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능력의 한계

응급실의 벽시계가 오후 3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준호의 손이 환자의 맥박을 잡는 순간, 세상이 멈췄다.

내일 새벽 6시 23분.

감각이 명확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맥박 아래 흐르는 생명이 모래주머니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모래가 떨어지는 시간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24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환자의 척추가 부러져 있었다. 제4경추에서 제6흉추까지 완전 손상. 내출혈도 심했다. 비장이 파열되어 있고 우측 신장도 손상되었다. 생존율 12%.

의료진은 이미 수술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응급 팀장인 이준호의 결정은 곧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수술실 복도를 걸어가며 이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그 안에 아직도 환자의 맥박이 느껴졌다. 내일 새벽 6시 23분. 그 시간까지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척추를 고정하고, 출혈을 멈추고, 신장을 봉합하고... 그리고 나면?

손가락 끝에서 맥박의 떨림이 사라질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이준호는 수술실 문 앞에서 멈췄다. 의료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취과 의사 한석우도 이미 위치에 붙어 있었다. 이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그 손가락이 살린 환자마다 누군가는 죽는다는 걸. 그 규칙을 이제 명확히 인식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9시간 28분.

그것이 수술에 걸린 시간이었다. 척추 고정만 해도 5시간이 필요했다. 현미경 아래에서 신경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금속 나사를 삽입하는 작업은 밀리 단위의 정확도를 요구했다. 이준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아니, 떨렸지만 그 떨림 자체가 수술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환자의 맥박이 응답했다. 내일 새벽 6시 23분으로 향해가는 시간을 붙잡고, 연장하고, 밀어내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그 연장의 대가로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맥박이 멈춰갈 것이라는 확신.

한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혈압 안정적입니다. 산소 포화도 98%."

"출혈량?"

"1,200cc. 정상 범위."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수술 시야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장의 열상을 봉합하는 중이었다. 실은 가늘고 정교했다. 그의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렸다. 처음으로, 분명히.

한석우가 눈치챘을 것이다. 마취과 의사는 수술팀에서 환자의 생리 상태를 가장 세밀하게 모니터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이 이준호의 손을 따라갔다.

"닥터 이, 괜찮으신가요?"

"계속."

손가락이 움직였다. 신장의 열상이 봉합되었다. 하지만 이준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환자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생명이 끊어지고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손을 떨리게 했다.

내일 새벽 6시 23분.

그 시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환자의 맥박이 멈힐 시간.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의 맥박도 함께 멈힐 것이라는 생각. 지난 3개월간 그는 이 감각을 외면해왔다. 손가락 끝에서 사라지는 맥박의 떨림, 그 사라짐이 의미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그 규칙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의 손가락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마주해야 했다. 환자를 살리는 만큼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 대가의 메커니즘이 명확했다.

오후 11시 10분. 수술이 끝났다.

환자는 살아 있었다. 맥박은 정상이었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척추 고정, 신장 봉합, 비장 제거.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준호의 손은 정확했다. 떨림에도 불구하고 정확했다.

그의 손에서 환자의 맥박이 떠났을 때, 이준호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떨림이 돌아가는 느낌. 마치 자신의 손이 죽음의 시간표에서 환자를 꺼내고 동시에 다른 곳에 누군가를 집어넣는 것 같은.

그리고 그 동시에, 다른 곳에서 무언가가 들어갔다는 확신.

이준호는 수술실을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이 너무 밝았다. 시야가 일순간 흐릿해졌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환자의 신음이 중환자실에서 들렸다. 성공했다. 또 한 명을 살렸다. 생존율 12%의 환자를 기적적으로 살렸다.

그런데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다.

한석우가 나왔다. 마스크를 내렸다. 그의 표정은 이상했다.

"이번 수술은 왜 손이 떨렸어?"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한석우는 대사가 짧은 남자였다. 필요한 말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말은 이것이었다.

"과로지."

이준호의 답도 짧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한석우를 피했다.

