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실 궁전의 저주
황실 궁전의 대연회장은 찬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귀족들로 가득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수한 몸들이 춤을 추는 그 광경 속에서 카라는 레한의 팔에 기대어 있었다. 화려한 은색 드레스가 바닥을 쓸고, 레한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한곳을 향해 있었다.
아이리스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진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무리를 헤치고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지만, 눈빛은 검었다. 카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스템창을 켜지 않아도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질투. 노골적인, 감춰지지 않은 질투.
"레한 황자님, 오랜만입니다."
아이리스가 우아하게 몸을 굽혔다. 레한의 팔이 카라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감쌌다.
"아이리스."
그의 목소리는 차갑다. 카라는 그 음성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톤이었다. 레한의 관심은 아이리스에게 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집중력은 카라에게 쏠려 있었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그것을 무시했다.
"날씨가 참 좋네요. 정원을 산책하실 시간이 있으신가요?"
아이리스가 레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의 손가락이 레한의 팔을 세게 눌렀다. 그것은 신호였다. 가지 말라는 신호. 하지만 레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이리스를 보지 않고 카라만 바라봤다.
"아니오."
한 마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순간 카라는 시스템창을 켜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아니다. 이제는 이 능력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에이든의 경고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감정 동기화는 너를 파괴한다. 너는 지금 자신을 잃고 있다.
연회장의 다른 쪽에서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매튜 백작이었다.
카라의 호흡이 얕아졌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경직된다. 매튜는 천천히 걸어왔다. 황실 궁전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권력의 무게였고, 소유욕의 무게였다.
"카라."
한 마디가 전부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위협. 통제. 그리고 소유의 욕망.
카라는 레한의 팔을 더욱 세게 잡았다. 레한이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그의 눈이 매튜를 향했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혔다.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카라는 이제 내 손님입니다."
레한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명확했다. 그것은 단순한 진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매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여자는 내 딸이오. 너희 황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매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카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황실 궁전의 모든 귀족들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은 계속 흘러나왔지만, 춤을 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 이 긴장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만나지."
레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것은 협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매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황실 법정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넌 레한 황자와 어울리지 않아."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카라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광기 어린 집중력으로 빛났다.
"나만이 그의 완벽한 짝이야. 나만이 황실에 걸맞은 여인이지. 넌 그저 매튜 백작의 딸일 뿐이야. 그것도 문제 많은."
각 단어가 칼처럼 날아왔다. 카라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이 시스템창을 켜지 않고 직면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을. 감정을 수치화하지 않고 그저 마주해야 할 감정이라는 것을.
카라는 입을 열었다.
"완벽함이란 무엇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엇이 완벽함입니까?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는 것? 아니면 자신을 잃는 것?"
카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레한의 팔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헷갈려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그녀가 아이리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당신이 완벽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레한 황자님은 절대 당신을 보지 않을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길고 긴 침묵. 연회장의 모든 귀족들의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켜져 있지도 않은데 카라는 느꼈다. 아이리스의 감정이. 질투 100. 강박 95.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무가치감 88.
카라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당신은 충분히 완벽해요. 하지만 당신의 완벽함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러나 그 순간, 매튜가 다시 나섰다. 그의 손이 카라의 팔을 잡았다.
"충분하다."
매튜의 손아귀는 강했다. 카라의 팔이 저렸다. 레한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손을 놓으시오."
레한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였다. 레한의 손이 검의 자루로 향했다. 황실 궁전의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음악도 멈췄다.
"나의 딸을 건드리지 마시오, 황자."
매튜가 낮게 말했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황실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
"그 여자는 내 딸이 아닙니다."
레한이 검을 뽑으려 했다. 그의 손은 검의 자루에 있었다.
"그 여자는 내 손님이고, 곧 내 왕비가 될 것입니다."
카라의 눈이 커졌다. 왕비? 그것이 언제 결정되었나?
하지만 그 순간, 카라는 레한의 시선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매튜를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는 묻고 있었다. '괜찮은가? 이렇게 해도 되는가?'
카라는 매튜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을 천천히 들었다. 레한을 바라봤다. 감정 동기화 없이. 시스템창 없이. 순수한 신뢰로.
"괜찮습니다."
카라가 작게 말했다.
그 순간,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현실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부의 소리였다. 카라의 심장 속에서 울리는 깨짐의 소리. 은빛 균열이 그녀의 팔뚝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피부가 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매튜의 손이 그녀의 팔에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아이리스도 뒷걸음질 쳤다. 연회장의 모든 귀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저주가..."
