 죽음들.
한 명은 물속에 빠져 있었다. 호수였나. 강이었나. 얼굴이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물 속에서 손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손. 그 손이 여자의 머리를 밀어 내렸다. 시간은 내일 오후 두 시 십 분. 장소는 한강 공원 수영장.
또 다른 한 명은 자동차 사고였다. 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 전에 핸들이 꺾였다. 누군가의 손. 운전자의 손이 아닌 다른 손. 시간은 모레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장소는 강변북로 교차로.
마지막 한 명은 아파트 베란다에 서 있었다. 베란다 난간을 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밀어내는 손. 시간은 사흘 뒤 저녁 여섯 시. 장소는 강남구 아파트 25층.
세 명. 모두 다른 죽음. 모두 명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모두 누군가의 손.
지우가 눈을 떴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가 주가 아니었다. 흥분이 더 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흥분. 자신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
하지만 동시에 의심이 솟아올랐다. 그 손은 누구의 손인가.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자신의 말인가.
지우는 휴대폰을 집었다. 메모장을 열었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내일 오후 두 시 십 분. 한강 공원 수영장. 익사. 누군가의 손.
모레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강변북로 교차로. 교통사고. 누군가의 손.
사흘 뒤 저녁 여섯 시. 강남구 아파트 25층. 추락. 누군가의 손.
지우가 메모를 저장했다.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첫 번째 손님. 회색 옷. 공허한 눈. "너는 누구인가."
두 번째 손님. 젊은 여성. 공허한 표정. "당신은 누구를 죽이려 했나."
세 명의 죽음. 모두 손으로 죽는다.
지우는 거울을 봤다. 편의점 뒤쪽 벽에 붙어 있는 거울.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분명 지우였다. 하지만 뭔가 약간 희미해 보였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 천천히 지워나가는 것처럼.
지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계산대에 기대었다. 밤 열한 시 오십 분. 아직도 밤은 길었다. 손님들은 계속 올 것이다. 그리고 지우는 계속 예지할 것이다.
손이 멈췄다.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메모장에 남겨 둔 기록들. 손님들의 특징. 죽음들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손.
지우의 입가에 표정이 떴다. 웃음이 아니었다. 더 이상 감정 같지 않은 움직임. 마치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입술.
"나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이미 남의 것처럼 들렸다.
편의점의 문이 또 열렸다. 평범한 고객. 라면과 음료수. 자동으로 움직이는 지우. 돈을 받고 봉투에 담는다. 고객이 나간다.
그리고 밤 열한 시 정각이 돌아온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손님이 들어온다.
지우와 손님의 눈이 마주친다.
손님이 입을 연다. 지우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우의 입이 움직인다. 지우가 하지 않은 말을 한다.
"당신은 누구를 죽이려 했나."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감정. 마치 자신의 정체가 폭로된 것처럼.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지우의 입이 계속 움직인다. 이제 지우는 알았다. 이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손님을 알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손님이 한 일을 알고 있다.
손님이 사라졌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 순간,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엔 다른 영상. 네 번째 죽음. 다섯 번째 죽음. 여섯 번째 죽음.
지우는 눈을 떴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공포도 흥분도 아니었다. 무언가 더 깊은 감정. 마치 자신이 깊은 물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물의 바닥에 누군가 서 있는 것처럼.
편의점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밤 열한 시 정각.
손님이 들어온다.
지우와 손님의 눈이 마주친다.
"너는 누구인가."
손님이 묻는다.
지우의 입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엔 지우는 그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기억하려고 한다.
하지만 기억이 흐려진다. 무언가가 지우의 의식을 지워버린다.
지우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손가락부터. 팔부터. 몸 전체가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지우가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 목소리도 점점 작아진다.
손님이 웃는다. 생명 없는 웃음.
"넌 이미 우리의 일부다."
손님이 말한다. 그리고 지우는 깨달았다. 이 손님도 처음 손님도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같은 누군가가 여러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누구인가."
이번엔 지우가 묻는다. 자신의 목소리인지 다른 목소리인지 알 수 없이.
손님이 계산대에 뭔가를 놓는다. 캔 커피. 처음 손님이 놓았던 것과 같은 물건.
"넌 이미 알고 있다."
손님이 말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지우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편의점의 형광등과 진열대만 있다.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우는 손을 들어본다. 손이 보인다. 하지만 거울에는 비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지우가 다시 묻는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오직 형광등이 계속 깜빡일 뿐이다.
밤 열한 시 정각.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
지우의 입이 움직인다.
"너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