한석우는 웃지 않았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똑바로 봤다. 그 눈빛에는 의심이 있었다. 아니, 의심을 넘어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난 안다."

음성이 낮았다. 복도의 주변 사람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들었다.

"뭐가 아니야?"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달라졌어. 수술 중에 너의... 손가락이."

한석우가 말을 맺지 못했다. 그저 이준호의 손을 봤다. 수술 장갑을 벗은 손.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계속 느껴진단 말이야. 뭔가 환자한테서... 빨려나가는 느낌."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한석우는 돌아섰다.

그 등뒷모습이 이준호에게 가장 무서워 보였다. 친구의 등뒷모습. 그것이 나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료기록실로 가는 복도에서 이민지를 만났다. 그녀는 의료 기록 파일을 들고 있었다. 손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끼워져 있었다. 이준호를 보자 멈춰 섰다.

"닥터 이..."

"뭐."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이준호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손가락이 무엇을 하는지 이제 알았으니까.

이민지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뭔가 물었던 것 같았다. 질문. 의심. 아니면 고발?

"최근 수술 기록들... 혹시 보셨나요?"

그녀가 들고 있던 파일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이준호의 수술 기록들과 함께 시간 간격을 표시한 메모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를.

"나중에."

이준호는 지나갔다. 이민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닥터 이, 잠깐만... 정말 중요한데요..."

하지만 이준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손가락이 경정맥 위에서 경직됐다. 자신의 맥박을 느꼈다. 그 안에서 규칙을 감지했다. 환자를 살릴 때마다 누군가는 죽는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의 메커니즘이었다.

그 밤, 이준호는 자신의 아파트에 혼자 앉아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 손을 펼쳤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마치 처음 보는 손인 것처럼. 손가락 끝에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자신의 맥박.

그는 손가락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자신의 맥박이 느껴졌다. 규칙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뭔가 있었다. 다른 것. 환자의 맥박을 잡을 때와 같은 떨림. 그 떨림이 말하고 있었다. 살린 환자 1명당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앞당겨진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다.

이준호는 손을 내렸다.

밤 11시 47분. 벽시계가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다시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맥박을 의도적으로 거부해봤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자신의 맥박을 끊어봤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맥박이 멈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이미 멈췄을 것이다.

이준호는 밤을 새웠다. 손가락을 만지고, 맥박을 감지하고, 그 감각을 따라가며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테스트했다. 환자의 맥박을 잡지 않은 채로 수술 기록을 읽어봤다. 그 기록 속의 환자 이름, 나이, 진단명.

그리고 그 환자의 사망 시각.

새벽 4시,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손가락이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자 뉴스가 나왔다.

"어제 오후 3시경 서울 세인트 의료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은 환자의 회복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병원 근처 아파트에서 30대 남성이 원인 모를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해당 남성은 전날 특별한 질환 진단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이준호는 화면을 멈췄다.

뉴스 기사를 찾았다.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전 5시 17분. 사망 시각.

그는 어제 수술 완료 시각을 계산했다.

오후 11시 10분.

간격을 맞춰봤다.

11시간 47분.

정확했다. 마치 계산된 것처럼. 마치 예정된 것처럼. 자신이 환자를 살린 시간과 누군가가 죽은 시간 사이의 간격.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이 만드는 시간표였다.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 맥박이 증언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누군가를 죽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기사 제목이 흐릿해 보였다.

그는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향했다. 서울 세인트 의료원이 보였다. 회색 건물. 그 안에서 자신의 손가락이 누군가의 죽음을 연장했다. 그리고 그 연장의 대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맥박이 멈췄다.

"11시간 47분."

입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차갑고 낯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석우였다.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울음이 그쳤다. 문자가 들어왔다. '병원에 가야 한다. 응급실에 중증 환자 3명 동시 입실.'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이 반사됐다. 눈이 검은색이었다. 망망한 검은색.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뉴스 기사를 다시 열었다. 30대 남성. 이름은 기사에 없었다. 개인정보 보호. 그렇다면 알 필요가 없다.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죽음이 덜 죽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의료진 커뮤니티를 켰다. 어제 올라온 글들이 있었다.

