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의 불이 꺼졌다.
카라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손목이 잡혔다. 루시아였다. 그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루시아?"
"쉬. 말하지 마."
루시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손아귀는 단단했다. 카라는 그대로 끌려나갔다. 침실을 벗어나 복도를 지나 거실로. 그리고 다시 어딘가로. 방음 장치가 된 작은 다실로 들어섰을 때, 루시아가 비로소 손을 놨다.
"넌 요즘 뭐 해?"
루시아가 물었다. 그 얼굴은 카라가 알던 것과 달랐다. 평온함이 벗겨져 내려 있었고, 그 아래는 뭔가 검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
"루시아, 너는..."
카라의 목이 말을 잇지 못했다.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루시아를 향해 열린 시스템창. 그 안에서 처음으로, 루시아의 감정 수치가 나타났다.
**독점욕: 96** **애정: 84** **질투: 91**
카라는 숨을 멈췄다.
지난 몇 화 동안 루시아의 감정은 시스템창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 루시아가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수치가 활성화되었다. 카라는 직감했다. 루시아의 감정이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을.
"당신을 시스템으로 읽을 수 있다는 건... 당신도 나처럼..."
"뭐?"
루시아가 한 발 다가섰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당신은 내가 레한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밀어붙혀요?"
카라는 루시아의 눈을 맞췄다. 그 눈동자 안에서 독점욕이 빛났다. 96이라는 수치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감정으로 느껴졌다.
"왜냐면..."
루시아가 손을 올렸다. 카라의 뺨을 스쳤다.
"...넌 나한테만 속해야 하니까."
그 손이 떨렸다. 루시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뭔지. 그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애정과 독점욕이 어디서 갈라지는지.
카라는 루시아를 바라봤다. 이 여자는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키는 것이 감옥을 짓는 것과 같다는 걸, 루시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루시아, 당신은..."
"뭐라고 할 거야? 내가 미쳤다고? 내가 집착한다고?"
루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 맞아. 난 너한테 집착해. 근데 그게 뭐 어때? 난 너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넌 날 필요했어. 그게 충분하잖아."
카라는 느꼈다. 루시아의 감정이 순수하지만 동시에 독이라는 것을. 사랑이지만 동시에 쇠사슬이라는 것을.
"당신을 사랑해요."
카라가 말했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감정 동기화 준비 완료: 대상 루시아**
카라의 손이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루시아의 손가락이 카라의 손등을 누르고, 맥박이 닿았다. 따뜻함이 전해졌다. 카라는 그 온기를 붙잡으며 모든 진정성을 담아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요?"
**동기화 시작**
루시아의 몸이 경직됐다. 카라가 보냈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루시아가 원했던 감정. 루시아를 위한 감정. 그 순간, 카라의 시스템창이 또 다른 신호를 울렸다.
**경고: 다중 감정 동기화 감지**
침실의 문이 열렸다. 레한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검을 쥐고 있었다.
"루시아가 뭐 했어?"
레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다. 독점욕 수치가 순간적으로 99를 넘었다.
카라는 즉각 손을 움직였다. 루시아에겐 미안함을 보내고, 레한에게는 거짓을 보냈다. 루시아를 포기하라는 감정. 루시아가 자신을 원한다는 감정. 그리고 레한만이 중요하다는 거짓 감정.
감정공명 시스템은 한 번에 하나의 대상과만 연동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카라는 지금 두 사람에게 동시에 다른 감정을 보내고 있었다. 시스템의 한계를 무시하고.
**감정 동기화 진행률: 73%**
"루시아... 미안해."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카라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에는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말로 깨지는 소리였다.
카라의 손에서 은빛이 터져 나왔다.
저택 정원의 죽은 나무가 울부짖었다. 세 번째 저주의 조각이 깨지고 있었다. 그 균열이 카라의 손목을 지나 팔뚝으로, 어깨로 번져갔다. 마치 자신의 몸이 거울처럼 갈라지는 듯한 느낌.
**감정 동기화 진행률: 89%**
"카라!"
레한이 외쳤다. 그 목소리 안에 집착이 있었고, 공포가 있었고,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카라는 느꼈다. 루시아의 사랑을. 루시아가 포기하는 순간의 감정을. 그리고 동시에 레한의 집착을. 레한이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절박함을.
두 감정이 카라의 마음 안에서 충돌했다.
"난... 누구야?"
카라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카라인지, 지은인지. 루시아를 사랑하는 카라인지, 레한을 두려워하는 지은인지.
**경고: 정체성 붕괴 위험도 85%**
카라의 팔뚝이 떨렸다. 은빛 균열이 더욱 진해졌고, 그 틈새로 다른 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카라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다시 들었다가 내렸다.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더듬었다. 마치 남의 살을 만지는 것처럼 낯설어하며.
"당신은... 내가 아니에요."
카라가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더 낮고, 더 차갑고, 더 낯설었다.
루시아의 몸이 흔들렸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것이 되길 원했죠. 하지만 난...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 해요."
카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레한이 움직였다. 카라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넌 지금... 자살하고 있어."
레한이 속삭였다.
"세 번째 저주를 깨려고 남의 감정을 조종하면서, 넌 자기 자신을 부수고 있어. 모르고 있어?"
