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이 도는 것 같았다.
지은의 눈이 떠졌을 때, 침실의 천장은 느릿느릿 회전하고 있었다. 아니, 회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팔뚝, 목, 관자놀이. 모든 곳에서 열이 솟아올랐다. 침대 시트는 땀으로 축축했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지은의 이마를 짚었다. 낯선 손이었다. 지은은 순간 몸을 경직시켰다. 레한이 아니었다. 손가락의 질감, 손의 크기, 그것을 누르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시스템창이 켜졌다. 하지만 이상했다.
손을 누르고 있는 사람의 감정 수치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 누세요?"
지은이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침대 옆에 서 있는 남자는 회갈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황립 도서관의 휘장이 새겨진 순백의 배지. 나이는 서른 중후반쯤 되어 보였다. 얼굴은 차분했다. 마치 무언가를 관찰하듯이.
"에이든이야. 루시아가 불렀어."
에이든. 그 이름은 알았다. 도서관 사서. 카라의 저택 도서관에 가끔 나타나는 남자.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 온 건 처음이었다.
"뭘 하시는 거예요?"
지은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없었다. 에이든이 손을 거두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맥박 확인 중이었어. 너 지난밤 내내 열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뭘... 언제 쓰러진 거죠?"
기억이 끊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명확한 건 레한과의 감정 동기화였다. 그 이후는 안개였다. 뭔가 중요한 게 있었는데... 무엇이었지?
에이든이 지은의 손목을 다시 집었다. 이번엔 느리고 정확했다. 마치 음악의 박자를 세듯이.
"감정 동기화를 과다 사용했어. 한 달에 10회 이상 쓰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너 이미 그 이상 썼지?"
지은의 몸이 경직되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 증상이 그걸 말해줘."
에이든이 손을 놨다. 그리고 일어나 침실 창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카라 저택의 정원이 보였다. 죽은 나무. 여전히 검고 말라 있었다. 저주의 상징이라고 했던 그 나무.
"너 뭔가 하고 있지? 시스템창을 이용해서 뭔가."
에이든이 창에 기대어 말했다. 그의 톤은 비난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관찰.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나열하듯이.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난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
에이든이 돌아섰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그 안에는 뭔가 오래된 상처 같은 게 있었다.
"시스템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지 않니?"
지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남자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감정공명 시스템이야."
에이든이 침대 옆에 다시 앉았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매우 드문 능력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은총 중에서도 거의 없는 종류야. 보통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거나..."
에이든이 멈췄다. 눈이 지은을 응시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부여한 거야."
지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의도적으로?"
"그렇지. 감정공명 시스템은 그냥 생기는 능력이 아니야."
에이든이 창밖의 죽은 나무를 바라봤다. 회색의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손처럼.
"5년 전, 나도 그걸 봤어. 누군가 이 시스템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부여했어. 그 과정에서 뭔가 잘못됐고..."
에이든이 지은을 마주봤다.
"그 대상이 죽었어."
침실이 얼어붙었다.
"뭐... 뭐라고요?"
"시스템은 설계된 대로 작동하지 않아. 감정을 읽고 조종하는 능력이 되어야 했는데, 현실은 다였어."
에이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점점 자신을 잃어갔고, 결국 자살했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은의 손이 떨렸다. 시스템창의 경고가 떠올랐다. 자아 안정도 68%.
"그런데 넌... 다를 수도 있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에이든이 일어났다.
"조심해. 시스템을 사용할수록 넌 카라가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가 될 거야. 진정한 감정을 잃지 마."
침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성급한 발걸음.
"그리고 하나 더. 루시아는..."
에이든이 말을 멈췄다. 침실 문이 열렸다.
레한이 침실 문을 열며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멈췄다. 이미 침실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든이 침실을 나가며 레한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 없이 눈을 맞췄다.
시스템창이 켜졌다.
【레한 - 감정 상태】 질투: 88 집착: 92 분노: 45
수치가 급상승했다.
"넌 왜 여기 있어?"
레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에이든은 침착했다.
"카라를 진찰했어. 감정 동기화 과다 사용의 증상이 있거든."
"내가 물어본 게 아니야."
레한이 한 발 다가섰다. 에이든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남자는 복도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침실에서 지은은 시스템창을 통해 레한의 감정 수치를 읽고 있었다. 질투도. 집착도. 모두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온도계처럼.
손가락이 떨렸다.
'아, 그게 뭐야...'
지은이 깨달았다. 시스템창의 수치는 감정을 숫자로 변환한 게 아니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레한의 감정 뒤에 숨겨진 진짜 것은.
'당신은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거네.'