'닥터 이의 수술 성공률 98%? 그 뒤의 죽음은?'

'6명? 아니 7명?'

'병원이 은폐하는 건 아닐까?'

댓글이 달렸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 닥터 이 수술 덕분에 산 사람들이 많다'고 옹호했다. 누군가는 '통계를 보면 비정상이다'고 주장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준호는 글을 닫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경직됐다. 이번엔 더 심했다. 마치 누군가의 맥박처럼. 마치 죽음을 감지하는 손가락처럼.

그는 옷을 입었다. 수술복을 챙겼다. 병원으로 가야 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었다. 생명이 위기에 처한 환자가.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이 필요한 환자가.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죽게 할 환자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울이 있었다. 그 안의 자신을 봤다. 눈 아래 다크서클. 얼굴이 창백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처럼.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은 혼란스러웠다. 3명의 중증 환자. 모두 교통사고. 연쇄 추돌. 오전 7시 강남대로에서 발생했다. 한 명은 이미 3층 중환자실에 올라가 있었다. 한 명은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한 명은 응급실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닥터 이. 이 환자 봐 줄 수 있습니까?"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말했다. 침대 위의 환자는 40대 남성. 복부 외상. 내출혈. 골반 골절. 척추 손상. 의식 있음. 통증으로 신음하고 있음.

"생존율?"

"10% 미만입니다."

이준호는 침대로 향했다.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이 느껴졌다. 약하고 불규칙한 맥박. 그 안에서 죽음의 시각이 들렸다.

내일 오후 1시 23분.

약 20시간 뒤. 충분한 시간이었다. 수술하기에. 죽음을 연장하기에.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죽이기에.

하지만 이준호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맥박 속에서 뭔가 더 읽으려고 했다. 이번엔 죽음의 시각만이 아니라 다른 것. 자신의 손가락이 이 환자를 살릴 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것. 그 사람의 이름. 나이. 얼굴.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이 자신의 손가락이 만드는 대가라는 것.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시각만 있었다. 나머지는 암흑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인지, 그렇다면 누구인지, 왜 그것이 대가인지.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닥터 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손을 떼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수술실로. 지금."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의료진이 움직였다. 침대가 밀려갔다. 이준호는 뒤따랐다. 한석우가 수술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취과 의사. 이준호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력자. 아니, 과거에는 그랬다.

"준비됐냐."

"응. 근데..."

한석우가 말을 멈췄다. 이준호를 바라봤다. 오래 봤다.

"뭐."

"너 괜찮아? 얼굴이..."

"괜찮다."

이준호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한석우가 뒤따랐다.

수술실은 침묵했다. 의료진들이 환자를 옮겼다. 마취 주입이 시작됐다. 모니터가 켜졌다. 심전도, 혈압, 산소포화도. 모든 수치가 표시됐다.

이준호는 장갑을 끼웠다. 소독약을 뿌렸다. 메스를 집어 들었다.

"절개."

메스가 피부를 가르고 들어갔다. 혈관이 나타났다. 근육이 드러났다. 뼈가 보였다. 내장기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부 내출혈. 예상대로였다. 비장이 파열되어 있었다. 신장도 손상되어 있었다. 소장의 일부가 천공되어 있었다. 혈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정확했다. 빠르고 정확했다. 비장을 적출했다. 신장을 봉합했다. 소장을 재건했다. 모든 출혈을 제어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준호는 느꼈다.

그 경직. 그것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 환자를 살리면 누군가는 죽는다. 그리고 그것이 너의 대가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더 경직됐다. 메스가 흔들렸다. 한석우가 보고 있었다. 모니터를 보면서 환자의 생리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의 손을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한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드셋을 통해. 중성적인 목소리. 하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있었다. 의심. 두려움. 아니면 죄책감?

"계속해."

이준호는 대답했다.