어떤 귀족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빛이 무엇인지. 저것이 마법의 징조임을.
카라의 온몸이 은색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해방이었다. 무언가가 그녀 안에서 풀려나가는 느낌. 무언가가 그녀 안에서 깨어나는 느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다섯 번째 저주 해제 완료] [조건: 타인의 보호를 받아들일 것 - 달성] [보상: 자유의식 +20, 신뢰도 +15]
그리고 그 아래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여섯 번째 저주 활성화] [저주명: 진정한 자아의 수용] [조건: 사용자가 '카라'와 '지은' 모두를 동시에 받아들일 것] [경고: 이 저주는 가장 개인적인 저주입니다. 외부의 도움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카라의 은빛이 점차 옅어졌다. 그녀의 피부는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변해 있었다. 뭔가가 깨어났다. 뭔가가 변했다.
레한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카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시스템창을 바라봤다. 여섯 번째 저주. 가장 개인적인 저주.
그것은 무엇인가?
카라와 지은.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자아. 둘 다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거울에는 두 개의 얼굴이 떠 있었다. 카라의 얼굴과 지은의 얼굴. 그들은 다르지만 같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면일 뿐이었다.
"너는 누구인가?"
카라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난 카라야. 그리고 난 지은이야."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난... 둘 다야."
그 순간, 카라의 심장이 또 다시 울렸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저주를 깨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다음 단계였다.
카라의 팔에서 은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마지막 두 조각. 그것들을 깨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 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라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레한의 팔 속에서 카라는 시스템창을 내려놓았다. 여섯 번째 저주의 메시지는 여전히 화면 위에 떠 있었지만, 그것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 메시지는 이미 그녀의 심장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카라와 지은을 동시에 받아들일 것.'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반복될수록 더 이상 명제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피할 수 없는,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처럼.
연회장의 귀족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의 충격이 가시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저 은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수군거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리스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까까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 여자가, 이제는 마치 물에 빠진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저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이리스가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을 설득하듯.
"황자 폐하, 저 여자는 마법사입니다. 저 여자는 위험합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제 연회장 전체를 향한 외침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저 여자를 막아야 합니다!"
레한이 아이리스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것은 집착으로 가득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호함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백작부인, 당신은 지금 황실의 손님에게 모욕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황실의 법에 따르면, 그것은 대역죄에 해당합니다."
레한이 손을 들었다. 황실 근위대가 즉시 움직였다. 그들은 아이리스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당합니다! 황자 폐하, 이것은 부당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근위대가 그녀를 연회장 밖으로 끌어갔다. 그녀의 비명과 항의는 복도를 통해 멀어져 갔다.
매튜 백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아닌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그의 주먹이 쥐어졌다.
"카라."
매튜가 다시 한 번 딸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레한이 그 사이에 섰다. 정확히는, 그가 카라 앞에 섰다. 그의 등이 카라를 완전히 가렸다.
"백작 폐하,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레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매튜의 입술이 떨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레한 뒤의 카라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황실 황자의 앞에서 귀족이라는 지위는 무의미했다.
"이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매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약한 자의 마지막 저항이기도 했다.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연회장을 떠났다. 남은 귀족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한이 카라에게로 돌아섰다.
"괜찮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우리 나갈까요?"
레한이 속삭였다.
카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레한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귀족들의 시선은 그들을 따라다녔다.
황실의 복도는 조용했다. 밤이 깊어 있었고, 대부분의 시종들은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다. 오직 횃불만이 어두운 벽을 밝혀주고 있었다.
"저건..."
카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왕비? 당신이 언제..."
"방금이야."
레한이 대답했다. 그들은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레한의 손은 여전히 카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한 것 같아. 이미 결정했다고. 나는 그냥... 동의한 거야."
"그게..."
카라가 멈췄다. 레한도 멈췄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요?"
카라의 눈이 레한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것도 있었다.
"카라."
레한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너를 왕비로 만들고 싶어. 왜냐하면 나는 너를 지키고 싶으니까. 너를 내 옆에 두고 싶으니까."
"그것은..."
"집착이 아니야. 이제는."
레한이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나는 이제 깨달았어. 내 집착이 뭐였는지. 나는 너를 소유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카라의 눈이 커졌다.
"처음 너를 봤을 때부터 나는 넌 다르다고 생각했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그래서 나는 너를 잃을까봐 두려웠어. 그 두려움이 집착이 됐던 거야."
