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황실 궁전의 복도는 금빛 촛불로 가득했다. 카라는 레한의 손에 이끌려 걸으면서 화려함 뒤에 숨겨진 차가움을 느꼈다. 계단을 올라가며 카라는 시스템창을 열었다. 레한의 감정 수치는 평온(45)과 슬픔(72)이 섞여 있었다. 조종하기 쉬운 상태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깨어난 후로 무언가가 달라졌다.
레한의 방 문이 열렸다. 침대는 황금 장식으로 가득했고, 벽에는 제국의 지도와 전략서가 붙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정원이 보였지만, 방 자체는 마치 금고처럼 느껴졌다. 외부와 단절된,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여기가 나의 전부야." 레한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카라는 침대 끝에 앉았다. 레한은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조각상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 방에만 있었어. 아버지는 날 데려와서 말했어. '집착은 왕이 가져야 할 가장 강한 무기다. 모든 것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그래야만 왕이 된다.'" 레한의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금이 가 있었다. "어머니는 달랐어. 자꾸만 나한테 다른 감정들을 가르쳐주려고 했어. 공감, 양보, 사랑 같은 것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컸어. 그리고 어머니는..."
레한이 말을 멈췄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어머니는 떠났어. 내가 아직 어릴 때. 아버지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카라의 손가락이 시스템창의 가장자리를 터치했다. 레한의 수치가 변했다. 슬픔(72) → 슬픔(85). 절망(0) → 절망(38). 하지만 손을 놨다.
"아버지가 날 데려갔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어." 레한이 계속했다. 이제 그는 카라를 돌아봤다.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황실의 공식 행사들을 보여줬어. 사람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을 봤어.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어. '저것들을 소유하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사랑이다.'"
카라는 숨을 멈췄다.
"나는 그렇게 배웠어. 원하는 것을 집착으로 움켜쥐는 법.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는 법. 하지만..." 레한이 카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소유와 집착이었어. 그 감정들이 뭔지 몰랐어."
시스템창이 울음을 냈다.
【주의: 감정 동기화 범위 내에서 고강도 감정 파동 감지. 레한(집착: 99→101 오버플로우 / 절망: 38→63 / 슬픔: 85→92)】
카라는 창을 닫았다. 손으로 누르지 않고, 그냥 시선을 돌렸다. 창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시스템창을 강제로 닫을 때마다 발생하는 손상. 카라는 이빨을 깨물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넌..." 레한이 카라의 얼굴을 들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넌 처음으로 날 두렵게 만든 사람이야.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누군가. 그래서 더 잡고 싶었어. 더 조종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러면 할수록 넌 더 멀어졌어."
카라의 손이 움직였다. 시스템창을 열지 않고. 그냥 레한의 볼을 닦았다.
"당신도 피해자였군요." 카라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거짓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벗어나요. 이 감옥에서."
레한이 카라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카라는 감정 동기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진정한 공감만으로. 시스템창 없이, 수치 없이.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손을 잡는 것.
침묵이 흘렀다. 길고도 깊은 침묵.
카라의 손에서 은빛이 번쩍였다.
처음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저주가 깨질 때마다 카라는 고통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따뜻함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안아주는 것 같은 따뜻함. 은빛 균열이 팔 위를 타고 흘러 어깨를 지나 가슴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었다. 정체성 붕괴도 없었다.
거울에서 본 여러 얼굴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 같았다. 카라와 지은이 겹쳐지는 느낌.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온전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네 번째 저주가 깨졌다." 카라가 중얼거렸다.
【네 번째 저주 해제 완료: '소유욕에서의 해방'】 【남은 저주: 3개】 【시스템 안정도: 89%】 【정체성 안정도: 72% → 81%】
수치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 카라는 그것들을 보고도 두렵지 않았다.
"넌 누구야? 정말로." 레한이 카라의 눈을 바라봤다.
카라가 웃었다. 처음으로 거짓 없는 웃음이었다.
"저는..." 카라가 레한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카라이면서 지은이에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예요."
레한이 카라를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그도 울고 있었다. 이 화려한 방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감정이 흘렀다.
카라의 손에서 은빛이 더 깊게 번져 내려갔다. 팔, 어깨, 그리고 가슴. 심장 위치까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경고: 남은 저주 3개. 다음 저주는 가장 강력합니다.】 【주의: 제국 내 세력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이리스 백작부인, 매튜 백작, 그 외 미확인 세력의 움직임 감지】
카라가 창을 봤다. 레한도 봤다. 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야, 이게?" 카라가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 레한이 카라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야."