수술을 진행했다. 척추 손상 부분의 신경 압박을 제거했다. 골절 부분을 고정했다. 모든 손상 부위를 복구했다. 혈액을 수혈했다. 생리식염수를 주입했다. 항생제를 투여했다. 손가락이 계속 경직되어 있었다. 그 경직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10시간이 걸렸다.

모니터의 모든 수치가 정상화됐다. 환자의 맥박이 규칙적이 됐다. 혈압이 올라왔다. 산소포화도가 98%를 넘겼다.

"성공했다."

이준호가 말했다.

의료진들이 움직였다. 환자를 회복실로 옮겼다. 모니터가 꺼졌다. 수술실이 침묵했다.

이준호는 장갑을 벗었다. 손을 씻었다. 따뜻한 물이 흘렀다. 비누 거품이 일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경정되어 있었다. 그 경정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누군가를 죽게 했다는 것을.

한석우가 나타났다. 마취복을 벗고 있었다.

"이번 수술... 손이 왜 떨렸어?"

"과로."

"거짓말하지 마."

한석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이준호는 손을 씻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물 위에서 손가락이 떨렸다.

"나 봤어. 너의 손이 경정되는 거. 메스가 흔들리는 거. 그게 과로 때문이 아니라는 거 알아. 넌 절대 과로로 떨리지 않아. 넌 죽음 앞에서도 손이 안 떨려. 그런데 이번엔..."

한석우가 말을 멈췄다.

"이번엔 뭐야."

"이번엔 뭔가 다른 거 같았어. 마치 넌 그 환자를 살리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물 소리만 들렸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물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넌 뭔 소리 하는 거야?"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뭘 하는지 봐. 환자를 살리는 거야. 그게 다야."

"그게 전부가 아니야."

한석우가 다가섰다. 이준호를 정면으로 봤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넌 알고 있어. 뭔가를 느끼고 있어. 그리고 그걸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이준호는 한석우를 보지 않았다. 손을 씻었다. 계속 씻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누로 닦았다. 손톱 밑을 긁었다. 마치 무언가를 제거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무언가를.

"넌 내 친구다. 그래서 말하는 거야. 이대로는 안 돼. 이 일은... 잘못됐어."

한석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이준호를 향한 것이 아니라 이준호가 하고 있는 일을 향한 것이었다.

이준호는 물로 얼굴을 씻었다. 찬 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경정되었다가 펴졌다를 반복했다. 거울을 봤다. 그 안에 자신이 있었다. 눈이 공허했다. 그 공허함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돌아가."

이준호가 말했다.

"뭐?"

"돌아가라고 했어."

한석우는 돌아갔다. 그의 등뒷모습이 문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이번엔 단순한 거리감이 아니라 단절처럼 느껴졌다.

이준호는 혼자 남았다. 거울 앞에서. 손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을 폈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자신의 맥박. 그 안에서 뭔가가 말하고 있었다.

'넌 이미 돌아올 수 없다.'

오후 1시, 응급실에서 40대 남성이 휠체어에 실려 나왔다. 이준호의 수술을 받은 환자.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중환자실로 옮기고 있었다. 그 환자는 살았다. 기적적으로 살았다.

의료기록실에서 이민지는 폴더를 정리하고 있었다. 박영미 병원장이 건넨 자료들. 지난 3개월간의 수술 기록과 사망 기록. 시간 간격을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패턴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명확했다.

그 순간 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울렸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파트에서 40대 남성이 원인 모를 뇌졸중으로 사망. 사망 시각은 오후 1시 23분으로 추정.'

이민지의 손이 떨렸다. 폴더를 떨어뜨릴 뻔했다. 화면에 표시된 시간을 봤다. 오후 1시 23분.

그리고 자신이 분석 중이던 기록에 적힌 이준호의 수술 완료 시각을 생각했다.

오전 3시 52분.

간격을 계산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9시간 31분.

이민지는 화면을 스크린샷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박영미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장님, 지금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패턴이... 너무 명확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화면에 표시된 시간과 기록의 간격. 그것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오후 2시, 의료윤리위원회 회장실에서 강철준과 박영미가 마주앉아 있었다.