침실 복도에서, 레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무언가를 놓칠까봐 움켜잡으려는 손처럼. 에이든을 보는 그의 눈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아래엔 공포가 있었다.
"카라는 내 것이다."
레한이 말했다. 단순한 선언이었다.
"그렇지 않아. 아무도 누구의 것도 아니야."
에이든이 대답했다.
레한이 한 발 더 다가섰다. 이제 복도의 긴장은 칼 위의 선 같아졌다. 에이든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침실을 향해 한 번 더 바라봤다. 지은을 바라봤다.
"조심해."
에이든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레한을 향한 게 아니라 지은을 향한 것이었다.
"꺼져."
레한의 목소리가 끊었다. 에이든은 침실을 나갔다. 곧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레한이 침실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은 어두웠다. 마치 폭풍 직전의 하늘처럼.
"누가 왔어?"
그가 물었다.
"도서관 사서예요. 감정 동기화 때문에..."
지은이 대답했다.
"난 묻지 않았어."
레한이 침대 옆에 앉았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지은은 그 떨림을 본다. 시스템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넌 왜 다른 남자를 봐?"
"뭐... 뭘 말씀하시는..."
"내 감정을 읽고 있지. 지금도. 내 수치를 보고 있지."
레한이 침대에 누워 있는 지은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깨지기 직전의 것이 있었다.
"하지만 넌 나를 모르지. 그게 가장 무서워. 내가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그걸 넌 시스템창으로도 못 본다."
지은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레한은 그 전에 손을 들었다.
"이제 충분해. 다른 건 필요 없어. 넌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뭐... 뭐라고..."
"내 것이 되거나, 죽거나. 넌 선택지가 그것뿐이야."
레한이 침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밖에서 열쇠 소리가 났다.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
지은은 혼자 남겨졌다. 침실의 문이 닫혔고, 창문은 높았다. 침대 위에서 지은은 시스템창을 들여다봤다.
【감정공명 시스템 - 알림】 두 번째 저주의 조각 활성화. 조건: 배신감 극복 대상의 감정 수치 - 배신감 수준 측정 중
현재 진행 상황: 0%
지은의 눈이 흔들렸다. 에이든의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진정한 감정을 잃지 마.'
그렇다면 지금 레한을 보고 느끼는 건 뭐였을까? 시스템창을 통해서 본 그의 두려움에 대한 공감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감정이었을까?
침실의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카라인지 지은인지, 지은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야?"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창은 계속 울렸다.
【경고】 진정한 감정과 거짓된 감정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자아 안정도: 68%
침실의 창밖으로 죽은 나무가 보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피지 않았다.
지은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열은 아직 남아 있었다. 머리가 둔하게 아팠다. 자아 안정도 68%.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게 이런 뜻인가.
침실의 창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높았지만 닫혀 있지 않았다. 밖에는 아이언 바가 있었다. 탈출은 불가능했다.
침실 문을 다시 시도해봤다. 밖에서 잠겨 있었다. 레한이 직접 자물쇠를 잠근 것 같았다. 그것이 의도적인 감금인지, 아니면 보호인지 지은은 알 수 없었다.
지은의 손가락이 시스템창을 터치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확인해봤다. 감정 동기화는 72시간 후에야 가능했다. 그 사이에 뭐가 일어날까. 레한은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루시아는 뭘 하려고 하는 건가. 그리고 에이든이 말한 5년 전의 그 사람은... 정말로 죽었던 걸까?
밤이 되었다. 침실의 창문 밖으로 달이 떠올랐다. 죽은 나무의 가지들이 달빛에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뼈처럼.
그 순간, 지은의 귀에 뭔가가 들렸다. 복도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 빠르고 성급한 발걸음. 그리고 레한의 목소리.
"카라를 데려와."
누군가가 답했다.
"황자, 지금은..."
"지금 당장."
발걸음 소리가 침실로 향했다.
침실의 문이 열렸다.
루시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뭔가 끔찍한 일을 본 것처럼.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노의 눈물이었다.
"카라."
루시아가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뭐... 뭐예요?"
"황자께서 나가시며 말씀하셨어. 당신이 이 방을 나가면 안 된다고. 나한테 감시하라고."
루시아가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난 싫어. 이건 너무... 당신을 가두는 거. 당신을 감시하는 거."
루시아의 목소리가 끊겼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왜 황자를 자극해? 왜 자꾸만 위험한 짓을 해?"
"루시아, 난..."
"당신이 죽으면 난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 살아가."
루시아가 지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손의 힘은 절박했다.
"제발. 제발 더 이상 황자를 건드리지 마. 제발."
지은은 루시아를 바라봤다. 시스템창에 그녀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났다. 에이든이 지적했던 이상 현상. 루시아는 시스템창에서 감지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루시아는 뭔가 다른 존재였다. 시스템 밖의 존재. 혹은 시스템의 일부.
