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박영미의 사무실 벽면에 붙은 차트는 이준호의 시선을 따라다녔다. 엑셀 시트를 확대 인쇄한 것이었다. 날짜, 시간, 환자명, 생존 여부. 그리고 각 항목 옆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었다. 응급실 환자명, 사망 시각, 원인 불명.
"2024년 6월 14일 오후 2시 23분. 교통사고 환자 김민준, 수술 성공."
박영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26분. 응급실 베드 5번, 심근경색 환자 이명수, 사망. 원인 불명."
이준호는 회색 소파의 끝자락에 몸을 구겨 넣고 앉아 있었다. 박영미는 계속 읽었다.
"6월 18일 오후 11시 14분. 대동맥류 파열 환자 강민철, 수술 성공. 같은 날 오전 1시 17분. 응급실 베드 8번, 뇌졸중 환자 박지은, 사망."
손가락을 물어뜯는 음성음이 들렸다. 이준호가 치아로 손톱 주변을 깨물고 있었다.
"6월 22일, 7월 3일, 7월 8일, 7월 15일…"
박영미는 멈추지 않았다.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모든 기록이 일치했다. 이준호가 살린 환자의 수술 시각과 정확히 2시간 3분 후에 발생한 응급실의 원인 불명 사망. 리듬이 있었다. 기계적인 리듬이.
"23건입니다."
박영미가 차트에서 손을 내렸다.
"지난 3개월 동안 당신이 수술한 23건의 환자가 모두 생존했고, 그 직후 23건의 원인 불명 사망이 정확한 시간 간격으로 발생했습니다. 통계적 확률로는 1조 분의 1 이하입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손톱 아래 살이 터져나갔다. 그는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계속 깨물었다.
"부인하시겠습니까?"
"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다시 닫혔다. 자신이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지, 남아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차트의 숫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료 기록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자신의 손만이 거짓말을 해왔을 뿐이다.
"당신의 어머니도 그 23건 중 하나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박영미의 질문은 정확했다. 어머니. 새벽 5시 47분에 뇌출혈 응급 수술을 받은 어머니. 이준호는 맥박을 잡고 죽음을 감지했고, 그 시간을 오전 10시 15분으로 연장했었다. 능력을 사용했었다.
그 순간, 응급실 베드 4번의 환자가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박영미는 피를 흘리는 이준호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십시오."
"어머니를…"
"살렸다?"
"네."
한 글자. 그 한 글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글자 뒤에 숨겨진 것들이 터져 나오려 했다. 자신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 그 누군가의 이름이 정준영이라는 사실. 그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한다는 사실. 하지만 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강철준이 들어섰다. 의료윤리위원회 회장으로서의 표정이 아니었다. 스승의 얼굴이었다.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 그 주름 사이에 절망이 맺혀 있었다.
"이준호."
강철준이 소파 앞에 섰다.
"내가 너에게 의료를 가르쳤을 때, 이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이준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환자를 살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
"증거가 있습니까?"
이준호의 목소리는 텅 빈 것처럼 들렸다. 거기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오직 방어만 있었다.
강철준이 웃음을 흘렸다. 의사가 아닌 사람의 웃음처럼.
"증거가 아니라 직감이다. 내가 너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나는 알았다. 너의 손이 환자를 만질 때 일어나는 일들을. 너의 손을 통해 흐르는 것이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강철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내가 너를 수술실에 들였을 때, 나는 천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천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래였다. 죽음과의 거래였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손톱 깨물기를 멈추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강철준의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닿는 순간, 자신이 지어온 모든 거짓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승의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외면해온 진실의 이름이었다. 이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숨이 얕아졌다.
"그리고 난 그것을 방조했다. 너의 성공률을 보며 환호했다. 병원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내 제자의 손가락이 신의 손이라 불리는 것을 자랑했다."
강철준이 손으로 차트를 가리켰다.
"이것이 그 대가다. 23명의 생명과 23명의 죽음. 그리고 여기 어딘가에는 너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죽어야 했던 누군가가 있다."
이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영미와 강철준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차트로 눈을 돌렸다.
"누가… 죽었습니까?"
"모르십니까?"
박영미가 물었다.
"모르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이준호는 차트를 다시 들여다봤다. 이번엔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기 시작했다.
"6월 14일, 2시간 3분 간격…"
손가락이 이름을 따라 내려갔다.
"이명수. 심근경색."
다음 기록.
"6월 18일, 2시간 3분 간격…"
"박지은. 뇌졸중."
손가락이 멈췄다. 새벽 5시 47분. 어머니의 수술 시각.
"7월 27일, 새벽 5시 47분. 어머니 이미영, 뇌출혈 응급 수술 성공."
이준호의 몸이 굳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을 찾아 내려갔다.
"7월 27일, 새벽 7시 50분. 응급실 베드 4번, 환자 정준영, 원인 불명 사망."
손가락이 멈췄다. 정준영. 교통사고로 들어왔던 환자. 이준호가 응급실에서 직접 본 환자였다.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고 있던 환자. 생존 가능성이 충분했던 환자.
그 환자가 새벽 7시 50분에 죽었다.
이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정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응급실 베드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 살고 싶다는 절실함이 담긴 눈. 그 눈이 닫혔다. 자신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이 사람을 죽게 했다. 선택의 순간이 아니라 이미 선택된 것이었다. 자신이 손을 뻗은 순간, 정준영의 죽음은 정해진 것이었다.