창 밖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뒤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여러 그림자들이.
카라의 심장 위의 은빛 균열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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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한이 카라를 끌어안은 상태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카라는 그 떨림을 고스란히 느꼈다. 이것이 진정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창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오직 살과 살이 맞닿을 때만 전해지는 것.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해." 카라가 속삭였다.
레한이 몸을 뒤로 물렸다. 눈빛이 변했다. 울음은 멈췄지만, 그 대신 보호본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카라는 그것이 집착의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구분할 여유가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안 돼?" 카라가 물었다.
"아이리스가 뭔가 준비했을 거야." 레한이 창 밖을 봤다. "정원에서 내 움직임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어. 부친의 심복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끝났다.
카라는 시스템창을 열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카라가 침실에서 본 그 검은 옷의 남자. 카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그것. 아직도 이 궁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게 뭐예요?" 카라가 물었다. "저 남자. 제 목소리를 하던."
레한의 얼굴이 굳었다.
"모르겠어. 처음 본 건 지난주야. 아버지의 방에서." 레한이 잠깐 멈췄다. "아버지는 그것을 '실험'이라고 부르더라. 내가 더 묻자 황실의 비밀이라며 말을 끊었어. 그 이후로 계속 감시 당하는 기분이 들었어. 마치 누군가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들려는 것처럼."
카라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전 화의 끝장면이 되살아났다. 도서관에서 에이든이 확인해준 것. 카라는 복사본이라는 사실. 그렇다면 저 검은 옷의 남자는?
"원본이에요." 카라가 중얼거렸다.
레한이 카라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질문이 가득했지만, 카라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원본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존재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
"일단 여기서 나가자." 레한이 카라의 손을 잡았다. "이 방은 안전하지 않아."
그들이 방을 나갔을 때, 황실 복도의 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밤 3시. 가장 어두운 시간.
카라의 은빛 균열이 심장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뭔가를 감지하는 것처럼.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레한이 카라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복도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카라는 시스템창을 열어 주변을 스캔하려 했지만, 손을 멈췄다. 이제는 그것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의존할 수 없었다. 강제로 닫은 시스템은 손상 상태에 있었으니까.
"카라."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의 목소리. 루시아였다.
레한이 카라를 벽 뒤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루시아가 시녀 둘을 거느리고 복도를 지나갔다. 손에는 은색 편지가 들려 있었다. 황실의 공식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카라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나?" 루시아가 시녀에게 물었다.
"저택에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황실로 온 것 같은데..."
루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이 주먹으로 쥐어졌다.
"알았어.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데려오겠어." 루시아가 시녀들을 돌려보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루시아가 사라진 후, 카라와 레한은 서로를 바라봤다.
"루시아가 뭔가 숨기고 있어." 카라가 속삭였다.
"도움이 아니라면 뭘까?" 레한이 카라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들이 계속 이동하던 중, 침실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이리스의 목소리였다.
카라와 레한은 동시에 그 방향으로 달렸다. 침실의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매우 이상한 광경이었다.
침실 한구석에 아이리스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고, 그녀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카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그 존재. 그의 손에는 은색 결정체를 들고 있었다.
"아, 넌 여기 왔구나, 카라." 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 카라와 같은 목소리로. "난 너를 찾고 있었어."
카라의 몸이 얼었다.
"난 너야. 그리고 넌 나야." 검은 옷의 남자가 한 발 더 나아갔다. "원본과 복사본. 우린 하나가 되어야 해. 황실의 계획이니까."
카라의 가슴의 은빛 균열이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가 반응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거부의 떨림인지, 아니면 인정의 떨림인지 카라는 알 수 없었다.
시스템창이 울음을 냈다.
【경고: 미지의 세력 감지. 정체 불명. 위협 수준: 최대】 【카라의 생명 신호: 불안정】 【남은 저주: 3개. 다섯 번째 저주 진행 중.】
카라는 창을 닫으려 했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처럼. 창은 카라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메시지: 안녕, 나 자신. 이제 넌 결정해야 해. 나와 하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시간이 없어.】
카라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순간이 자신의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스템창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그녀는 레한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검은 옷의 남자를 바라봤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카라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저는 제 선택을 했어요."
레한이 카라의 앞에 섰다. 검을 들었다.
"정체를 드러내!" 레한이 외쳤다.
검은 옷의 남자는 웃음만 계속했다. 그것은 카라의 웃음이었고, 동시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웃음이기도 했다.
침실의 불빛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