레한이 카라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런데 이제는 알아. 너는 나한테 잃혀질 여자가 아니야. 너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여자야. 그리고 난 그런 너를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레한..."
카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시스템창 없이, 감정 동기화 없이, 순수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순간, 시스템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감정 동기화 감지] [대상: 레한 황자] [집착도: 82 (감소 중)] [신뢰도: 96 (증가 중)] [사랑도: 98 (새로 추가됨)]
하지만 카라는 시스템창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레한을 봤다. 오직 레한만 봤다.
"나는..."
카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뭐예요?"
그것이 여전히 그녀의 질문이었다. 카라? 지은? 둘 다? 아무것도?
"넌 너야."
레한이 답했다. 간단하게. 명료하게.
"넌 카라도 아니고 지은도 아니야. 넌 그냥... 너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
카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눈물.
"여섯 번째 저주..."
카라가 중얼거렸다.
"아직 안 풀렸어요."
"풀리지 않아도 괜찮아."
레한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넌 저주를 풀 필요가 없어. 넌 그냥 너로 살면 돼."
그 말은 모순이었다. 시스템창은 명확했다. 여섯 번째 저주는 풀어야만 한다. 풀지 않으면 일곱 번째 저주는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저주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저주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레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충분했다.
복도의 끝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였다.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카라 자신과 닮은 형상이었다.
그것은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관찰하듯.
그리고 그것의 입술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흥미로워."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카라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감정이 없는 목소리. 기계적인 목소리.
"진정한 감정이 나타났군. 하지만 이것도 부족해."
그림자가 손가락을 스스로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카라와 같은 손가락. 카라와 같은 팔. 하지만 카라가 아닌 무언가.
"여섯 번째 저주를 풀지 않으면 일곱 번째는 절대 나타나지 않아. 그리고 일곱 번째 저주가 없으면..."
그것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카라의 것과는 다른, 차갑고 공허한 목소리로.
"넌 사라져. 영원히."
그 말이 끝나자, 그림자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복도에 남은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복도에는 오직 레한과 카라만 남았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의 품 안에 있었다.
카라의 팔에 은빛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여섯 번째 저주의 신호였다. 풀려야 할 저주. 받아들여야 할 저주.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았다.
카라는 레한의 품 속에서 시스템창을 다시 켰다. 여섯 번째 저주의 메시지를 읽었다.
[진정한 자아의 수용] [조건: 사용자가 '카라'와 '지은' 모두를 동시에 받아들일 것] [경고: 이 저주는 가장 개인적인 저주입니다. 외부의 도움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새로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은 시간: 23시간 47분]
일곱 번째 저주 활성화까지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24시간 이내에 이 저주를 풀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카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저주의 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울림 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답을 찾기까지, 남은 시간은 24시간을 채 안 될 것이었다.
카라는 깨달았다. 레한의 말이 맞았다.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카라로도, 지은으로도, 그 어느 쪽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했다. 시스템창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주는 구체적인 사건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했다.
복도 끝에서 사라진 그림자는 무엇이었나? 카라의 또 다른 자아? 저주의 의인화?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
카라는 그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시아를 만나야 했다. 매튜를 직면해야 했다. 지은으로서의 거짓을 고백해야 했다.
그것만이 여섯 번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레한."
카라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
"나... 저택으로 가야 해요."
레한의 팔이 경직되었다.
"왜?"
"저를 찾기 위해서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요."
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결연함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이 옆에 있어도, 이건 제가 혼자 해야 할 일이에요."
레한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으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나는 기다릴게. 그리고 넌 돌아올 거야."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카라는 그의 품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네. 돌아올게요."
그리고 카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황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밤의 거리를 지나며 카라는 시스템창을 켰다가 껐다를 반복했다. 여섯 번째 저주의 카운트다운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23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루시아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매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카라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결의였다.
저택의 불이 켜져 있었다. 밤중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처럼.
카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저택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손을 올려 문을 두드리려 했지만, 그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루시아였다.
루시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마치 한참 동안 울었던 것처럼.
"카라..."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돌아왔구나."
그 순간, 카라는 깨달았다. 루시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카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시아... 나는..."
"들어와."
루시아가 카라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을 말해줘. 넌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왜 여기 있는지."
카라는 루시아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순간, 카라의 팔에서 은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여섯 번째 저주. 진정한 자아의 수용.
그것을 풀기 위한 여정이 이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