"루시아, 당신이..."
지은이 루시아의 눈을 직시했다.
"황자를 감시하라고 했다는 건...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황자를 감시하는 거네요?"
루시아의 손이 경직되었다.
"당신은 황자가 뭘 하는지 봐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한테 보고하는 거고."
"카라, 난..."
"누가 시켰어요? 누가 당신한테 황자를 감시하라고?"
루시아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실이... 황실에서 시켰어. 황자의 행동이 위험해진다고."
루시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래서 난 당신을 지켜야 해. 황자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루시아가 지은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침실을 나갔다. 문을 닫으며, 밖에서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지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회백색의 천정만 있었다.
루시아가 감시한다는 건 뭔가를 의미했다. 황실이 레한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한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뭔가 위험한 것을.
시스템창이 울렸다.
【경고】 황자 레한의 감정 수치 급변 집착: 92 → 97 불안: 73 → 89
레한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시스템창은 수치만 보여줄 뿐, 그의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다. 지은은 레한을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시스템창은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수치만 보여주었다. 99의 집착은 사랑인가, 아니면 소유욕인가. 그것은 수치로는 알 수 없었다.
"진정한 감정을 잃지 마."
에이든의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렸다.
침실의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이 되고 있었다. 죽은 나무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가지도 피지 않았다. 저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은이 손을 들어 시스템창을 터치했다.
【감정공명 시스템 - 두 번째 저주의 조각】 조건: 배신감 극복 대상의 감정 수치 - 배신감 수준 측정 중 현재 진행 상황: 0%
배신감. 에이든의 경고가 떠올랐다. 5년 전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죽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도 이런 상태였을까.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지은이 침실 내를 둘러봤다. 창문, 문, 거울. 모두 탈출의 길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창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도구였다.
지은은 시스템창을 들었다. 혹시 모르니 레한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지 확인해봤다. 감정 동기화는 불가능했지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시스템창의 메뉴를 넘겼다. 그곳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옵션이 있었다.
【감정공명 시스템 - 숨겨진 기능】 대상 감정 조작 (사용 가능) 대상 기억 편집 (사용 불가) 대상 의식 제어 (사용 불가)
대상 감정 조작. 그것은 지금 가능했다.
첫 번째 저주를 파괴했을 때 활성화된 기능이었다. 지은은 그것을 직감했다. 시스템은 자신이 더 깊이 빠져들수록 새로운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은 한 발씩 더 진정한 자아에서 멀어질 것이다.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만약 자신이 이 기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배신이 될까. 레한을 조종하는 것. 그의 진정한 감정을 왜곡하는 것.
침실의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카라인가, 지은인가.
그 순간, 침실의 문이 열렸다.
레한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두움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박함이었다. 마치 뭔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절박함. 그의 호흡은 가팔랐다.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그가 물었다.
"...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거짓말하지 마."
레한이 침대에 앉았다. 그의 손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또는 뜨거웠다.
"너 시스템창 없이 나를 볼 수 있니?"
"뭐... 뭘 말씀하시는..."
"나를 봐. 시스템창 없이."
지은이 레한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공포와 집착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뭔가 더 있었다.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나는... 내가..."
지은이 말을 맺지 못했다.
"내가 넌 뭔지 말해줄까? 넌 내 것이야. 내 것이고, 내가 너를 놓을 리 없어. 절대로."
레한이 지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게 사랑이든 집착이든... 상관없어."
그 순간, 지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시스템창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대상 감정 조작】 레한의 집착도를 50%로 감소시키시겠습니까?
지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버튼은 아직 눌리지 않았다.
침실의 창밖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죽은 나무의 가지에서 은빛이 번쩍였다. 마치 균열이 생긴 것처럼. 아주 미세한 균열.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거기 있었다.
지은의 손가락에서도 같은 은빛이 번쩍였다.
시스템창이 울렸다.
【첫 번째 저주의 조각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저주의 조각 활성화】 【경고: 배신감 수준이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배신감: 0% → 15% → 32% → 51%...】
레한의 눈이 지은의 눈을 마주쳤다.
"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어?"
그가 물었다.
그 순간, 지은은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레한의 감정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배신이라는 것을.
또는 그 반대로.
레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루시아가 자신을 감시하고, 에이든이 자신에게 경고하는 모든 것이 이미 배신이라는 것을.
침실의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 그 얼굴은 두 개로 보였다.
카라와 지은.
둘 다였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지은은 선택해야 했다.
시스템창의 버튼을 누를 것인가, 아니면 누르지 않을 것인가.
그 선택이 곧 배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