박영미가 테이블 위에 파일을 놓았다. 이준호의 수술 기록과 사망 사건들의 시간 간격을 정리한 문서였다. 9명. 모두 8시간에서 12시간 사이의 간격.

"제자분의 수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영미가 물었다.

"뛰어나다."

강철준이 답했다. 창문을 통해 서울 하늘이 보였다. 회색 하늘. 흐린 날씨.

"그것만입니까?"

"뛰어나지만, 뭔가 위험하다."

"위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박영미가 추궁했다.

강철준은 침묵했다. 오래 침묵했다. 파일을 봤다. 9명의 이름. 각각의 사망 시각. 그리고 이준호의 수술 완료 시각과의 간격.

"당신도 알고 있군요."

박영미가 말했다.

강철준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파일 위에서 경정되었다.

"나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의심이 아닙니다. 증거입니다."

박영미가 계속했다.

"그리고 증거를 찾으면 무엇을 하실 겁니까?"

강철준이 물었다.

박영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철준을 봤다. 그 눈빛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그리고 슬픔이.

"그는 내 제자입니다."

강철준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료인으로서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강철준이 말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파일을 가리켰다. 9개의 이름. 9개의 죽음.

"하지만 그 재능이 초래하는 결과가 문제라는 것을 아실 거란 겁니다."

박영미가 말했다.

강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정 속에는 깊은 절망이 있었다.

"그를 멈춰야 합니다."

박영미가 말했다.

강철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봤다. 서울 하늘. 그 아래에서 이준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손가락은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있을까.

오후 5시, 이준호의 사무실 책상 위에 노트북이 놓여있었다. 화면에는 의료진 커뮤니티가 떠있었다.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닥터 이가 인간이 아닌가?'

'9명이 더 죽었다고 카더라'

'병원이 은폐한다고 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소문 말고 증거를 가져와'

이준호는 창을 닫았다. 대신 자신의 의료 기록을 열었다. 지난 3개월간의 수술 기록. 환자의 이름. 진단명. 수술 시간. 수술 결과.

그리고 각 수술 직후 발생한 사망 사건들.

그는 시간을 계산했다. 정확한 간격. 8시간에서 12시간 사이. 마치 계산된 것처럼.

'11시간 47분. 20시간. 9시간 15분. 10시간 32분. 9시간 31분...'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경정됐다. 떨렸다.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 맥박이 말하고 있었다.

'넌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멈출 수 없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뉴스 알림이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파트에서 40대 남성이 원인 모를 뇌졸중으로 사망. 사망 시각은 오후 1시 23분으로 추정.'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즉시 계산했다.

자신의 수술 완료 시각: 오전 3시 52분.

사망 시각: 오후 1시 23분.

간격: 9시간 31분.

정확했다. 자신이 예측한 그 시간. 자신의 손가락이 읽은 그 간격.

"내가 죽였다."

중얼거렸다. 입으로만. 아무도 들을 수 없게. 하지만 자신의 손가락은 들었다. 그 손가락이 떨렸다.

그 순간, 휴대폰에 또 다른 알림이 들어왔다. 의료진 커뮤니티였다.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9번째 의심 사망. 닥터 이 수술 직후 또 누군가 죽었다. 병원은 이것을 은폐할 건가?'

댓글이 달렸다.

'이제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조사가 필요하다'

'의료사고조사팀에 신고해야 한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책상 위에서 떨렸다. 마치 누군가의 맥박처럼.

창문으로 밖을 봤다. 서울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진다. 밤이 온다. 그리고 밤이 지나면 또 다른 환자가 올 것이다. 또 다른 죽음의 시각이 들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은 또 다른 누군가를 죽게 할 것이다.

"어떻게 멈춰?"

혼잣말을 했다. 손가락이 경정되었다가 펴졌다를 반복했다. 대답은 없었다. 오직 손가락의 떨림만이 있었다. 그 떨림이 말하고 있었다.

'넌 이미 돌아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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