카라가 레한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집착으로 가득한 얼굴. 하지만 그 안에 무언가 다른 것도 있었다. 진정한 공포.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라질 것 같은 공포.
"저는... 누구죠?"
카라가 물었다.
"카라? 지은? 루시아를 사랑하는 사람?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 누구?"
레한이 카라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정확히 3화에서 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도였다. 카라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는 것이 아니라, 카라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넌 지은이야. 그리고 넌 카라야. 동시에."
레한이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카라의 뺨을 따라 내려갔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터치. 마치 무언가 흐릿해지는 것을 다시 선명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넌 내 것도, 루시아의 것도 아니야. 넌 너 자신의 것이야. 처음부터."
**경고: 다중 감정 동기화 급격히 상승** **현재 감정 동기화 진행률: 94%** **긴급 경고: 정체성 붕괴 임계값 돌입**
시스템창의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카라는 이제 그것을 무시할 수 있었다. 레한의 목소리가 더 크니까. 루시아의 울음소리가 더 크니까.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카라의 눈이 흔들렸다. 두 손이 레한의 팔을 움켜잡았다. 마치 자신이 물에 잠기고 있는데 레한이 유일한 밧줄인 것처럼.
"루시아..."
카라가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의 감정 수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었다. 독점욕 96에서 52로. 질투 91에서 34로.
루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눈빛이 흔들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그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한 손이 가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은 공중에서 맴돌다가 내려앉았다.
"루시아..."
카라가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 목소리는 떨렸다. 이번엔 진짜 자신의 목소리였다. 루시아를 조종하려던 목소리가 아니라, 루시아를 상처 입히는 자신을 인식한 목소리.
"미안해요."
루시아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흘렀다. 한 줄, 두 줄. 독점욕이 무너지는 순간의 눈물.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눈물.
"당신은 내 것이 될 수 없어요."
카라가 계속했다.
"아무도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 해요."
루시아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의 목이 마침내 움직였다.
"아니야. 아니야..."
목이 메인 목소리였다.
"넌... 날 떠나갈 거야?"
카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저주 진행 상황: 3/7 완료** **세 번째 저주 - 소유욕: 해제**
저택 정원의 죽은 나무가 마지막 울음을 질렀다. 은빛 균열이 하늘을 그었고, 세 번째 저주의 조각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카라의 팔뚝을 타고 흐르던 은빛이 멈췄다. 균열이 더 이상 번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침실은 고요해졌다. 루시아의 울음소리만 남았다.
레한은 여전히 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자락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의 손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집착 수치 99는 이제 다시 하강하고 있었다. 공포로. 심각한 공포로.
"카라. 대답해."
레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지금 뭐가 보여?"
카라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여러 겹의 음성이 한꺼번에 울리는 것처럼.
"거울이..."
카라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침대 옆 벽에 붙은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카라는 손을 들었다. 거울 속의 손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손이 자신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울에 세 개의 얼굴이 보여요."
카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라도 있고, 지은도 있고... 그리고..."
손이 거울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그 손이 거울에 닿으려는 순간, 레한이 그것을 잡았다.
루시아는 여전히 침실 모서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카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이 변했다. 독점욕으로 가득 찬 눈에서 이제 무언가 다른 것이 비어나가고 있었다. 죄책감. 그리고 포기.
시스템창이 깜박였다.
**경고: 시스템 오류 감지** **데이터 손상 진행 중** **추정 완전 붕괴 시간: 3일**
카라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카라가 중얼거렸다.
"시스템이... 무너져?"
그 순간, 저택의 전체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박였다. 침실의 촛불이 흔들렸고, 거울의 반사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정원의 죽은 나무—이제 세 개의 균열이 생긴 죽은 나무—에서 무언가 다른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 아니라 어두움 그 자체였다. 마치 빛을 먹어치우는 무언가가 나무 뿌리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루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카라! 저것 봤어?!"
레한도 봤다. 그의 집착 수치가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이유로. 공포로. 그것도 카라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에 대한 공포로.
"저것이... 뭐야?"
레한이 중얼거렸다.
"저것은... 저주가 아니야."
카라가 시스템창을 들었다. 하지만 시스템창도 이제 흔들리고 있었다. 화면이 깜박이고, 글자가 흐릿해지고, 일부 정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맨 아래, 한 줄의 문구만 남았다.
**경고: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저주를 계속 깰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버릴 것인가?** **하지만 당신이 선택하기 전에, 누군가는 이미 선택했습니다.**
카라의 손이 떨렸다. 시스템창에 나타나는 경고들이 점점 빨라졌다. 알람음이 귀를 찢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침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루시아도, 레한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황실의 검은 옷을 입은, 얼굴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지금까지 카라의 시스템창에 한 번도 수치로 나타난 적 없는 인물. 마치 시스템 자체 밖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카라의 저택 정원의 죽은 나무와 같은 색의, 검은 결정체.
"오랜만이야, 카라."
그 남자가 말했다.
"시스템이 너한테 얼마나 도움이 됐어? 재미있었어?"
카라의 몸이 얼었다. 그 목소리. 그 말투.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