손가락이 더 내려갔다. 그 다음, 그 다음. 23명의 이름을 모두 읽으며 손가락이 내려갔다. 각 이름 옆에는 어떤 환자가 죽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23명의 산 환자와 23명의 죽은 환자. 완벽한 교환.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혈색이 빠져나갔다. 마치 자신의 피가 차트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내가…"
목소리가 나왔다. 매우 작은 목소리였다.
"23명을 죽게 했습니까?"
"당신이 23명을 살렸습니다."
박영미가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23명이 죽었습니다."
강철준이 이준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너는 의료인인가, 아니면 죽음의 거래인인가?"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한 번 더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그 순간, 손가락을 깨물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깊게. 치아가 살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있어야 뭔가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 통증이 필요했다.
"너는 의료인이 될 수 없다."
강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래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박영미가 차트를 거두었다. 사무실의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아무것도 없는 빈 벽. 그 벽을 바라보던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선 것이 아니라 떠 있는 것 같았다.
"수술 금지 처분입니다."
박영미가 말했다.
"의료윤리위원회의 결정은 만장일치입니다. 당신은 추가 조사 시까지 모든 의료 행위를 금지당합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처럼.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는 밝았다. 병원의 조명은 항상 같은 밝기를 유지했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공간. 응급실은 시간을 모르는 곳이었다.
응급실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걸어, 자동문을 통해.
응급실의 모니터들이 울리고 있었다. 생명 신호를 나타내는 초록색의 파형들. 모두가 살아 있다는 신호. 모두가 죽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
트라우마 베이에서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중증 두부 손상. 생존율 10% 미만. 응급 수술이 필요했다.
이준호는 그곳에 설 수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금지 처분.
대신 다른 의사가 들어갔다. 젊은 의사. 이준호의 후배가 아닌 다른 팀의 의사.
수술실 밖에서 이준호는 모니터를 봤다. 수술 진행 상황. 의료진의 움직임. 그리고 환자의 생명 신호.
4시간 22분. 그것이 수술 시간이었다.
수술실이 열렸다. 환자가 나왔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의료진의 얼굴에는 절망이 있었다.
"심정지. 재소생 불가능."
모니터에서 초록색의 파형이 일직선이 되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깨물기 시작했다. 손톱이 없는 손가락의 살을 깨물었다.
'내가 수술하지 않으면 환자는 죽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다르게 들렸다.
'내가 수술하면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그리고 이것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순간, 응급실 입구에서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교통사고. 중증 복부 손상. 생존율 8%.
의료진이 이준호를 봤다. 눈빛이 다른 의사를 향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시선은 이준호에게 있었다.
"이 환자는?"
누군가가 물었다. 응급의학과 과장이었다.
"준호 의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준호 의사는 수술 금지 처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과장이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 환자는 죽을 것이다.'
이준호는 환자의 얼굴을 봤다. 청년이었다. 아마도 25세 정도. 눈이 떠져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통증 속에서 죽음을 느끼고 있는 눈.
이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환자의 손목을 잡으려다가 멈췄다.
손목을 잡으면 맥박을 느낄 것이다. 맥박을 느끼면 죽음의 시각이 보일 것이다. 죽음의 시각이 보이면 그것을 연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연장하면 누군가가 죽을 것이다.
응급실의 모든 눈이 이준호에게 향했다. 의료진의 눈, 환자들의 눈, 심지어 모니터의 초록색 파형도 마치 그를 바라보는 눈처럼 느껴졌다.
이준호의 손목이 경직됐다. 손가락이 환자의 피부에 닿기 직전, 움직임이 멈췄다.
그 순간, 자신이 한 것들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정준영을 죽였다. 자신의 선택이 그 청년의 죽음을 가져왔다. 23번이나. 자신의 손이 죽음을 거래했다. 그리고 지금 이 청년을 살리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은 죽음을 옮기는 것일 뿐이었다. 23명을 살렸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23명을 선택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로 23명이 죽었다.
그 순간, 응급실 입구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박영미가 다시 들어섰다. 그 뒤로 이민지와 한석우가 따라왔다. 이민지는 의료 기록을 들고 있었고, 한석우는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준호… 미안해."
박영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병원장으로서의 공식성이 없었다. 오직 한 명의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을 바라보는 무게만 있었다.
"당신은 이미 선택했습니다."
이준호가 박영미를 바라봤다.
"23번 선택했습니다. 23명의 생명을 위해 23명의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또 다른 선택 앞에 있습니다."
박영미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이 환자를 살리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손을 내려놓겠습니까?"
"그것이 같은 것입니까?"
이준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박영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대답이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환자의 손목에 닿았다. 맥박이 느껴졌다. 약하지만 분명한 맥박. 그리고 그 맥박 너머로 죽음의 시각이 보였다.
응급실의 모니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초록색 파형이 흔들렸다.
응급실 베드 7번의 환자 모니터에서 심박수가 급락했다. 90에서 80으로. 70으로. 50으로.
의료진이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베드 7번 환자 심정지. 심정지."
모니터는 일직선이 되었다.
이준호의 손은 여전히 청년의 손목 위에 있었다. 죽음의 시각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응급실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완벽한 교환.
이준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